chapter 14 비명으로 뒤덮인 고요의 협곡
어제 하루를 미영과 데이트하면서 보냈기 때문인지 파이온에 접속하는 것이 매우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총 다섯 통의 쪽지가 도착해 있습니다.]
나는 쪽지 정보를 열었다. 헤드셋을 통해 익숙한 동지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랏사드 형, 도대체 뭐 하기에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짬 내서 몹 사냥하는 것 좀 가르쳐달라고 하려 했는데.]
[랏사드 형, 오늘 우리끼리 파티플레이 했어요. 쪽지 보는 대로 연락 주삼.]
[랏사드 형, 오늘 혈의 눈물에 가입하겠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은 로카나이. 랏사드에 버금가는 고수에요.]
[하이, 랏사드. 내 쎄미트린데. 로만이가 자꾸 로카나이라는 사람 혈맹에 넣어주자는데 어떻게 해야 되노?]
[랏사드 형, 저 로만인데요. 내일부터 시험기간이라 당분간 게임하기 힘들 것 같아요. 쩝, 아쉽지만 로타카에서의 공성전은 다른 혈원들과 치러야겠네요. 내가 빠져서 잘되려나 모르겠지만. 참, 그리고 로카나이라는 기사가 쪽지 보냈더라고요. 형한테 자기 이야기 좀 잘해 달래요. 제가 형 아이디 가르쳐줬으니까 형한테 곧 있으면 연락이 갈 거예요. 참, 우리 파티 모임은 언제 할 거예요?]
마지막 로만에게서 온 쪽지를 확인하자 헤드셋을 통해 컴퓨터의 음성이 들려온다.
[총 다섯 개의 쪽지를 확인하셨습니다.]
‘로카나이? 누구지? 혈원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한데…….’
나는 혈맹창을 열어 우리 혈원들이 파이온에 접속해 있는지 확인했다.
쎄미트리, 로큰롤메이지, 세나5 모두 파이온에 접속해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들에게 일괄 메시지를 보냈다.
[혈의 눈물, 오랜만이야. 다들 잘 있었어?]
[이게 누꼬? 랏사드 아이가? 어디서 뭐 하고 있었노?]
[그래요, 랏사드 님. 연락도 안 받으시고 너무해요.]
며칠 안 되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들이다. 쎄미트리의 경상도 사투리도 유난히 정겹게 들렸다.
[자, 이제 로타카 대륙을 정벌하러 가야지.]
[랏사드, 뒷북치지 마. 랏사드만 오면 돼. 우리는 준비 완료야. 여기 새로운 게이머도 있으니까 빨리 오라구. 아무래도 우리 혈의 눈물 레벨이 업그레이드될 것 같아.]
[지금 어딘데?]
[여기? 로타카 대륙의 입구인 비탄의 마을이야. 빨리 오라구.]
[오케, 알았어.]
나는 마지막 접속지역이었던 조슈아 평원에서 비탄의 마을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파이온 게임에 있는 아홉 개의 대륙 중 규모나 접속량에서 두 번째 지위에 있는 로타카 대륙에는 모두 여섯 개의 성이 있다. 고랜 성, 프랑수파아 성, 호다드 성, 락파엘 성, 바르하 성, 로타카 성. 이들 중 중국인들이 차지한 것으로 파악되는 성이 호다드 성과 바르하 성인데 파이온의 한국 혈맹들은 호다드와 바르하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신청하고 동맹군을 모집하고 있었다.
내가 평원을 지나고 있을 때 각종 혈맹의 깃발들이 대평원을 수놓으며 로타카 대륙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실로 대단해서 선두와 후미가 강물처럼 늘어져 있어 선두에서 보면 후미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마어마하군. 이 많은 게이머들 중에는 또 각 서버의 고수와 영웅들이 즐비하겠지?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나는 사슬처럼 이어진 군사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프레드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프레드릭 님, 지금 접속해 계세요?]
[아, 랏사드 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 어디예요?]
[저는 지금 비탄의 마을로 가는 길인데 비명의 숲에서 만나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죠. 저희 가드리안 혈맹도 지금 로타카 대륙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그곳에서 만나도록 하죠.]
[좋아요. 그럼 비명의 숲에서 봅시다.]
나는 프레드릭과의 교신을 끊었다.
어느새 눈앞에 비탄의 마을이 나타났다.
[쎄미트리, 어디야? 나는 지금 비탄의 마을 여행자의 여관 앞인데.]
[아, 우리도 그 근처다. 그쪽으로 갈게.]
얼마 되지 않아 쎄미트리와 일행들이 눈에 들어왔다.
“랏사드 님, 너무 간만이에요. 얼굴 잊어 먹겠는걸요.”
‘그래, 너는 제발 좀 잊어다오.’
“세나, 오랜만이군. 그간 잘 지냈어?”
“네, 랏사드 님도 잘 있었죠?”
내가 세나와 대화를 주고받을 때 다크엘프계열의 실리엔 나이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지난 번 임파젤 성 전투 후 랏사드 님을 사모해왔습니다.”
‘사모? 웬 사모?’
“아, 예. 저도 반갑군요. 우리 혈의 눈물에 가입하고 싶으시다구요?”
실리엔 나이트. 다크 파이터에서 페르자 나이트(Ferza Knight)를 거쳐 2단계 전직을 하면 실리엔 나이트가 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파이온 게임을 오랜 기간 즐겨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습니다. 저를 혈원으로 받아주십시오.”
“꼭 우리 혈의 눈물에 가입하고 싶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뇨, 구체적인 이유는 없구요. 그냥 랏사드 님과 함께 게임을 즐기고 싶습니다. 레벨에 맞지 않는 그 화려한 스킬, 화려한 아이템들, 싸일리엄 하우스에서 50여 명의 기사들의 목을 잡초 썰듯 써는 모습을 보면서부터 이미 저는 랏사드 님의 팬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임파젤 성에서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한당과 주태를 레벨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머니에서 구슬 빼듯이 쉽게 가지고 놀지 않았습니까?”
‘이 자식 스토커야? 어떻게 나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아는 거지?’
“의화단과 어쌔시네이트의 추적도 마치 해커처럼 따돌려버리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랬나요?”
“유독 중국 게이머들에게 감정이 많으신 것 같더군요.”
‘이 녀석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군.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 것 같다는 느낌이.’
“와, 그 정도면 제 팬이 확실하군요. 어때? 다른 사람들은 이의 없어?”
“이의가 있을 리가 있나.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은인인데.”
로큰롤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쎄미트리도 별 다른 말이 없는 것으로 봐서 찬성 쪽인 것 같았고 세나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럼 만장일치로 로카나이의 혈맹 가입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어.”
“감사합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혈맹 가입소에 가서 우리 혈의 눈물 혈맹 가입 신청을 하세요. 그럼 제가 가입 수락을 할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로카나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으나 그 말투에는 별다른 기쁨 같은 것은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 내가 혈맹을 만들었을 때 다른 동료들이 보였던 반응과는 비교되는 분위기였다.
나는 곧바로 미영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영아, 난데 지금 나 모니터하고 있어?]
[아뇨, 기획안 작성 때문에 좀 바빠서요.]
[잠깐 나 모니터 좀 해줘.]
[무슨 일인데요?]
[지금 내 옆에 있는 로카나이라는 자 있잖아. 이자 IP 주소 좀 추적해줄래?]
[그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추적해보고 결과 나오면 연락드릴게요.]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 안에 부탁할게.]
[넵.]
나는 미영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다시 우리 혈원들을 바라봤다.
“자, 드디어 또 전란의 기운이 로타카를 뒤덮고 있어. 다들 준비는 된 거지?”
“그럼, 우리에겐 랏사드가 있으니까 두렵지 않다구.”
“거기다가 또 로카나이라는 든든한 실력자를 지원군으로 얻었다 아이가.”
쎄미트리와 로큰롤은 이미 사기 충전, 자신감 만빵의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실력은 아직까진 모자라지만 자신감에 넘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든든했다.
반면 세나는 여전히 게임보다는 게임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남자 하나 건져볼까 하는 데 뜻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어쩌면 나 혼자만의 세나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파티 모임을 한 후로는 좀처럼 세나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로만이 이 자식은 만날 캐릭 키워달라는 소리만 하고, 꼭 중요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인단 말이야.”
“갸는 틀렸다, 틀렸어. 파이온 하면서 싸움을 두려워하면 되나? 하여튼 어린놈이 싸가지가 없는기라.”
“로큰롤, 쎄미트리, 그쯤 해둬. 새로운 혈원 앞에서 같은 혈원을 험담하는 것은 조금 듣기 거북하군.”
나는 로만을 씹고 있는 로큰롤과 쎄미트리를 점잖게 타일렀다.
“저기, 랏사드 님은 한국인이신가요?”
쿠웅.
“네? 갑자기 웬 그런 질문을.”
“아뇨, 그냥 평소에 중국 게이머들에게 무슨 원수라도 진 것처럼 사정없이 PK하시고 또 중국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성만을 골라서 공격하시는 것 같아서요.”
“예, 뭐 최근 공성전은 대부분 중국과 한국의 전쟁이라고 봐야겠죠.”
나는 로카나이의 질문에 확실하게 답변하지 않고 그냥 비켜 나가며 대답했다.
“이번 공성전 목표는 어딘가요?”
“그래, 이번에는 어느 성을 칠 기고?”
로카나이가 다음 목표를 물어오자 쎄미트리도 그 사실이 궁금했는지 내게 물어왔다.
“글쎄, 최근에 내가 커뮤니티를 통해서 다른 대륙의 유명 동맹들과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있거든. 지금 혈맹 군주들끼리 다음 타깃을 어디로 할 것인지 회의 중이니까 일단 비명의 숲으로 이동하면서 회의 결과를 지켜보자구.”
나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급조해서 로카나이와 혈원들에게 대답하며 즉답을 피했다.
“곧바로 로타카로 진입하는 게 아니라 비명의 숲엘 간다고?”
“응, 그곳에서 프레드릭의 가드리안 동맹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
“아, 프레드릭 님도 보고 싶다.”
“뭐 하고 있노? 그라믄 빨리 거기로 가야지.”
쎄미트리가 앞장서자 우리는 그를 따라 비명의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 미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혁 오라방, 아까 말한 로카나이라는 자 IP를 추적해보니까 중국 주소로 나오는데요.]
그러면 그렇지. 처음부터 수상쩍다 했어.
[미영아, 고맙다. 그럼 기획안 작성 잘해.]
나는 그녀와의 교신을 끊은 후 곧바로 프레드릭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프레드릭 님, 랏사드예요.]
[예, 랏사드 님. 지금 어디신가요?]
[지금 비명의 숲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몸이 근질근질하군요.]
[부탁 좀 드릴게요.]
[뭔데요?]
[제가 지금 짱깨 스파이 하나를 저희 혈맹에 가입시켰거든요.]
[예? 왜 첩자를 혈에…….]
프레드릭은 당황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흐흐, 반간계죠. 놈에게 허위 정보를 흘려 짱꼴라들을 교란시켜야겠어요.]
[아~ 그렇다면 부탁한다는 것이?]
[맞아요. 제가 지금 그 첩자를 데리고 가고 있는데 그놈에게 우리 한국 동맹들이 다음 공성 목표에 대해 회의 중이라고 거짓말을 해놨거든요. 그니까 우리가 그놈 앞에서 다음 목적지를 거짓으로 말하고 실제로는 다른 성을 치는 거죠. 이름하여 성동격서.]
[흠, 그럴듯하군요. 그렇다면 어느 성을 공격한다고 하는 게 좋을까요? 지금 각 동맹들은 호다드 성 쪽으로 몰리고 있는 것 같던데…….]
[그럼 녀석 앞에서는 바르하 성을 타깃이라고 하고 동맹들과 교류해 역으로 호다드를 치도록 하죠.]
[네,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봐요.]
[네.]
길이가 30m가 넘는 침엽수들이 하늘을 떠받칠 듯이 즐비하게 서 있는 비명의 숲에서 우리는 프레드릭의 가드리안 동맹과 조우했다.
프레드릭과 스타리스는 지난 암살 길드와의 싸움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나머지 혈원들은 오래간만에 만나는 거라 반가움이 남달랐다.
혈원들 간의 인사가 끝나자 나는 가드리안 혈맹에게 새로운 혈원 로카나이를 소개했다. 로카나이는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의 바르게 자신을 소개했는데 내 눈에는 가식적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첩자, 간첩, 뿌락지, 스파이.’
나는 그가 공손한 말투로 인사할 때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인사가 끝날 즈음 나는 프레드릭에게 사인을 보낸 후 그와 함께 무리들에서 떨어진 쪽으로 걸어갔다.
“프레드릭 님, 공성전과 관련해서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아, 알았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가시죠.”
우리는 다른 혈원들이 대화를 듣지 못하게 몇 분간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연기를 한 후 다시 각자의 혈맹으로 돌아갔다.
“자, 대륙의 영웅들이 바르하 성을 다음 타깃으로 정했어. 프레드릭의 정보에 따르면 호다드로 향하는 병력은 일종의 위장막이고 실제로는 바르하를 칠 거라고 하더군. 그러니 모두들 보안을 철저히 지키고 다른 게이머들에게 함부로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구. 어디에서 짱깨들이 첩자질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알았어.”
“그럼 공성전까지 세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인근 대장간에 가서 무기를 손질하고 아이템의 마나도 보충하고 그러자.”
“그래, 그게 좋겠어.”
“근데 왜 로카나이는 아무 말이 없는 거야?”
로카나이는 내가 바르하 성을 공략할 거라는 이야기를 꺼낸 후로 줄곧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지금 중국 게이머들에게 호다드보다는 바르하 성 쪽으로 병력을 집중시키라는 전음을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중국 란저우에 위치한 한 허름한 PC방에서는 파이온 게임을 즐기던 자들이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고 자기들만의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형님, 제가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한국 혈맹들이 호다드 성이 아니라 바르하 성을 공격할 거라는군요.”
“뭐? 호다드 성이 아니었어?”
“그때 그 삼합회에서 말한 놈 있잖습니까. 그 랏사드라는 놈. 지금 제가 그놈에게 접근해서 그놈이 만든 혈의 눈물이라는 혈맹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요. 그놈과 다른 혈맹의 군주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다드는 눈속임이고 실질적으로는 자기들끼리 내통해서 바르하를 칠 거라고 하더군요.”
로카나이.
혈의 눈물과 랏사드에게 접근했던 그는 중국 란저우에 있는 삼합회의 작업장에서 게임을 즐기는 자였다.
그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파이온을 떠돌며 랏사드와 한국 내 기류를 살피는 첩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우연히 랏사드를 제외한 혈의 눈물의 몹 사냥 과정에서 로만이 랏사드라는 이름을 발설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내려 하는 것이다.
“후후,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야말로 그간 한국 놈들에게 당한 설욕을 깨끗이 씻을 수 있겠군. 또 이번 바르하 성을 지켜내면 조직에서도 나를 우대해주실 거야.”
“형님, 어떻게 할까요?”
“모든 조직을 동원해서 로타카 대륙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는 자들은 모두 바르하 성으로 이동하라고 해. 호다드에는 최소의 인원만 남고 전부 바르하 성을 지킨다. 공성전이 시작되기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빨리 바르하로 집결하라고 해.”
한편 대장간에서 무기 수리를 끝마친 나는 혈의 눈물, 가드리언과 함께 로타카 대륙의 공성전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는 다른 혈맹들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미영, 지금 로타카 대륙의 이동상황 좀 체크해줘.]
[그렇지 않아도 지금 모니터링과 함께 서버 체크를 동시에 하고 있는데요. 호다드 성에 있는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바르하로 옮겨가고 있어요. 이들 바르하로 이동하는 자들의 IP 경로를 분석해보니 거의가 중국 주소들이군요.]
‘그렇겠지. 이 자식들, 어디 한번 혼나봐라.’
[미영, 번번이 고마워.]
[뭘요, 저희들이 이런 것이라도 도와줘야죠.]
[참, 최상조 씨하고 김민우는 어쩌고 있어?]
나는 그들의 동태가 궁금해 미영에게 물어봤다.
[예, 저번에 부장님께 혼난 후로 이번에는 호다드 성 공략에 나섰어요.]
[그래? 그거 잘된 일이네. 알았어. 또 도움 필요하면 연락할게.]
[네, 언제든지 불러만 주세요.]
[참, 호다드에서 바르하로 통하는 지형들이 나와 있는 지도 좀 보내줄래?]
[그건 어디에 쓰려고요?]
[지켜보면 알 거야. 파일로 전송 좀 부탁할게.]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최상조와 김민우가 호다드 성 공략에 참가한다고? 잘하면 이번에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볼 수 있겠는걸.
로타카의 국경을 넘으면서 나는 프레드릭에게 다가갔다.
“프레드릭 님, 혹시 잘 아는 군주들 없으세요? 연락해서 우리 계획 좀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무슨 별다른 계획이라도?”
“저희는 호다드 공성전에 참가하지 않을 거예요.”
“예? 뭐라고요?”
나의 말 한마디에 프레드릭은 지구가 멸망했다는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어투로 놀라며 되물어왔다.
“그럼 뭘 하실 작정이죠?”
“호다드에는 제가 아는 실력 있는 자들이 몇 명 투입될 것 같고 또 다른 동맹군들도 그곳으로 이동 중이니까 저희는 바르하에서 호다드로 이동하는 길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바르하에서 호다드를 도와주기 위해 오는 놈들을 치겠습니다.”
“아, 자기들이 속은 걸 알면 아무래도 바르하보다는 호다드가 크니까 다시 호다드로 돌아오려고 하겠군요.”
“그렇죠. 짱깨들이 성동격서에 속았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호다드를 돕기 위해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가 바르하에서 나오는 놈들을 기습하는 겁니다.”
“이거 정말 숨 막히겠는걸요. 성공만 하면 호다드도 빼앗고 짱깨들도 싹 쓸어버릴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혈의 눈물과 가드리언으로는 부족해요. 더 많은 지원군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아는 군주들 없냐고 물어보셨군요.”
“네.”
“저하고 친분이 있는 군주 중에 사자 혈맹의 크리스, 파라오 혈맹의 스피드 헤라클레스가 있는데 그들에게 연락을 하겠습니다. 아마 지금 호다드에 와 있을 거예요.”
사자 혈맹의 크리스는 얼마 전 용의 비늘 퀘스트에서 카이오틱 보우를 들고 김민우와 함께 리자드 킹과 싸웠던, 활을 주무기로 하는 사냥꾼 계열의 독특한 군주였다.
또 파라오 혈맹의 스피드 헤라클레스는 파이온 게임에서 노블레스에 근접해 있는 몇 안 되는 군주인데 특히 스피드 헤라클레스가 이끄는 파라오 기병대는 파이온의 대륙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좋아요. 어서 그들에게 연락해서 고요의 협곡으로 오라고 해주실래요?”
“아, 고요의 협곡이라면 호다드와 바르하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잖아요. 그렇군요. 호다드 성이 위기에 처하면 가장 빠른 길인 고요의 협곡으로 놈들이 지나갈 확률이 높겠군요.”
“네, 바르하의 짱깨들은 고요의 협곡에서 뼈를 묻게 될 겁니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호다드 성의 공성전이 시작되기 30분 전쯤에 혈의 눈물과 함께 로카나이를 데리고 인근 혈맹 가입소로 찾아갔다.
“어서 들어가서 신청하고 오세요.”
“예, 그럼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나올 테니까요.”
로카나이는 들뜬 듯한 모습으로 혈맹 가입소로 들어갔다.
로카나이가 밖으로 나온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였다.
“랏사드 님, 이상해요. 혈맹 가입이 거부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죠?”
그는 혈맹 가입 신청을 하다가 자꾸 혈맹 가입이 거부되었다는 메시지가 나오자 밖으로 나와서 내게 따지듯이 묻는 것이었다.
“로카나이, 혈맹 가입이 안 되던가요?”
“예, 다섯 번이나 혈의 눈물 가입 신청을 했는데 거부되었다는 메시지가 뜨더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요. 제가 다섯 번 전부 거부했으니까 그렇죠.”
“예?”
로카나이는 검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스팟, 스팟, 스파파.
그가 나를 노려보았을 때 싸울아비 단검이 로카나이의 목을 두 동강내버렸다.
“와우, 파이브 샷에 가버리네.”
“랏사드, 이 무슨 짓이고!”
쎄미트리는 비무장 상태에 있는 로카나이의 목을 잘라버리는 나를 보며 불같이 화를 냈다.
“군주에 대한 태도가 불손하잖아. 감히 어딜 노려봐?”
“뭐, 뭐라고?”
로큰롤도 나를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보고 있었고 세나는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놈은 짱깨의 스파이야. 우리에게 접근해서 공성전에 관한 정보를 염탐하고 자신들의 진영에 알려준 것이 틀림없어. 우리는 바르하나 호다드 공성전에 참가하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리고?”
“우리는 고요의 협곡으로 간다. 그곳에 매복해 있다가 호다드를 도우러 가는 짱깨들을 싹 쓸어버릴 거야.”
“……?”
셋은 하나같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고 지금 당장 고요의 협곡으로 갈 테니까 서두르자.”
[프레드릭 님, 사자 혈과 파라오 혈에게 빨리 좀 와달라고 해주세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곧 공성전이 시작될 테고 제가 로카나이를 죽여 버렸기 때문에 놈들도 바르하가 목표가 아니라 호다드가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알았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고요의 협곡으로 이동 중이고, 크리스와 헤라클레스도 곧 그곳으로 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만나요.]
“일이 이거 우예 돼가는 기고?”
쎄미트리, 로큰롤, 세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 힘겹게 뛰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인데 그래?”
로카나이의 옆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던 작업장의 책임자는 호들갑을 떠는 로카나이에게 다가가 연유를 물었다.
“아니, 갑자기 랏사드 이 자식이 저를 PK해버렸어요. 혈맹 가입 안 받아줘서 따져 물었더니 갑자기 저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런 황당한 경우가.”
로카나이 캐릭을 운용하고 있는 게이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PC 방 안의 중국인들이 웅성거렸다.
“호다드 성에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됐어요. 큰일 났습니다.”
“뭐? 바르하가 아니라 호다드였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작업장 책임자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랏사드에게 속은 것 같은데요.”
짝!
“병신 같은 새끼,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때문에… 이제 삼합회 형님들에게 뭐라고 변명한다?”
로카나이 캐릭을 운용하는 중국인은 책임자에게 뺨을 얻어 맞아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그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호다드 성을 도우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당장 호다드로 가는 최단거리를 파악해서 바르하로 집결한 게이머들에게 호다드 성을 도우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절벽을 등지고 건설된 호다드 성은 말 그대로 천연 요새였다. 등 뒤로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자리 잡고 있어 배후가 든든했고 성의 앞 쪽에는 다섯 개의 아웃워크가 있어 성문을 향해 접근해 오는 적들을 원거리 저격하기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성 자체가 방어에 유리한 데다 이번 공성전의 주요 타깃이 호다드 성이 아닌 바르하 성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 성주와 혈맹 군주들은 다섯 개의 아웃워크를 중심으로 거점 방어형 유저를 배치한 후 성내 병력의 40퍼센트를 바르하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그 첩보가 잘못된 것이었고 주요 타깃이 바르하가 아닌 호다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다드 성 앞 평원에 자리 잡고 있던 몇 안 되던 동맹군의 깃발들은 공성전을 앞두고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고 개전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성으로 쳐들어오는 병사들이 파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총공격하라!”
“호다드 성을 빼앗아라!”
수백 개의 화살과 각종 계열의 마법들이 호다드 성 주변의 하늘을 물들였다. 순식간에 호다드 성은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뒤덮여버렸다.
“아웃워크를 중심으로 거점 방어에 치중하면서 바르하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호다드 성의 군주들은 성루를 오가며 장병들을 독려했으나 그 자신도 방어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어 보였다.
“버텨라! 성 자체가 워낙 튼튼하고 높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사력을 다해라!”
쿠쿵쿠쿵.
지축을 뒤흔드는 묵직한 소리가 호다드 성의 성벽에까지 전해져 왔다.
“저, 저것은…….”
호다드 성의 군주들을 놀라게 한 것은 신장이 30m가 넘는 소환수 고르곤의 등장 때문이었다.
청동 비늘로 된 가죽에 두꺼운 청동 갑옷을 걸친 브론즈색의 소환수인 고르곤은 어지간한 사람 크기를 넘는 거대한 해머를 휘두르며 호다드 성의 거점인 아웃워크를 향해 육중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이런, 저 무식한 괴물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휘이익, 쿠콰앙!
당황한 호다드 성의 병사들이 고르곤을 향해 화살을 발사하고 있을 때 거대한 해머가 아웃워크를 내려찍자 성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이 스티로폼 부서지듯 맥없이 부셔져버렸다.
“맙소사! 아웃워크를 방어하지 못하면 호다드도 끝이다. 모두들 무너진 아웃워크를 막앗!”
벽이 허물어진 아웃워크 주변으로 호다드 성의 기사들이 운집하고 있을 때 성벽을 향해 달려오던 무리 중 한 명이 소환수 고르곤의 몸을 타고 올라 광채를 뿜으며 아웃워크로 날아올랐다.
“헉, 놀라운 몸놀림이다.”
하늘에서 하강하는 그자는 은색 미스릴 플레이트를 걸치고 샤이닝 소드를 번쩍이며 황제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막아! 저놈이 아웃워크에 내리지 못하게 해라!”
“조무래기 같은 것들.”
스파팡.
빛 무리를 이루는 샤이닝 소드가 한 번씩 불꽃을 뿜을 때마다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의 살점이 뜯겨 나갔다.
“도대체 누구냐?”
겁에 질린 아웃워크의 기사들은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네깟 놈들에게 가르쳐 줄 존함이 아니시다. 쥬다스 프리스트, 지원 좀 해줘.”
“킬킬, 엘리트PK, 제법인걸. 이거 간만에 피가 솟구쳐 오르는데? 공성전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단 말이야. 물론 고급 아이템 주우러 다니는 것만 못하지만 말이야.”
엘리트PK가 터 놓은 길을 따라 다크엘프 계열의 마법사인 쥬다스 프리스트는 마법사에 걸맞지 않는 빠른 속도로 성벽을 뛰어 올랐다.
“텔레포트.”
순식간에 아웃워크로 올라온 쥬다스 프리스트의 손에는 이미 둥근 박만 한 크기의 파이어 볼이 연성되고 있었다.
“피… 피해라! 무지막지한 화염이다!”
피식.
검은 피부 사이로 보랏빛 입술이 씰룩거렸다.
“파이어 플레임.”
화르르륵.
“우와악!”
화염과 비명이 뒤덮인 아웃워크를 엘리트PK가 맹호처럼 달려가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뭐야? 로타카 대륙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한다던 호다드 성이 겨우 이거였어?”
엘리트PK. 쥬다스 프리스트.
김민우와 최상조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공성전에 참가했다가 뜻밖에도 쉽게 호다드 거점을 점거해버렸다.
다섯 개의 아웃워크를 중심으로 거점 방어를 하고 있던 호다드 성은 축의 한곳이 무너져버리자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저울처럼 급격히 무너져갔다.
“방어선이 뚫렸다! 진격하라! 짱깨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호다드 성 앞을 가득 메운 수만의 기사, 궁수, 마법사, 드워프들은 성난 노도처럼 호다드 성의 방어벽을 넘고 있었다.
두 개의 붉은 산이 하늘을 베고 누운 듯한 고요의 협곡.
언젠가 큰물이 지났을 법한 협곡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모래 협곡이어서 조그마한 움직임과 약간의 바람에도 흙먼지가 심하게 날리는 곳이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찢어놓았다.
“놈들이 바르하 성을 떠났습니다. 머지않아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프레드릭의 가드리안 혈맹의 사냥꾼 계열의 사내가 바르하 성쪽에서 달려오며 우리에게 적들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협곡에서 최대한 많이 해치워야 합니다. 그 다음은 씨앗 평원에서 파라오 기병대가 놈들을 기다릴 거야. 적당히 원거리 공격을 퍼붓다가 씨앗 평원 쪽으로 달아나.”
“잘하면 오늘 짱깨들 상당수가 이곳 고요의 협곡과 씨앗 평원에서 망자가 되겠군.”
“그럴 테지.”
넓은 창에 깃털이 꽂힌 모자를 쓰고 혼돈의 활을 들고 있는 사나이는 프레드릭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묶었다.
“프레드릭, 그나저나 저자는 누구야?”
혼돈의 활을 들고 있는 사자 동맹의 군주, 크리스는 랏사드를 가리키며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왜, 내가 예전에 이야기한 혈의 눈물이라는 신생 혈맹의 군주 있잖아.”
“아, 레벨에 걸맞지 않는 초호화 아이템을 들고 다닌다는 자?”
크리스는 그제야 생각이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템뿐만이 아냐. 그의 플레이 역시 그의 레벨에 어울리지 않지. 이번 작전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야.”
“흠, 랏사드라. 범상치 않은 친구군.”
프레드릭은 크리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협곡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수적으로는 우리가 훨씬 불리하니까 적당한 시점에서 평원으로 가서 합류하도록 해. 나는 랏사드와 함께 협곡 아래에서 놈들과 싸우면서 놈들을 협곡 쪽으로 유인할 테니까.”
“너무 염려 마.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니까.”
프레드릭은 크리스에게 신신당부한 후 활강하듯 협곡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의 발길이 스치는 곳마다 지독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쎄미트리, 로큰롤, 세나.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이번 싸움은 장난이 아닐 테니까.”
“알았다, 알았다. 도대체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하노.”
쎄미트리는 성가시다는 투로 대꾸했지만 그의 억양은 긴장하고 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멋진 한판이 되겠어. 내가 이 맛 때문에 게임에 미쳐 산다니까.’
두둥.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이 발걸음을 내딛어서일까,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군이 이곳 고요의 협곡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호다드가 함락 위기에 있다! 빨리, 빨리!”
“보병은 뒤따라오라 하고 켈티르를 타고 있는 기사들부터 우선 호다드로 달려가야 해.”
늑대의 생김새를 하고 있지만 덩치는 곰 같은 얼룩무늬 소환수 켈티르. 사냥 시에는 공격용 소환수로 사용할 수 있고 전투 시에는 말처럼 타고 다닐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소환수인 켈티르를 타고 있는 기사들은 달리는 켈티르의 속도를 높여 어느새 고요의 협곡 입구까지 다다라 있었다.
“기다려라, 기다려. 조금 더 기다려. 내가 신호하면 쏘도록. 일격에 제압한다. 오케이?”
크리스는 손에 땀이 흥건히 묻어나는 긴박한 상황에도 침착하게 부하들을 지휘했다.
두두두두.
각 종족의 기사들을 실은 켈티르가 빠른 속도로 협곡 안으로 진입했다.
크리스는 오른손에 무려 세 개의 화살을 재우고 있었다.
‘좀 더 들어와. 좀 더. 그렇지.’
피잉.
끊어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혼돈의 활시위에서 세 개의 화살이 협곡을 가르며 날아갔다.
퍼퍼퍽.
협곡 위에서 날아간 화살은 정확하게 켈티르 위에 타고 있는 기사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달리오던 속력 때문에 화살에 맞은 기사들은 허공으로 떠올라 빙글빙글 돌며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것이 고요의 협곡을 가득 채운 피의 축제의 시작이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