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1 죽음의 능선을 넘어 발카라즈 던전으로 (12/51)

chapter 11 죽음의 능선을 넘어 발카라즈 던전으로

“네놈의 혼을 말살시켜주마.”

피피피핑. 피피핑.

나는 클라우드를 향해 해저드 보우 건을 사정없이 날려버렸다. 하지만 스피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다크엘프 계열의 블레이드헌터인 클라우드는 날아가는 화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회피해버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스파이크 건틀릿으로 비행 중인 화살을 절반으로 분리해버렸다.

“나도 알고 있었다. 클라우드 네놈을 보우 건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아하하하!”

보우 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나는 뻘쭘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클라우드가 송곳처럼 대기를 가르며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풀 플레이트 실드를 꺼내 들고 놈의 건틀릿을 막고 소울 엘리 검을 휘둘렀다.

카카캉.

한순간의 격돌에 무려 3합 이상이 오고갔다.

클라우드의 기다란 손톱 같은 건틀릿이 내 왼쪽을 파고들면 방패가 그것을 막아냈고 그 틈을 이용해 내가 검을 찔러 넣으면 놈의 오른쪽 손톱이 검을 비켜 쳤다. 그야말로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검무를 추는 것처럼 어우러졌는데 그 공방의 균형은 쉽사리 깨지지 않고 있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네놈은 항상 말이 너무 많아.”

“리버스 포지션.”

뭐? 뭐라구? 리버스 포지션?

나는 순간 클라우드의 외침에 당황했다.

리버스 포지션이라면? 그때 내 시야에서 클라우드가 사라졌다.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의화단의 졸개들과 나를 비웃고 있는 질렌 단주.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나의 당황스러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날카로운 건틀릿이 내 몸을 뚫고 들어왔다.

“쿨럭.”

가느다란 선혈이 목청을 뚫고 터져 나왔다.

리버스 포지션. 일대일 대결에서 상대방의 몸을 거꾸로 돌려버리는 기술로 대결 중 상대방이 등을 보이게 만든다. 파이온 게임 중 오직 다크엘프 계열의 블레이드헌터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캬캬캬, 맛이 어떠냐? 네놈의 창자가 내 건틀릿에 감기는 게 느껴지는구나.”

나는 방패를 집어넣고 왼손으로 놈의 건틀릿 날을 거머쥐었다.

“이런 미… 미친놈.”

나는 클라우드의 건틀릿을 놓기는커녕 오기로 더욱 거세게 거머쥐며 상채를 뒤로 틀었다.

드드득.

몸을 관통한 건틀릿이 뼈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빠악!

건틀릿을 잡고 있기에 한 손을 봉쇄당해 움직일 수 없는 클라우드의 이마를 향해 나는 박치기로 응수했다.

‘랏사드는 나의 분신. 머리의 단단함으로 치자면 나에 버금가겠지.’

박치기에 얻어맞은 클라우드의 몸이 휘청거렸다.

“리스타트해라, 이 개자식아.”

나는 잡고 있던 건틀릿을 놓은 후 두 손으로 소울 엘리미네이트를 거머쥐고 수직으로 한 번, 수평으로 한 번 휘둘렀다.

번쩍.

사막 한가운데서 흰빛을 일으키는 십자가가 그어졌다.

그리고 클라우드의 몸은 정확하게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또… 분하다.”

갑주를 관통해버린 공격 때문에 내 체력은 급속도로 떨어져갔다. HP 지수가 이미 절반 정도 줄어버린 상태였다.

‘제길, 이런 사막 한가운데서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건가? 내 고급 아이템을 설마 질렌 같은 비겁한 자식이 줍는 건 아니겠지?’

나는 회복 물약을 반복해서 주입하면서 발카라즈 던전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내 도약은 뛰기 보다는 빨리 걷기에 가까웠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기에 윈드 워크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후후후, 클라우드, 잘했어. 놈을 거의 반쯤 죽여 놨구나.”

“단주님, 저희들이 해치우겠습니다.”

‘저런 XX시키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니까 저런 허접한 것들까지 나를 쉽게 보네. 너희들이 나를 해치운다고?’

나를 해치우겠다고 공언하고 나서는 의화단원들을 보자 분통이 터졌다. 불과 몇 십분 전만 해도 찍 소리 못하던 것들이…….

“아니다. 놈은 내가 직접 해치우겠다.”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질렌이 두 손을 교차하자 그의 양손에서 기다란 손톱이 광채를 뿜어내며 뻗어 나왔다.

‘젠장.’

“랏사드, 네놈의 광대놀음은 여기까지다.”

의화단주가 나를 향해 큰소리칠 때 던전 입구 쪽에서 흑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질렌이 몇 발짝 뛰더니 힘차게 도약하며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나를 향해 건틀릿 날을 박아 넣으려고 날아왔다.

‘저건 또 누구냐? 뒤에는 복수심과 살심에 불타는 의화단의 단주 그리고 던전 입구 쪽에는 정체불명의 게이머들…….’

슈슈슝.

질렌의 날카로운 손톱이 나를 할퀴려 할 때 내 눈 위로 두 개의 불덩이가 지나갔다. 선홍색의 불기둥에 진홍색의 불덩어리들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불기둥.

“월 오브 파이어.”

“크핫, 웬 놈들이냐?”

던전 쪽에서 날아온 월 오브 파이어 하나는 정확하게 나와 의화단 단주 사이에 거대한 불의 벽을 세워 올렸다. 나에게 비수를 꽂으려던 질렌은 뜨거운 불기둥의 벽에 부딪혀 화상을 입고 물러섰다.

하지만 그 불기둥이 의화단주만을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두 개의 불기둥 중 작은 덩어리 하나가 반쯤 죽어가는 내 몸을 덮쳐버렸다.

“앗, 뜨뜨… 네놈들은 또 누구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아든 화(火) 계열의 마법. 나는 화를 낼 힘도 없었지만 짜증 섞인 어투로 던전 입구를 쳐다봤다.

“랏사드 대장, 미안해. 내가 너무 서툴러서… 좌표를 잘못 잡았어.”

익숙한 음성. 나는 지옥의 문턱에서 부처님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움과 안도감이 뒤섞여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래도 그렇지 같은 편에게 화염 계열의 마법 공격을 퍼붓다니. 그것도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로큰롤메이지, 여긴 어떻게? 같이 온 사람들은 누구야?”

“랏사드, 서운하데이. 로큰롤메이지만 알아보고 내는 몰라본단 말이가?”

“누구?”

“내다, 내. 똥고집으로 뭉친 배틀액스의 달인 쎄미트리.”

“쎄미트리, 당신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진 건 처음이야.”

“뭐 어째?”

“랏사드 님, 회포는 나중에 푸시고 지금은 당신의 치료가 먼저예요.”

“그대는?”

“숲의 정령들이여, 랏사드를 회복하라. 엘리멘탈 힐.”

“엘프의 수호신들이여, 랏사드의 마나를 복구시켜다오. 엘리멘탈 리차지.”

내게 회복 마법이 걸리자 내 발 아래에서 마치 붉은빛의 기둥들이 나를 감싸는 것처럼 올라왔다. 그리고 연이어 체력과 마나를 나타내는 게이지가 상승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지 않고.”

“그… 그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던전 입구에는 네 명의 게이머들이 서 있었는데 가드리안 동맹의 군주인 프레드릭과 그의 좌장이며 가드리안 최고의 마법사인 스타리스 그리고 혈의 눈물의 두 고집불통 로큰롤메이지와 쎄미트리가 용용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질렌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것이 안타까워 거의 울음에 가까운 신음을 토했다.

“뭣들 하고 있어? 놈을 쫓아라.”

“어딜 감히! 로큰롤메이지, 나와 함께 놈들에게 뜨거운 불덩이를 안겨주자.”

“오케이.”

트윈 파이어 스트라이크.

스타리스와 로큰롤메이지가 손을 마주 잡고 마법구에서 불기둥을 뿜어 댔다.

“으앗!”

내 뒤를 쫓던 의화단원들은 쏟아지는 불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휴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던전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쒜애애액.

‘이 소리는 또 뭐야?’

나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괴상망측한 파공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불에 휩싸인 거대한 해머가 나의 등 뒤를 파고들었다.

“랏사드, 해머 크래쉬야! 지름 3m 내의 모든 것들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입힌다고!”

“뭐야, 빨리 말했어야지!”

나는 윈드 워크와 함께 몸을 굴려 전방으로 텀블링했다.

쿠쿵.

깻잎 한 장 차이로 내 발 뒤에 지름 3m의 웅덩이가 생겨났다.

‘놀라운 위력이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

“역시, 어쌔시네이트가 랏사드를 노린다더니. 나타났군, 어쌔시네이트의 단주 형가.”

“이런 씨방새, 죽을 뻔했잖아.”

나는 갑주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놈들을 노려봤다. 던전 쪽을 향해 의화단원들과 어쌔시네이트의 오크 자객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제법이구나, 랏사드. 지금까지 나의 해머 크래쉬를 피한 놈은 처음이야.”

“누구?”

“이런 애송이 같은 놈. 최고의 자객 집단 어쌔시네이트의 형가를 모른단 말이냐?”

“뭐꼬, 저 돼지코 자식은? 생긴 건 내랑 닮았는데… 감히 우리 군주를 죽이려 들다니. 이 배틀액스로 머리를 뽀샤버릴까 보다.”

“아서, 쎄미트리. 자네는 놈의 상대가 못 돼. 랏사드, 이제 어떻게 하지?”

우리는 나와 쎄미트리, 로큰롤, 스타리스, 프레드릭, 이렇게 다섯 명. 놈들은 50명이 넘었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지하 던전으로 도망가야지. 다 생각해둔 수가 있으니까 던전을 지나서 로타카 대륙으로 건너가자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일 먼저 앞장서서 발카라즈 던전으로 들어갔다.

“뭐야? 도망가는 거야?”

쎄미트리와 로큰롤도 가드리안 혈맹의 두 용사를 따라 나를 뒤쫓아 들어왔다.

“쎄미트리,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던전 입구를 파괴시켜버려.”

“알았다. 힘쓰는 거라면 내도 자신 있다.”

붕붕붕.

쎄미트리는 묵직한 배틀액스를 엿가락 돌리듯이 휘저으며 던전 입구의 양쪽 벽과 위쪽 벽을 내쳤다.

쿠쿠쿠쿵.

검은 흙먼지가 입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라의 눈.”

입구가 막히는 바람에 동굴 안이 깜깜해졌고 나는 라의 눈을 들어 어둠을 밝혔다. 나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서 강미영에게 메신저를 이용해 메시지를 보냈다.

[미영, 발카라즈 던전 설계도 가지고 내 방으로 좀 와줄래?]

[지금이 몇 신지 알아요? 좀 있으면 밤 12시라구요. 나도 퇴근해야죠.]

[급한 일이야. 한번 좀 도와주라. 이번에 도와주면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뭐 사줄 건데요?]

뭐야, 지금 이 순간에 나랑 거래하자는 거야?

[나중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근사하게 한번 쏠게.]

[좋았어요. 방금 퇴근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조금 있다가 설계도 가지고 그쪽으로 갈게요. 20분만 기다리세요.]

[그깟 설계도 하나 가지고 오는 데 20분이나 걸려?]

[아뇨, 지금 막 씻으려던 참이었어요.]

푸욱.

나는 하마터면 코피를 쏟을 뻔했다. 김씨소프트사의 직원들은 게임 회사원들이어서인지 대부분 직장 생활을 자유롭게 했는데 사무실 내에 있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내 작업실이 있는 층에서는 라면을 끓여 먹는 직원들도 있었다. 특히 프로그래머인 깔깔이 프로그래머와 박만호 부장은 걸핏하면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래, 그럼 대충 씻고 최대한 빨리 와주라.]

[넵.]

나는 므흣한 상상에 사로잡혀 잠깐 동안 아무런 움직임 없이 멍청하게 서 있었다. 입가로 뭔가 차가운 게 흘러내리기 전까지는. 그것은 침이었다.

“흡.”

“랏사드, 뭐 하고 있어?”

“아… 아니…….”

“이런 깜깜한 동굴로 들어와서 어쩌자는 거야?”

“일단 지하 던전으로 들어가자구.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우리는 용수철처럼 늘어진 모양의 계단을 따라 발카라즈 던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헉… 헉… 힘들다. 좀 쉬었다 가면 안 될까?”

“하여튼 위저드들은 체력이 약해서 탈이야. 그나저나 로큰롤, 어떻게 동지에게 파이어 스트라이크를 걸 수 있는 거야?”

“아하하, 미안, 미안. 랏사드도 알다시피 아직은 내가 좀 서툴잖아. 그래도 실력 많이 향상된 것 같지 않아?”

그랬다. 사실 쎄미트리와 로큰롤메이지의 실력은 내가 그들을 침묵의 대륙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향상되어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레벨은 어느새 139로 상승되어 있었다. 그동안 플레이에 집중하기 위해 옵션에 있는 메시지 창을 꺼두는 바람에 모르고 있었는데 여유를 가지고 보니 레벨이 제법 상승해 있었다.

“근데, 세나하고 로만은 어디 있어?”

“위험하다고 프레드릭 님이 가드리안 혈맹과 함께 로타카 대륙으로 바로 이동하라고 했어.”

나는 사려 깊은 프레드릭의 조치에 대해 다시 한 번 프레드릭에게 감사의 표시로 읍했다.

“프레드릭 군주, 정말 번번이 감사합니다.”

“뭘요, 사실 임파젤 성 전투 후 랏사드 님을 다시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정말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인품이 흘러나오는 자다.

“선젝터 그 개새끼, 아마 몇 달 안 가 임파젤 성을 빼앗길 겁니다. 도대체가 성주가 된 후로 자신의 잇속만 채우려 하지 성안의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신경을 안 써줘요. 그 흔한 회복 아이템 하나 안 주더군요. 적어도 나는 가드리안 동맹의 부군주인데도 말입니다.”

프레드릭의 오른팔인 스타리스는 선젝터를 떠올리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때 아무래도 랏사드 님이 성을 맡아주셨어야 했어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무슨 그런 가당치도 않은 말씀을…….”

“랏사드,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데이.”

쎄미트리가 찍는 소리를 한다.

“랏사드 님,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곳 발카라즈는 퀘스트를 수행하려는 게이머들이 찾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왜 굳이 이곳을 지나려 하시는 겁니까?”

프레드릭이 조심스러운 자세로 물어왔다.

“어제 잠들기 전에 파이온 게임 매뉴얼을 한 번 더 읽어봤습니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곳 발카라즈 던전 지하 감옥에는 각종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긴걸.”

“내도.”

‘헉, 혈의 눈물의 불쌍한 중생들아, 그대들의 경험과 실력으로 그 사실을 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헉, 이럴 수가. 쎄미트리와 로큰롤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프레드릭 같은 고수도 그 사실을 모른단 말이야?’

“그 부비트랩이 설치된 지하 던전을 통과해서 얻는 게 뭐죠?”

스타리스 역시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물어왔다.

“뭘 얻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의화단과 어쌔시네이트를 그곳으로 유인해서 몰살시킬 계획입니다. 다행히 프레드릭 님과 스타리스 그리고 내 동료들이 나타나주었으니 계획은 훨씬 수월해질 것 같군요.”

그제야 모두들 내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제법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서로 쳐다봤다.

* * *

슬루디오 영지 남쪽 끝에 위치한 글루딘 마을.

샤이닝 소드에 중장갑 미스릴 풀 플레이트 아머, 실드는 황제의 방랑자 방패, 더구나 머리에는 황제의 투구를 쓰고 있는 엘프 나이트(Knight). 가지고 있는 아이템과 갑주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고수이거나 아니면 중수지만 돈이 넘쳐 나 매일매일 지름신이 강림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엘프의 기사가 글루딘 마을을 유유자적 걷고 있다.

그의 이름은 엘리트PK. 즉 김민우가 주로 애용하는 캐릭터였다.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로타카나 라마바담 대륙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서 그는 도대체 이 늦은 시각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모두들 용의 비늘 퀘스트를 수행하러 오신 분들인가요?”

“그렇습니다.”

엘리트PK 주위에 있는 갖가지 클래스의 게이머들. 그들 역시 대부분 최상급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곳에 모인 자들은 대부분이 레벨 420 이상의 고수들.

그들이 말하는 용의 비늘 퀘스트란 파이온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 중 레벨 420이상이 되는 이들에게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퀘스트, 바로 귀족이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귀족이 되면 귀족만의 독특한 오러를 가지며 귀족만의 스킬과 아이템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귀족이 된 자들은 각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판테온 경기장에서 배틀 마니아를 거쳐 마지막 한 명의 우승자를 뽑게 되고 이 배틀 마니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거머쥔 자는 파이온 최고의 지존인 히어로(영웅)의 칭호를 받게 된다.

파이온 총 서버 77개 중 각 서버 당 2명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 파이온 궁극의 지존 영웅.

지금 김민우는 김씨소프트와 국정원이 제시한 광개토 대왕 프로젝트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오직 영웅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 전 단계인 귀족이 되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글루딘 마을에 와 있는 것이다.

“와, 저 사람은 누구야?”

“누구누구?”

“저기 미스릴 풀 플레이트 아머에 황제의 방랑자 실드 가지고 있는 사람.”

“푸훗, 아주 돈으로 도배를 했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명품족이군.”

“웁쓰, 황제의 투구는 또 뭐람. 정말 과시욕에 사무친 놈이야.”

용의 비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마을에 모여든 자들은 한 쪽에서 도도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엘리트PK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고까운 소리를 했다.

“나는 저 자식 알아. 내가 아는 파이온 게이머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놈이지. 엘리트PK. 몇 번 놈과 파티를 해봤는데 저 자식은 당최 다른 파티원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어. 오직 자기 캐릭 키우는 데만 혈안이 된 놈이야.”

“나도 들어본 것 같다. 겉치장을 바꿔서 몰랐는데 서브 클래스를 바꾼 모양이군. 예전에는 템플 파이터였는데 말이야. 조금 이기적이긴 하지만 실력 하나는 끝내주더군.”

“실력이 좋으면 뭘 해.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게임하는 사람들이 곰, 호랑이냐? 사람이 되게. 실력만 좋으면 되는 거야, 이 세계에선.”

“그래도 그렇지. 파이온 안에서는 저 자식처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자네들도 잘 알잖아.”

그들은 자기들끼리 엘리트PK를 씹다가 자신들에게 시선을 던지는 그를 바라보며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그대들도 용의 비늘 퀘스트를 수행하러 온 자들인가?”

‘그대들’이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런 불충스러운 표정은 뭐지? 나에게 불만이라도 있다는 건가?”

그 말에 몇몇이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자기가 황제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황제지. 머리에 쓴 관을 보라구. 황제 맞잖아.”

“킥킥킥.”

“왜 대답들이 없어? 용의 비늘 퀘스트를 수행하러 온 자들이 맞나?”

“그렇소.”

한 게이머가 이유 없이 그에게 존대를 사용했다. 그가 존대를 쓰자 곁에 있던 게이머들이 그를 째려봤다.

“그렇소가 뭐야, 그렇소가. 너 저 자식 하인이냐?”

“아니, 워낙 기운이 강렬하기에 나도 모르게 그만.”

“병신.”

옆에 있던 사람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이자 그는 어색해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나 엘리프 PK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내가 용의 비늘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대들에게 파괴자의 검을 선물하지.”

엘리트PK의 말에 주위의 모든 이들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파괴자의 검이라면 아이템 거래에서 시가 2,000만 원을 웃도는 A급 아이템이 아닌가.

“미친놈, 자기가 무슨 재벌 2세야?”

“네가 미친놈이다. 그 말을 믿냐? 순 구라야, 구라.”

“그래도 만약 사실이라면 이거 횡재하는 거 아냐?”

좀 전에 김민우의 말에 ‘그렇소’라고 대답했던 게이머는 이번에도 눈치 없이 횡재 운운하다가 주변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어이, 우리가 저 엘프 기사 한 명에게 너무 정신을 팔고 있었어. 모두들 타우론 협곡으로 가서 드래곤을 잡고 그의 용의 비늘을 획득하자구.”

“그래그래, 어서 올라가자.”

국적도 신원도 알 수 없는 각양각색 클래스의 게이머들은 엘리트PK를 무시하고는, 글루딘 마을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협곡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협곡의 입구로 접어들 즈음 협곡의 상단 부분에서 어두운 그림자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림자들은 모두들 팔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는데 팔에는 하나같이 도끼나 해머 같은 중병기들을 들고 있었고 입에서는 끈적끈적한 타액을 흘리고 있다.

<발로그 오크 전사>

타우론 협곡에 있는 드래곤을 지키는 드래곤의 수호 전사들. 타우론 협곡에 사는 도마뱀계열의 몬스터 리자드 맨의 지시에 따라 드래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드랍 아이템은 아데나와 나무줄기, 나무화살, 브로드 소드 등이 있다.

한두 마리씩 모습을 드러내던 발로그 오크 전사들은 어느덧 수십, 수백마리로 불어났고 협곡의 상부는 초록색 물결로 가득 채워졌다.

협곡을 향해 전진하는 무리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는 엘리트PK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화려한 외모가 그의 인상을 강렬하게 심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무리 중에서 엘리트PK를 따르는 자들은 별로 없었고 오히려 반대로 수수한 차림에 경갑을 걸친 사내를 따랐다. 그는 깃털이 박힌 기다란 창의 후두를 쓰고 있었는데 어깨에는 카이오틱 보우를 걸치고 있었다.

“크리스, 기운이 심상치 않은데.”

그를 따르는 무리는 카이오틱 보우를 든 사내를 크리스라고 불렀다.

“뭐야, 자네들 그러고도 귀족이 되고자 한단 말인가?”

“아니, 왜?”

“협곡 위에 오크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뭐?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하나?”

“나는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때 엘리트PK가 갑작스럽게 쓴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런 실력으로 용의 비늘 퀘스트를 수행하러 왔단 말인가? 그대들도 참 한심하군.”

“저 쉐이, 정말…….”

“자네가 참게, 테오. 대꾸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니까.”

“그래그래, 다른 생각 말고 병장기나 단속 잘하자구.”

부우우. 부우우우.

협곡으로 향하던 전사들이 병장기를 챙기고 있을 때 발로그 오크들이 사용하는 매머드의 상아로 만든 뿔피리가 협곡 내에 울려 퍼졌다.

“놈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방어진을 갖춰라.”

“이럴 수가. 일찍이 용의 비늘 퀘스트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저렇게 많은 오크 떼는 처음 보는군.”

협곡에 들어선 전사들을 향해 발로그 오크들은 협곡을 마치 빠른 거미처럼 타고 내려왔는데 마치 초록색 물결이 협곡 아래를 향해 사방에서 쏟아져 흐르는 것 같았다.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아.”

파이온 게임을 즐기는 스타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 파티를 이뤄 몹을 사냥하거나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레벨을 올리고 특수 아이템을 습득하는 유형, 또 공성전이나 혈맹 간에 혈전을 벌이는 유형, 또 어떤 이들은 일명 배틀 마니아로 불리는 그랜드 듀얼 그랑프리에 참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해킹이 파이온 게임에서 이슈가 되면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공성전으로 흘러가 버렸고 이들처럼 퀘스트를 수행하려는 게이머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러니 개떼처럼 쏟아지는 발로그 오크들을 보고 이들이 기가 질려버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황하지 말고 내 주위로 진용을 짜.”

“오케이, 모두들 크리스 주위로 뭉쳐야 해.”

협곡 안의 전사들은 카이오틱 보우(혼돈의 활)를 들고 있는 크리스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며 방어라인을 구축해갔다.

그러나 엘리트PK만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발로그 오크들을 향해 샤이닝 소드를 겨누었다.

피링.

엘리트PK의 등 뒤에서 발사된 화살이 도끼를 휘두르며 협곡을 뛰어 내려오는 오크의 정수리에 날아가 박혔다. 협곡에 박쥐처럼 매달려 뛰어오던 오크는 화살에 맞아 협곡을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링. 피리링.

한 손에는 황제의 방랑자 방패를 들고 한 손에는 샤이닝 검을 들고 서 있는 엘리트PK의 뒤로 혼돈의 활시위에 세 개의 화살을 재우는 크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세 개의 깃을 잡고 있던 크리스의 손가락이 풀리자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협곡에서 달려 내려오는 오크들을 찍어 넘겼다.

“캬오오! 캬오오!”

동료들이 죽어 나가자 더욱더 괴성을 질러대는 발로그 오크들.

피링. 피링.

슈슈슝.

“아이스 오브 소로우.”

크리스의 화살 세례를 시작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전사들 중 마법사나 궁수들 같은 원거리 저격수들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을 받은 오크 전사들은 굴러 떨어지고 넘어지면서 동료들에게 부딪히고 적진의 일사불란한 대열이 조금은 흐트러졌다.

얼음 계열의 마법에 걸려 얼어버린 발로그 오크가 뒤에서 달려오는 동료 오크와 부딪쳐 유리 조각 깨지듯이 깨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원거리 공격으로는 개떼 같은 오크들을 다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인가?”

어느덧 눈앞까지 다가온 발로그 오크 전사들을 향해 엘리트PK는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펼쳤다.

“파워 스트라이크.”

쿠쿵.

샤이닝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마치 자로 재단한 후 날카로운 칼로 썰어버린 것 같은 발로그 오크들의 머리와 몸통이 양단되어 바닥에 뒹굴었다.

“원샷에 7킬, 8킬이라니. 대단하다.”

“지금 엘리트PK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동심원을 그리고 방어진을 구성한 전사들과 엘리트PK를 둘러싼 네다섯 겹의 오크 포위망이 그들을 옥죄려 들어왔다.

휙휙휙.

발로그 오크들은 포위망을 좁혀 오며 그들이 들고 있는 손도끼를 퀘스트를 수행하러 온 기사들에게 일제히 던졌다.

“방패, 방패.”

퍼퍼퍽.

수백 개의 도끼를 몇 십 명의 기사들이 든 방패로 다 막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오크들의 손도끼가 팔다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얼굴에까지 박혔다.

상황은 엘리트PK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황제의 방랑자 방패를 들고 있어도 개떼처럼 덤벼드는 적들의 공격을 모두 방어하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그는 혼자 잘난 맛에 일 대 다수의 싸움을 벌이니 그 위기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저 새끼 혼자 잘난 척하더니 곧 죽겠는걸.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될 줄 알았더니.”

“테오, 그러지 말고 엘리트PK를 좀 도와주자구.”

크리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동심원의 방어선 위로 솟구쳐 올랐다.

수직으로 솟구쳐 오른 그가 혼돈의 활시위에 3개의 화살을 재어 엘리트PK를 돕기 위해 쏘았다.

“버스트 샷.”

퍼퍼펑.

엘리트PK를 둘러싸고 있던 오크들은 크리스가 쏜 화살에 맞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폭발형 스플래시 데미지를 입은 오크들. 엘리트PK를 둘러싼 그들의 포위망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군, 그대.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해결 가능하단 말이야.”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엘리트PK는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며 샤이닝 검을 휘둘렀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 그러기에 저런 놈은 도와주면 안 된다니까.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뭐가 어쩌고 어째?”

“속으로는 우리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거야. 테오, 슬리핑 포그를 부탁해.”

“오케이. 안개의 힘이여, 오크들을 잠재워버려라. 슬리핑 포그.”

테오라는 엘프 싱어의 마법구에서 잿빛 안개가 뿜어져 나가자 일정 범위의 오크들의 광폭성을 잃어가더니 그대로 수면 상태로 돌변했다.

“기사들, 지금이야. 놈들을 도륙해버려.”

스걱스걱.

개떼처럼 달려들던 오크들이 잠에 빠져들자 방어에 집중하던 기사들이 검을 들고 그들의 목을 후려쳤다.

“잘하면 오크 떼들을 깨뜨릴 수 있겠는걸.”

“테오, 한 번 더 슬리핑 부탁해.”

뀌이이이익. 뀌이이이익

협곡의 끝에서 들려오는 귀청이 찢길 것 같은 괴송. 마치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괴성에 전사들은 귀를 틀어막았고 발로그 오크들은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진용을 갖추었다.

“이 소리는…….”

“그래, 이 소리는 리자드 킹의 소리다.”

“훗, 이거 어렵게 됐는걸. 그대들, 그대들의 실력으로 리자드 킹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나는 지금 약속이 있어서 이만 로그아웃해야겠어.”

“뭐, 뭐라고? 저런 개자식.”

미스릴 풀 플레이트를 입고 황금 투구를 걸친 엘리트PK는 리자드 킹이 협곡에 나타나자 같이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온 전사들에게는 한마디의 양해를 구하는 말도 없이 협곡에서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이템이 하나 남았다.

“저런 더티한 자식, 기껏 위기에 처한 걸 구해줬더니…….”

“그래도 놈, 진짜 부자는 부잔가봐. 파괴자의 검을 드롭했는데.”

“지금 그딴 파괴자의 검이 문제야? 여기서 저 오크 전사들과 리자드 킹에게 죽으면 그 이상의 아이템을 떨구게 될지도 모르는데.”

뀌이익. 뀌이익.

쿵쿠쿵.

높이 4m, 꼬리 포함 길이 17m의 리자드 킹이 그 용용한 모습을 협곡에 드러내자 오크들이 그를 엄호하며 오십여 명의 전사들을 향해 육중한 발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 들이밀었다.

“겁먹지 마라. 어차피 놈은 인공 지능이 떨어지는 몬스터에 불과해.”

피리링. 피리링.

크리스는 연속해서 활시위를 메겨 화살을 발사했다.

하지만 리자드 킹이 워낙 몸집이 커서 화살 몇 개가 몸에 박힌다고 해도 벌레가 문 듯한 수준일 뿐이었다.

파창! 파차창!

동심원을 이루고 있는 전사들의 눈앞까지 다가온 리자드 킹은 강철로 된 방패도 꿰뚫어버릴 듯한 위력을 지닌 혀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혀의 두께만 12cm가 넘는 그 가공할 채찍에 기사들의 방패는 종잇장처럼 짓이겨졌다. 그 틈을 노리고 리자드 킹의 혓바닥이 몽둥이처럼 날아들었고 혓바닥에 맞은 기사들은 한방에 대여섯 명이 허공으로 떠올라 날아가서 협곡의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슬리핑 포그.”

“이런, 전혀 먹히질 않는걸.”

“마법 공격을 가해. 리자드 킹을 일점사해야 한다.”

“크리스… 리자드 킹도 문제지만 앞을 보라구.”

테오의 말에 크리스가 시선을 돌렸을 때는 몽둥이와 도끼를 든 발로그 오크들이 리자드 킹과 함께 거센 파도처럼 협곡의 전사들이 형성하고 있는 방어진을 깨고 몰려들고 있었다.

“오늘 일진 더러운걸.”

김민우는 헤드셋과 파이온 컨트롤러를 팔에서 떼어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상조 아저씨는 뭐 하는지 한번 가볼까?”

김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의 문을 열고 옆방에 있는 최상조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최상조 아저씨, 뭐 하세요?”

“누가 노크도 없이 들어오나 했더니 민우 니가. 다음부터는 노크하고 들어온나.”

“왜요? 무슨 죄라도 저질렀나요?”

“아니, 또 김씨소프트 직원들이 뭐 하나 감시하러 들어오는 거 아닌가 해서 불안하잖아.”

“아저씨, 지금 공성전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요?”

“공성전? 내가 그딴 걸 왜 하노?”

김민우의 눈이 똥그래진다.

“박민규 사장이 저번에 회식 자리에서 신신당부했잖아요.”

“내는 그런 거 모른다.”

“예? 그럼 아저씨는 날마다 방에 처박혀서 뭐 하는 거예요?”

“내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고급 아이템 줍는 데 있지. 오늘도 쓸 만한 거 여러 개 주웠다 아이가. 그라는 니는 공성전 열심히 하나? 짱꼴라들 열심히 색출하고 있느냐 그 말이다.”

“뭐, 저도 그냥 가끔씩 공성전 참가하다가, 그냥 저하고 싶은 플레이해요. 요즘은 뭐 고수들 골라서 PK하고 다니는 것도 별로고 해서 영웅이나 한번 돼볼까 해서 귀족 퀘스트 수행 중이에요.”

김민우의 마음속에는 국부 유출이나 애국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파이온 최고의 지존, 영웅이 되어 다른 게이머들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고 싶은 욕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영웅? 귀족? 그딴 거 하면 돈 좀 되나?”

“아저씨는 돈밖에 몰라요? 만날 돈, 돈 그러게.”

“임마야, 니는 아직 어려서 모른데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곤기라. 그나저나 이놈의 김씨소프트 자슥들은 상여금 준다더니 와 아직까지 연락이 없노?”

“상여금이래야 몇 백만 원밖에 안 된다던데 뭘…….”

이번에는 최상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임마 이거 말하는 거 보게. 니 몇 백만 원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나?”

“우리 집 거실에서 키우는 개 이름이 백만원이에요. 하하하!”

“뭐, 그거 진짜가?”

“아뇨, 농담이에요. 하지만 진짜 우리 집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 가격이 몇 백만 원은 할 거에요.”

“진짜가? 니 집이 그래 잘사나? 아부지가 뭐 하시는데?”

최상조는 김민우가 부자집 아들이라는 이야기에 하고 있던 플레이를 중단하고 김민우를 바라봤다.

“그냥 조그마한 사업 하나 하시고요. 부동산 임대업도 좀 하시고요.”

“그래? 아부지가 땅부잔가 보네. 얼마나 돈이 많노?”

“그냥 지금까지 살면서 평생 돈 걱정 해본 적은 없었어요.”

“와, 임마 내가 젤로 부러워하는 사람이네. 근데 니는 그래 돈이 많은데 뭐가 아쉬워서 여기서 이라고 있노?”

“그냥 재미 삼아서요. 또 여기만큼 최적의 시설에서 게임 즐길 만한 곳도 드물잖아요.”

“그렇긴 하지만서도… 니 혹시라도 강미영이나 박만호 보면 내 공성전 열심히 하고 짱깨들 색출 열심히 한다고 말해야 된데이.”

“알았데이.”

김민우는 어설프게 최상조의 말투를 흉내 냈다.

“하하하! 민우 임마, 억수로 웃기네.”

“참, 상조 아저씨. 강미영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안데. 강미영 팀장 참 예쁘지 않아요? 이런 게임 회사에서 썩기에는 아까워요.”

“이뿌기야 이뿌지. 근데 내 같은 아저씨들은 아줌마들이 낫지 그런 얼라들은 봐도 흥분도 안 된다. 그라고 니는 돈 많으니까 오렌지 걸들 많이 봤을 거 아이가?”

최상조의 말에 김민우는 손사래를 쳤다.

“뭘요, 걔네들 순전히 화장발에 수술발이에요. 얼굴에만 몇 천씩 들인 애들이죠. 하지만 강미영 팀장은 자연산이잖아요.”

“니가 그걸 우예 아노?”

“저 같은 프로들이야 한눈에 척하면 척이죠. 강미영 팀장처럼 자연스러운 쌍꺼풀은 처음 봤어요. 피부도 깨끗하고. 몸매도 되고.”

“임마 이거 완전히 맛 갔데이. 정신 차려라, 임마. 니 누나다, 누나.”

“뭐 그렇다고 내가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렵니다.”

“와, 작업실 가서 또 게임 할라고?”

“아뇨. 그냥 집에 갈래요.”

“맞다. 니 집이 서울이랬제?”

“예, 도곡동이요.”

김민우는 애써 자신이 도곡동에 산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상조는 도곡동이 무슨 동인지 잘 알지 못했기에 더는 물어보지 않고 다시 모니터를 보며 게임에 열중했다.

김민우는 최상조의 방을 빠져나오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강미영과 마주쳤다.

“어마, 김민우 씨. 왜 거기서 나와요?”

지금까지 강미영 이야기를 하다가 나와서인지 김민우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방금 샤워를 마치고 올라오는 강미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와, 화장 안 했는데도 저렇게 예쁠 수가…….’

“뭘 그렇게 빤히 봐요? 최상조 씨랑 뭐 했어요?”

“아… 네… 그냥 게임에 관해서 조언 좀 받으려고.”

“요즘은 저희들 프로젝트 열심히 하고 계시죠?”

“예? 예, 그럼요. 오늘도 짱꼴라들 몇 명 죽였나 몰라요.”

“최상조 씨는요?”

“상조 아저씨도 열심이던걸요.”

“열심이요? 고작 50명 정도 PK하셨더군요. 두 분 모두 말이에요. 다음 실적 보고 때까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시지 않으면 지급한 아이템 모두 압수하고 전용 계정도 폐쇄시키겠습니다.”

“거,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소. 와, 수혁이가 잘하고 있다 아이가?”

열린 문틈으로 밖의 소리를 듣던 최상조가 어슬렁어슬렁 나오더니 능청스럽게 말대답을 했다.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그 모양이시죠? 회사 방침이니 그렇게 알도록 하세요. 그리고 국운이 걸린 프로젝트입니다. 제발 긴장 좀 하시죠.”

강미영은 가볍게 목을 까닥거린 후 굳은 표정으로 김민우와 최상조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하이고 마, 무서버서 살겠나.”

최상조는 투덜거리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김민우는 강미영의 뒷모습을 좇았다.

‘어딜 가는 거지?’

나는 지하 던전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강미영이 올 시간이 다가오자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했다. 그리고 옷도 지난번에 미영이가 아울렛에서 골라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의 바닥을 드러낸 스킨과 로션도 얼굴에 발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영이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릿결을 털어내며 내 작업실로 들어왔다.

‘오~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들 모습이 방금 머리 감은 모습인데… 와우, 죽이는구나. 정말 섹시하다.’

“어머, 수혁 씨 세수했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방금 날림으로 세수한 티가 너무 나네요. 목에는 물도 가시지 않았군요. 수혁 씨 스킨 발랐어요?”

“아… 응… 왜?”

“푸훗! 수혁 씨 정말 가끔 너무 안 어울리게 귀여운 거 아시죠? 설마 저 올라온다고 하니까 세수하고 스킨 바른 건 아니죠? 그러고 보니까 제가 골라준 옷도 입고 있네요. 아하하하! 정말 웃긴다.”

거침없는 그녀의 융단 폭격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머? 얼굴 빨개지네~.”

‘뭐야? 이거 완전 확인 사살이네.’

“발카라즈 던전 설계도는 가지고 왔어?”

나는 이미 강미영 팀장의 오른팔에 들린 파일을 보고 그것이 던전의 설계도라는 것을 알았지만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자, 여기 있어요. 근데 설계도면은 왜 찾으시죠?”

“응, 지금 의화단 녀석들하고 어쌔시네이트 녀석들이 나를 쫓고 있거든. 던전으로 유혹해서 몰살시켜버리려고.”

“와,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네요. 그니까 오라버니는 설계도면을 이용해 부비트랩을 유유히 빠져나가고 놈들은 트랩에 걸려 죽고, 뭐 그런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근데 나는 프로그램에는 문외한이라 미영이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음… 그렇다면 사주신다는 음식 메뉴를 업그레이드시켜야겠네요.”

“미영이가 옆에서 도와만 준다면야 그까이거 하나 못 사주겠어?”

“좋아요. 수혁 씨 오늘 저한테 잘 보이려고 치장도 했는데 제가 도와드리죠.”

“정말이야?”

‘앗싸!’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영이가 들어오면서 열어둔 문 밖에서 김민우가 소리도 없이 나와 미영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질투 어린 듯한 눈빛…….

“김민우 씨, 거기서 뭐 해?”

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었다.

“아… 아뇨. 나가다 보니 방문이 열려 있어서… 두 분 일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하군요.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민우는 인사도 없이 훌쩍 사라져버렸다.

“김민우 저 사람도 참 독특해요. 서울대 나온 이력도 그렇고… 뭔가 냉기가 흐르는 카리스마도 그렇고…….”

“칼은 무슨 칼. 내가 보기에는 칼없스마 같은데.”

“헉, 수혁 씨 유머 감각 있는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아이스 맨 그 자체군요.”

이거 오늘 일이 왜 이렇게 꼬이지.

“아하하하! 내가 원래는 엄청 재밌는데 군대 갔다 온 후로 이렇게 돼버렸어. 자, 그만 게임에 집중하자구. 나를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나는 다시 헤드셋을 끼고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의 옆에 의자를 가지고 온 미영이 밀착해 앉았다.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포근한 샴푸 냄새가 번져왔다. 거기에 채 물기가 가시지 않은 촉촉한 그녀의 다리가 반바지 아래로 나와 있었는데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나는 불심으로 버텨냈다.

‘나 이러다가 죽으면 몸에서 사리 나오는 거나 아닌지 몰라.’

“랏사드, 우리 말 듣고 있나? 도대체 뭐 하는 기고? 내가 몇 번째 말 걸었는지 아나?”

쎄미트리의 질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응… 잠깐 뭐 좀 가져오느라.”

우리는 어느새 지하 20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지하 던전으로 내려가는 비상구에는 거미줄과 인간, 몹들의 해골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지하 20층에 발을 내딛었을 때 눈앞에 동물의 뼈로 되어 있는 간판이 보였다.

<발카라즈 던전>

들어오는 것은 자유이나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 간판 아래 옥지기 NPC가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죽음의 지하 감옥 발카라즈 던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발카라즈 던전의 옥지기 클라투입니다.”

“이봐라, 너거 NPC 말투는 듣기만 해도 짜증난데이.”

“못생긴 돼지코 오크가 성미도 더럽군요.”

쎄미트리가 성깔을 부리자 NPC도 강하게 받아쳤다.

“이런 뭣 같은 놈을 봤나.”

퍽퍽!

“끄으윽!”

옥지기 NPC는 배틀액스에 몇 번 맞더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쎄미트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맙소사. 드디어 쎄미트리가 사고를 치는구나. 파이온 게임에서 NPC 살해는 아이디 도용이나 해킹과 맞먹는 중범죄.

“저 개자식이 나보고 못생긴 돼지코라고 하는 말 못 들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끄응.”

프레드릭도 장탄식을 내뱉었다.

“요즘 NPC들, 도대체가 싸가지가 없다. 군기가 완전히 빠졌다. 우리 같은 게이머들 없으면 저거들은 존재의 이유가 없는 거 아이가.”

“오우, 무시무시하군, 쎄미트리.”

“그래도 그렇지. 쎄미트리 님은 성미 좀 죽여야겠어요.”

“알았다. 알았다. 그러기에 와 랏사드 니가 늦게 와가지고 사람 열 받게 하노.”

뭐? 와… 이제 완전히 남한테 덮어씌우려고 그러네.

“이거 NPC 설명도 없이 잘못 들어갔다가 정말 죽는 거 아냐?”

“자, 일단 랏사드가 큰소리쳤으이 한번 믿어봐야 안 되겠나?”

쎄미트리의 말에 조금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그녀의 부담스러운 속살 때문에 쳐다보지 못하고 있던 미영을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수혁 씨, 정말 당신 혈원들 끝내주네요. 쎄미트리에게는 우리 게임운영팀 최대리가 경고문을 발송할 거예요. 첫 번째는 구두경고로 끝나지만 두 번째로 NPC살해를 저지르면 계정압류 들어갑니다. 일러주세요. 자, 한번 볼까요. 우선 던전의 문을 여세요. 대신 문 앞에 서지 말고 문 옆의 벽에 붙어서 무기나 마법구를 이용해 문을 열어야 해요.”

“모두들 문 옆으로 비켜 서.”

“뭐야?”

내가 갑자기 다급하게 말하자 모두들 당황하며 문 옆으로 비켜섰다. 나 역시 문 옆쪽 벽에 기대어 엘리멘탈 검을 이용해 문을 슬쩍 열었다.

피피피피핑.

던전의 입구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출입문을 향해 날아와 문 밖 벽에 박혔다.

“뭐야? 랏사드가 말 안 해줬으면 우리 완전히 고슴도치 될 뻔했잖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땅굴 모양으로 된 지하던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터널처럼 된 던전의 입구에는 보도블록들이 바닥에 정교하게 깔려 있고 벽에도 사각형 모양의 벽돌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우선 동료분들께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그건 왜지?”

“지금부터 수혁 오라버니가 이 죽음의 터널을 통과할 방법을 암기하고 반복 연습해야 해요. 자칫 잘못하면…….”

미영은 뒷말 대신 나를 바라보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프레드릭 님, 스타리스, 쎄미트리, 로큰롤. 여기서 잠시 기다려요.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미영은 그때부터 던전의 설계도면을 보며 부비트랩과 연결된 블록 그리고 연결되지 않은 안전한 블록을 지정해주었다.

“A1, B3, C5, D1, E2, F4, G1, H5, IL-2, JL-3, K1, L2, MR-4, OR-2, PL-3, Q-1, R-3, …Z4.”

“잠깐, 천천히…….”

“게임의 제왕이 그 정도도 못 외워요?”

“A, B, C, D로 나가는 건 알겠는데 IL, JL은 뭐지? MR, OR은 또 뭐야?”

“ABCD로 나가는 것은 바닥의 블록 번호고요, 알파벳 옆에 L이 붙은 것은 그 열 왼쪽 벽 블록, 알파벳 옆에 R이 붙은 것은 그 열의 오른쪽 블록을 밟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이큐가 200 정도면 몰라도 어떻게 이 지하 통로를 통과할 수 있지?”

“설명이 없긴 왜 없어요. 옥지기 NPC가 다 설명해주는데 수혁 오라버니 동료가 그 NPC를 죽여 버린 거 아니에요.”

“…….”

“물론 통로의 안전한 블록 번호는 Y열까지만 일러주게 되어 있어요.”

“뭐? 그럼 나머지 Z는?”

“그건 퀘스트를 수행하려는 게이머의 운에 맡기는 거죠.”

“와, 이거 순 사기네. 무슨 퀘스트가 이래?”

“순 사기요? 이 퀘스트는 제가 설계한 거란 말예요.”

“아… 그래? 어쩐지 지하 던전 퀘스트가 뭔가 마지막에는 반전을 주면서 도박 같기도 한 게 내 맘에 꼭 들더라고.”

“이미 늦은 거 아시죠?”

토라지는 모습까지도 어쩜 저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자, 제가 여기 종이에 적어줄 테니까 차근차근 한 블록씩 밟아 나가세요. 마지막 Z열을 지나면 던전의 부비트랩을 차단할 수 있는 레버가 있을 거예요. 그 레버를 당기면 부비트랩이 차단되고 나머지 동료들은 안전하게 트랩을 건널 수 있는 거죠.”

“오케이, 알았어.”

나는 미영이 적어준 방식대로 하나씩 하나씩 블록을 밟아갔다. 중간에 L과 R이 붙은 열은 벽의 왼쪽 면과 오른쪽 면을 밟아야 했는데 L열 바로 다음이 바닥 열 일 경우는 빠르게 측면을 밟고 내려오면서 바닥을 밟아야 했다.

I열까지 밟은 나는 JL-3을 밟고 내려오다가 K1이 아닌 K2를 잘못 밟아버렸다.

슈슝.

“우왓!”

“조심해요.”

나는 블록을 잘못 밟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양쪽 벽에서 튀어나오는 강철로 된 창을 피했다. 네 개의 창날이 양쪽 벽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휴, 하여튼 수혁 오라버니 사람 놀래는 재주 있다니까.”

“너무 순탄해도 재미없잖아.”

쎄미트리가 무너뜨려버린 지하 던전 입구에서는 어쌔시네이트 길드와 의화단 길드원들이 무너진 바위를 치우고 있었다.

“비켜, 병신 같은 것들.”

어쌔시네이트의 단주인 형가는 자신의 크래쉬 해머를 들고 무너진 돌덩어리들을 걷어냈다. 그가 해머를 몇 번 휘두르자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돌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치워졌다.

“단주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뒤쫓아.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서 의뢰 받은 사냥감을 처치하는 것이 우리 어쌔시네이트의 신조라는 거 몰라! 하긴 병신 같은 의화단 길드라면 여기서 포기하겠지만 말이야.”

그의 말투에는 랏사드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의화단에 대한 짜증이 진하게 묻어 있다.

“뭐? 형가 단주, 지금 뚫린 입이라고 너무 함부로 말하는 거…….”

“쫄다구들 앞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입 닥쳐.”

“아… 알았어.”

어느새 형가의 크래쉬 해머가 질렌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고 무시무시한 오크의 눈이 질렌을 노려보자 의화단주인 질렌은 꼬리를 내려버렸다.

“지금부터 랏사드를 추적해 던전으로 들어간다. 놈의 목에 ‘용의 뿔’ 아이템을 현상금으로 걸겠다.”

“와아아! 랏사드를 죽여라! 랏사드를 죽이자!”

어쌔시네이트의 오크들과 의화단의 몇 안 남은 다크엘프들은 랏사드를 쫓아 던전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A1, B3, C5, D1, E2, F4, G1, H5, IL-2, JL-3, K1, L2, MR-4, OR-2, PL-3, Q-1, R-3, …Z4.

나는 몇 번이나 던전 터널의 안전한 블록을 밟고 지나가는 연습을 했다. 그 덕에 이제는 30m 가까이 되는 지하 통로를 윈드 워크를 사용해 물 찬 제비처럼 통과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쎄미트리를 비롯한 동료들은 처음 통로를 통과했을 때 안전장치를 풀어버려서 다들 통로의 끝부분에 도착해 있었다.

“수혁 오빠, 역시 대단해요. 처음엔 조마조마했는데 이제는 거의 평지를 달리는 듯하군요.”

“휴, 쉽진 않았어. 그냥 바닥만 밟고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왼쪽 오른쪽 측면까지 밟으며 뛰어야 한다는 게…….”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미영의 물음과 동시에 다른 동료들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젠 어떻게 할 거야?”

“내가 통로의 중간 정도에 가 있을 테니까 내가 신호하면 안전장치 레버를 다시 위로 올려 트랩을 가동시키라구.”

“음…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다.”

사방위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자, 어서 와라. 죽음의 터널로. 이곳에서 어쌔시네이트와 의화단을 수장시켜주마.”

철컹철컹.

오크들의 스켈레톤 부츠가 철계단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는구나.”

맞은편의 쎄미트리, 로큰롤, 프레드릭, 스타리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단주님, 지하 던전의 NPC가 죽어 있고 벽면에 무수한 화살이 꽂혀 있습니다.”

“놈들이 이곳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구나. 쫓아라.”

드디어 초록색의 암살자들이 터널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휘이익.

나는 그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쥐새끼 같은 놈, 이미 도망간 줄 알았더니 아직 던전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게냐?”

“단주, 저희들이 놈을 한합에 저승으로 보내버리겠습니다.”

“두 놈 가지고 되겠어? 한꺼번에 덮쳐서 놈을 수장시켜버려라.”

“목을 빼고 기다려라,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드디어 오크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이야, 쎄미트리.”

“알았다, 군주.”

쎄미트리는 잡고 있던 레버를 힘껏 올렸다.

기기기깅.

“윈드 워크.”

나는 부비트랩이 작동되는 소리를 들으며 던전 터널을 독사가 먹이를 발견하고 덮치듯이 바닥과 좌우 측면을 밟아가며 순식간에 통과해버렸다.

파창.

“꾸에에엑!”

차카캉.

“꾸웨웩!”

내가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놈들은 안달하여 쫓아오다가 아무 블록이나 사정없이 밟았고 그 결과 벽에서 튀어나오는 강철 창과 천장에서 찍어 내리는 돌기둥에 머리를 찍혀 죽어갔고 어떤 녀석들은 벽면이 좌우에서 프레스되어 몸이 완전히 쥐포가 되어버렸다.

“하… 함정이다. 모두 물러서.”

동료 암살자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뒤로 물러나던 놈들은 또다시 트랩이 설치된 블록을 밟았고 쏟아지는 병기들과 화살들에 맞아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갔다.

“끄으응, 랏사드 이놈.”

“내가 통과하는 방법 가르쳐줄까? 자, 따라해봐. A2, B4, C1, D2, E3, F1, G3, H4, IL-1, JL-1, K2, L1, MR-1, OR-1, PL-2, Q-2, R-1, …Z1.”

물론 내가 불러준 암호는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었다.

“네… 네놈이 나를 희롱하다니. 천하의 형가를…….”

“이게 끝이 아니야. 스타리스, 로큰롤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지.”

“오케이,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자, 간다. 불의 힘으로 오크들을 태워버릴지니. 파이어 볼.”

화르르륵.

터널 안은 폭탄이 터진 것처럼 순식간에 불기둥이 가득 찼고 맞은편에 서 있던 오크 암살자들과 다크엘프 암살자들은 뜨거운 불에 살이 녹아갔다.

“끄아악!”

“사… 살려줘!”

“아이스 실드.”

그 와중에서도 어쌔시네이트의 단주인 형가는 온몸을 얼음으로 덮어 불기둥을 막아내면서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 찬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메, 무서워라. 그럼 나는 이만 바빠서. 또 보자고, 질렌, 형가 놈아.”

“혹시라도 딴 맘먹는 놈들은 나 쎄미트리의 배틀액스가 가만 놔두지 않을 기다. 그러니 찌그러져 있으래이.”

쎄미트리는 뒤를 돌아보며 배틀액스를 휘저어 으름장을 놓은 후 우리를 따라 던전의 다른 곳으로 이동해갔다.

“단주님,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 터널을 통과해 저 쥐새끼를 반드시 척살한다. 어쌔시네이트와 내 이름을 걸고.”

“하지만 방법이… 터널 안에 트랩이 설치되어 있어서…….”

“방법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바로 네놈들의 희생을 통해서.”

“예에?”

형가의 입에서 나온 싸늘한 한마디에 어쌔시네이트의 암살자들은 겁에 질려 그를 쳐다봤다.

“크흐흐흐, 으하하하! 나를 욕보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랏사드.”

지하 던전 입구에서 형가는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그 냉기 어린 웃음소리가 터널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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