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With or without you (10/51)

chapter 9 With or without you

로만이는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임을 하기로 한 이후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알아낸 건데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한다. 내가 중학교 입학할 무렵에 세상의 빛을 보며 응애응애 울고 태어난 것이다.

기다리던 금요일이 됐고 나는 우리 혈의 눈물 멤버들을 만나기 위해 박만호 영업부장을 졸라 월말에 나오기로 한 성과금과 급여를 미리 당겨 받기로 했다.

“여, 우리의 호프(Hope) 랏사드가 무슨 돈 쓸 일이 있다고?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잖아?”

“예, 사실은 우리 혈의 눈물 동지들과 오늘 파티 모임이 있거든요.”

“파티 모임? 자네 그런 것도 하고 사나? 허허, 역시 고수는 다르군, 달라.”

“어떻게 좀 성과금이라도 미리 좀 주실 수 없을까요?”

“그래그래, 자네 일이라면야 내가 도와줘야지. 그것도 다 원활한 게임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 아니겠나? 허허허, 내가 업무지원팀에 잘 이야기해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구.”

“고맙습니다, 부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박만호 부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을 때 박부장의 옆에 앉아 있던 강미영 팀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내가 파티 모임이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그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한겨울 얼음장 같은 그녀의 시선을 나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박수혁 씨, 지금 한가하게 파티 모임이나 하러 다닐 때예요?”

“왜요?”

“김민우 씨야 주말이라 집에 갔다지만 최상조 씨 보세요. 하루라도 더 좋은 플레이를 위해서 오늘도 불철주야 게임에 열중이시잖아요. 그런데 이제 겨우 레벨 78이면서 그렇게 한가하게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다니면 도대체 언제 고수 되실래요?”

‘미영아, 좀 솔직해져라. 혹시라도 세나가 너보다 예쁠까봐 고민이냐? 그리고 내가 남들 보기에는 레벨 78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오락신동, 게임의 제왕 아니냐?’

“예, 예, 알겠습니다. 강미영 웹서버관리팀장님.”

나는 일부러 그녀의 직함을 강조했다.

“학교 다닐 때도 수학여행이나 소풍이라는 게 있잖아요. 선생님들이 뭐라고 그래요? 그것도 학업의 연장이라고 그러시잖아요. 이 파티 모임도 다 게임의 연장이라고요. 정보도 주고받고 혈맹원들 간에 우애도 다지고 그러다 보면 혈맹의 능력치도 올라가는 거예요.”

“정보도 주고받고? 그런 허접한 사람들하고 무슨 정보를 주고받으실까? 정보나 빼앗기지 마세요. 괜히 공명심에 사로잡혀서 광개토 대왕 이야기나 함부로 안 꺼내셨으면 싶네요.”

이 여자가 오늘 그날인가? 왜 이리 오늘따라 히스테리야?

“예, 예, 알겠습니다. 강미영 웹서버관리팀장님.”

“보안에 신경 쓰세요.”

그녀는 나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대화하고 싶은 의지가 사라졌는지 회전의자를 거세게 돌려 나를 외면했다.

“수혁이, 내가 업무지원팀장한테 이야기했더니 자네 통장으로 송금 완료했다는군. 한번 확인해봐. 그리고 오늘 재미있게 놀고.”

“감사합니다, 박부장님.”

나는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박부장에게 인사를 건넨 후 일부러 미영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수혁 씨, 잠깐만요.”

“왜 또 무슨 충고를 하시려고…….”

“그래도 혈맹 군주신데 그 몰골로 파티 모임에 나가실 건 아니죠?”

“왜요? 내 모습이 어때서?”

“몇 십 년 전에나 유행하던 일자 청바지에, 정체불명의 그 티를 입고 나가신다고요? 그것도 며칠씩 입은 채로 잔 그 옷을?”

그녀는 신호 위반에 걸린 운전자가 면허증 밑에 천 원짜리 지폐를 뇌물로 줄 때의 교통순경처럼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저 따라오세요. 이곳에는 아울렛이 많이 있으니까 제가 직접 골라드리죠.”

그 길로 나는 미영이를 따라 가리봉의 명소 싸리오 아울렛에 가서 옷을 몇 벌 샀고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오전부터 세나와 로만이에게서 계속해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뭐 대충 오늘 모임이 엄청 기대된다는 그런 것들이었다.

나 역시 오늘 모임이 엄청 기대됐다. 다른 무엇보다도 세나의 실물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게임 캐릭터의 반절만 닮았어도 혈의 눈물은 영원하리.

“저기 혹시, 랏사드?”

영등포역 앞에 잠시 서 있으니 옆에 있던 꼬마가 말을 걸어왔다.

“그럼 네가 로만?”

“형님, 반갑습니다. 저 로만이에요. 본명은 김요왕이구요.”

“어… 너 정말 초등학생이었구나.”

“헤헤헤헤, 그럼 제가 유치원생일까 봐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와 있니?”

“세나 누나 왔는데 잠깐 백화점에 갔다 온다면서 갔어요.”

“그래? 로큰롤은?”

“글쎄요, 로큰롤 형은 아직 연락 없었는데…….”

“쎄미트리는 기차 도착시간이 7시 20분이라고 연락 왔어.”

“그럼 로큰롤 형에게 연락하고 세나 누나 나오면 먼저 들어가서 쎄미트리한테 연락 주죠.”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요왕이를 오프라인에서는 처음 만났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은 친숙함을 느꼈다. 파이온 게임은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세상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이미 그 세상에서 생사를 같이한 혈맹 동지니 그런 느낌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으리라.

“어? 세원 누나, 여기예요. 랏사드 형, 아니 우리 군주님 오셨어요.”

나는 세나를 부르는 로만이의 말에 그의 목소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환상, 기대, 그동안 가져왔던 세나라는 인물에 대한 모든 관념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어마, 랏사드 님. 반가워요.”

헤드셋을 통해 들려오던 것보다는 훨씬 여성스럽고 맑은 목소리.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예, 반…갑…습니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쭉쭉빵빵한 나의 그녀가 뽕브라였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기분? 군대에서 펜팔 하던 여자의 사진을 받아보고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보니 뽀샵질과 화장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 중국 여행 갔다 온 친척이 롤렉스시계를 선물해줬는데 일주일도 안 되어 바늘이 멈춰버렸을 때의 감정? 그런 모든 것들이 뒤섞인… 한마디로 정신적 공황과 심리적 쇼크 상태에 나는 빠져버렸다.

“어마, 랏사드 님, 실물도 역시 멋지시네요. 키도 크시고 얼굴도 남자답고…….”

세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는데 순간 양볼이 붉게 물들었다.

‘헉, 웬 이쁜 척.’

정말 게임 캐릭터와 똑같구나. 공주병 증세 있는 것만.

“형, 어디로 들어가죠.”

“그, 그래. 어디가 좋을까?”

“우리 레스토랑 가요.”

“그러죠.”

“아이, 랏사드 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요? 왜요? 액면으로는 누님 같아 보이는데 제가 말 놓으면 남들이 싸가지 없다고 얼마나 욕하겠어요. 그냥 불편한 게 좋겠군요.’

“그… 그럴까요?”

나는 그녀와 말을 편하게 했다가는 친해져버리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또, 요가 아니라 ‘그럴까’죠.”

“그… 그래. 로만아, 이 근처에 잘 아는 레스토랑 있니?”

요왕이라는 이름보다는 로만이라는 이름이 더 입에 익숙했다. 물론 세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묻지 않고 로만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대충 아무데나 가죠. 저야 어차피 미성년자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 생각을 못했네. 요왕이 너는 초등학생이니까… 그럼 그냥 햄버거 집 갈까? 어때요, 랏사드 군주님?”

“그래… 좋을 대로.”

나는 갑자기 김씨소프트 작업실에서 혼자 끓여 먹던 컵라면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나를 여자 외모만 밝히는 놈이라고 욕해도 좋다. 나는 어차피 여자는 예쁘기만 하면 대머리여도 용서하는 스타일이니까.

우리는 로큰롤메이지에게 연락을 한 후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햄버거를 먹었다. 본명이 송세원인 세나는 그 큰 입으로(입이 얼마나 큰지 입술이 소시지 두 개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깨작깨작 마치 공주처럼 햄버거를 야금야금 먹었다.

거울은 또 어찌나 자주 보는지 나와 로만이가 햄버거를 다 해치우고 감자튀김까지 다 먹어치울 때까지도 햄버거의 절반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랏사드 형님, 그나저나 본명이 뭐예요?”

“그래요, 우리 군주님 본명이 너무 궁금하네요.”

“수혁이야, 박수혁.”

“와, 수혁. 본명도 정말 멋지다. 수혁 오라버니.”

오라버니? 내가? 너의? 네가 내 누님 아니고?

“그, 그래…….”

“예, 정말 너무 멋져요. 완벽해요.”

그녀는 소시지를 겹쳐놓은 듯한 큰 입을 벌리며 해맑게 웃었는데 이빨 사이에 햄버거에 들어 있던 초록빛 상추 같은 것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거울은 그렇게 많이 보더니 도대체 뭐 한 거냐? 그것도 하나 제거 안 하고.’

나는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하마 같은 여자는 세나가 아니고 틀림없이 세나의 하녀 또는 세나가 나의 인물됨을 알아보기 위해 미리 보내놓은 친구 정도일 거라며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빨에 낀 상추는 그나마 남은 기대마저도 산산이 짓밟아버렸다.

“랏사드 님, 이건 약소하지만 그때 초심자의 마을에서 제 생명을 구해주신 데 대한 보답이에요.”

“예?”

그녀는 여전히 상추 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수줍은 듯한 자태로 나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세요. 약소하나마 제 마음을 담았어요.”

나는 정말이지 탄저균이 들어 있는 소포를 열어보는 듯한 심정으로 쇼핑백을 받아 열었다. 그런데 그 쇼핑백 안에는 탄저균 대신 손목시계가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와, 세원이 누나, 돈 많은가봐?”

“뭘, 그냥 약소한 거야.”

“까르띠에 시계, 이거 몇 백만 원 하는 거 아니에요?”

‘뭐라고? 몇 백만 원? 이게 뭔데 그렇게 비싼 거야? 설마.’

“응… 그냥 제일 싼 걸로 하나 샀어.”

“이렇게 값진 걸 받아도 되려나…….”

나는 솔직하게 이 시계가 명품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나의 촌스러움이 들통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로만이와 세나의 이야기를 종합해본 결과 명품 까르띠에 몇 백만 원이라는 정도를 알 수 있었다.

“누나, 직업이 뭔데?”

“직업? 얘는 무슨 직업이야. 나 아직 대학생이야.”

“근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서 어떻게 보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렇게 비싼 선물을 해?”

“그냥 우리 아버지가 조금…….”

“그러고 보니까 누나 강남 산다고 그랬지?”

“뭐 그냥…….”

‘강남? 대한민국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나의 지론. 돈질 앞에 장사 없다. 철권에서 처음으로 나를 무릎 꿇게 했던 것도 돈질이 아니었던가. 그 순간부터 세나의 얼굴이 달라 보이려고 했으나 혹시 그렇다면 저 얼굴이 돈 들여서 고친 얼굴일까 라는 데 생각에 미치자 좀 전보다 더 큰 실망이 밀려 왔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나의 실망이 점점 커져가고 있을 때 즈음 로큰롤메이지가 도착했고 또 오래지 않아 쎄미트리도 도착했다.

로큰롤메이지는 본명이 조재범으로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 많았고 쎄미트리는 본명이 유상효이며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건장한 남자였다.

파티 모임에서 나의 기대를 가장 충족시킨 사람은 쎄미트리였다. 그는 온라인 상에서나 오프라인 상에서나 초지일관하는 사람이었는데 게임 상의 쎄미트리만큼이나 실제 성격도 괄괄하고 막무가내였다. 또 어찌나 솔직하던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아무런 거리낌과 망설임 없이 토해냈다.

“세나, 아니 세원 씨, 진짜 실망이다. 그냥 게임 상에서만 만날 걸 그랬데이. 허허허.”

로큰롤메이지가 그런 쎄미트리에게 숙녀에게 무례라며 면박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쭉한 입담은 예의를 몰랐다.

“세나, 입술 썰어 접시에 담으면 두 접시는 나오겠는데. 허허허.”

정말 그의 말은 거의 언어 테러에 가까웠는데 속없는 로만이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그래도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는 법이라고 세나는 성격 하나는 끝내줬는데 쎄미트리의 계속되는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 지으며 그의 말들을 받아 넘겼다.

“어디 두 접시뿐이겠어요. 저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에요? 세 접시는 될걸요. 호호호.”

“저도 쎄미트리 님 그냥 게임 상에서만 만날 걸 그랬어요. 쎄미트리 님은 오프라인에서도 인간보다는 오크에 가까우신걸요? 호호호.”

그녀의 반격에 쎄미트리도 한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큰롤도 로만이도 세나도 쎄미트리도 모두 즐거워 보였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가 싫진 않았다.

그래도 뭔가 한구석이 허전한 마음이 들었는데 어쩌면 그 감정은 미영의 높은 콧대에 대한 보상을 세나에게서 받으려고 했던 기대감이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다들 허물없이 가까워졌고 우리는 2차로 맥주를 마시러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호프집으로 가는 중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그때 햄버거 집에서부터 호프집까지 선팅을 진하게 한 검정색 차가 우리의 뒤를 슬며시 쫓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차량은 호프집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고 그냥 밖에서 정차하고 있을 뿐이라 별다른 생각 없이 호프집 안으로 들어갔다.

호프집에 들어왔을 때 입구의 웨이터가 로만이 때문에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한 성격 하는 쎄미트리가 로만이가 자신의 조카고 자기가 보호해주면 된다고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웨이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우리의 입장을 허용해줬다.

우리의 이야기는 간단한 안주와 함께 시작됐다.

“요즘 중국놈들의 아이디 도용 사건 정말 문제야, 문제.”

“그러게요, 그 피해액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또 시민단체가 김씨소프트사를 상대로 개인정보 유출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거라더군요.”

“정말 짱깨들 때문에 이만저만 피해가 아인기라.”

쎄미트리는 로큰롤의 말을 받으며 특유의 경상도 사나이의 억양으로 열변을 토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자 세나는 주량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원샷으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고 어른들 노는 자리에 적응을 못했는지 로만이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나를 한번 쳐다봤다 다른 멤버들을 쳐다봤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세나가 술 취한 모습으로 나에게 두 접시는 나올 듯한 입술을 들이밀며 러브샷을 하자고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쎄미트리와 로큰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난 술 마시는 거라면 게임만큼이나 자신 있었는데 쎄미트리의 주량도 보통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나는 혀가 꼬였는지 발음이 샜고 로큰롤은 술 때문에 빨개진 얼굴을 숙인 채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랏사드 형, 저 꼭 레벨업 시켜주시고 제 캐릭터 키워주셔야 해요.”

로만이는 오늘 술자리 내내 그 이야기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빼먹지 않고 했는데 시간이 늦어 먼저 간다면서도 마지막까지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로만, 벌써 가려고?”

“예… 누나, 저 먼저 갈게요.”

술이 취해 말조차 제대로 못하던 세나는 로만이 간다고 하자 그나마 정신을 차렸는지 작별 인사를 하더니 다시금 머리를 탁자에 처박고 잠이 들어버렸다.

“로만아, 그럼 내일 피나울 연못에서 보자.”

“예, 형님. 내일 파이온에서 만나요. 로큰롤 형님도 일어나면 잘 들어가시라고 전해주시구요.”

“그래, 우리 로만이 잘 들어가래이.”

내가 문 밖으로 나가는 로만이를 보고 있을 때 쎄미트리가 3000CC 피처 잔을 들었다. 로만의 뒷모습을 보던 내 눈에 선글라스를 낀 채 바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는 점퍼 차림의 여자가 보였는데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중성적 매력을 풍기는 여인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인데… 어디서 봤더라…….’

내가 그 여자에게 시선을 주고 있자 쎄미트리가 나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랏사드, 술 한잔 받아야지 뭐 하고 있노? 누구 보는 기가?”

“아… 아니, 그냥…….”

“이거 랏사드 군주님, 주량도 보통이 아이네. 그나저나 어떻게 그렇게 게임을 잘할 수 있는 기고? 레벨 20의 초보가.”

“아… 그거요… 뭐 그냥… 아이템에 돈질 좀 하다보니까…….”

“뭔가 수상하단 말이야…….”

“수상하긴요… 뭘… 그런 게 수상해요?”

“아이다… 수상하데이…….”

“자, 한잔해요. 자꾸 그러니까 술 맛 떨어지려고 하네요.”

“그래그래, 먹고 죽자.”

쎄미트리도 술이 좀 들어갔는지 점점 목소리가 커져갔고 발음이 또렷하지 않았다. 그는 술이 점점 들어갈수록 목소리가 커졌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험상궂은 인상의 아저씨들이 가끔 쎄미트리의 우렁찬 목소리 때문인지 우릴 가끔씩 흘겨보곤 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다 쎄미트리가 또다시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아제가 말이다. 중국에 가서 사업한답시고 공장을 샀는데 중국 공무원 자슥들이 우리 아제 사업을 꿀꺽 해뿔라꼬 무슨 소방 설비가 미흡하다, 무슨 안전시설이 미흡하다 하면서 자꾸 대출을 강요하고 뇌물을 요구하더란다. 그래가 우리 아제가 공장 다 지아놨는데 못 돌리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놈들이 시키는 대로 대출 받아서 설비를 갖췄는데 갑자기 중국 은행에서 원금하고 이자를 갚으라꼬, 몬 갚으면 압류한다고 협박하고 으름장 놓고 해가 결국은 공장 그대로 남겨놓고 한국으로 도망 와서 신세 한탄하고 살고 있다. 중국 놈들 진짜 나쁜 놈들이데이.”

“그랬군요…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요.”

“그것도 모자라가 인자는 우리나라 주민등록 번호까지 도용하고 그놈들이 뭐 하는 놈들이고. 순전히 하는 짓거리가 생 양아치다 아이가.”

나는 점점 커져가는 쎄미트리의 목소리가 불안해졌는데 때 마침 양아치에 억양을 넣어서 말을 해서인지 옆 테이블에 앉았던 무서운 인상의 깍두기 형님들이 우리 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매서운 시선이 결국은 사단을 불러 일으켰다.

“점마, 머 저래 째려보노?”

“쎄미트리… 많이 취했어요. 진정하세요.”

“야, 거기 경상도 사투리 쓰는 새끼, 방금 뭐라고 했어?”

드디어 겉옷이 미어터질 정도로 살이 붙은 깍두기가 쎄미트리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서 두 주먹으로 두두둑 하는 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뭐라꼬? 니가 내를 언제 봤다고 새끼라고 하노. 니 미친나?”

“죄… 죄송합니다. 우리 형이 좀 많이 취해서요.”

나는 사태를 막아보려고 했으나 이미 쎄미트리의 말은 탁자 위에 엎질러진 맥주처럼 주워 담을 수 없게 돼버렸다.

“야, 경상도 촌뜨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설레바리쳐?”

뱃살로 허리를 둘러버린 그 깍두기는 엉기적엉기적 다가오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쎄미트리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니 이거 몬 논나? 셋 셀 때까지 이 손 노으래이.”

“진… 진정하세요… 제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탁자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솥뚜껑 같은 손으로 쎄미트리의 머리채를 낚고 있던 사내가 반동을 이용해 쎄미트리의 머리를 탁자에 찍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쿠야!”

“엄마야! 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야?”

술에 취해 뻗어 있던 세나와 로큰롤은 큰 소리에 눈을 떴다가 주위를 보고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는지 놀란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선생님, 제발 참으세요…….”

“선생은 무슨 선생!”

‘그럼 학생이에요?’

나는 그에게 되묻고 싶었으나 두 팔로 그를 팔을 붙잡고 그를 만류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깍두기 선생님은 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는지 몸을 돌려 나의 가슴팍을 밀어버렸다.

“뭐야, 넌 또… 너도 죽고 싶어?”

나는 그만 얼떨결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생님, 제발 고정하세요.”

그제야 술집 웨이터가 허겁지겁 달려와 깍두기 선생님을 만류했다.

“너도 뒈지고 싶어?”

그 깍두기가 술집 웨이터의 멱살을 움켜쥔 채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게 아니라 손님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진정하시라고…….”

“이 새끼가 근데 어디다 대고 훈계야, 훈계가.”

그의 솥뚜껑 같던 팔이 웨이터를 후려치려고 할 때였다.

“어이, 돼지 새끼. 그만 진정하시지.”

‘헉, 이건 또 누구야? 이러다 오늘 나 작업실에 못 들어가는 거 아냐?’

나는 놀란 눈으로 깍두기를 자극하는 사람을 바라봤다. 깍두기를 자극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바에 홀로 앉아 병맥주를 마시던 보이쉬한 커트 머리 여자였다.

“이 미친년은 또 뭐야? 오밤중에 선글라스 끼고, 너 봉사냐?”

“그래, 나는 봉사라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이 돼지 놈아.”

‘저 여자가 뭘 믿고 설치는 거야?’

나는 불안에 떨며 슬쩍 우리 멤버들을 쳐다봤다. 그 기세 좋던 쎄미트리는 머리가 깨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충격이 심하지 않을 텐데 기절한 척하고 있었고 세나와 로큰롤은 간이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었는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이년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부웅.

솥뚜껑 주먹이 여자를 눌러버릴 듯한 기세로 여자의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퍽.

순간 술집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어버린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가냘픈 여인이 솥뚜껑 주먹에 쥐포가 돼버릴 것 같았는데 어느새 여자의 구두가 깍두기 선생님의 울대를 짚고 있었다.

“켁… 켁…….”

“돼지새끼가 학교 교육을 잘못 받았는지 걸핏하면 년이야.”

그녀는 깍두기의 울대를 짚고 있던 발을 지탱하던 발의 반동을 이용해 커다란 원을 그리며 깍구기의 면상을 돌려 찼다.

정말 그림과도 같은 교과서적인 돌려차기였는데 그 발에 얻어맞은 깍구기의 목이 분질러질 것처럼 휘어지더니 온몸이 반 바퀴 정도 돌아 빈 테이블로 그 육중한 살덩어리가 나가떨어져버렸다.

“저, 저년은 또 뭐야?”

쨍그랑.

깍두기의 동료들이 그들의 동료가 당하자 술병을 깨어 들고 그녀를 덮쳐들었다.

“웁!”

그러나 다음 순간, 깨진 술병을 들고 달려들던 깍두기2는 양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눈알이 튀어 나올 것 같은 얼굴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똑똑히 바라봤다. 선글라스 낀 여인의 손이 깍두기2의 불알을 움켜쥐는 모습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깍두기2를 선글라스 여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정말로 남자의 생명이자 인류의 종족 번식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그 중요한 것을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움켜쥐었다.

뽀도독.

호두알 까지는 듯한 소리가 저 멀리 카운터의 여 종업원의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퍼졌다.

깍두기3이 비좁은 공간을 헤집고 선글라스 여인에게 공격을 할라치면 종족 번식의 수단을 잡고 있는 그녀는 깍두기2를 이용해 그의 몸놀림을 막아버렸다.

깍두기3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려 하면 그녀는 깍두기 2를 조종해 오른쪽을 방어했고 그 반대쪽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제압하다가, 깍두기3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 깍두기2의 등을 짚고 넘어가 양 팔꿈치로 깍두기 3의 정수리를 찍어버렸다.

깍두기3은 정수리를 찍히더니 오바이트를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다리가 풀려 쓰러져버렸다.

“하룻밤 안주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소란 피우고 지랄이야. 여기서 썩 꺼져버려.”

조금은 중성적인 외모에 어울리게 선글라스 여인은 욕설을 담아 말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너… 이년, 기억해두겠어… 두고 보자.”

깍두기2는 연신 양손으로 바지춤 가운데를 어루만지면서 힘든 표정으로 깍두기 1과 3을 깨워서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짝짝짝짝.

호프집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뭐라고 감사들 드려야 할지…….”

“뭘요. 박수혁 씨죠? 여기 정리하고 밖에 있는 제 차로 오세요.”

“어떻게 제 이름을?”

나의 의아한 얼굴에 그녀는 한마디를 남겨두고 나갔다.

“임승수 전무가 보내서 왔습니다. 모임 정리하고 나오세요.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임과장이 보냈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지금까지 마신 술이 다 깨는 것 같았다.

“누고, 저 여자? 랏사드 아는 여자가? 억쑤로 쌈 잘한데이.”

언제 깨어났는지 쎄미트리가 머리를 매만지며 나에게 물었다.

“저도 모르는 여잡니다.”

“하여간에 우리 랏사드는 비밀이 많은 남자야.”

로큰롤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세나는 술이 깼는지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핏기가 가시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세나, 좀 괜찮아?”

“예… 뭐… 그냥 그러네요. 지금 몇 시죠?”

“11시 30분이야.”

“어마, 벌써 그렇게 됐어요?”

“뭐가 벌써고. 인제 겨우 초저녁 아이가?”

“초저녁은요, 아빠 걱정하시겠다. 저도 그만 들어가 볼래요.”

“이게 뭐꼬? 고생해서 대구에서 올라왔드만 벌써 파장 분위기가?”

“쎄미트리, 이제 그만 들어가지. 내일 게임도 해야 되잖아. 오늘은 여기서 그만 정리하자고.”

로큰롤도 세나를 따라 들어갈 분위기였다. 나 역시 밖에서 기다리는 여자의 정체와 임과장이 왜 그녀를 보냈는지 몹시도 궁금했기에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쎄미트리,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또 다음에 만나서 놀자고요.”

“됐다 마, 너거들끼리 잘 놀아라.”

쎄미트리는 잔뜩 삐친 표정으로 친구로 보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재워달라고 사정을 했고 우리는 내일 오후 6시 제2의 공성전 참가를 약속하며 김빠진 오프라인 모임을 마감했다.

나는 로큰롤, 쎄미트리, 세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임과장이 보낸 여자를 만나러 나갔다.

나는 그녀가 타고 온 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말 대신 손바닥을 안쪽으로 구부리며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말 터프한 여자군.’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자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수혁 씨, 전 채하영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형사처럼 불쑥 손을 내미는 그녀의 위용에 나는 약간 주눅이 들었는지 말을 더듬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서울까지 올라오신 분이 술이나 마시고 다녀야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다들 우리 혈원들이라…….”

“국가를 위해 일하실 분이 그런 양아치들에게 봉변당할 뻔하고… 군대에서 태권도 안 배웠어요? 쯔쯔.”

‘뭐야, 이 여자? 내가 무슨 죄인도 아니고… 나 행정병 출신이다. 됐냐?’

“예… 근데 임과장님께서 무슨 일로 하영 씨를? 혹시 전에 말씀하시던 보디가드가 하영 씨?”

“보디가드요? 하하하!”

‘무슨 여자 웃음소리가 쎄미트리 같냐?’

“뭐, 보디가드라고 해두죠.”

“근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가 서울 올라온 지 한참 됐는데 이제야…….”

“자세한 사항은 대외비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구요. 앞으로 외출하실 때는 우리 통제를 받으셔야 합니다.”

“통제요? 제가 무슨 죄인도 아니고… 무슨 일인지 알아야…….”

“대외비 사항이라고 했잖습니까? 저는 두 번 말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헉, 이 여자… 정말… 멋지다. 자세히 보니까 조금 남자 같긴 하지만 눈, 코, 입도 균형 잡혀 있고 키도 크고… 이런… 내가 조금 변태 취향인가? 왜 이렇게 터프한 여자에게 끌리는 거지? 나는 새디스트인가?’

“앞으로 밖에 나갈 때는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김씨소프트사에도 조치해뒀습니다.”

“예? …예.”

그녀는 내 핸드폰을 다짜고짜 빼앗아가더니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웅우웅.

그녀가 내게 핸드폰을 건네려고 할 때 진동으로 해둔 핸드폰이 심하게 울렸다. 핸드폰 액정에는 강미영이라고 쓰여 있었다.

“여보세요?”

“수혁 씨, 저예요. 빨리 사무실로 들어오세요.”

“무슨 일인데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들어와 보시면 알아요. 급한 일이니까 빨리 들어오세요.”

‘오늘 이 여자들이 왜 이래? 전부 명령조네.’

“알았어. 지금 들어갈게.”

나는 전화를 끊고 채하영을 쳐다봤다. 그녀는 나에게 뭘 바라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기, 김씨소프트 사무실까지 좀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시죠.”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대답. 역시 시원시원한 여자다.

“앞으로 외출할 때는 무조건 사전 보고하세요.”

차에서 내릴 때 잘 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그녀가 내던진 한마디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허겁지겁 김씨소프트 사무실로 올라갔다.

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늦은 시간이지만 강미영과 깔깔이 입은 프로그래머가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강미영 씨가 이야기해줘. 나는 이만 피곤해서 먼저 잘 테니.”

깔깔이 프로그래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신의 라꾸라꾸 침대를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뭘 이야기한다는 거야?”

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영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그녀는 대답 대신 컴퓨터에 앉아 모니터를 나를 향해 돌려줬다.

<파이온 온라인 월드 자유 게시판>

“파이온 게시판을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야?”

“이곳 월드 자유 게시판은 현재 서비스 제공 중인 5개국 모든 회원들이 글을 올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 여기 월드 자유 게시판 읽으신 다음에는 이곳 국내용 자유 게시판 참여의 창을 읽어보시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약간 기가 막힌다는 듯한 미영의 말투에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 미영이 비켜준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바라봤다.

게시판의 한 페이지에는 15개의 게시물이 등재되는데 첫 페이지에는 모두 비슷한 제목의 게시물이 등록되어 있었다.

<제목: 킬 라사드>

가장 위에 기록되어 있는 ‘킬 라사드’를 필두로 첫 화면의 15개 게시물은 모두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제목: 라사드 암살 작전>

<제목: 라사드 죽인 자에게 최고급 아데나 지급>

<제목: 현상수배 ‘라사드’>

나는 가장 위에 기록된 ‘킬 라사드’를 클릭했다.

<위대한 중국의 파이온 유저들이여, 최근 중국 게이머만 골라서 PK하고 있는 ‘라사드’를 죽여 버리자. 중국의 모든 암살길드는 ‘라사드’를 암살하는 일에 앞장서라.>

나는 그제야 미영이가 왜 그렇게 어이없어 했는지 이해가 됐다. 나는 곧바로 두 번째 게시물을 클릭했다.

<제목: 라사드 암살 작전>

중국 최고의 암살길드 의화단의 이름으로 경고한다. 라사드, 너는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이게 뭐야? 이것들은 뭐 하는 것들이지?”

두 번째 게시물의 작성자는 ‘의화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을 게시한 이들은 틀림없이 중국내의 파이온 암살 길드 집단들일 거예요.”

“이놈들이 어떻게 나를 아는 거지? 그리고 나는 라사드가 아니라 랏사드야, Rassad 랏사드.”

“글쎄요, 저들이 말하는 라사드는 분명 수혁 씨의 랏사드일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국내 게시판 참여의 창을 읽어보세요.”

나는 미영의 지시대로 참여의 창을 클릭했다.

<제목: 김씨소프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제목: 미친 떼놈들의 무차별한 암살 작전이 시작됐다.>

<제목: 의화단 같은 대조직이 왜 저를?>

게시판을 가득 글 들 중의 하나를 클릭했다.

<오늘 글리덴 마을에서 몹 사냥 중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무도 없는 데서 칼이 날아와 저를 PK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라사드를 죽여 버리겠다면서… 아래 게시판들을 읽어보니 PK 당한 사람들이 저뿐만이 아닌 것 같군요. 아이디가 저랑 비슷한 사람들은 다 죽었네요.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해킹인가요?>

“뭐야? 라사드를 중국놈들이 죽이고 다닌다는 이야긴가?”

“그래요. 이게 모두 수혁 씨가 제 말을 듣지 않고 처음부터 너무 실력을 과시해버려서 생긴 일이에요.”

‘참나, 언제는 잘했다고 하더니.’

“근데 왜 라사드를 노리는 거야? 랏사드를 노려야지.”

“아마 그들은 수혁 씨 닉네임을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아요. 그들은 라사드와 이름이 비슷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어요.”

“뭐라고?”

“라사드, 랏시드, 라소드, 라시드, 랏수드, 라자드 등등 라사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자들은 예외 없이 PK 당하고 있죠.”

“이런 미친…….”

“더군다나 중국에서는…….”

“중국에서는 뭐가?”

“못 들으셨어요? 임과장이 이야기 안 해요? 중국에 파견된…….”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닫아버렸다.

“무슨 이야기야? 끝까지 이야기해보라구.”

“아니에요. 못 들으셨다면야… 모르는 게 나을 테니까 이야기 안 했겠죠.”

나는 순간 좀 전의 채하영이라는 국정원 직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외비 사항이라…….”

대외비 사항. 그렇다면 중국 내에서 뭔가 사건이 터졌다는 건가? 갑작스럽게 경호원이 파견된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지?

“어떻게 하실래요? 수혁 씨. 이제 저들은 수혁 씨가 게임에 접속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의 아이디가 창에 나타나기기 무섭게 암살 길드의 추격이 시작될걸요.”

“그까짓 것들, 한 트럭 온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 올 테면 와보라고 해.”

“와우,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하지만 저 많은 라사드들 중에는 레벨이 400이 넘는 고수들도 많아요.”

“내가 해내겠어. 의화단이건 황건적이건 다 덤비라고 하라고. 전부 상대해줄 테니. 그리고…….”

“그리고 뭐요?”

“내가 혹시 죽으면 김씨소프트에서 다시 업그레이드시켜줄 거잖아.”

나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미영을 바라봤다.

“내참, 누구 맘대로요.”

“미영~ 내가 초반에 설친 건 잘못했어. 그치만 그만큼 수확도 있었잖아. 다시 한 번 김씨소프트의 요구에 부합하게 행동할 테니 화 풀어~.”

“됐어요. 전 이만 퇴근할 테니까 수혁 씨도 그만 쉬세요.”

“들어가게? 지금 들어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자고 내일 출근하지 그래?”

“아뇨, 전 들어갈래요. 참, 오늘 혈맹 모임은 어땠어요? 세난지 두난지는 어땠어요? 예쁘던가요?”

‘예쁘? 말도 마라, 말도 마. 그 여자 몽타주 때문에 혈을 깰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럼, 실물도 게임 속 캐릭터처럼 쭉쭉빵빵에 눈은 사슴 같고, 입술은 앵두 같고…….”

“진짜요? 좋으셨겠네요.”

“좋긴 뭐가 좋아. 그래도 미영이보다는 훨씬 떨어지던걸. 미영이가 세나보다 2.98배 정도 예뻐.”

2.98뿐이랴. 298배는 더 예쁘겠지.

더 예쁘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퉁퉁 불어 있던 미영의 얼굴이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전 들어갈 테니까요, 오늘은 자지 말고 중국의 암살 길드들에 대해서 연구 좀 하세요. 여기 자료들 있구요. 또 참여의 창 같은 곳에 들어가면 더 많은 자료들이 있을 거예요. 특히 의화단 길드와 어쌔시네이트 길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세요.”

“의화단과 어쌔시네이트?”

“예, 그 둘은 중국뿐만 아니라 파이온 대륙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암살 길드들이에요.”

“그래?”

“전 들어갑니다.”

미영은 그렇게 뒤돌아 나가버렸고 나는 몇 개의 게시물을 더 읽어보다가 내 작업장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워 미영이 준 자료들을 읽어보았다.

<암살길드 자료집>

그것은 미영이 워드로 일목요연하게 작성해놓은 자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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