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3 원 스트라이크 쓰리 볼(?) (14/51)

chapter 13 원 스트라이크 쓰리 볼(?)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최근 불리자드(Bulizzard)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월드 오브 워 2’ 부스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코니(Cony)사의 야심작 PS sataion 가상현실게임을 소개하는 부스입니다.”

사이버틱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자 도우미들. 그들은 북새통을 이룬 관람객들을 붙들기 위해 각종 안내문과 기념품을 나눠주며 게임 홍보에 열심이었다.

일본 치바현 카이힌 마쿠하리 역 근처의 마쿠하리 멧세. 이곳은 해마다 E3, ECTS(Europe Computer Trading Show)와 함께 세계 3대 게임쇼로 손꼽히는 도쿄 게임쇼가 열리는 곳이다.

개막쇼가 있는 날이어서인지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마쿠하리 멧세에 몰려들고 있었다.

“야, 저기 좀 봐. 스트리트 파이터 코스프레들이다.”

“여긴 철권 코스프레네.”

“신기하다. 이거 좀 봐. 정말 사실적이지 않니? 스타워즈 캐릭터를 그대로 복제했네?”

저마다 게임쇼 내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부스를 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한쪽에서는 게임 속 캐릭터의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코스튬 플레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발 디딜 틈 없는 북새통 행사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마쿠하리 멧세 빌딩 안에 있는 회의실에서는 서양인과 동양인 몇 명이 정장 차림으로 탁자에 앉아 비밀스런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이데이 씨.”

“예. 저도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모나임.”

수행원들을 대동한 두 중년 사나이들. 작달막한 체구에 간사한 눈빛을 하고 있는 동양인은 일본의 대표적인 게임사 코니(Cony)의 사장 이데이 노부야키, 그리고 금발 올백을 하고 있는 매부리코 사내는 미국에서 MS와 함께 자웅을 겨루고 있는 온라인 게임 전문회사 불리자드의 모나임 사장이었다.

“이데이 씨, 오늘 전시회에서 코니사의 차기작 ‘프라이드’를 잘 감상했습니다. 이거 우리 불리자드에게 큰 위협이 될 것 같더군요.”

“하하하! 모나임 씨,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보다는 불리자드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가상현실게임 ‘월드 오브 워 2’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이 더 뜨겁더군요.”

“허허허,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 게임에 회사의 사운을 걸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봐서는 서로 간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고 모임 역시 사교적인 모임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의 형식적 인사말이 오간 후 드디어 코니사의 이데이가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요즘 한국의 1세대 가상현실게임 파이온의 아성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불리자드의 모나임은 이데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중국이 개방의 길로 접어들면서 온, 오프라인 산업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그만큼 시장규모도 커졌는데 그 큰 대어를 한국의 파이온이 독식하고 있어요.”

“인정합니다, 이데이 씨. 코니에서는 한국의 독주를 좌시하고 있을 겁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어렵게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이제야 대화가 진지하게 시작되는군요.”

안경 너머로 모나임의 눈빛이 번쩍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우리들이 한국에게 기술적으로나 아이디어 면에서 뒤처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미 온라인 게임으로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한국이었으니 어쩌면 지금의 결과는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불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 2’가 출시되면 파이온의 인기도 수그러들 걸로 보입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이미 파이온은 저희들에 비해 몇 단계 앞서서 1세대 가상현실게임의 지위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 분야의 후발주자인 우리들이 후발주자로서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그 시장에 파고든다는 것은 피 튀기는 전쟁을 각오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물론 저 역시 이데이 씨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렇게 자리를 만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말인데… 한국의 게임, 특히 김씨소프트의 파이온 게임의 독주를 견제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정보에 따르면 김씨소프트에서는 파이온 게임의 성공에 힘입어 제2세대 가상현실게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데이 씨, 우선 우리들이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파이온의 아성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점을 도출했으니 구체적인 방안이나 실무적인 일들은 보좌진과 실무진에게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야지요. 골치 아픈 이야기는 저도 오래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지만 이데이의 미소에서는 진심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일본까지 왔는데 회를 안 먹고 갈 수는 없고…….”

“이런, 모나임 씨가 일식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요. 제가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은 큰 테두리에서 합의점을 찾고 서류를 챙겼다. 그들이 움직이자 보좌진들이 발 빠르게 그들을 수행했다.

그리고 각 진영에서는 여섯 명의 실무진들이 남아 실무 협상에 들어갔다.

“톰슨 씨, 작년 E3 후 근 1년 만에 뵙는군요.”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조금 피곤해 보이는 군요 마이쿠라 씨.”

여섯 명의 실무진 중 대표급으로 보이는 두 사내는 회의실에 남아 계속해서 협상을 이어나갔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불리자드의 톰슨이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불리자드는 이미 사우스 코리아의 파이온 게임이 오픈 베타 테스트 중에 있을 때 그들의 방어벽을 뚫고 해킹을 시도해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빨리 움직이셨군요. 하긴 파이온 게임이 출시될 때에도 김씨소프트는 온라인 게임에서는 세계 최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게임 해킹 쪽은 불리자드 측에서 맡아주시면 되겠군요. 그럼 저희들은 중국 시장의 교두보 장악을 위해서 중국 측과 교섭을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실무 대표자의 제안에 미국 측 실무 대표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한국의 게임사들이 경쟁력을 잃게 된 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시장은 당분간 실무팀에서 정한 비율대로 점유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그럼 그 파이에 대해서 이제 이야기해보실까요?”

“그러죠. 그럼 잠깐 쉬었다가 30분 후에 다시 뵙도록 하시죠.”

그들은 노트북을 덮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시각 마쿠하리 멧세 인근 마쿠하리 니오타니 호텔의 비즈니스 센터에서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나이가 서류 가방을 들고 빠져나왔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만족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허상무님, 그곳 도쿄 게임쇼에서 제2세대 가상현실게임인 파이온 크로니컬 2에 대한 반응이 어떤가요?”

“하하하, 아주 폭발적이야. 현재 쇼케이스에서 단연 돋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허성진 상무. 김씨소프트의 2인자로 박민규 사장의 오른팔 같은 자이다. 그의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그래, 사장님께서는 잘 계시지? 회사에 별일은 없어?”

“예, 상무님. 그나저나 사장님께서 파이온 크로니컬 2에 대한 유럽과의 투자건을 매우 궁금해하십니다.”

“하하하! 이 사람아, 내가 누군가. 천하의 허성진 아닌가. 유로비스 스트래티직에서 5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네. 내일 다시 스트래티직 측과 만나서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로 했어.”

“축하드립니다, 허상무님. 역시 허상무님이네요. 대단하십니다.”

“뭘, 다들 국내에서 자네들이 고생한 덕 아니겠나.”

“그나저나 상무님, 사장님께서 다음 주 중으로 일본으로 출장 가실 예정입니다. 출국 관련해서 저희들이 준비를 다 마쳤으니까요. 사장님 가시는 날 마중 좀 나오셔야겠어요.”

“그래그래, 알았네. 나중에 또 통화하도록 하세. 사장님한테는 내가 직접 전화 드릴 테니 다른 말 하지 않아도 되네. 알았나?”

“예, 상무님. 그럼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그래, 이만 끊네.”

가상현실게임의 물꼬를 튼 김씨소프트는 본격적인 차세대 가상현실게임 개발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파이온 크로니컬 2를 진일보한 가상현실게임으로 제작해 명실공히 세계 게임시장에서 김씨소프트의 입지를 굳히고자 하였다.

권팀장과의 전화를 끊고 박민규 사장에게 전화를 걸려던 허성진 상무에게 검정색 양복의 사내가 다가왔다.

“김씨소프트의 허성진 상무님이시죠?”

“그렇습니다만… 뉘신지?”

허상무는 다부진 인상을 하고 있는 삼십대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오자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경계하고 바라보자 검정 양복의 사내는 자신의 신분증을 허상무의 눈앞에 내밀고는 곧바로 집어넣었다.

‘블랙? 이들이 말로만 듣던 국정원의 해외 정보원들인가?’

“무슨 일로…….”

“잠깐 저와 함께 가시죠.”

“이보시오.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거 아니오.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동행하자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오?”

“김씨소프트와 한국 게임 산업에 관한 일입니다. 어차피 허상무님께서 같이 가주시지 않더라도 공식 라인을 통해 김씨소프트까지 보고될 건입니다. 하지만 의사 결정의 신속성을 위해 이러는 것이니 조금만 양해를 해주십시오.”

계속되는 권유(?)에 허상무는 마지못해 그를 따라 나섰다.

블랙.

그것은 국정원 직원들 중 해외 분야에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활동하는 직원을 말한다. 그들의 첩보 활동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국가에서는 그들의 존재를 일체 부정하며 사고 처리도 그에 준하여 처리하게 되어 있다.

국정원 요원은 허상무를 커다란 밴으로 안내했다.

밴에 올라탄 허상무는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밴 안에는 각종 통신장치와 도청장치를 갖춘 정보원들이 허상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요?”

“허상무님께 들려드릴 일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안이니 보안을 유지해주셔야 합니다. 여기 보안유지 각서에 서명하세요.”

허상무는 당황한 표정으로 보안 각서를 읽은 후 서명했다.

“오늘 저희들이 코니사의 이데이와 불리자드의 모나임의 대화를 탭(도청)했습니다.”

블랙 요원의 말이 끝나자 놀란 허상무의 눈이 더욱 더 커졌다.

“뭐? 뭐라구요?”

같은 시각 중국 푸둥의 종합병원.

“좀 늦으셨군요.”

“아, 예, 요즘 탈북자 문제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도 직원들의 신변 문제를 해결해주신 점에 대하여 원장님께서 매우 고마워하고 계십니다.”

“뭘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인 걸요. 그런데 이번 일은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사건을 크게 벌이신건지…….”

대사관 직원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중년 사내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저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들에게 죄송할 것까지는 없구요. 자칫 잘못했으면 양국 간 외교 비화로 번질 뻔했습니다.”

“예,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드리는 거구요.”

“그나저나 임과장님도 조심하세요. 이번 일에 연루되어 있던 직원들이 모두 임과장님 수하 직원들 아닙니까?”

“후우우.”

다시 한 번 한숨 같은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담배 연기와 함께 국정원 해외분야 외사 3과장 임승수는 회상에 잠겼다.

“이보시오, 임과장. 일을 어쩌다 이렇게 크게 키웠어?”

“죄송합니다, 국장님.”

“죄송으로 끝날 일이 아니에요. 지금 원장님께서 얼마나 곤경에 처하신 줄 아십니까?”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경위서 제출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무너진 포스트에 대해서는 임과장이 책임지고 복구하도록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대사관과의 유관 업무는 어떻게…….”

임승수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상사의 표정을 살폈다.

“원장님께서 모든 라인을 동원해 조치를 취해두셨습니다.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국장님.”

“앞으로가 문제에요. 프로젝트를 접을 수도 없고. 무너진 포스트를 복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죄송합니다.”

그가 한국에서의 일을 회상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사고를 방해했다.

“과장님, 임승수 과장님.”

“아… 그래, 어떻게 됐나?”

“예, 다행히 공안 측에서도 협조적으로 나와서 일이 쉽게 해결됐습니다. 다음 주 내로 조선족을 제외한 국내 직원들의 시신을 국내로 이송키로 합의했습니다.”

“수고했네, 이차장.”

임승수는 안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어 물었다.

“이차장, 국내에서 유족들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되어가는 중인가?”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유족연금 건만 잘 해결되면 크게 문제되진 않을 겁니다.”

“그래, 자네가 최선을 다해서 알아봐주게.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것은 그것밖에 없질 않나.”

“예, 과장님.”

임승수 과장은 최용석을 생각하며 천장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자신의 한쪽 팔이 뜯겨 나가 버린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랏사드 형, 로그인했어요?]

요왕(로만)은 혼자서 파이온 게임에 로그인한 후 랏사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러나 랏사드의 응답은 없었다.

“뭐야? 핸드폰도 꺼놓고. 도대체 나는 언제 키워주는 거야? 젠장.”

요왕은 입맛을 다신 후 다시 세나와 쎄미트리, 로큰롤에게 연속에서 귓속말을 보냈다.

[혈의 눈물, 뭣들 하고 있어? 나 심심한데 같이 파티 사냥 나가자.]

잠시 후 요왕(로만)의 헤드셋을 타고 익숙한 혈원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로만이? 지금 어디고?”

“쎄미트리 형, 역시 쎄미트리 형밖에 없네요. 로타카 대륙으로 가는 길에 잠시 비탄의 마을에서 몹 사냥 좀 할까 하구요.”

“근데 랏사드는 어딨노? 랏사드 없이 우리끼리 사냥하러 다녀도 될려나 모르겠다.”

둘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로큰롤메이지와 세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뭐야? 둘이서 파티플레이 하려고? 나도 좀 끼워주지그래.”

“어머머, 다들 실력도 안 되면서 그러다가 괜히 경험치만 깎이고 우리 혈의 눈물의 명예에 먹칠만 하는 것 아니에요?”

“세나는 하기 싫음 마라.”

“정말, 쎄미트리는 어쩜 그렇게 같은 말도 정떨어지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래서 한다는 기가, 만다는 기가.”

“알았어요. 해요. 대신 무리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하자고요.”

“자, 그럼 다들 비탄의 마을로 오실 거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빨랑 오삼.”

“랏사드 없으면 내가 대장인가? 와하하하! 쎄미트리의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보여주지.”

나는 연인들끼리, 또는 친구들끼리 자주 가는 패밀리 레스토랑에게 가기 위해 종각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빠져나갔다.

나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서울이라는 동네가 참 신기하다. 저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저렇게 바빠서 그리 빨리 걷는 것일까?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대한민국 인구의 25%가 모여 사는 서울이라는 곳은 정말 인간시장에 가까웠다.

“뭘 그리 두리번거려요?”

“아… 제가 촌놈이라서요…….”

채하영. 평상시의 말투도 공격적인 그녀. 나는 그녀가 혹시 군인 출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최근 들어서 나뿐만 아니라 최상조, 김민우에 대한 국정원의 경호가 예전에 비해 조금은 까다로워진 듯했다.

얼마 전 집으로 들어가던 김민우는 자신을 미행하는 국정원 경호원을 치한으로 착각하고 경찰에 신고를 해버렸다. 그 사건으로 파출소 경찰들이 출동하는 사태가 빚어졌는데 출동한 경찰관들이 되레 사과를 하고 돌아갔다나… 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바깥출입이 거의 없던 최상조는 최근에는 거의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별 문제 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처음으로 미영이와 데이트를 하는 날인데 이렇게 따라다니면 이건 뭐 경호원이라기보다는 스토커에 가깝지 않을까…….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 물어보세요.”

정말 갑자기 물어보기 싫어진다. 도대체 나긋나긋한 맛이 없는 목석같은 여자다.

“왜 항상 검정색 옷만 입으세요? 경호원이라서 그런 건가? 왜 대부분 경호원들은 검정색 옷을…….”

“때가 잘 안 타니까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떼가 잘 안 타서. 오직 그 이유 하나뿐이란 말인가? 정말 그녀다운 대답이다.

“저기, 실례지만 몇 살이나……?”

“그건 왜요?”

너무도 퉁명스러운 말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슨 여자가 정말 이런단 말인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27인데요.’, ‘스물일곱?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오빤데 말 놓으면 안 되겠니?’ 뭐 이게 일반적인 수순인데 말이야. 도대체 이 여자는 앞뒤 수식어 다 빼고 용건만 간단히란 말이야.

아마 세나였다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잔뜩 수줍은 표정으로

“숙녀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가 아닌가요?”

라고 했을 것이다.

그녀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렸을 때 나는 드디어 미영과의 약속장소인 패밀리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저 사람들은 왜 입구 앞에서 앉아 있는 거야?’

“어서 오십시오, 손님. 예약은 하셨나요?”

‘예약? 저녁 한 끼 먹는데 무슨 예약씩이나?’

“아… 아니요.”

“손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박수혁이요.”

“채하영입니다.”

‘뭐야? 같이 들어가는 거야?’

“네. 박수혁, 채하영 손님. 앞으로 4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헉! 40분! 도대체 이놈의 동네는 어떻게 된 곳이 저녁 한 끼 먹는데도 40분씩이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아… 네. 그러죠, 뭐.”

“저는 박수혁 씨하고 같은 일행 아니니까 다른 테이블을 잡아주세요.”

“네?”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생은 우릴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의 의아한 표정에 채하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기표에 내 이름을 적어놓은 후 머쓱한 표정으로 채하영을 바라봤다.

“그러기에 그냥 김밥 집 같은 데서 만날 것이지.”

“채하영 씨가 무슨 상관입니까?”

“제 시간도 그만큼 빼앗기는 것 아닙니까?”

‘저 얼굴에 웃음만 있다면 괜찮을 텐데 말이야.’

나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강미영 팀장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미영, 지금 어디야? 4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데.]

우우웅.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차가 좀 막혀서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알았어.]

40분이 40시간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인간 목석과 같이 앉아 있자니 대화도 안 통하고 정말 지겨웠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몇 번을 반복해서 봤다.

공교롭게도 민망한 장면을 들켜버린 나는 한나절을 고민하다가 미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해하지 말아 달라. 미영이가 생각하는 상황이 아니다. 저번에 나 도와준 데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 미영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달라.’ 뭐 그런 내용들이었다.

무려 20통이 넘는 문자를 보냈을 때 미영에게서 답 메시지가 왔다.

[수혁 오빠, 밤마다 많이 외로우셨나 봐요?]

나는 그 문자를 보고 쓰러질 뻔했다.

‘이 여자가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도. 사나이 말을 안 믿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꿈과 연관된 사건임을 해명했다.

나의 그 수줍은 고백에 그녀는 전화기 수화기가 터져나가라고 웃었는데 정말이지 쥐구멍으로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빠? 지금 나이가 몇 개? 우리 남동생이 고등학교 다닐 때 하던 걸… 세상에나…….”

그러나 한 번의 쪽팔림으로 나는 미영과의 데이트를 어렵사리 얻어냈다.

그리고 지겨운 시간이 흐르고 30여 분이 지났을 때 미영이가 도착했다.

오늘 아침 회사에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는데 정말이지 회사원이라기보다는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정장도 잘 어울리지만 캐주얼도 참 잘 어울린다.’

우리는 아르바이트생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서 미영이 주문하는 대로 음식을 시켰다.

그녀는 이곳에 몇 번 와봤는지 능수능란하게 요리를 주문했다. 전부 영어로 된 음식들이었는데 나 같은 촌놈들은 한 번 들어서는 외우기 힘든 이름들이었다.

단 둘만의 만남이 어색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미영이의 성격이 붙임성이 있고 싹싹해서인지 아니면 나의 화려한 구라와 현란한 말발이 끊이지 않아서인지 분위기는 예상외로 화기애애했다.

특히 그녀는 나의 오락, 도박, 바둑, 주색잡기 등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는데 철권 하면서 맞아 죽을 뻔한 이야기나 100원짜리 동전 50개를 쌓아놓고 나를 기권시킨 돈질형 인간 이야기에서는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정말이지 즐겁게 웃었다.

“수혁 오빠 정말 재밌네요. 호호호.”

나는 슬슬 밑천이 바닥났다. 뭔가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데, 이대로 분위기가 가라앉게 만들면 안 되는데… 그런데 머리를 굴려도 재밌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빤 여자친구 없어요?”

“응?”

“여자친구 없냐고요.”

“아… 없어.”

“이상하네. 키도 크고 얼굴도 남자답게 시원하게 생겼는데 여자친구가 없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 아마 미영이 너를 만나게 해주려는 신의 뜻이 아니었을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있었는데 헤어졌어.”

“정말요? 왜 헤어졌는데요?”

나는 또다시 새로운 소재를 찾은 만담꾼처럼 미혜와 헤어지게 된 이야기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미영이 때문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자들은 다 그렇죠. 대학 1, 2학년도 아니고 졸업할 때 되고 또 졸업하거나 직장인이 되면 현실적인 문제들을 많이 따지게 되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고 보니 수혁 오라버니는 다 되는데 한 가지가 안 되네요.”

“그게 뭔데?”

이 바보 같은 놈아. 그걸 몰라서 묻냐? 능력 아냐, 능력.

“직장이요. 오빤 현재는 그나마 울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한다 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수였잖아요.”

‘이보게, 미영. 나는 황인종이라 황수라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무책임한 농담은 어렵사리 만들어놓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화기애매하게 만들어버리기 십상이고 여자들이 싫어하는 세 번째 이야기 ‘축구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로 싫어한다는 ‘군대 이야기’를 한 후 여자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분위기 깨기 대망의 삼종 세트를 질러버리는 것과 같은 간 큰 남자 베스트 1위에 들어갈 법한 짓이었다.

“그래? 백수는 뭐 사람 아닌가. 정말 대한민국 백수들은 서럽다고.”

“호호호,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오빠는 이번 프로젝트가 있잖아요. 왜 국정원 임승수 과장님께서도 프로젝트만 성공한다면 취직자리도 알아봐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때 되면 제가 괜찮은 친구 소개팅시켜줄게요.”

‘소개팅? 싫은데. 그냥 미영이 네가 소개팅 나오면 안 될까?’

나는 머릿속에서 매미처럼 앵앵거리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이 나이에 소개팅은 무슨…….”

“참, 오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이상형이라… 음… 글쎄, 생각을 안 해봐서… 얼굴은 성유리에 몸매는 한은정, 성격은 박경림? 뭐 그 정도면야… 나는 그냥 소박한 남자야.”

“와, 오빠 정말 소박하시네요. 차라리 TV 속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치만 성유리의 얼굴과 한은정의 몸매, 박경림의 성격을 가진 여자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 미영이 너지.’

느끼하다. 내가 생각해도 느끼해. 나는 입 안을 뱅뱅 맴도는 버터 발린 말들을 주워 삼켰다.

“그러는 미영이 네 이상형은 누구야?”

두근두근. 왜 가슴이 두근거리지?

“저요? 글쎄요… 어렸을 때는 외모를 봤는데 요즘은 능력을 보게 되더라고요. 우리 박민규 사장님 정도면 킹카 수준이죠. 하지만 유부남이라.”

그녀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귀엽게 웃었다.

“나 같은 남자는 어때? 백수라서 싫겠지?”

나는 그동안 모아뒀던 용기의 마나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과감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예? 오라버니요?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하는 거죠?”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

“그걸 나한테 물어 보면 어떡해. 박민규 사장님이 킹카면 나는 킹콩인가?”

“호호호, 오빠도 멋있어요. 특히 게임에 집중할 때 모습 보면 사람이 달라 보이죠. 항상 장난만 치는 것 같고 진지한 구석이 없어 보였는데 게임할 때 보니까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하시더라고요. 오빠도 멋져요. 이런 말 하니까 디게 어색하다. 우리 다른 이야기해요.”

“어… 그… 그래.”

아싸, 일단 킹콩은 아니라는 거잖아. 그래, 킹콩은 아니니까 이제 취직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멋지게 프로젝트 성공하고 임승수 과장님한테 말씀 잘 드려서 취직하면 미영이도 나를 다르게 보겠지?

나는 황사 낀 하늘이 단비에 갑자기 말끔해진 것처럼 기분이 맑아졌다.

“손님, 다 드셨으면 그릇 치워드리겠습니다.”

‘뭐야? 이거 그만 나가라는 거 아냐. 하긴 오래 있긴 했지.’

“미영아, 어디 가서 맥주 한잔할까?”

“맥주요? 저 술은 잘 못하는데… 그냥 분위기 좋은데 가서 칵테일이나 한잔 마셔요. 내일 또 출근해야 되니까요.”

“아… 그래. 그럼 어디 잘 아는 곳 있으면 한번 안내해봐. 내 지역구는 서울이 아니니까. 흐흐.”

우리가 계산을 끝마치고 나서자 멀찌감치 앉아 있던 채하영도 우릴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서울의 도심에는 밤이 없어 보였다.

* * *

“로큰롤, 녀석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켜줄 수 있겠어?”

“물론이지. 나도 실력이 꽤 늘었다고. 고블린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켜다오. 카오스 베인.”

선홍빛 물결이 로큰롤메이지의 마법구에서 뿜어져 나가 쎄미트리와 로만을 둘러 싼 고블린들을 휘감았다.

“로큰롤 형님 대단한걸요. 랏사드 형님 뒤통수나 치던 때와는 실력이 많이 향상됐는데요.”

로큰롤의 마법에 햄버거 빵 같이 기다란 코를 가진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틈을 비집고 쎄미트리가 헤비 워 배틀액스를 휘저었다.

“이야, 쎄미 트리 형. 그 도끼 위력 끝내주는데요.”

“당연하지. 이걸 어떻게 구한 건데.”

“어떻게 구한 건데요?”

“어떻게 구하긴, 어쌔시네이튼가 뭔가 하는 암살길드의 우두머리 목을 따고 빼앗은 거지.”

캬카오. 캬카오.

쎄미트리는 로만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연신 헤비 워 배틀액스를 휘저으며 고블린의 파도를 넘고 있었고 로만 역시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법 용맹스럽게 쎄미트리를 보조했다.

“세나, 세나도 뭔가 해야지.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나타나면 랏사드도 좋아할 거야.”

“좋았어요. 아이스 보텍.”

큐큐쿵!

세나는 노비스 스텝으로 고블린들을 향해 물대포 같은 아이스 보텍을 발사해 로만과 쎄미트리를 지원했다.

촤파팟.

캬오오. 캬오오.

너무 커서 땅을 향해 처진 기다란 코, 귀 길이로만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엘프보다 더 긴 귀, 목에는 뼈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차고 있는 고블린들은 동료들이 공격을 당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비탄의 마을에 있는 들판을 가득 메웠다.

“쎄미트리 형,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건드린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내가 랏사드 님 오면 같이 하자고 했잖아.”

캬오오. 캬오오.

어느새 벌레 떼처럼 몰려든 고블린들은 로만과 쎄미트리를 조금씩 조여왔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누구 저희 혈의 눈물을 도와주실 분 들 없으신가요?”

로만은 지금까지 파티플레이를 위해 귓속말로 정해 놓았던 헤드셋 옵션을 전체 대화로 바꾸고 주위에 있는 게이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주세요. 저희들 좀 도와주세요. 아… 랏사드 형님만 있어도…….”

“로만, 이건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야. 남들의 도움은 왜 청하고 그래?”

로큰롤메이지는 따끔하게 로만에게 충고했다.

“맞다, 로큰롤 말이 맞다. 로만이 너 작작 좀 징징대라.”

“하, 하지만… 벌써 고블린들이…….”

슈각슈각.

고블린들은 로만과 쎄미트리를 향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신이 구불구불한 검을 찔러 넣었다.

“세나, 힐링 마법 좀 걸어줘요. 이러다 죽겠어요.”

“로만, 그만 좀 징징대라. 듣기 싫어 죽겠어.”

슈리릭.

로만의 칭얼대는 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예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꾸에엑.

꾸에엑.

갑작스럽게 날아온 단검이 고블린들의 목을 관통했다.

“누… 누구지?”

로만과 쎄미트리, 그리고 로큰롤메이지와 세나는 단검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다크엘프 계열의 기사인 실리엔 나이트가 어쓰 디바이더를 비껴 들고 서 있었다.

캬오오. 캬오오.

제법 인공 지능이 발달해 있는 몬스터인 고블린은 자신들을 향해 단검을 던진 사내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자들에 비해 고수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위기에 처하신 것 같은데 싫지 않다면 제가 좀 거들어드리죠.”

“싫긴요,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죠.”

“그렇다면 사양 말고 감상해주세요.”

스스스.

“와, 랏사드 군주님의 특기인 윈드 워크네.”

갑작스럽게 나타난 실리엔 나이트는 물 흐르듯 고블린에게 다가와 검무를 추었다.

“모르탈 블로우 샷!”

실리엔 나이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애꿎은 고블린들의 머리가 십여 개씩 떨어져 나갔다.

“와, 엄청난 박력이다. 랏사드 형님과 비슷한 수준이야.”

“치, 뭐가 그래. 랏사드 군주님보다는 훨씬 못한 것 같은데.”

쓰걱쓰걱.

실리엔 나이트는 혈의 눈물이 사냥하던 고블린들이 마치 자신이 사냥하던 몬스터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고블린들의 몸을 분리시키고 찢어발겼다.

다크 블루 헤어스타일에 검정색 피부를 하고 은빛 어쓰 디바이더를 든 사내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고블린들의 비명소리가 비탄의 마을에 울려 퍼졌다.

고브린들은 자신들을 향해 마주 달려오는 다크 나이트를 향해 조악한 검을 일직선으로 찔러 왔다.

“타합!”

몸을 슬쩍 젖혀 검을 피한 다크 나이트는 검병으로 놈들의 검을 찍어내린 후 가까이 다가온 고블린들의 안면에 자신의 검을 찔러 넣었다.

캬캬오!

미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고블린의 안면은 날카로운 검에 관통되어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급하게 검을 뽑아낸 다크 나이트는 포위된 것을 느꼈는지 몸을 납작하게 수그리며 원호를 그었다.

서거걱.

고블린들의 조악한 검이 다크 나이트의 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고 그는 엎드린 자세로 고블린들을 썰어버렸다.

퍼퍼퍽

육체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들의 몸뚱이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다크 나이트는 텀블링하며 몸을 일으켰다.

“구경만 하고 계실 겁니까?”

“아… 불의 정령이여, 고블린들을 태워주소서. 파이어 볼!”

화르륵.

가뜩이나 다크엘프의 등장에 밀리던 고블린들은 로큰롤메이지의 화염계 마법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그 틈새를 어쓰 디바이더가 파고드니 허공에는 속절없이 타다 만 고블린들의 불씨들이 휘날릴 따름이었다.

캬오오. 캬오오.

수백이던 고블린들은 종족들이 쓰러져가자 들고 있던 구부러진 검들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

“와하하하! 짜식들, 겁도 없이 까불더니 줄행랑치는 모습이란.”

“고맙습니다. 위기에 빠진 저희들을 도와주셔서요.”

“뭘요. 같은 게이머로서 당연한 일이죠.”

그 다크엘프 계열의 기사는 예의 바르게 로큰롤메이지의 감사 인사에 겸손하게 대답했다.

“와, 님 대단하시더군요. 저희는 혈의 눈물이라는 혈맹인데,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는 혈의 눈물의 부군주인 로만이에요.”

“누구 맘대로 니가 부군주고?”

로만의 자기소개에 쎄미트리가 질그릇 깨지는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저는 로카나이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들이 어려움에 처하신 것 같아서요.”

“저는 쎄미트리라고 합니다.”

“저는 로큰롤메이지. 그리고 여기 이 아가씨는 세나5예요.”

로큰롤은 자신과 함께 세나를 소개한 후 말을 이었다.

“의협심이 대단하시네요.”

로큰롤은 다시 한 번 그의 겸손함과 의기를 칭찬했다.

“뭘요, 그런데 아까 얼핏 듣기에 랏사드라고 하시던 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우리 혈의 눈물의 군주님이 랏사드예요. 얼마 전 임파젤 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신 그 랏사드죠. 그뿐인가요. 최근에는 의화단과 어쌔시네이트 암살 길드의 추적을 따돌려버렸죠.”

로만의 말에 로카나이라는 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아, 그렇다면 제가 알고 있는 랏사드가 맞는 것 같군요.”

“어머나, 랏사드 님을 아세요?”

“예, 조금. 또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소문도 많이 들었구요.”

“그래요? 우와 우리 랏사드 형이 그렇게 유명하신 분이었어? 이거 괜히 나까지 목에 힘이 들어가는데.”

로만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런데 왜 랏사드 님은 같이 파티플레이를 하지 않으시고?”

“아, 우리 군주님 오늘은 바쁘신지 연락이 통 안 돼요. 전화기도 꺼져 있고 로그인도 안 되어 있더라구요.”

“저기, 가능하다면 저도 혈의 눈물에 가입하고 싶은데요, 그렇게 되겠습니까?”

“뭐라구요? 우리 혈맹에 가입하시겠다구요?”

네 명의 혈의 눈물 혈원들은 갑자기 나타난 로카나이라는 자의 혈맹 가입 신청에 하나같이 입을 모아 탄성을 질렀다. 처음 랏사드의 제안으로 세 명이서 시작했던 혈의 눈물은 고집불통, 오기의 로큰롤과 쎄미트리가 가세함으로서 혈맹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 누구도 혈의 눈물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드디어 신규 혈원을 받게 되다니.

그들이 감격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좋아요. 제가 당장 랏사드 형님한테 쪽지 보낼게요.”

“그래주실래요?”

“저기, 로만아, 너무 앞서가는 것 아냐? 어찌됐든 우리 혈맹의 군주는 랏사드 님이니까 랏사드 님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세나는 너무 들떠 있는 로만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뭘 물어보고 자시고 해요. 그냥 가입시켜주면 되는 거지. 랏사드 형도 절대 싫다고는 안 할 거예요.”

“예, 제발 저도 가입 좀 시켜주세요. 세나 님, 너무 튕기지 마시고 저 좀 랏사드 군주에게 잘 말해주세요. 네?”

로카나이는 조금 오버해서 세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지금 당장은 우리가 결정 내리기는 조금 그렇고… 저기, 로카나이 님. 구해주신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구요. 혈맹 가입은 나중에 랏사드 군주와 상의해서 저희들이 별도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제가 님을 친구로 등록해놓을 테니까 님도 저희들을 친구로 등록해놓으실래요?”

“쩝, 뭐 서운하지만 우선 그것만으로도 만족입니다. 꼭 랏사드 군주께 저에 대해서 좋게 말씀해주세요.”

로카나이는 정말 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네, 그건 걱정 마세요. 저희들을 구해주신 분이니까 랏사드 형도 좋게 생각할 거예요. 근데 로카나이 님, 나중에 우리 혈맹 가입하면 저 좀 키워주셔야 해요. 하하!”

“와… 완전 졌다. 졌어. 로만이 너란 녀석은 도대체가…….”

로큰롤의 말을 들으며 로카나이는 크게 웃은 후 사람 좋게 신경 안 써도 될 법한 로만의 말에 친절하게 대꾸했다.

“만약 혈맹에 받아주신다면 로만의 레벨을 한 달 안에 갑절 이상 올려주겠어요.”

“와, 정말요?”

로만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끌끌끌, 저리도 좋을꼬.”

* * *

다크 블루의 조명 아래로 이글스의 호텔 켈리포니아가 잔잔하게 흐른다.

“어때요? 분위기 좋죠?”

‘분위기? 쩝, 나는 뭐 삼겹살에 소주가 더 좋은데…….’

“응, 분위기 좋은데. 고급스러워 보이고.”

미영과 나는 롱아일랜드라는 칵테일 바에 가서 스탠드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이네요, 강미영 팀장님.”

“예, 그러게요.”

후드건을 쓰고 있는 바텐더는 강미영에게 오랜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뭐로 드실래요? 오늘도 블루 마카리타?”

미영은 바텐더의 말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오늘은 레인보우로 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아가씨.”

미영은 나를 쳐다봤다.

“수혁 오라버니는 뭐 드실래요?”

‘여긴 소주는 안 팔 테고… 그렇다고 아는 칵테일도 없고. 뭐 그냥 마티니가 괜찮겠지?’

“마티니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와 미영이 칵테일을 주문하고 났을 때 채하영은 내 자리에서 몇 칸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 술을 주문하며 우리 쪽을 흘깃 쳐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주문한 칵테일이 나왔고 바텐더는 미영이 주문한 레인보우라는 칵테일에 불을 붙였다.

“자, 강팀장님 차례네요.”

바텐더의 말이 끝나자 강미영은 눈을 감고 뭔가 기도를 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밥 먹기 전에 기도하는 건 봤어도 술 마시면서 기도하는 건 또 처음 보네.’

곧이어 미영은 눈을 떴다.

깊고 푸른 조명 아래서 살며시 눈을 뜨는 미영의 모습은 방금 잠에서 깨어난 공주님을 보는 것 같았다.

“자, 수혁 오라버니. 건배해요.”

“그래. 완샷.”

“푸훗.”

나의 완샷이라는 말에 미영은 또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보조개가 조명과 어우러져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이곳에 자주 오나봐?”

“예, 가끔.”

“남자친구랑 오나보지?”

나의 도발적인 질문에 미영은 조금 머뭇거렸다.

“푸훗, 저 남자친구 없어요.”

두근.

“뭐? 미영이 네가 남자친구가 없다고? 와, 도대체 대한민국 남자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이거 서울 남자들 눈이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러게요.”

“아니면 미영이 네가 눈이 너무 높던가.”

“안 그래요. 저 눈 그렇게 안 높아요. 그냥 평범하게 연애도 하고 싶고 평범하게 결혼도 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녀는 애써 자신의 이상형이 평범한 사람이라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신이 준 기회다. 지금이야말로 고백할 타이밍이야.’

나는 지금이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눈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려 마티니 잔을 쳐다봤다.

탁.

그 순간 내 좌측 옆에 앉아 있던 채하영이 마시던 술잔을 바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러더니 채하영은 핸드폰을 꺼내들고 뭔가를 입력했다. 그녀가 손놀림을 멈췄을 때 내 핸드폰이 강렬하게 요동쳤다.

우웅우웅.

강렬하면서도 짧은 진동. 그것은 문자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

나는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무슨 남자가 그렇게 소심해요. 내가 다 답답할 지경이네. 강미영 팀장이 레인보우를 시켰을 때부터 이미 게임은 끝났어요.]

우웅우웅.

연속해서 들어오는 문자 메시지.

[레인보우는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레인보우를 시켜놓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진 칵테일이에요.]

[답답하게 빙빙 돌리지 말고 남자답게 고백하세요. 내가 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아요.]

‘뭐? 그게 정말이야?’

나는 가슴 한편에서 불덩이가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영아.”

“예, 말씀하세요.”

“너도 알다시피 지금까지 내가 게임, 술, 도박 같은 것에 미쳐 있었잖아.”

사뭇 진지해진 내 표정에 미영도 내 말을 끊지 않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근데 나 당구장에서 임승수 과장과 유경호 경위, 너를 만난 후부터 미친 듯이 열중하고 싶은 게 생겨버렸어.”

미영은 그게 뭐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건 바로 너야.”

“예?”

미영의 눈이 외나무다리에서 호랑이를 만난 토끼마냥 동그랗게 커져간다.

“나 미영이한테 완전 반해버린 것 같아. 예전 여자친구하고 헤어진 후로 이성에게서 이런 기분 느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야.”

“오… 오빠…….”

“응.”

“그렇게 갑자기 진지하게 말씀하시니까 당황스럽네요.”

쨍그랑.

내 마음속에 유리 조각 깨지듯 심장에 금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묵과 긴장, 어색함이 우릴 감쌌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미영은 칵테일 잔에 꽂혀 있는 빨대만 빙빙 돌렸다.

“어머, 오라버니.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그만 들어갈까요?”

“어? 으응, 그래.”

우리는 어색하게 칵테일 바를 나왔고 미영은 주차해놓은 자신의 차에 올라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오라버니, 덕분에 오늘 즐거웠어요. 내일 회사에서 만나요.”

나는 말없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미영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채하영이 내 옆에 와서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성난 킹콩처럼 그녀를 노려봤다.

“이게 뭡니까? 뭐가 다 끝난 게임이에요? 하영 씨 말 듣고 섣불리 고백했다가 분위기만 더 어색해졌잖아요.”

“아, 미안미안. 그나저나 강미영 저 여자 맘속을 알 수가 없네.”

“미안하면 다예요? 어떻게 할 거예요, 이제. 민망해서 미영이 얼굴도 못 보겠네.”

“나참, 소심하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살다보면 여자한테 차일 수도 있는 것이고 찰 때도 있는 거지. 데려다줄 테니까 차에 타세요.”

나는 하영의 차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문자 메시지가 왔다.

[수혁 오라버니, 아깐 너무 당황해서… 무안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저도 오라버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오라버니, 프로젝트 성공하고 나면 우리 멋지게 만나요. 그때는 오빠의 고백에 웃으며 답해줄게요.]

한여름 장마처럼 찌뿌둥해 있던 나는 다시금 힘이 솟아났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짱꼴라들 싹 쓸어버린 후 다시 도전이다.”

내가 어찌나 크게 외쳤는지 운전하던 채하영이 나를 실성한 사람 쳐다보듯 쳐다봤다.

늦음 밤 우리가 탄 차는 분주한 도로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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