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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다섯 마리의 은빛 늑대와 싸울아비, 다크 레인저를 얻다 (13/51)

chapter 12 다섯 마리의 은빛 늑대와 싸울아비, 다크 레인저를 얻다

죽음의 터널을 통과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섯 갈래의 길이었다. 미영이는 내가 암살자들을 지하 던전으로 유도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수십 명의 암살자들을 몰살시키는 것을 보면서 연신 감탄성을 질러댔다.

“수혁 오라버니, 대단해요. 정말 멋져요.”

“정말? 괜찮았어?”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정말 오빠 빨리 광개토 대왕 프로젝트 끝내고 우리 회사에 취직하세요. 제가 부장님한테 적극 건의해볼게요.”

‘진짜?’

나는 하마터면 본심을 말할 뻔했다.

“그래? 기분 나쁘진 않네. 근데 나는 자유롭게 사는 게 좋아. 구름처럼 바람처럼.”

“오라버니, 이제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제가 알기로는 장남으로 아는데 장가도 가고 그러려면 직장이 있어야죠. 저만 해도 아무리 인물이 좋아도 백수면 완전 비호감이에요. 그니까 취직을 하세요.”

나는 갑자기 미혜가 생각났다. 가장 최근의 사랑이었던 유미혜. 그녀 역시 지금의 미영처럼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는데… 그런데 그때와 다른 점은 미혜가 하는 말은 잔소리로 들렸는데 미영이가 하는 말은 애교 섞인 충고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

“근데 진짜 수혁 오빠, 게임에 집중할 때는 정말 멋져 보여요.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할까? 전 남자건 여자건 자기 일에 열심이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이 좋더라고요.”

나는 미영의 말에 갑자기 파이온 컨트롤러와 키보드를 가지고 게임을 엄청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모니터를 바라보며 집중하는 연기를 했다.

“푸훗, 귀엽다.”

“또 뭐라고 했지? 나는 오락신동, 게임의 제왕이다. 와하하하! 임요강도 나한테 울고 갈 뻔했지. 어때, 자신 있어 보여?”

“그건 좀 오버구요.”

“그나저나 미영아,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지?”

다섯 갈래의 길에서 주저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미영은 너무도 간단하게 길을 제시했다.

“이거 정말 랏사드한테 너무 특혜를 주네요. 오른쪽에서 세 번째 길로 가세요.”

“왜 세 번째 길을 추천하는 거야?”

“세 번째 길의 끝에 또 다른 퀘스트가 있어요. 지하 던전에 감금된 로타카 영지의 왕자 카이로즈를 구하라. 물론 카이로즈는 NPC고요. 카이로즈가 감금된 지하 감옥은 외눈박이 오우거가 지키고 있죠.”

“카이로즈? 그딴 NPC 구출해서 뭘 해. 차라리 안전하고 빨리 로타카 대륙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나?”

“오빠, 제가 오빠한테 해로운 걸 권하겠어요? 카이로즈를 구출해보세요. 그럼 카이로즈가 오빠에게 큰 선물을 줄 거예요.”

“선물?”

선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공짜 선물이라면야.

“오케, 좋았어. 랏사드, 카이로즈를 구출한다.”

“랏사드 님, 길이 다섯 군데로 나뉘어 있는데 어느 길로 가는 게 좋을까요?”

“세 번째 길로 갈 겁니다, 프레드릭 님.”

“랏사드 말하는 거 보면 이 지하 던전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다. 진짜 파이온 게임한 지 얼마 안 되는 거 맞나?”

“쎄미트리, 넌 다 나쁜데 사람 의심하는 게 제일 나빠.”

쎄미트리의 말에 로큰롤이 핀잔을 주었다.

“객관식 시험은 대부분 3번이 답입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다섯 갈래의 길 중 세 번째 길로 접어들자 우리 눈앞에는 좀 전까지 드라큘라가 누워 있었을 법한 관들이 즐비해 있고 그 주위로 사람과 몬스터들의 뼈다귀들이 널려 있었다.

“이거 왠지 잘못 들어왔다는 느낌이 드는걸.”

“그러게. 분위기가 으스스한데.”

빠지직.

찌익, 찍.

누군가가 뼈다귀를 밟았는지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놀란 박쥐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리고 눈앞에 투구를 쓰고 있는 용머리 두 개 사이로 다섯 개의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길에 용 문양이 새겨진 고리 달린 큼직한 문이 보였다.

‘저긴가? 왕자가 갇혀 있는 곳이.’

“쉿, 오우거의 냄새가 나지 않나? 모두들 조심하라구.”

“아무런 냄새도 안 나는데? 랏사드.”

쎄미트리는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계단을 밟고 올라가 용 문양이 새겨진 문을 열어젖혔다.

휘이이잉.

문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거 봐라, 아무도 없잖아.”

“아니, 누군가가 있는데.”

프레드릭의 낮고 차분한 한마디에 우리는 모두 방안을 살펴봤다.

문 크기에 비해서 방은 훨씬 넓었는데 어두컴컴한 방안의 중앙 한편에는 햇빛이 들어오는 유리창이 있는지 조명처럼 빛이 내려왔다. 그리고 그 조명이 비추는 곳에 용의 머리에 검을 들고 있는 5m 정도 되어 보이는 석상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고 그 기둥에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쇠사슬에는 양팔과 양다리가 묶여 다 죽어가는 인간이 매달려 있었다.

‘저자가 카이로즈 왕자인가?’

왕자는 굳은 혈흔이 묻어 있는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왕자의 뒤에는 네 개의 촛대에 불이 밝혀져 있었으며 숫양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뭔가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긴데…….”

방안에 흐르는 침묵을 로큰롤메이지가 깨버렸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야수의 울음소리.

카오오오!

퍼억!

“위험하다!”

그러나 내 외침은 이미 늦어버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4m 크기의 오우거가 흉포한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제일 앞에 서 있는 쎄미티리를 솥뚜껑 같은 손으로 쳐버렸다. 우리들 중에 덩치가 가장 큰 쎄미트리가 오우거의 펀치에 맞아 몇 미터를 날아가더니 벽에 패대기쳐졌다.

쿵!

털썩.

“스타리스, 쎄미트리를 치료해줘.”

“랏사드 님, 로큰롤, 오우거를 포위해야 해요.”

프레드릭은 몬스터 사냥에 익숙한지 어느새 우리를 진두지휘하며 검을 뽑아 들고 오우거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쿠웨엑! 쿠웨엑!

프레드릭의 검을 본 오우거는 더욱더 광포한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프레드릭을 향해 포크레인 같은 손을 휘둘렀다.

붕붕.

프레드릭은 그 무지막지한 손을 줄넘기 뛰어넘듯 뛰어넘으며 검을 오우거의 몸에 꽂아 넣었다.

쿠워워!

하지만 프레드릭의 검은 두꺼운 오우거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오히려 오우거를 더 성나게 만들었다.

“파이어 볼!”

로큰롤메이지가 오우거를 향해 불 계열의 마법 공격을 가했다.

화르륵.

파이어 볼이 오우거의 몸뚱이에 불꽃을 일으켰으나 오우거는 마치 성냥불 끄듯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툭툭 쳐서 불을 꺼버렸다.

“놈의 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공격이 잘 안 먹히는군요.”

“그렇다면 그 가죽을 썰어서 지갑이나 혁대 만들면 순식간에 명품 되겠는걸요.”

나는 윈드 워크를 이용해 오우거의 포클레인 같은 팔 공격을 피해 녀석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내 손에는 어느새 파괴자의 검이 들려 있었다.

“자, 얼마나 두꺼운지 한번 보자.”

쑤욱.

나는 놈의 뱃가죽에 파괴자의 검을 박아 넣었다.

‘쑤욱? 이 소리가 아닌데. 쑤우욱 하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덥석.

오우거는 내가 박아 넣은 파괴자의 검을 잡더니 한 손으로 내 얼굴을 후려쳤고 다른 손으로는 파괴자의 검을 빼내 던져버렸다.

퍼억!

땡그렁.

간신히 급소를 피하긴 했지만 놈의 솥뚜껑 같은 손에 얼굴을 얻어맞은 나는 쎄미트리가 누워 있는 곳까지 날아가 그 옆에 쓰러져버렸다.

“하이, 랏사드.”

“하이.”

“이대로 둬선 안 되겠군요. 얼음의 비수여, 오우거를 잠재워라. 아이스 대거.”

스타리스의 손끝에서 얼어붙은 고드름 모양의 단검이 오우거를 향해 날아갔다.

퍼퍼퍽.

오우거는 아이스 대거가 몸에 꽂혀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방안을 헤집고 다니며 우리들을 공격했다.

“로큰롤, 너는 접근하면 안 돼. 놈에게서 떨어져.”

“그게 말대로 쉽게 안 되는데.”

“조금만 기다려라. 여기 쎄미트리가 간다.”

훙훙훙훙.

쎄미트리는 로큰롤메이지와 프레드릭을 쫓고 있는 오우거를 향해 달려갔다. 측면에서 달려오는 쎄미트리를 발견한 오우거가 그를 향해 오른팔을 날렸다. 쎄미트리는 허리를 숙여 큼직한 팔을 피하더니 배틀액스를 오우거의 왼쪽 발등에 찍어 넣었다.

캬오오오!

“그래, 그거야. 제법인걸, 쎄미트리.”

쎄미트리의 배틀액스는 오우거의 발등을 꿰뚫고 들어가 땅속까지 박혀버렸고, 오우거는 도끼에 꿰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캬오캬오!

고통 때문인지 더 크게 비명을 질러 대는 오우거는 두 손으로 쎄미트리를 잡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드드득.

“윽, 내 캐릭터 허리 다 분질러지뿐다…….”

“프레드릭 님, 쎄미트리를 구해주세요.”

“나도 노력 중이에요.”

프레드릭은 오우거를 향해 연거푸 단검을 던졌다. 그의 가슴에서 복부까지 연거푸 단검이 틀어 박혔다. 프레드릭은 번개처럼 오우거를 향해 달려가더니 그의 고정된 왼발 무릎을 밟고 뛰어 자신이 던져 놓은 단검들을 계단 삼아 밟고 올라가 검을 오우거의 목에 쑤셔 넣고 한쪽으로 그어버렸다.

크워워!

목 한쪽이 날카로운 검에 완전히 갈라져버렸고 고통 때문에 오우거는 잡고 있던 쎄미트리를 던져버린 후 목덜미에 매달린 프레드릭을 후려쳤다.

“크윽!”

프레드릭도 포클레인 같은 손에 얻어맞고 날아가 떨어졌다.

“자, 이번에는 내 차례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파괴자의 검을 집어 들고 윈드 워크를 이용해 바람처럼 달려가 오우거를 향해 뛰어오르며 프레드릭이 박아 놓은 단검을 붙잡고 반동을 이용해 몸을 거꾸로 돌려 솟구쳐 올랐다.

피가 흘러나오는 목을 붙들고 있던 오우거가 시선에 들어온 나를 쳐다봤다.

“이미 늦었어. 파괴자의 검, 파워 스트라이크!”

푸화학!

프레드릭이 반쯤 갈라놓은 오우거의 목에 내 파괴자의 검이 들어가자 오우거의 목은 몸통과 완전하게 분리되어버렸다.

끄워워…….

놈의 머리는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직까지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놈의 어깨에 올라탄 채로 계속해서 파괴자의 검을 쑤셔 박았다.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육중한 몸이 거목 넘어지듯 앞으로 넘어졌다.

쿠쿵.

“끝인가? 대단하네. 프레드릭, 랏사드.”

“아니, 우리 모두의 합작품이다.”

“스타리스, 어서 쎄미트리와 랏사드, 프레드릭 님을 치료해줘.”

로큰롤의 말에 스타리스가 우리에게 치료 마법을 걸어주고 있을 때 오우거의 몸에서 마녀 모양을 한 정령이 솟아 나왔다.

“나는 발카라즈 던전의 이리나. 퀘스트를 끝내버렸구나. 억울하지만 원수의 자식인 카이로즈 왕자를 놓아줄 수밖에.”

스스스.

그 마녀 NPC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오우거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뭐꼬? 저 비실거리는 놈이 왕자였나?”

쎄미트리는 여전히 입담을 과시했다. 나는 묶여 있는 왕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파괴자의 검으로 그를 묶고 있는 네 개의 쇠사슬을 끊어 버렸다.

왕자를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지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강렬한 빛이 그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 위에서 부서졌다.

“30년간의 감금에서 나를 구한 기사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랏사드, 랏사드인데요.”

“랏사드 경, 그대에게 로타카 왕국의 기사 작위를 내리는 뜻으로 로타카 왕국의 보검인 싸울아비와 다크 레인저 이도류 세트를 하사하노라.”

“싸울아비와 다크 레인저?”

“또한 그대에게 로타카 왕국의 국수(國獸)인 은빛 늑대 5 마리를 성물로 지급하겠네. 이 다섯 마리의 은빛 늑대는 그대의 종물이 되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을 걸세.”

자동 모드에 따라 나는 카이로즈 왕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싸울아비 단검과 다크 레인저 단검으로 기사 서품식을 치렀다. 그리고 연이어 내게 소환수를 불러낼 수 있는 소환구를 지급했는데 소환구에는 실버 울프의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랏사드 님에게 싸울아비, 다크 레인저 이도류 세트가 접수되었습니다.]

[랏사드 님에게 실버 울프 아이템이 접수되었습니다.]

“그럼 랏사드 경, 앞으로 그대의 앞날에 로타카 왕국의 명예와 축복이 함께하길 빌겠네.”

스스스스.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로타카 왕국의 왕자는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뭐야, 랏사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 혼자서 그 비싼 아이템들 꿀꺽할라고? 니 너무한다.”

“그… 그게…….”

“혹시 다 알고 온 거 아이가? 서운하디.”

프레드릭과 스타리스는 멀찍이서 팔짱낀 채 관망하고 있지만 로큰롤과 쎄미트리의 반발이 심상치 않았다.

“미영, 어, 어떻게 할까? 이러다 쿠데타 일어나겠…….”

나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새벽 한 시 반이 훌쩍 넘어버린 시각에 미영은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차분히 가라앉은 미영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 예쁘다…….’

다크 브라운으로 염색한 긴 생머리가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어깨를 덮고 내려가고 라운드 티 너머로 그녀의 뽀얀 속살이 살짝 비쳤다. 상체를 세워 라운디 티 안을 보면 그녀의 꽃봉오리 같은 가슴 굴곡이 보일 것만 같았다.

꿀꺽.

“랏사드, 뭐 하고 있노? 지금 우리 말 씹는 기가?”

“아… 미안, 미안. 나는 전혀 몰랐어. 이거 정말 뜻밖의 수확인걸.”

“랏사드 님, 감축 드립니다. 싸울아비 이도류 세트를 획득하시다뇨. 거기에 다섯 마리의 은빛 늑대라…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쳇, 이거 완전 당한 느낌인걸.”

쿠쿠쿠쿠.

콰콰쾅.

“이게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들려오는 거대한 파열음. 뭔가가 심하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 우리는 하나같이 던전 쪽 출입구를 바라봤다.

“이 개자식, 랏사드. 내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간다고 했지?”

“어… 어떻게 네놈들이?”

방의 입구 쪽에는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걸치고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의화단주 질렌과 어쌔시네이트의 형가 그리고 그들의 수하 여덟 명이 거의 반 시체 상태로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미영, 미영, 큰일 났어.”

나는 황급히 잠들어 있는 미영을 깨웠다.

“아웅, 무슨 일이에요? 아하암.”

그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새어 나오는 하품을 막으며 나를 바라봤다. 막 잠에서 깨어나서인지 그녀의 쌍꺼풀이 훨씬 도드라졌다.

“저 미친놈들이 여기까지 쫓아왔어. 어떻게 도망쳐야 하는 거야?”

“웅… 뭐라구요? 도망을 왜 쳐요? 오빠, 싸울아비 이도류 세트 못 얻었어요? 그 퀘스트 끝났으면 파이브 실버 울프도 같이 얻었을 텐데…….”

“얻었어. 그치만 너도 쎄미트리와 로큰롤의 실력 잘 알잖아. 우리 셋이라면야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정 그렇다면 적당히 싸우다가 그 제단 뒤에 있는 숫양 왼쪽 옆에 있는 촛대를 잡아 돌리세요. 그러면 벽이 열리고 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물에 휩쓸려 던전 밖으로 솟구쳐 오르실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고마워. 자는데 깨워서 정말 미안.”

“아함, 네… 그럼 전 계속…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오빠 침대에 잠깐 누워 있어도 되죠?”

‘헉, 뭐라? 되다마다. 되다마다.’

“어… 그럴래? 진짜 미영이 너 너무 피곤해 보인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

나는 다시 헤드셋의 전원을 켜고 귓속말 아이콘을 클릭하고 동료들에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프레드릭 님, 제가 시간을 벌 테니까 쎄미트리와 로큰롤을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주세요. 그리고 스타리스는 나를 좀 도와주고.]

[어떻게 빠져나가면 됩니까?]

[뒤에 있는 숫양 왼쪽 옆에 있는 촛대를 잡아 돌려요. 그러면 물이 쏟아져 나와 우리를 던전 밖으로 밀어 올려줄 겁니다. 그동안 저는 스타리스와 함께 놈들을 막겠어요.]

[그러죠. 조심하시구요.]

[오케이, 제게 맡겨주세요.]

“뭘 수군거리는 거지? 네놈들이 작당을 한다고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나? 여기가 네놈들의 공동묘지가 될 것이다. 우하하하!”

“미친놈, 실성했구나. 그나저나 어떻게 죽음의 터널을 통과했지?”

나는 일부러 시간을 벌기 위해 형가에게 말을 걸었다.

“너처럼 얍삽한 놈만이 그곳을 건널 수 있는 건 아냐. 내 휘하 모든 단원들을 희생시켜 그곳을 건넜다. 몇 십 명이 희생됐는지 모른다. 때론 수하들을 방패막이 삼아, 때론 수하들을 부비트랩의 실험체로 삼아.”

‘그런 미친…….’

“자, 어서 내 해머 맛을 봐라.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어. 네놈들은 다섯, 우리는 열. 더구나 네놈들은 내 발끝에도 못 미치는 하수들이지. 흐흐흐.”

“훗, 누가 우리가 다섯이래?”

“미친놈, 공포에 질려 이젠 더하기도 못하는 모양이지?”

“그래? 어디 다시 한 번 잘 더해봐라. 몇 명인지. 가라, 다섯 마리의 은빛 늑대들아. 비열한 암살자들을 물어뜯어버려라. 파이브 실버 울프.”

크르르… 컹컹!

은빛 줄기와 함께 나타난 다섯 마리의 은빛 늑대들이 오크와 다크엘프 암살자들을 향해 사납고 거칠게 달려간다.

“스타리스, 이터널 서비터로 내 소환수들의 전투 능력을 극대화시켜줘.”

“좋았어. 이터널 서비터.”

소환수의 전투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이터널 서비터가 시전되자 은빛 늑대들의 몸이 광채로 뒤덮였다.

“크악! 놔라, 이 개새끼들아.”

“지금이에요, 프레드릭 님.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나는 프레드릭에게 탈출을 권유한 후 인벤토리에서 빛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자, 어디 한번 신명나게 놀아볼까?”

“쥐새끼 같은 놈, 어디서 이런 늑대 새끼들을…….”

“어쌔시네이트의 실력을 한번 볼까? 스타리스, 지원 부탁해.”

타합.

“가루로 만들어주마.”

채앵.

허공에서 내 검과 형가의 해머가 맞부딪치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제법이구나. 무쇠 같은 해머여, 저 애송이를 짓눌러버려라. 해머 프레스!”

“쉽진 않을걸. 빛의 검, 익스트림 스피드.”

파콰쾅!

내가 형가와 몇 합을 겨루고 있는 동안 내 실버 울프들은 끈질기고도 잽싸게 나머지 오크 암살자들을 괴롭혔고 의화단의 질렌은 스타리스의 마법에 막혀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퍼엉!

콸콸콸.

“랏사드 님,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빨리 뒤따라오세요.”

방의 한쪽 벽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졌다.

“저놈들을 놓치지 마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너나 잘하시지. 빛의 검, 오러 스트라이크!”

번쩌억!

“큭!”

허공을 가르는 섬광과 함께 빛의 검이 형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킥킥, 암살 길드 조직 후 처음 보는군. 내게서 피를 보게 하는 놈을. 해머 스트라이크!”

쿠쿵.

쏟아지는 물속에서 해머 스트라이크가 지축을 흔들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스타리스, 놈들에게 햄스트링을 걸어줘.”

“알았어. 적들의 스피드를 다운시켜라. 햄스트링.”

눈꽃송이가 날리는 듯한 마법, 햄스트링이 암살자들에게 들러붙었다.

“자, 우리도 그만 빠져나가자. 돌아와라, 은빛 늑대들아.”

커컹커컹!

나와 스타리스는 햄스트링에 걸려 몸놀림이 둔해진 암살자들을 등지고 쏟아지는 물기둥에 몸을 실었다. 하수구를 통과하기 직전 나와 스타리스는 심호흡을 한 후 물로 가득 찬 통로를 헤엄쳐 올라갔다. 한참을 헤엄쳐 나오자 수면 위로 빛이 보였다.

“푸우우우!”

“랏사드, 스타리스! 이쪽이야, 이쪽.”

던전 밖에 나와 있던 로큰롤이 우리에게 손짓했고 쎄미트리는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의 배틀액스를 내밀었다.

“영차.”

쎄미트리는 오크다운 괴력을 발휘해 나와 스타리스를 물속에서 건져냈다.

“카캇, 꼭 물에 빠진 생쥐 같군. 형가 그 자식이 왜 랏사드보고 쥐새끼, 쥐새끼 그랬는지 알 것 같아.”

“하하하하!”

“자, 이제 로타카 대륙으로 가서 짱꼴라들에게서 워렌드 성을 탈환하자구.”

“좋았어. 가자. 고고고!”

추와악.

“가긴 어딜 간다는 게냐? 천하의 형가에게 이런 치욕을 안기다니. 용서치 않겠다!”

그때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형가가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헉! 뭐 저런 물귀신 같은 놈이 다 있노?”

“저놈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예, 단주님.”

“질렌, 너는 뭐 하고 있어? 어서 공격하지 않고.”

“캬캬캬, 질렌, 너 명색이 의화단 단주라는 녀석이 알고 보니 형가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는구나.”

“닥쳐라, 쥐새끼 같은 놈아.”

놈들은 웅덩이에 빠져나와 우리를 향해 점점 빠르게 다가왔다. 그때 로큰롤메이지가 머리를 앞으로 쓱 내밀었다. 그의 마법구에는 어느새 방전구가 스파크를 발하고 있다.

“썬더 라이트닝.”

아직은 레벨이 낮아 파괴력은 낮지만 다수의 적을 상대로 광범위한 공격을 가하기에 썬더 라이트닝만큼 좋은 마법은 없다. 전격계 공격 마법인 썬더 라이트닝. 그 전기의 힘은 물에 젖어 있는 오크와 질렌에게 치명타였다.

파츠츠츠.

“으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소리.

물에 휩쓸려가고 몇 남지 않은 오크들은 전기에 감전돼 검게 타들어간 채로 쓰러졌다.

“하하, 간지러운 마법이구나.”

이제 남은 암살자는 질렌과 형가. 쓰러진 동료들을 밟고 질렌이 로큰롤메이지의 마법을 비웃으며 뛰어 나왔다.

“그럼 이건 어떠냐. 번개의 정령이여, 썬더 볼트.”

파지지직.

“끄으으!”

온몸에 전기가 휘감겼지만 질렌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우릴 향해 달려왔다.

“놈은 제가 맡을 테니 형가는 랏사드 님이 맡아주세요.”

프레드릭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어디 한바탕 비무를 춰볼까나.”

“우린 뭐꼬? 우린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채챙.

일순 로타카 대륙으로 향하는 평원에 검풍이 몰아쳤다. 네 마리의 야수들을 풀어 놓은 듯한 대지 위에 비무가 절정을 이루었다.

“제법이구나.”

“맹물인 줄 알았더니 역시 의화단의 단주답군.”

건틀릿에 박혀 있는 섬뜩한 쇠 송곳은 쉴 틈을 주지 않고 프레드릭을 찔러 왔다. 마치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스파이크 건틀릿의 움직임에 프레드릭도 꽤 애를 먹고 있었다.

콰쾅!

손끝이 떨려온다. 컨트롤러를 통해 형가의 힘이 느껴진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구나. 크하하하! 그러나 애송이, 넌 내 적수가 아니야.”

“과연 그럴까?”

나는 호언장담했지만 그 무겁다는 해머를 솜방망이 휘두르듯 휘두르는 형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쥐포로 만들어주마. 해머 프레스.”

나는 뒤로 점프하며 형가의 해머 프레스를 피했다. 그 순간 내 가슴이 무방비 상태로 열리고 말았다.

“큭, 끝장이다. 해머 크래쉬.”

비수처럼 파고드는 형가의 해머.

“천만에. 가서 놈을 물어뜯어버렷! 파이브 실버 울프.”

커컹커컹.

나는 파고드는 해머를 비껴 돌며 다섯 마리의 은빛 늑대를 풀었다.

“이런 비겁한 놈.”

크르르르.

회피하는 형가를 파고들며 몸을 낮춘 늑대들은 순식간에 도약해 오르며 형가의 어깨와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암살집단의 단주로 손색없다만 이미 너무 지쳤어. 모탈 블로우 앤 파워 스트라이크.”

쩌정.

그때 옆에서는 질렌의 양손에 걸쳐 있는 여섯 개의 쇠 송곳이 잘려 나갔다.

“크으윽, 천하의 의화단주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질렌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모래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캐캥.

목을 물어뜯고 있는 늑대 한 마리를 손으로 쳐낸 형가는 해머에 마지막 힘을 실어 나를 향해 내리쳤다.

“드디어 카이로즈 왕자의 선물을 시험해볼 기회구나.”

스르릉.

인벤토리에서 꺼낸 두 개의 단검. 싸울아비와 다크 레인저. 나는 두 개의 검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해머의 기둥을 막아낸 후 몸을 틀어 낮게 구르며 형가의 양 발목을 두 개의 단검으로 잘라버렸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는 육중한 체구. 나는 그의 가슴을 향해 번개 같은 쾌도를 질러 넣었다. 속사포 같은 공격에 놈의 몸은 피로 낭자해졌다.

퍼퍼퍼퍽.

“…분하다.”

풀썩.

끈질기게 따라붙던 형가는 그제야 쓰러져 아이템 몇 개를 남기고 사라져갔다.

“끝인가?”

“랏사드, 잠깐 기다려.”

“무슨 일이야?”

나는 갑자기 고함을 치고 달려오는 쎄미트리 때문에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깜짝 놀라 바라봤다.

“놈이 떨군 아이템, 내가 주워 담으면 안 되겠나?”

“컥, 맙소사. 예, 예. 그렇게 하세요.”

[쎄미트리 님께서 헤비 워 배틀액스를 취득하셨습니다.]

[쎄미트리 님께서 망자의 파르티잔을 취득하셨습니다.]

“앗싸!”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기뻐하는 쎄미트리의 모습을 처음 봤다.

“그렇게도 좋아?”

“그라믄. 랏사드 니가 싸울아비 세트랑 늑대 다섯 마리 가져가는 것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아나?”

“하하하하.”

로타카 대륙으로 향하는 대평원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쎄미트리, 로큰롤에게 다음 목적지인 로타카 대륙의 호다드 성에서 만날 약속을 잡고 프레드릭, 스타리스와 함께 로타카 대륙에서 만날 것을 결의한 후 파이온을 로그아웃했다.

세나와 로만에게는 약속 일정에 관해 쪽지를 보냈고 프레드릭은 가드리안 혈맹을 이끌고 이번 공성전에 우리 혈의 눈물과 함께 참가하겠노라며 굳은 신뢰를 보여줬다.

암살자들에게 쫓기면서 기나긴 시간 게임에 몰두해서인지 심하게 피곤했다. 어느새 벽시계는 새벽 3시 20분임을 알리고 있었다.

“핫!”

나는 피로해서인지 게임에 집중해서인지 침대에 눕기 위해 뒤로 돌려다가 그제야 내 침대에 잠들어 있는 미영을 발견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들고 온 예비역군 훈련용 야상을 덮고 잠들어 있는 그녀.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 심장 박동 소리가 조용한 작업실 안에서 그녀의 곤한 잠을 깨우지는 않을까? 누군가가 내 심장이 떨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눈이 뻑뻑하고 목이 뻐근한 게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지만 어린아이처럼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울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작업실 밖으로 나가서 회사 직원들이 타 마시는 일회용 커피를 탔다.

따뜻한 온기에 손 안에 전해 온다.

‘대단하군, 최상조 씨. 이시간까지 게임을 하고 있을 줄이야.’

나는 커피를 들고 돌아서다가 최상조의 작업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 더 분발해야겠는걸.’

나는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태우기 위해 계단 로비로 내려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어릴 적에 본 시골 마을의 야경이 포근함과 아늑함을 가져다준다면 이 대도시의 야경은 화려함, 꿈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젠장, 오늘 밤은 어디서 잔다?’

“후우.”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 내가 내뿜는 것은 비단 담배 연기뿐만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이제 삼십대를 바라보는 청년의 인생에 대한 고찰과 번뇌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나는 담배를 마저 태운 후 내 작업실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내 작업실 앞 소파에 누워서 자야 할 분위기다. 졸음이 기습적으로 밀려왔다.

우우웅. 우우웅.

누군가의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

‘아, 누구야? 시끄럽게. 전화 좀 받지, 정말.’

나 같은 사람들이야 워낙 부엉이 생활이 익숙해서 늦게 자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날 새기는 나의 일과다. 그치만 이렇게 아침 일찍 잠을 깨우는 일은 지양해줬으면 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정말 게임 도중 일어나는 랙보다 더 싫다.

“여보세요? 어머, 팀장님. 죄송해요. 그만 늦잠 자버렸네요.”

미영의 목소리?

나는 그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고 미영이 내 작업실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예. 죄송합니다, 팀장님. 지금 저 사무실이거든요.”

부장? 누구 부장을 말하는 거지? 작업실 안에서 들려오는 미영의 목소리만으로는 무슨 일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녀의 잠이 덜 깬 모습이 살짝 궁금해진다. 하지만 어릴 적 방귀도 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는 그 순수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혹시라도 눈곱이 끼어 있거나 입가에 침이 묻어 있는 미영을 발견한다면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환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말 궁금한 걸 어떡하란 말이야.’

“예, 좀 씻고 들어갈게요. 죄송합니다.”

탁.

핸드폰의 폴더가 닫히는 소리. 그리고 연이은 미영의 음성.

“어머, 수혁 오라버니. 소파에서 주무셨어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아… 아냐… 무슨 일 있어?”

“아… 오늘 아침에 회의가 있었는데 그만 제가 늦잠을 자 버려서 DB프로그램 팀장님께서 전화 주신 거예요. 오라버니, 덕분에 푹 잤어요. 나중에 또 봐요. 전 바빠서…….”

“어… 그래…….”

나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건성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갑자기 어깨에 으슬으슬한 기운이 느껴져 몸이 떨린다.

나는 엉기적엉기적 걸어서 침대로 구렁이처럼, 나무늘보처럼 기어들어갔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야? 어라, 이제 겨우 8시 51분이잖아. 무슨 회사가 새벽부터 회의를 하고 난리야. 으아암…….”

나는 벌어진 입을 토닥거린 후 밀린 잠을 청했다.

* * *

“어맛, 죄송합니다.”

미영은 세수만 가볍게 하고 머리를 곱창으로 말아 올린 후 지각생처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강미영 씨, 조금 늦었군.”

“아, 예, 사장님.”

김씨소프트의 대표이사이자 CEO인 박민규. 한 번쯤 그냥 넘어가줬으면 했는데 꼭 걸고 넘어가는 박민규가 새삼 원망스러운 강미영이었다.

“사장님, 다들 모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게임 사업은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과 스피드가 생명입니다. 변화를 캐치하고 시장과 고객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스피디한 의사결정 구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회의에 늦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윽, 확인 사살하는구나. 정말 너무해.’

“마켓 어낼리스트(Market analyst) 팀장님, 최근 파이온 게임 시장 동향에 대해서 간략하게 보고해주세요.”

“예, 최근 들어 파이온 게임의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3개월 전의 가입자 수입니다. 그래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3개월 전 420만이던 가입자 수가 지금 현재 760만으로 약 1.8 배가량 상승했습니다. 특히 한국인 전용 서버에 치중되어 있던 이용자가 통합 서버로 옮겨가면서 가입자가 늘어났습니다.”

마켓 어낼리스트 팀장은 준비해 온 슬라이드를 통해 회의에 참석한 팀장급 간부들에게 자료를 보여주었다.

“서비스 시작 초기에 보여줬던 폭발적 회원 가입 이후 줄곧 완만한 상승세가 이어졌는데 최근 3개월간 지난 분기에 비해서 가입자 수가 대폭 상승했음을 그래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흠, 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박민규 사장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과 팀장의 생각을 맞춰보기 위해 손으로 턱을 받치고 팀장을 응시했다. 드레스 셔츠 소매에 달려 있는 커프스단추가 귀족 분위기를 풍기는 박민규의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켜주었다.

“물론 하나의 이유만으로 이 상황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최근 잇따른 중국의 계정 도용과 해킹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서버가 불안해서 게이머들이 안전한 게임을 즐길 수 없고 또 잦은 해킹으로 게임에 대한 네거티브 마인드가 증가하고 있는데 중국의 범죄 때문에 가입자 수가 늘어난다니요? 논리적으로 모순이에요.”

“후후, 역시 클라이언트 팀장님은 고객의 눈높이로 생각하는군요. 어쩜 그것이 클라이언트팀의 한계일 수 있죠.”

클라이언트 팀장의 반론에 시장 분석 팀장이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어간다.

“일본 외상들의 잦은 망언으로 독도 사랑 펀드가 생겨나고 독도 관광을 제공한 여행사가 대박을 터뜨렸죠. 중국의 계정 도용과 해킹이 국내 게이머들의 민족적 마인드와 애국심을 자극해서 국내의 회원 가입수가 증가했습니다. 그 수치는 지금 보시는 그래프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죠. 언론에 문제가 보도된 후 회원 탈퇴하겠다는 으름장을 놓는 회원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소폭에 그쳤고 오히려 회원 가입수가 증가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파이온 가상공간 안에서 중국과 한국 간에 전쟁이 벌어진 후로 그 증가세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물 흐르는 듯한 그의 브리핑이 이어진다.

“더구나 한국 게이머들의 중국인 PK가 중국인들의 민족의식과 국수주의를 자극했습니다. 한국 게이머들의 무차별적인 중국 게이머 PK 후 이번에는 중국 내 신규 회원 가입자 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그렇군요. 이건 마치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부장님 비유는 그렇게 정확한 것 같진 않고요. 제가 보기엔 이건 변증법과도 같습니다. 한국 게이머들의 회원 가입 증가를 정(正)으로 본다면 중국 게이머들의 회원 가입 증가를 반(反)으로 볼 수 있죠. 이들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 하면서 서로 간에 물고 물리며 전체적인 회원 가입 수 증가라는 합(合)을 향해 나아가는 거죠.”

“흠, 그럴 듯한 비유야.”

박민규 부장이 흡족한 표정을 짓자 시장 분석 팀장도 흡족한 표정으로 브리핑을 마쳐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시장 동향은 더 지켜봐야 합니다. 특히 일본, 미국, 유럽 지역의 신규 회원 가입자 수는 한국과 중국에 비하면 소폭을 유지하고 있고 어떤 곳은 거의 현상 유지 수준입니다.”

“이봐, 어낼리스트 팀장. 그 중국 내 반한 기류를 매출 신장과 연결 지을 방법을 연구해보는 게 어때?”

“무슨 말씀이신지…….”

냉기 어린 미소가 잠깐 박민규의 입가에 스쳐 지나갔다.

“현재 고용한 프로젝트 요원들을 시켜서 중국 게이머들을 더 자극하라 그 말이야. 중국 사람들이야 항상 땅덩어리 믿고 쪽수로 밀어붙이려고 하잖아. 그들을 자극하면 자극할수록 더 많은 중국인들이 파이온에 가입하지 않겠느냐 그 말이야.”

“예,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박부장님, 프로젝트 에이전트들 성과 분석표 줘보세요.”

“예?”

그때까지 졸린 눈으로 있던 박만호 영업부장은 사장의 부름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를 바라봤다.

“최상조, 박수혁, 김민우 씨 성과 분석표 달라고요.”

“예… 강미영 팀장, 성과 분석표 가지고 있어?”

“네, 여기 있습니다.”

“박부장님, 왜 에이전트들 성과 분석을 서버 관리팀에게 맡겼습니까? 제발 부장님 업무는 부장님이 좀 챙기세요. 제가 신신당부했잖아요. 그들을 고용하면서 필요 이상의 지출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제발 긴장 좀 하세요, 긴장 좀.”

박민규 사장은 인척인 박만호 부장을 모든 임원들이 보는 앞에서 유치원생 나무라듯 꾸짖었다. 그는 무안해서인지 창피해서인지 성과 분석표를 박사장에게 밀어 넣었다. 박부장의 보고서를 받아본 박민규는 꼼꼼하게 분석표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이 사람들 이거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만.”

순간 회의실 내 분위기는 한겨울 발가벗겨 놓고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썰렁해졌다.

“중국인 IP 적발, 최상조 48건, 김민우 66건? 그래도 박수혁이 가장 선전했군. 173건. 도대체가 에이전트들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겁니까? 일전에도 제가 회식 자리에서 한번 언급했는데 도대체 대표 이사의 말을 뭐로 듣는 겁니까?”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닥만 쳐다보거나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다.

“웹 서비스 팀.”

“예, 사장님.”

웹 서비스 팀장은 박민규가 자신을 부르자 긴장한 이등병처럼 대답하며 굳은 자세로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점심시간까지 세 에이전트의 경로 파일을 제출하세요. 프로젝트 시작 이후 그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들에게 무슨 아이템이 지급됐는지, 세세한 사항까지 철저하게 조사해서 보고하세요. 특히 최상조와 김민우를 중점적으로 조사하세요.”

“예, 사장님.”

“업무지원팀”

“예, 사장님.”

“최상조와 김민우에게 주어지는 성과금을 삭감하고 박수혁에 대한 성과금은 정상 지급하세요. 최상조와 김민우가 문제 삼을 경우 당초 작성한 계약서를 보여주도록 하세요.”

“예, 사장님.”

“다들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 파이온 게임에 김씨소프트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제발 정신들 바짝 차리세요. 이거 군기가 완전히 빠졌어요. 회의에 늦질 않나… 자기 업무 하나 똑바로 챙기길 하나… 제가 여러분들 공짜로 일 시킵니까? 우리 김씨소프트에서 여러분들에게 자원봉사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관리자들입니다. 평사원이 아니라고요. 연봉이 높으면 하는 일도 그만큼 많아야 합니다. 각 팀별로 다음 주 말까지 기획안 한 건씩 올리세요. 특히 사업기획실은 다음 주까지 파이온 게임 업그레이드 기획안과 제2세대 가상현실게임에 관한 기획안을 제출하도록 하세요.”

“…….”

“왜 대답이 없습니까?”

“예…….”

우렁차게 시작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끝나는 대답.

“그리고 해외 마케팅 권팀장, 현재 도쿄에 도쿄 게임쇼 때문에 나가 있는 허상무님하고 연락 취해서 현지 분위기 보고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업무지원팀장님은 다음 주 내로 제가 직접 일본 도쿄 게임쇼에 출장 갈 테니 현지 출장 계획 세워주세요. 아시겠습니까?”

“예, 사장님.”

“자, 나가들 보세요.”

덜컹덜컹.

의자 미는 소리, 일어서는 소리로 시끄럽던 회의장이 임원들이 빠져나가고 조용해지자 박민규는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가 엉망진창이야.”

“이놈의 회사, 정말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원. 일요일 아침부터 간부 전략회의 하는 회사가 어디 있어? 월급도 쥐꼬리만큼 주면서. 연봉이 어쩌구저쩌구. 정말 아니꼬워서. 내 친구는 대기업 과장인데도 나보다 연봉이 2천은 더 되더라구.”

“하나 마나 한 소리 하지도 말게. 그나저나 사장님 오늘 왜 그러셔?”

“낸들 아나. 어제 사모님한테 또 바가지 긁히셨나보지.”

“하하하하!”

“예끼, 말조심해. 박부장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강미영 팀장, 오늘 강팀장 때문에 사장님 뿔나신 거야. 왜 지각을 하고 그랬어?”

“호호, 그런 거예요? 죄송하네요. 저 때문에 다들… 오늘 회의는 완전 가시방석이었어요.”

미영은 농담으로 하는 말이거니 생각하며 애써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허전했다. 그간 박민규 사장에게 지적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서운한 마음이 컸다.

그녀는 서버 관리팀 자리에 돌아와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휴일이라 출근한 직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지잉.

절전 모드 상태에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켜고 키보드에 손을 가져다 댔다.

“휴, 보고서를 또 어떻게 꾸민다지?”

그랬다. 이 시대의 직장인들은 보고서를 작성한다기보다는 거의 꾸민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 그만큼 업무에 치이고 프로젝트에 치여 정상적으로는 보고서를 작성할 수 없기에 그들은 날림으로 작성하는 보고서를 꾸민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미영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음 주까지니까… 뭐…….”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최상조, 김민우, 박수혁의 작업실이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을 때 웹 서비스 팀장과 박만호 부장이 최상조의 작업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호호, 최상조 씨 오늘 임자 만났는걸. 그러게 평상시 잘할 것이지.’

미영은 최상조의 작업실을 지나쳐 박수혁의 작업실을 향해 걸어갔다.

‘수혁 오빠한테 밥 사주기로 한 약속이나 지키라고 해야겠다.’

“세나5, 잠깐 기다려~ 어디 가는 거야?”

“랏사드 님, 따라오세요.”

세나는 갑자기 뒤돌아서 성큼성큼 초라한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여… 여긴 왜…….”

엘프의 쫑긋한 귀, 서구적 체형의 긴 다리, 업되어 있는 힙. 그녀는 초라한 여인숙에 들어가자마자 나에게 덤벼들었다. 발정 난 암캐마냥…….

“세나… 왜 이러는 거야…….”

“쉿, 아무 말도 말아요.”

“으… 으윽…….”

실핏줄이 보일 것 같은 새하얀 피부… 그녀의 기습에 나는 맥없이 무너졌다. 그녀는 어느덧 내 몸을 범하기 시작했다.

‘아, 세나의 실물이 이 정도만 된다면야…….’

그 순간 세나의 얼굴이 비가 오면 빗물이 코로 들어갈 것 같은 들창코에, 상추가 덕지덕지 끼어 있는 이빨을 드러낸 실제의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뭔가가 목을 조여 오는 듯한 느낌.

“아… 안 돼에… 으윽!”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젠장, 나이 스물아홉에 몽정이라니. 열아홉도 아니고… 히유…….’

나는 긴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분 더러운 찝찝한 느낌. 추리닝 바지 앞이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마치 오줌 저린 소년의 바지처럼.

‘쉬트…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이 박보살이라고 놀려대는데…정말 이러다 사리 나오는 거 아냐? 아… 정말 엽기다. 나이 스물아홉에 몽정이라니.’

나는 탁자 위에 손을 뻗어 크리넥스 각티슈를 잡아 뽑았다. 그런데 너무 힘을 줘서였을까. 탁자 위를 미끄러진 각티슈가 바닥에 떨어졌다.

‘X병. 휴우~.’

나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나와 바닥에 떨어진 각티슈를 집어 들고 화장지를 추리닝 안으로 집어넣어 끈적끈적한 액체를 닦기 시작했다.

달칵.

그때 문이 열리고 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수혁 오라버니, 아직도 자요?”

“…….”

미영과 나는 순간 정지해버린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 있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숨소리도 없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누군가가 이 상황을 만화로 그린다면 아마 뒤통수에 땀이 삐질삐질 나는 모습을 연출했을 것이다.

“엄마야…….”

‘아하하하하!’

“뭐… 뭐 하는 짓이에요?”

“미… 미영아, 그게 아니라…….”

그녀는 홱 돌려 작업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영, 미영아, 강미영 팀장님. 그게 아니라… 오해야.”

휘이이잉.

귓가에 폐부를 찌르는 효과음이 환청으로 울린다.

“이런 X팔 놈의 세나.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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