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Fear of the dark
햇볕은 더없이 좋으나 바람이 많이 불어 차가운 날,
에메랄드빛의 헤븐 소드를 들고 있는 휴먼 파이터가 숨을 헐떡이며 슬루미오 마을의 담벼락을 따라 뛰고 있다. 누구에게 공격을 받았는지 몸의 곳곳에는 혈흔이 낭자하고 갑옷과 보호구들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도대체 왜 날 죽이려는 거야? 모습을 드러내라! 비겁한 놈들!”
헤븐 소드, A그레이드인 상승 무기를 든 걸로 봐서 레벨 350 이상의 고수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그는 아무도 없는 슬루미오 마을의 담벼락에 지친 몸을 기댄 채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그의 이름은 라싸드였다.
“후후후, 헤븐 소드를 사느라 그 흔한 실버 샌드 하나 못 산 모양이지?”
음산하면서도 냉기를 담고 있는 낮은 톤의 목소리들.
“네놈이 임파젤 성에서 설쳤다는 놈이냐?”
“무슨 소리야? 내가 임파젤 성 졸업한 지가 언젠데. 최근에는 뮤호 마을이나 임파젤 성에 가본 적도 없엇!”
헤븐 소드를 든 휴먼 파이터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말하면서 마지막 힘을 짜내 허공을 향해 헤븐 소드를 휘둘렀다.
휘이이잉.
그러나 그가 가른 것은 마을을 덮고 있는 바람.
“후후후, 마지막 발악이었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 미친놈들아!”
스르릉, 파밧.
날카로운 검기가 허공을 가른다. 끈질긴 추격에 체력이 바닥 나가던 그의 목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바람이 흙먼지를 실어와 라싸드의 얼굴을 조금씩 뒤덮어갔다.
대기가 습한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카마파타 대륙의 피나울 연못에도 슬루미오 마을 못지않게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초보 엘프로 보이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 때문에 얼굴을 때린다. 백옥 같은 피부에 오뚝한 코를 가진 아름다운 엘프 세나. 오프라인에서는 비호감이지만 온라인에서만큼은 얼짱으로 통하는 그녀가 피나울 연못에서 로만과 함께 서 있었다.
“랏사드 님이 늦는걸.”
“그러게요, 형님이 왜 안 오지?”
“귓속말 보내봐.”
“아까 보냈는데 아직 응답이 없어요.”
“분명 로그인은 되어 있는데…….”
그 둘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로큰롤과 쎄미트리가 각자의 마법구와 배틀액스를 들고 피나울 연못으로 다가왔다.
“없어. 연못 주위를 다 돌아봤는데 안 보여. 아직 카마파타 대륙에 오지 않은 것 같아.”
로큰롤메이지의 말에 쎄미트리가 대답했다.
“랏사드가 왜 안 오는 거지? 이거 혈맹 군주가 없어서야 공성전에 참가할 수 있겠어?”
“로만아, 랏사드 님한테 다시 연락해봐.”
“연락해봤다니까요.”
“무슨 연락을 또 하라는 기고… 아까 로만이가 귓속말도 보내고 핸드폰으로 연락도 했다믄서.”
“왜 안 오시는 거지…….”
“이게 다 세나…….”
“예? 제가 왜요?”
“아니… 아이다.”
쎄미트리가 세나 이름을 들먹거리자 세나도 화가 났는지 쎄미트리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그러나 쎄미트리는 가뜩이나 랏사드가 오지 않아 삭막해진 분위기를 더 심각하게 할 순 없어서였는지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다.
“다들 왜 그래. 진정들 하자고. 무슨 일이 있겠지.”
“아이, 정말. 랏사드 형 나 키워주기로 해놓고 안 오면 어떻게 해.”
철없는 로만의 한마디는 가뜩이나 뿔나 있는 쎄미트리를 자극했다. 기차화통 삶아먹은 듯한 그의 호통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철딱서니 없는 자식아, 지금 상황에서 그딴 소리가 나오나!”
“아, 이 형님은 걸핏하면 나만 가지고 난리셔.”
“뭐? 난리? 니 죽고 싶나?”
“다들 그만 해욧.”
세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쎄미트리! 나야, 랏사드. 지금 혈원들 이끌고 프레드릭에게 가 있어. 내가 프레드릭에게는 미리 연락해뒀으니까.]
“야, 랏사드다, 랏사드.”
“무슨 일이야, 군주?”
“그래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랏사드 님.”
[지금 다 설명하기는 힘들고, 일단 공성전에 참가하긴 어렵게 됐으니까 가드리언 혈맹의 프레드릭에게 가 있어. 내가 그곳으로 찾아갈 테니. 지금 쫓기고 있으니까… 이만 연락 끊을게.]
“랏사드! 랏사드!”
“뭐예요? 연락 없어요?”
“랏사드가 귓속말을 거부하고 수신기를 꺼뒀어.”
“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쫓기고 있다니?”
“그러게 말이야.”
어수선한 틈을 로큰롤메이지가 정리하고 나선다.
“자, 이러지들 말고 일단 랏사드 군주가 프레드릭 님에게 가 있으라니까 가드리언 동맹을 찾아가자구.”
“그래요. 그렇게 하죠.”
“쩝, 내 캐릭은 언제 키우는 거야?”
그랬다. 파이온 게임 안의 대륙을 돌아다니는 중국의 게이머들은 ‘라사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면 자기네들끼리 연락을 취해 암살자 길드에게 보고하거나, 상대방의 레벨이 낮을 경우에는 직접 PK하기도 했다.
카마파타 대륙으로 가기 위해 워프 비콘을 향하던 랏사드 역시 누군가의 제보로 암살자 길드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 * *
‘좋아. 얼마든지 쫓아와 봐라.’
나는 피나울 연못으로 이동하기 위해 워프 비콘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럽게 날아온 파공성을 듣고 몸을 수그렸다. 그러나 파공성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고 수십 개의 칼날이 날아왔기에 회피 동작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팔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뇌검도래.”
나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파괴자의 검을 꺼내 들고 360도 회전하며 뇌검도래를 시연했다. 무릎을 꿇고 있다 갑작스럽게 펼쳐 보인 동작 때문에 클로킹 되어 있던 암살자들 중 한 명이 부상을 입었는지 선혈을 뿜어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나는 마치 투명인간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니 마치 공기가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모두 놈에게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라.”
“그래, 지금까지와 같은 허접한 놈이 아니다.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실버 샌드 아이템을 받아뒀어야 하는 건데.’
실버 샌드 아이템은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끈적끈적한 은빛 모레를 뿌려서 투명한 적들의 형체를 드러내게 하는 아이템이다.
나는 급하게 메신저를 이용해 미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영아, 실버 샌드나 이글아이 아이템 좀 로딩해줄 수 있겠어?]
[실버 샌드요? 갑자기 그건 왜?]
[지금 게임 접속해봐. 암살 길드가 나를 노리고 있어.]
[놈들이 클로킹 아머를 입고 있나요?]
[아마 그런 것 같아.]
클로킹 아머. 고급 아이템인 클로킹 아머는 착용하면 플레이어의 몸을 감출 수 있는 투명 아이템이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요.]
[왜?]
[우선은 오빠가 싸일리엄 하우스로 가야만 하는데 지금 있는 곳은 싸일리엄 하우스에서 너무 먼 곳이에요. 그곳까지 가기 전에 살해 될지 몰라요.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보세요.]
[어떻게?]
[그건 저도 잘 모르죠. 오빠는 오락신동이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이런 제길.’
[잘 안 될 것 같으면 리스신공을 하든가요.]
[뭐? 리스신공? 지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게임의 제왕 박수혁이 리스신공이라니?]
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애꿎은 미영에게 화를 냈다.
리스신공이란 바로 게임 진행 중에 로그아웃을 해버리거나 아니면 강제로 컴퓨터를 꺼버리는 행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과거 MMORPG 게임에서는 몹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하거나 긴박한 상황에서 해결책이 안 나오면 리스신공을 사용하는 유저들이 많았다.
그러나 파이온 가상현실게임의 게임의 현실성과 재미를 높이고 일부러 리스타트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리스신공을 사용할 경우 아이템을 강제로 드롭시켜버렸고 리스신공 사용횟수가 증가할수록 아이템 드롭률을 높였다.
[놈들에게 암살당하는 거나 리스신공 사용하는 거나 그게 그거죠, 뭐.]
그때 또다시 나의 오락신경이 뇌하수체 후엽으로 흘러들어갔다.
[미영, 좋아. 내가 실버 샌드 없이 놈들을 잡아 보이겠어.]
[정말요? 어떻게요?]
[지금부터 잘 지켜보라구. 그리고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 근처에 있는 아이템 샵 위치 좀 일러주고.]
[그러죠.]
나는 미영과의 연락을 끊은 후 워프 비콘을 뒤로하고 카마파타의 옆 대륙인 바젤리스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윈드 워크.”
파이온 게임 안의 신법 중 빠르기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상승 신법. 나는 윈드 워크를 이용해 다시금 나를 향해 다가오는 클로킹 된 적들의 인기척을 뒤로하고 냅다 달아났다.
“쫓아라.”
“대장, 저놈이 틀림없습니다. 저놈이 간닝이 말한 그놈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레벨 78인 놈이 어떻게 윈드 워크를 쓸 수 있겠어. 놈을 쫓고 다른 암살 길드에게 현재 지역 정보와 놈의 닉네임을 퍼뜨려라.”
“예.”
“후후, 라사드가 아니라 랏사드였군. 놈 때문에 애꿎은 녀석들만 죽여 버렸어. 하긴 뭐 어차피 그놈들도 한꾸어 녀석들. 죽으나 사나 상관없는 깔따구 같은 것들이지만.”
나쁜 자식들. 나는 놈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깔따구라고? 어디 깔따구의 매운 맛을 한번 봐라.’
나는 윈드 워크를 이용해 바젤리스크를 향해 바람처럼 뛰었다. 그러나 나를 쫓는 암살길드 역시 허접한 초보 암살자 길드는 아닌 것 같았다. 놈들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내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포그리스 호수 근처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윈드 워크의 마나가 거의 소진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긴급히 내 인벤토리 창을 열어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살펴보았다.
특수 무기창을 열어 각종 공격용 아이템들을 살피다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아이템이 있었다.
‘찾았다. 이 자식들, 어디 한번 다 죽어봐라. 후후후.’
나는 비릿한 코웃음을 흘리며 포그리스 호수 근처 마을의 오두막집 벽을 등지고 섰다. 후방은 나무벽, 전방과 측면이 아니면 나를 공격할 수 없는 구도. 나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돌아섰다.
“후후후, 미친놈. 감히 우리 의화단 길드를 상대로 등지고 서다니.”
비릿한 음성. 아마도 놈이 의화단 길드의 수장 같아 보인다. 어쌔시네이트 길드와 함께 파이온 게임 내에 존재하는 중국 A급 암살길드 중 하나.
“그래, 어디 자신 있으면 나를 한번 죽여봐라.”
“하하하하, 미친놈.”
느껴진다. 놈들이 오는 게 느껴져.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어.
“저런 멍청한 놈, 사방으로 움직여도 우리의 공격을 피할까 말까인데 그렇게 얌전한 고양이처럼 가만히 있다니. 후훗.”
“죽어랏!”
파바밧.
서걱서걱
“……!”
스파이크 건틀릿을 들고 있는 손 세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길게는 어깨까지, 짧게는 손목이, 잘린 손에는 스파이크 건틀릿이 들려 있었다. 끊어진 팔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아악! 내 손!”
“어, 어떻게 된 거야?”
“이… 이런 영악한 놈. 인비저블 와이어를 이용해 방어막을 치고 있었다니… 우리가 당했다.”
나는 인벤토리 창을 열어 인비저블 풀메탈 와이어(Invisible full metal wire)를 이용해 내 몸 주위를 거미줄처럼 둘러놓았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의화단의 암살자들은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호자 같은 스파이크 건틀릿을 들고 나를 덮치다가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날카로운 와이어에 팔을 잃고 말았다.
풀메탈 와이어의 예리함 때문에 놈들의 팔은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클로킹 아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잘려나간 팔은 그간의 투명 상태에서 뚜렷한 형체를 드러냈고 팔 임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잘린 팔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어서 놈들의 위치가 노출되고 말았다.
“뇌검도래.”
나는 파괴자의 검을 꺼내 들고 피 흘리는 세 놈을 향해 맹호처럼 달려들었다.
“피… 피해랏!”
“이미 늦었어.”
폭 15cm의 파괴자의 검은 세 개의 날이 달린 스파이크 건틀릿의 날을 자르고 들어가 클로킹 아머를 입고 있는 녀석들의 목을 잘라버렸다.
“무시무시한 위력이다… 크윽, 분하다…….”
“보통 놈이 아니다! 놈에게서 떨어져라!”
팔을 잃은 세 명의 암살자들은 목 없는 귀신이 되어 쓰러졌다.
“여우같은 놈.”
나는 다시 놈들을 등지고 포그리스 호수를 향해 뛰었다.
“질렌… 회복 마법을 걸어주세요…….”
“그래요. 저희들을 버리고 가지 말아주세요… 질렌.”
“바보 같은 것들, 그깟 놈 하나 처치하지 못하다니. 쯔쯔… 클라우드, 놈들을 편히 보내줘라. 놈들의 아이템은 네가 챙겨도 좋다.”
“예, 단주님.”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의화단 녀석들은 클로킹 아이템의 마나를 아끼기 위해서인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화단의 단주는 다크엘프 계열의 자객이었고 그의 오른팔로 보이는 클라우드라는 녀석도 다크엘프 계열의 자객이었다. 그 뿐 아니라 의화단의 단원들은 모두 다크엘프 계열의 검사들로 모두들 스파이크 건틀릿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어깨에는 그들이 모두 의화단 암살 길드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둥근 방패 그림에 붉은색의 의(義)자가 각인되어 있다.
클라우드라는 자는 스파이크를 이용해 죽어가는 동료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영덕대게의 집게 발 같은 3개의 스파이크가 죽어가는 이들의 몸을 관통했다.
“끄으으… 너무…하…….”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의화단원.
“쫓아라.”
의화단의 단주인 질렌, 그는 특이하게도 적안(赤眼)을 가지고 있었는데 파이온 가상공간에서 적안은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일정 종류의 암살기술을 궁극의 경지까지 익힐 경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붉은 눈동자의 입에서 차디찬 냉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추적명령과 함께 의화단원들의 몸을 붉은빛으로 된 고리들이 휘감자 또다시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놈들, 또다시 몸을 감추는구나… 하지만 나 박수혁을 너무 얕잡아봤어. 네놈들 뜻대로 되진 않을걸.’
나는 윈드 워크를 이용해 어느새 마을을 벗어나 호수 근처까지 다다라 있었다.
“놈이 또다시 인비저블 와이어를 사용할지도 모른다. 모두들 이글아이를 착용해라.”
“네, 단주님.”
이글아이(Eagle eye). 실버 샌드(Silver sand)와 같은 클로킹 된 적을 잡는 데 사용하는 아이템이다.
실버 샌드와의 차이점이라면 실버 샌드는 특유의 점성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들러붙어 적들의 형체를 유지시켜주는 특징이 있고 이글아이는 아이템의 마나가 다 떨어질 때까지는 보이지 않는 적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기들까지도 감지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놈이 인비저블 와이어를 치지 않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 약은 놈이니까 섣불리 행동하진 말아라.”
나는 포그리스 호수의 한 지류를 등지고 추적하는 의화단원들을 상대하기 위해 뒤돌아섰다.
“쥐새끼 같은 놈, 또다시 인비저블 와이어를 펼쳐보시지. 이번에는 그렇게 어리석게 당하진 않을 테니.”
“의화단, 그간 게임 내에서 암살하면서 돈 많이 모으셨나보군. 그 비싼 이글아이를 모든 조직원들이 착용할 정도니 말이야. 하지만 네놈들 명성도 오늘로 끝이야. 레벨 78의 초보에게 의화단원들 전멸하다. 어때, 그럴듯하지 않나?”
“하하하, 미친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한 가지만 묻겠다.”
괴기스러운 웃음소리가 끝나더니 놈의 붉은 눈이 광채로 뒤덮였다.
“네놈이 임파젤 성에서 한당과 주태의 목을 벤 놈이냐?”
“한당, 주태? 글쎄, 내 칼에 목 빼고 죽은 놈이 한둘이 아니어서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군. 1284명까지는 기억했는데 그 후로는 통 기억에 남질 않아. 물론 기억에 남을 만한 플레이를 보여준 놈들도 없고.”
“레벨은 78이지만 입담 하나는 780에 가까운 놈이구나. 순순히 목을 내놔라. 그렇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마.”
“빨간 눈을 가진 또라이 같은 놈아.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다. 현실과 착각하는 듯한 대사를 읊조리지 마라. 나도 헷갈린다.”
“저놈의 주둥이를 틀어막아버려라.”
나의 자극에 놈은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질렌, 놈의 눈빛만 봐서는 오늘 여기서 무덤을 파야 될지도 모르겠다.
질렌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러 명의 의화단원들이 포위망을 형성하며 나에게 접근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오래간만에 내재되어 있는 나의 마나를 불러 모았다.
발밑에서 불기둥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강렬하고도 과감한 기운이 내 몸에서 피어올랐다. 마나가 머리끝까지 쳐 올라왔을 때는 마치 온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드 마스터급의 마나라니…….”
“벌써 놀라기는. 아직도 놀랄 일이 많이 남아 있을 텐데 말이야.”
나는 재빠른 동작으로 내 인벤토리 창을 열어 무거운 파괴자의 검을 집어넣고 다크 브레이커(Dark breaker)를 꺼내 들고 갑주는 붉은 늑대의 레더 세트로 교체했다.
“놈이 마나를 채우기 전에 공격해라.”
‘느껴진다. 놈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져.’
타이푼 참은 소드 마스터급 이상의 마나를 보유해야 시전 가능한 상승 스킬이다. 타이푼 참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최소 레벨 400 이상이어야 하며 다크 브레이커 이상의 상승 검을 사용해야 한다.
원래 타이푼 참은 일 대 다수의 싸움이나 공성전에서 수십 명의 적들을 바람계열의 공격을 이용해 날려버리는 기술이다. 그러나 나는 타이푼 참을 이용해 내 뒤로 흐르는 포그리스 호수의 물을 끌어들였다.
핵을 향해 강렬하게 돌아가는 소용돌이가 일더니 포그리스 호수의 물들이 태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타이푼 참!”
나는 끌어 모은 태풍 같은 물기둥을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퍼부었다.
수천 개, 아니 수만 개의 물방울이 맹렬한 기세로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물방울은 모래알처럼 흩어지면서 눈앞의 보이지 않는 적들의 옷이나 몸에 들러붙어 그들의 위치와 형태를 드러내 보여줬다.
물에 젖은 놈들의 모습은 마치 물방울로 만들어놓은 움직이는 조각상 같았다.
“이런, 위험하다.”
“뇌검도래.”
“피해라! 놈의 공격을 받으면 끝장이다!”
붉은 눈의 의화단주는 드디어 사태를 파악했는지 회피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커헉!”
“우욱!”
우레와 번개를 동반하는 스플래시형 공격, 뇌검도래. 물에 젖어 있던 의화단원들은 다크 브레이커가 내뿜는 번개들에 맞아 온몸이 초고압 볼트에 감전된 것처럼 타들어갔다.
파이온 공간의 A급 암살길드답게 놈들의 포위망은 그들의 팀플레이 훈련이 얼마나 호된지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빈틈없고 정교했다.
그러나 그런 촘촘한 포위망 덕분에 놈들은 모두 고압의 전기에 감전되어 온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쓰러져 죽어갔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클로킹 된 우리를 잡기 위해 역으로 인비저블 와이어를 이용해 잡아내더니 이글아이나 실버 샌드 없이 호수의 물을 이용해 단원들의 위치를 파악해내다니. 거기다 물과 전기가 상극이라는 자연과학적 진리를 게임에 응용해 접목시켰다. 정말 무시무시한 놈이다. 저놈을 살려둬선 훗날 큰 화가 될 게 틀림없어. 어떻게든 놈을 죽여야 한다.”
“이봐, 감탄할 것까진 없고. 속삭일 거면 혼자 속삭일 것이지 왜 헤드셋을 끼고 말해서 나까지 듣게 하는 거야. 아직 감탄하기는 이르다고 했잖아. 자, 또 간다. 타이푼 참!”
“피해! 물보라의 사정권에서 벗어나라!”
“과연 뜻대로 될까?”
내가 뿌려대는 물보라는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을 적셔버릴 만큼 폭 넓게 뿜어져 나갔다.
“의화단 길드, 소문만큼 네놈들의 실력은 명불허접이로구나.”
날아간 물방울이 몸에 달라붙어 위치가 노출되자 의화단원 한 놈은 불을 끄는 듯한 자세로 양손으로 옷에 들러붙은 물방울을 털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어느새 그런 허접한 놈의 눈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다크 브레이커, 어둠을 가를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마.”
나는 양손으로 다크 브레이커를 쥐고 허공을 향해 엑스 자의 사선을 교차시켰다.
슈슛.
날카로운 예기가 파공성을 일으키자 의화단원의 몸이 엑스 자 모양으로 양분되었다.
“바보 같은 놈들아, 당하고만 있지 말고 공격을 퍼부어라.”
쐐애액.
강철로 된 장갑에 긴 손톱이 뻗어 나와 있는 모양의 기형 무기 스파이크 건틀릿. 의화단원들의 스파이크 건틀릿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내게 다가왔다.
“네깟 놈들은 보이기만 하면 내 적수가 될 수 없어.”
나는 스파이크 건틀릿을 피하면서 다크 브레이커의 검병으로 뒤에서 다가오는 놈의 복부를 가격한 후 통증으로 상체를 구부린 녀석의 몸을 향해 다크 브레이커를 회전시켰다.
쩌정.
놈은 다급하게 스파이크 건틀릿으로 내 검을 막으려 했으나 풀메탈로 된 나의 다크 브레이커는 스파이크를 뚫고 지나가 놈의 몸을 절반으로 분리해버렸다.
타이푼 참이 일으킨 물보라가 가라앉자 허공에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슈파파.
‘암기?’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다크 브레이커를 뻗었다.
투투둑.
나를 향해 날아오던 암기들은 다크 브레이커의 검날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암기가 날아온 곳을 향해 다크 브레이커를 냅다 휘갈겼다.
퍼퍼벅.
낭자한 피와 함께 살덩어리가 찢겨 나가고 비명 소리가 이곳저곳으로 비산했다. 예리한 다크 브레이커는 살을 베기보다는 거의 포를 뜨는 것 같았다.
“단주님, 놈이 상상외로 강합니다.”
“바보 같은 놈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단주님, 클로킹 아이템의 마나가 거의 소진됐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들의 모습이 노출될 텐데 이대로는 불리합니다.”
“어쌔시네이트에게 통문을 띄워라. 그리고 여타 다른 암살길드들에게 놈이 포그리스 호수에 있다고 알려라.”
지금껏 나무와 숲, 호수만 있던 곳에 마나가 다 닳아서인지 놈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놈들은 겁을 집어먹고 나에게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곧 페어러 사막으로 가는 배가 들어올 시간이다. 이곳을 벗어나 페어러 사막으로 도주해야겠어. 그곳에서 놈들과 2차전을 벌여야겠다.’
나는 놈들이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으로 분석했다.
앞으로의 대책을 정리한 나는 배가 들어오는 포그리스 선착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놈이 선착장 쪽으로 달아납니다.”
“무슨 속셈이지? 워낙 여우같은 놈이라 거리를 두며 서서히 쫓아라. 그리고 클로킹을 해제해. 마나를 아껴야 한다.”
“네, 단주.”
뿌우우뿌우우.
멀리서 페어러 사막으로 게이머들을 실어 나르는 왕복선의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배가 선착장 가까이 와 있구나. 서둘러야겠다.’
“놈이 배를 타려는 모양입니다. 뱃고동 소리가 나자 움직임이 더 빨라졌습니다.”
“이런,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놈이 절대로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해!”
얼마를 뛰었을까. 선착장에는 왕복선이 닻을 풀고 기다리고 있었고 제법 많은 수의 게이머들이 페어러 사막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페어러 사막으로 건너가기 위해 배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배는 페어러 사막으로 가는 왕복선입니다. 배에 오르기 위해서는 5000아데나를 지급하셔야 합니다.”
“이런 미친 NPC, 지금 아데나 지급하고 말고 할 시간이 없단 말이다. 일단 달아놔!”
“달아놔라는 단어는 입력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배는 페어러 사막으로 가는 왕복선입니다. 배에 오르기 위해서는 5000아데나를 지급하셔야 합니다.”
“젠장, 일단 달아놓으라고.”
나는 뱃사공 NPC의 어깻죽지를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때였다.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퍼퍽.”
순간 뱃사공 NPC는 장부를 떨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도 잠시, 뱃사공 NPC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NPC의 심장을 움켜쥔 스파이크 건틀릿이 NPC의 등을 뚫고 나왔다.
놈의 건틀릿은 틀림없이 나를 노리고 날아오던 것이리라.
나는 급히 허공에서 몸을 틀어 늘어진 닻을 밟고 배 위로 뛰어올랐다.
“선장, 출발시켜! 빨리!”
내가 선장에게 출항 명령을 내리고 있을 때 뱃사공 NPC를 죽인 의화단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놈은 아까 의화단주가 클라우드라고 부르던 놈. 바로 질렌 단주의 오른팔 같은 녀석이었다.
‘다른 놈들에 비해 무척 빠르구나. 잘못했으면 큰 부상을 입을 뻔했어.’
“배가 출발합니다. 아직 배에 오르지 못한 분들은 서둘러 주십시오.”
나는 선착장에서 배로 오르는 판자 앞에 서서 의화단원 놈들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놈이 배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클라우드, 이 어리석은 놈! 더 민첩하게 놈을 가격했어야 했어.”
“죄송합니다, 단주.”
클라우드라는 녀석은 질렌에게 읍하더니 곧바로 날카로운 스파이크 건틀릿을 번뜩이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놈은 몸을 뒤로 돌아 마치 한 마리의 학처럼 우아한 자태로 두 개의 호조(스파이크)를 비켜 든 채였다.
“미친놈, 삽질하고 자빠졌네.”
나는 다크 브레이커를 단단히 붙잡고 두 손에 힘을 모아 놈을 올려쳤다.
파캉.
배는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고 나의 다크 브레이커와 놈의 스파이크 건틀릿은 허공에서 몇 번인가 부딪쳤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놈을 파워 스트라이크로 호수 속에 빠뜨려버리려고 했으나 몸놀림이 날렵한 놈은 내 다크 브레이커에 자신의 건틀릿 날을 끼운 후 그 반동을 이용해 배 안으로 돌아 들어와 바닥에 착지했다.
“클라우드, 어쩌려고 그러느냐?”
“단주님, 놈과 함께 가겠습니다. 단주님은 페어러 사막으로 바로 오십시오.”
“조심해라, 클라우드. 놈은 보기와는 다른 놈이다.”
“킥킥킥, 충성심이 대단하군.”
“닥쳐라.”
“와, 싸움이 벌어진 건가?”
페어러 사막으로 건너가기 위해 왕복선에 올라탔던 게이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불구경 나온 사람처럼 팔짱만 낀 채 우리의 결투를 수수방관했다.
“혹시 이 중에 한국 게이머들 있습니까?”
“응?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게이머들인데.”
“그거 잘됐군요. 지금 저기 스파이크 건틀릿을 들고 있는 머리 긴 다크엘프는 중국 의화단 길드의 부단주 정도 되는 놈입니다. 지금까지 숱한 악행을 일삼은 악질 게이머죠. 저놈이 나를 쫓아 이곳까지 온 것 같은데 여러분들이 저놈을 좀…….”
“뭐, 뭐야? 비겁한 놈. 실력으로 안 되니까 쪽수 믿고…….”
“비겁한 놈? 클로킹 한 상태로 암살이나 일삼는 주제에 비겁이라고?”
“그래, 의화단 새끼들 다 죽여 버려야 돼.”
누군가의 호통이 터져 나왔고 배 안의 분위기는 클라우드에게 점점 불리하게 변해갔다.
“후후후, 어리석은 한국 놈들.”
“크아악!”
갑자기 클라우드의 주위에서 비명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포그리스 호수에 난데없는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희멀건 안개 사이로 핏빛 안개가 드리워졌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저런 미친놈,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더니.”
나는 핏빛 안개의 틈바구니로 다크 브레이커를 들고 뛰어 들어갔다.
피리링.
안개 속에서 10cm 길이의 바늘들이 빗물처럼 내게 쏟아졌다.
‘암기.’
나는 한 손으로 다크 브레이커를 공회전시키면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손목의 반동을 이용한 다크 브레이커의 공회전에 부딪힌 암기는 날아오는 힘이 그대로 역추진되어 거꾸로 클라우드를 향해 날아갔다.
자신이 내던진 암기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클라우드는 몸을 허공으로 뛰어 양다리를 학처럼 벌리며 내 등을 뛰어 넘으면서 내 어깨에 스파이크를 쑤셔 박았다.
“큭!”
우아하면서도 날렵한 동작. 직선으로 뚫고 들어가던 나는 놈에게 어깨를 내주면서 동시에 내 등까지 놈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죽엇!”
놈은 승기를 잡은 기사처럼 내 등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울컥!”
그러나 순간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클라우드가 무릎을 꿇었다. 내가 검병을 양손으로 거꾸로 쥐고 등 뒤를 향해 힘껏 찔러 넣은 것이다. 다크 브레이커에 클라우드의 오장육부가 감기는 게 느껴졌다.
“대단하다… 랏사드…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살을 주고 뼈를 잘라내다니.”
내가 검병을 쥔 두 손을 비틀어버리자 클라우드의 입에서 내장과 함께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암살자로 전직한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다시 고생 좀 해야겠는데.”
“져… 졌다.”
클라우드는 안면을 배 바닥에 처박으며 그 길로 황천길로 떠났다.
“랏사드, 혹시 랏사드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배 안의 소란이 끝나자 어떤 이가 나에게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임파젤 성에서 랏사드 당신의 플레이를 지켜본 게이머입니다. 이거 영광이군요. 이렇게 또 만나 뵙게 되다니.”
“그랬군요. 근데 님은 왜 페어러 사막으로 가는 거죠?”
“페어러 사막 지하에 발카라즈라는 지하 던전이 있는데 그곳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면 아데나와 함께 어마어마한 레벨업을 시켜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그리고 발카라즈 던전에서 미션 수행이 끝나면 페어러 사막의 옆 대륙인 로타카 대륙으로 가서 공성전을 치를 겁니다. 로타카 대륙에는 지금 엘리트 동맹이 호다드 성을 치기 위해 공성 신청을 해둔 상태라고 해요.”
“발카라즈 지하 던전이라고요? 그리고 엘리트 혈맹이요?”
엘르트 혈맹은 바로 김민우의 혈맹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발카라즈 지하 던전이라…….’
“그런데 랏사드 님은 지금 왜 페어러 사막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리고 또 저놈은 누구죠?”
“아… 임파젤 성 전투 후에 중국 암살자들이 저를 노리고 있어요. 곧 중국 암살길드들이 페어러 사막으로 절 찾아올 겁니다. 여러분들도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배에서 내리는 즉시 다른 곳으로 피하십시오.”
“맞다. 나도 얼핏 본 것 같아. 암살길드들이 라사드를 쫓고 있다는 글을…….”
“이런 나쁜 자식들! 랏사드 님, 이거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인사를 했던 게이머의 옆에 있는 사람이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다가왔다.
“뭔데요?”
“이글아이입니다. 없으시다면 받아주십시오. 암살자들과 싸우려면 필수 아이템이 될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의 호의를 봐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겠군요.”
나는 그에게서 이글아이를 받아 내 인벤토리 창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로만과 세나, 로큰롤메이지, 쎄미트리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다들 잘 있지? 나는 지금 페어러 사막으로 이동 중이야. 무사하다면 페어러 사막의 옆 대륙인 로타카 대륙으로 와줘. 그곳에서 엘리트 동맹과 함께 호다드 성 공성전에 들어가자. 나는 사막에 있는 발카라즈 던전을 지나서 그곳으로 갈 거야.]
[와, 대장. 살아 있었어?]
[그래, 덕분에.]
[랏사드 님, 프레드릭 님에게 들었어요. 암살 길드들이 랏사드 님을 노린다면서요? 무섭다, 암살길드.]
‘정말 우리 세나는 생긴 것하고 어울리지 않게 말해요.’
[그나저나 암살길드들이 노린다는데 대장, 로타카 대륙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겠나?]
[뭐, 그렇다고 쎄미트리가 도와줄 것도 아니잖아. 깍두기한테 맞고 자는 척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켁, 아픈 곳 찌르기가?]
[로큰롤, 로만, 세나, 쎄미트리와 함께 로타카 대륙으로 건너와. 혈의 눈물 깃발 펄럭이면서. 알았지?]
[알았어요, 대장.]
[그리고 프레드릭 님한테 고맙다는 말 전해줘. 우리 동지들 당분간 보살펴준 점 말이야.]
[그래, 알았어.]
[그럼 또 나는 귓속말 닫아두고 잠적한다. 그럼 로타카 대륙에서 보자고.]
[그래, 몸조심해라이.]
[랏사드 님, 몸조심하셔야 해요. 제발요.]
[랏사드 형, 살아 돌아와서 나 레벨업 시켜줘야지. 하하하.]
헤드셋 너머로 쎄미트리와 로만이 싸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여튼 저것들은…….’
나는 귓속말 수신거부를 누른 후 페어러 사막을 향하고 있는 뱃머리로 올라갔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페어러 사막이 여인의 나신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누구의 손길이 닿아서 저렇게 고즈넉한 광경을 연출해내는 것인가? 움푹 팬 분화구 같기도 하고 파도에 휩쓸리는 백사장 같기도 한 페어러 사막.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적막감 때문일까, 가슴을 죄어 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다.
슈슈슉.
“쏴라! 모조리 벌집을 만들어버려라!”
오랜 정적을 깨고 질그릇 깨지는 목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스벅스벅.
갑자기 날아온 화살들 때문에 배 안의 게이머들은 미처 방어도 하지 못한 채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져갔다.
‘뭐지? 이놈들이 벌써 도착한 건가?’
나는 배의 화물칸 뒤로 숨어 타워 방패를 치켜들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폭격으로부터 몸을 피했다.
갑판 위를 요약하자면 시산혈해(屍山血海).
사막 쪽 선착장에서 날아오는 화살 세례에 배에 있던 한국의 게이머들은 방어다운 방어 한번 못해보고 화살이 박힌 채로 쓰러져갔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화살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스버벅스벅.
내 타워 실드는 마치 방패의 끝에서 화살이 자라나듯이 빼곡히 화살이 박혀 있었다.
“텔레포션으로 배 안으로 들어가라. 놈이 죽었는지 확인하고 확인 사살하도록 해.”
누군가가 명령조로 말했고 배 안에는 보랏빛의 인영들이 물속에 먹물이 번지는 듯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텔레포션을 사용하는 걸 보니 꽤 실력 있는 자들이구나.’
“이곳에는 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놈은 붉은 늑대의 레더 세트를 입고 있다고 했다. 놈을 찾아라.”
나는 녀석들이 붉은 늑대의 레더 세트를 운운하자 재빨리 인벤토리를 열고 붉은 늑대의 레더 세트를 벗어버리고 윈드 플레이트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쪽에는 없습니다.”
“그래? 놈은 다크 브레이커를 들고 있다고 했다. 저쪽을 찾아봐.”
‘이런 씨팔.’
나는 또다시 다크 브레이커를 집어넣고 소울 엘리미네이터를 꺼내 들었다.
“이쪽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저기 화물칸밖에 없구나.”
‘이런 닝기리.’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내 아이템을 점검했다.
인피니티 대거가 있다. 단검류 중에서 가벼워 암기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놈들의 발소리가 화물 뒤에 숨어 있는 나를 압박하며 조여들어왔다.
휘리릭.
나는 인피니티 대거의 검병에 풀메탈 와이어를 단단히 감은 후 왕복선의 돛 기둥에 인피니티 대거를 던져 와이어를 연결해 두 손으로 와이어를 잡고 솟구쳐 오르며 와이어 액션을 펼쳤다.
파바밧.
“놈이 나타났습니다!”
화물칸으로 다가오던 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나는 로켓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돛대를 타고 다람쥐처럼 배의 끝에서 끝으로 내달렸다.
“쫓아라!”
나를 어떻게 쫓는다는 말인가? 날개가 있어서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돛대 위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며 배가 선착장에 닿을 때 사막을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페어러 사막을 뜨겁게 달구는 태양이 내 몸을 감쌌고 내가 꺼내 든 소울 엘리미네이터가 태양빛을 받아 광채를 뿜어냈다.
“큭, 눈부셔.”
태양을 등지고 소울 엘리미네이터에서는 빛을 뿜으며 나는 선착장에 모여 있는 놈들을 향해 파워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파워스트라이크!”
원형 모양의 검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자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놈들은 혼비백산해서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소울 엘리미네이터를 들고 몸을 돌리며 한바탕 검무를 추었다.
“케켁!”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선착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 강력한 공격에 틈을 내주고 그것도 모자라 몇몇은 목이 떨어져 나가자 포위망이 느슨해지며 공간이 열렸다.
“자, 그럼…….”
나는 그 열린 공간을 향해 열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라! 쫓아! 신호탄을 쏴라. 놈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려!”
피우웅.
누군가가 신호탄을 쏘았는지 사막 한가운데서 폭발음이 들리더니 섬광이 퍼져 나갔다.
‘의화단 길드들의 통문을 받고 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실력으로 봐서는 어쌔시네이트 길드는 아닌 것 같은데…….’
콰캉!
나는 포위망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가다가 갑작스러운 헤비 오크 액스를 맞받아 넘겼다. 그러나 그 막강한 파워에 그만 소울 엘리미네이터를 든 채로 뒤로 나뒹굴었다.
“엄청난 파워다. 누구?”
내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을 때는 자신의 신장만 한 헤비 오크 액스를 들고 있는 초록색 피부에 돼지코, 그 코를 꿰뚫고 있는 흰색 뼈다귀, 그리고 상투처럼 땋아 올린 머리채를 가지고 있는 오크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헤비 액스를 뒤로 젖혀 나를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휘리릭.
나는 급하게 몸을 비틀어 놈의 무식한 헤비 액스를 피했다.
쿵.
얼마나 강력한지 내리찍는 도끼의 힘에 모래로 된 사막이 울리는 것 같았다.
“크흐흐, 역시 뜬소문은 아니었군. 제법이야. 내 헤비 액스를 피하다니.”
“네놈들은?”
나는 그 무지막지한 도끼를 들고 있는 오크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돼지코 떼를 향해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익히 들어서 알 텐데. 우리가 바로 파이온 최고의 암살집단 어쌔시네이트다.”
‘이런, 돼지코 오크들이 어쌔시네이트의 구성원이었나? 우선 이곳을 피하고 볼 일이다.’
“파이온 최고의 암살집단이 나 같은 초보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는 소울 엘리미네이터의 칼끝으로 모래를 찍어 놈들에게 뿌린 후 등 뒤 선착장 쪽에 있는 허접한 암살집단과 눈앞의 어쌔시네이트를 피해 발카라즈 던전 쪽으로 달아났다.
“꼭 쥐새끼 같은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어떻게 할까요?”
“급할 거 뭐 있나? 천천히 놈을 사냥하자구.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의화단의 질렌도 도착해 있을 게야.”
“의화단 길드도 놈을 노린단 말씀입니까?”
“놈의 지역정보와 위치를 알려준 것도 의화단의 클라우드였어.”
“클라우드? 의화단의 실질적인 2인자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나저나 저 랏사드란 놈 뭔가가 있어. 레벨에 어울리지 않는 플레이도 그렇고… 단순하게 해커라고 보기에는 플레이 스타일이 전혀 어설프지 않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분명 뭔가가 있어요.”
“누가 그걸 몰라? 그 뭔가가 뭐냐고?”
“아… 예… 그럼 놈에 대해서 도둑 길드에 의뢰를 해볼까요?”
“도둑길드라… 놈들이 랏사드에 대해 뭘 알아낼 수 있을까?”
“밑져야 본전이니 의뢰라도 해보심이…….”
어쌔시네이트 길드의 수장 형가(刑家)는 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쌔시네이트 길드의 수장은 전국시대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던 자객 형가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었다.
“좋다. 당장 중국 게이머들 중 이름난 도둑 길드들에게 놈에 대한 정보를 캐라고 일러라.”
“예, 당장 거행하겠습니다.”
나는 페어러 사막의 모래 위를 달리고 또 달렸다.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어서인지 발이 모래에 파묻히는 바람에 뛰는데 속력이 붙질 않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모래를 동반했는데 그 때문에 시야도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이글아이가 있었지.’
나는 사막으로 오는 길에 범선에서 만난 게이머가 내게 준 이글아이를 떠올렸다.
나는 이글아이를 장착했다.
모래 바람 속에서도 이글아이는 시야를 확보해줬다. 맵을 보며 발카라즈의 위치를 확인했다. 게임 거리상으로 300m.
‘거의 다 왔군.’
나는 발카라즈 던전의 위치를 확인한 후 마나가 얼마 남지 않은 윈드 워크를 이용해 제비처럼 발카라즈를 향해 달렸다. 50m 정도 달렸을 때였다.
사막의 모레가 수렁처럼 갈라지더니 눈앞에서 모레를 뒤집어쓴 다크엘프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의화단 길드!”
“후후, 알아봐줘서 고맙군. 네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나보다 더…….”
나는 왕복선을 타고 호수를 건넜다지만 어떻게 놈들이 나보다 더 빨리 페어러 사막에 왔고 더구나 잠복까지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초보라 다르군. 바보 같은 놈. 마을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워프 비콘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군. 워프 비콘을 이용해서 먼저 도착해 있었군.’
그들 중 눈에 띄는 한 녀석이 있었다. 바로 배까지 쫓아왔다가 내게 맞아 죽은 클라우드였다.
“어이, 거기 가운데 있는 놈은 어디서 많이 본 놈인데.”
“닥쳐라, 네 생명도 여기서 끝이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모두 떨어뜨려주마.”
“후후, 리스타트해서 레벨이 많이 떨어졌을 텐데.”
나는 클라우드와 의화단 길드를 향해 허세를 부렸지만 속으로는 무진장 긴장하고 있었다. 적들의 규모가 포그리스 호수 때보다 두 배 정도 늘어나 있었다.
“놈의 찢어진 주둥이를 꿰매버려라.”
클라우드가 팔을 활처럼 당기며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질렌과 클라우드의 뒤에 도열해 있던 다크엘프 전사들은 블레이드헌터. 모두들 2단계 전직을 마친 중수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파도처럼 나를 향해 달려오면서 안개처럼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시작됐군, 놈들의 클로킹. 이글아이가 진가를 발휘할 때다.’
보인다, 놈들의 모습이. 나는 마치 라식 수술을 받은 사람처럼 놈들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심봉사가 효녀 심청이 덕택에 눈을 떴을 때의 기분이 아마 이러했으리라.
그 놀라움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다크엘프 블레이드헌터들의 움직임이란 정말 터무니없이 빨랐다. 스피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블레이드헌터. 하지만 그들에게도 단점은 있다. 바로 타 캐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체력. 놈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한방.
잽 열 번 먹이는 것보다 어퍼컷이나 훅 한 방으로 끝내야 한다.
내가 채 전략을 정리하기도 전에 놈들은 장기인 스파이크 건틀릿을 포기하고 이도류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결같이 B급 이상의 이도류인 스톰 콜러. 파워는 떨어지지만 연속 공격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쳐 데미지를 크게 입힐 수 있는 무기들.
놈들은 나를 난도질하려고 작정한 듯 보였다. 이도류 스톰 콜러의 날카로운 검날 수십 개가 나를 향해 들어왔다.
‘어디 맛 좀 봐라.’
“슬램 실드.”
슬램 실드는 일시적으로 방패에 충격을 가하여 적의 물리적인 스킬을 강제적으로 봉쇄하는 기술이다.
파캉.
나를 제압하기 위해 찔러 넣었던 스톰 콜러는 놈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갔다. 나를 내치던 이도류가 슬램 실드에 막혀 오히려 자신들의 움직임이 둔화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맛이 어떠냐?”
나는 소울 엘리미네이터로 낙엽을 쓸듯이 놈들의 몸통을 그어버렸다. 빠른 공격을 위해 중장갑을 걸치지 않은 녀석들은 날카로운 예기에 몸통이 베이고 팔이 잘려 나가고 심지어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두 동강이 나기까지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피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블레이드헌터를 이렇게 농락하다니…….”
“내가 말 안 했던가? 잽은 필요 없다고. 라이트 훅 한 방이면 끝나는 거야.”
내가 적들을 향해 나아갔던 소울 엘리미네이터를 빼돌려 재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 팔을 비틀 때 공격을 피해낸 의화단 놈들의 이도류가 내 어깨를 핥고 지나갔다.
“이런, 제길.”
선명한 핏방울이 허공을 가른다.
나는 뒤로 두세 바퀴를 구른 후 간신히 자세를 다잡았다.
“뭐야? 좀 쉬었다가 하자고. 나는 방금 라이트 훅을 날려서 힘들단 말이야.”
내 사정 봐줄 놈들이 아니다.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거친 공격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두세 놈의 이도류는 가볍게 흘려버렸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이도류 스톰 콜러가 복부를 파고들어왔다.
“헉.”
다행히 붉은 늑대의 레더 갑주가 치명상을 막아주긴 했으나 그 충격을 모두 흡수하지는 못했다. 내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피?”
나는 피를 보면 돌아버린다. 고스톱 칠 때도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똥 쌍피와 비 쌍피는 절대 양보 못하는 사람이다.
“개쉐이, 감히 오락신동 랏사드 님에게 상처를 입혀? 너는 오늘 뒈졌어.”
나는 오른손으로는 놈의 이도류를 부여잡고 왼손에 착용하고 있던 풀 플레이트 실드로 내 복부에 이도류를 찔러 넣은 놈의 머리통을 찍어버렸다.
풀 플레이트 실드의 끝 부분은 오각형의 모서리처럼 뾰족하게 생겼는데 그 뾰족한 모서리가 놈의 머리통에 식칼이 수박에 꽂히듯 박혀버렸다.
나는 방패를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어 박혀 있는 풀 플레이트 실드를 뽑아냈다. 머리에 박혀 있던 실드가 뽑히자 움푹 팬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놈들과의 싸움이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나는 재빨리 단축키를 이용해 F10에 힐링 버프를 걸어 놓았다. 유사시에 단축키를 이용해 내 체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놈을 포위해. 수적으로 우리가 유리하다. 놈의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어라.”
‘훗, 의화단의 단주 질렌. 나는 네놈이 무섭지 않다. 네놈의 속셈을 내가 모를 성 싶으냐? 부하들을 이용해 내 체력을 빼 놓은 다음 마지막에는 네가 등장하려고 하는 거겠지. 선젝터 같은 놈. 나는 너보다 오히려 클라우드가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슴속에 답답해져 오는 걸 느꼈다. 빨리 발카라즈 던전으로 피신해야 하는데 앞을 사람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두들 레벨 350 이상의 고수들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뒤에서는 중국 최고의 암살 집단이라는 어쌔시네이트가 나를 노리고 있다.
게임하면서 한두 번 죽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아니지나 무 하면서 초보 시절에 PK 당하고 몹에게 당했던 게 한두 번인가.
게임의 제왕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죽으며 떨구게 될 아이템이다. 싸구려 단검 정도야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파괴자의 검이나 샐러맨더 검은 그 하나하나가 시가로 중형 자동차 한 대 값과 맞먹는 값비싼 아이템이다. 그런 고급 무기를 짱깨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순 없단 말이다.
슬램 실드와 방패 모서리로 골 까기에 주춤해진 녀석들이 잠깐 뒤로 물러섰다가 날카로운 이도류를 고쳐 쥐고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제길, 이글아이 마나가 소진되어가잖아. 아껴야 해.’
나는 왕복선에서 한국의 게이머에게 선물 받은 이글아이를 잠시 꺼뒀다. 그리고 윈드 워크로 후진하면서 사막의 모래 산을 넘어 능선 아래 몸을 감췄다.
내가 사라지자 놈들은 모래산 능선을 뛰어넘어 나를 쫓기 위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기다렸다, 이 자식들아.”
나는 이글아이를 재착용함과 동시에 방패 대신에 왼팔에 해저드 보우 건(Hazard bow gun)을 갈아 끼웠다. 한 번의 카트리지 장착으로 최대 30회 연사가 가능한 해저드 보우 건이 능선을 넘어서면서 약점을 드러낸 의화단원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피피피핑.
발밑에서 쏟아져 오는 화살 때문에 채 방어를 할 수 없었던 놈들은 사타구니와 하복부에 집중포화를 당해 힘이 빠져 내가 있는 쪽으로 추락했다.
급박한 순간에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놈이 있었는데 내가 쏜 화살이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국부에 꽂혀 마치 물건이 밖으로 삐져나온 것마냥 보였다.
“영혼을 파괴시켜주마.”
능선을 넘다 화살에 맞아 추락하는 놈들을 향해 이번에는 소울 엘리미네이터가 작렬했다.
“크악!”
하체에 힘이 빠진 녀석들은 방어다운 방어 한번 해보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 내 검의 사정권을 벗어난 놈은 순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행운만은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녀석은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이도류로 상체를 지탱하며 근근이 서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움켜 쥔 후 왼손에 들고 있는 해저드 보우 건을 이마에 갖다 대고 날렸다.
피핑.
화살 3개가 녀석의 이마에 연속으로 꽂혔다.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놈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아직도 나를 쫓는 의화단원들을 향해 보우 건을 쏴대면서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모래산 능선의 좌측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부하들의 손실이 너무 큽니다, 단주.”
“그래, 안 되겠다. 클라우드 네가 나서야겠다.”
“저는 레벨이 많이 떨어져서…….”
“지금 항명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능선을 거의 넘어 발카라즈 던전을 향해 내빼려 할 때 빠른 속도로 한 인영이 다가왔다. 의화단주의 충복 클라우드였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비켜라, 살고 싶다면.”
나의 으름장에 클라우드는 냉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