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임파젤 성을 정복하다 1
“형님, 정말 멋져요. 언제 꼭 한번 뵙고 싶어요.”
“그러게. 실력도 출중하고. 매너도 깔끔하고. 돈도 많고. 랏사드 짱이야.”
“험… 뭐… 그런다면야 내가 굳이 저 NPC 녀석과 싸울 필욘 없겠군.”
쎄미트리는 헛기침을 하면서 못 이기는 척 잠자코 있었다.
“랏사드 님께서 지불하시겠습니까? 다섯 분의 워프 비용은 총 10만 아데나입니다. 현재 보유하신 아데나가 없다면 파이온 인증 시스템을 거쳐 신용카드로 결제도 가능합니다.”
뭐라고? 신용카드 결제? 이거 정말 무섭구나. 대부분의 게임들은 게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아데나나 캐쉬를 충전하는데 파이온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NPC를 통해서 아데나를 충전할 수 있단 말이야? 이거 김씨소프트가 또 한 발짝 앞서가는구나.
나는 김씨소프트의 주도면밀함과 놀라운 돈벌이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만약 김씨소프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게임을 즐기고 현재처럼 워프를 하려면 10만 아데나, 즉 실제 돈 만 원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파이온 게임은 1,000원으로 10,000아데나를 살 수 있었다.
박민규 사장 부자이겠는걸. 이렇게 벌어들이는 돈만도 상당할 것 같은데…….
“아니, 지금 바로 10만 아데나를 지불하겠어.”
나는 내가 보유한 아데나로 즉시 결재를 했다.
“10만 아데나를 받았습니다. 10만 아데나가 결제됐습니다. 그럼 지금 디부아르 대륙으로 워프하겠습니다.”
NPC의 말이 끝나자 나와 동료들을 에메랄드빛이 땅 속에서 죽순처럼 솟아올라 원통으로 감쌌다.
파이온 게임의 3D 그래픽은 정말 몽환적이다. 보고 있으면 마치 훌륭한 판타지 영화의 감쪽같은 컴퓨터 그래픽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내가 잠시 김씨소프트의 그래픽 기술에 감탄하고 있을 때 우리의 모습이 점점 로이드의 워프 비콘에서 사라져갔다. 마치 박사가 약을 먹고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처럼.
스스슷.
드디어 우리 혈의 눈물은 한중전이 한창인 디부아르 대륙으로 이동해왔다.
나는 디부아르의 워프 비콘으로 빠져나오자 충격에 휩싸였다. 침묵의 대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게이머들. 비콘을 가득 채운 게이머들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많은 대화를 하며 급박하게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대장, 여긴 왜 이렇게 바쁜 거야? 다들 어딜 저렇게 뛰어가는 거지?”
“글쎄, 아마 전쟁 때문에 저 난리겠지.”
“어마, 정말 무슨 도떼기시장 같아요. 어지러워 죽겠네.”
“이러지 말고 누구 하나 잡고 물어보지. 전쟁터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로큰롤메이지가 차분하게 건의했다.
“그래, 도대체 어데로 가야 하는지 알고나 가야 할 거 아이가.”
쎄미트리는 투덜거리며 달려가고 있는 게이머 한 명을 붙잡았다.
“이보소, 여 사람들이 와 이렇게 바쁜 기요?”
“이게 사람이야, 똥파리야? 비켜, 이 오크 자식아. 죽기 싫으면.”
쎄미트리가 잡았던 다크엘프는 쎄미트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내 저놈에게 배틀액스 맛 좀 보여줘야겠다.”
후후후. 나는 쎄미트리가 가소로웠다. 방금 그 다크엘프는 적어도 레벨 150은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저기, 지금 다들 어디로 가는 건지 누가 좀 가르쳐주실래요?”
“이 바보들은 또 뭐야? 보아하니 초짜들 같은데 젠더 사냥터 같은 곳에서 놀 일이지 여긴 왜 온 거야? 이곳은 니들 같은 초짜들이 있을 곳이 아냐. 다른 곳으로 가서 놀아.”
정말 밥맛없는 답변이었다.
“세상에, 왜 이렇게 바쁜지도 모르고 이곳으로 온 거예요?”
다행히 한 명이 우리의 물음에 성실하게 답변해줬다.
“예, 우리가 조금 허접해서…….”
“지금 이곳 뮤호 마을의 워프 비콘 근처에 임파젤 성이라는 곳이 있는데 블러디 나이츠 동맹이 임파젤 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선포했어요.”
“블러디 나이츠 동맹이라구요?”
“네. 드래곤 기사단이나 람세스, 질리언 같은 유명 동맹은 아니지만 우리들 같은 중하수들이 가입하기에 딱 좋은 동맹이죠. 로완블루 같은 서버의 중하수급 고수들이 속속 블러디 나이츠 동맹으로 모여들고 있어요. 임파젤 성의 성주인 간닝이 혈맹을 모아 수성전을 준비하고 있죠. 우리들은 간닝과 임파젤 성의 혈원들이 짱깨들이라고 보고 있어요.”
나는 간닝이라는 말에 놀랐다. 간닝(Gan Ning)이라면 삼국지의 감녕을 부르는 중국 발음이기 때문이다. 간닝은 중국 게이머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우리도 블러디 나이츠 동맹에 가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죠?”
“뭐라구요? 블러디 나이츠에 가입한다구요? 지금 혈맹 평균 레벨이 몇이나 되죠?”
“혈 평균 레벨 12정도 됩니다.”
“아하하하! 뒤통수에 땀나려고 하네요. 크크, 과연 블러디 나이츠의 동맹 군주가 당신들을 받아줄지 모르겠군요. 어찌됐든 블러디 나이츠 동맹에 가입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됩니다. 그곳에 임파젤 성을 앞에 두고 블러디 나이츠 동맹군들이 진을 쳤거든요.”
“아, 고맙습니다. 블루바츠 님.”
“뭘요. 건투를 빌어요.”
블러디 나이츠라.
좋아. 우선 임파젤 성을 빼앗아보자.
“자, 모두 블러디 나이츠 동맹을 찾아 북쪽으로 이동이다.”
“오케이, 좋았어.”
우리 다섯 명은 북쪽을 향해 뛰고 있는 게이머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랏사드 님, 가슴이 두근거려요.”
“쳇, 나 역시 괜히 긴장되는데. 지금까지처럼 몬스터 사냥하는 것하고는 기분이 비교가 안 되는걸. 뭐랄까? 출전을 앞둔 병사 같은 기분이야.”
“후후, 다들 잘할 거라 믿어요. 우리 혈의 눈물 깃발 한번 임파젤 성에 꽂아봅시다.”
“됐다, 짱꼴라 녀석들은 내가 다 쓸어버릴 기다.”
쎄미트리는 실력에 맞지 않게 호언장담하며 오버했다.
5분 정도 북쪽으로 뛰었을까? 서서히 눈앞에 임파젤 성의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파이온 게임 속에 등장하는 대륙과 성들 중에서 비교적 저급인 임파젤 성의 위용이 저러하다면 다른 성들은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을까? 나는 파이온의 다른 성들이 궁금해졌다.
도개교를 옆으로 두 개의 워크아웃(성 밖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돌출된 성. 성과 연결되어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을 미리 보거나 공격할 수 있다.)이 나와 있는 성의 전면, 그리고 그 옆으로 둘러쳐진 성벽은 궁수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특히 고딕식의 웅장한 건물 모양은 주변의 녹지와 제법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성의 앞에는 수백 개의 통나무를 송곳처럼 깎아 만든 진채들이 즐비하고 각종 혈맹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만장을 드리운 듯한 형형색색의 깃발들 그리고 그 깃발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혈맹 문양.
‘저 많은 무리들 속에는 로완블루 서버에서 활동하는 영웅들도 많이 있겠지.’
나는 임파젤 성을 정복하기 위해 모여든 각지의 영웅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무슨 일이오?”
워프 비콘 방향인 남쪽 진채를 지키고 서 있는 보초병이 우리의 방문 목적을 물어왔다.
“예, 저희는 혈의 눈물이라고 하는 신생 혈맹입니다. 미력하나마 임파젤 공성전에 도움이 될까 해서 블러디 나이츠의 동맹에 가입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동맹에 가입하려면 동맹 위원회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동맹 가입은 어디까지나 위원회의 결정이니 일단 들어는 가시오. 그러나 당신들의 혈맹이 우리의 동맹에 가입될지 안 될지는 나도 장담 못하겠소.”
“고맙수다.”
쎄미트리가 뼈 있는 인사말을 던지며 우리 뒤를 따라 진채 안으로 들어갔다.
“동맹 군주와 위원들을 만나려면 진 중앙에 있는 막사로 가시오.”
“예, 고맙소.”
나는 거듭 그에게 감사를 표한 후 진의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임파젤 성의 약 500m(어디까지나 게임상 거리지만) 정도 앞에 위치한 진채에는 숱한 종족들과 숱한 게이머들이 공성전에 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으며 앞으로 전개될 전투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는 우리 올드보이 혈맹이 선봉에 서게 될 거야.”
“무슨 소리야. 우리 그린 블러드 혈맹이 선봉에 서야지. 이름부터 올드보이는 늙은 이미지라 사기가 떨어진단 말이야.”
“젠장, 왜 우리 혈맹은 이름을 올드보이로 지어서 만날 이런 유치한 빈정거림이나 들어야 하는 거지?”
“니들 올드보이, 화정중학교 동창들로 구성된 혈맹 아냐? 이 무식한 놈, 혹시 올드보이가 동창들을 말하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니지? 나이 먹은 소년이란 뜻 그대로 해석하면 곤란해.”
“캬캬캬, 그나저나 이번에 임파젤 성에 모인 중국 놈들이 그렇게 많다면서?”
“그렇다더군.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국인들이 임파젤 성으로 모여들고 있대.”
“어차피 그 자식들도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로 가입했을 거 아냐?”
“그렇겠지.”
“아냐, 어쩌면 진짜 중국 유저들일 수도 있어. 최근 김씨소프트와 사이버 수사대가 아이디 도용을 막고 있다고 하잖아.”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이번 공성전에서 어떤 공훈을 거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도 결정되는 거니까 전투에나 신경 쓰자고.”
“그래, 하여튼 짱깨들 골칫거리야.”
우리는 그들의 대화에 신경 쓰며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랏사드 형, 이거 정말 장난 아닌걸. 나 파이온 게임 한 후로 이렇게 많은 게이머들이 몰려 있는 곳은 처음이야.”
“정말요. 와… 진짜 말 그대로 인간 시장인걸요.”
세나와 로만은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모여든 전사들을 훑어보았다. 로큰롤과 쎄미트리는 제법 긴장이 됐는지 진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와, 저기 봐. 저건 에버라스트(Everlast) 혈맹 문장이야.”
로만의 외침에 나머지 셋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에버라스트 문양을 훑어봤다. 검정색 바탕에 흰 눈이 덮인 빙벽이 우뚝 솟은 모양을 하고 있는 에버라스트 혈맹의 깃발이 진 한가운데 펄럭이고 있었다.
“에버라스트 혈맹이 유명한 혈인가?”
로큰롤의 질문에 로만이 아는 체를 했다.
“그럼요. 아마 중급 레벨 중에서는 거의 최강일걸요. 혈맹원을 받아들일 때도 심사를 거쳐서 한다잖아요. 매월 한 번씩 혈 모임도 갖고 혈맹 카페도 있어요. 저도 가입하려고 했는데 1심에서 탈락했죠. 모르긴 몰라도 이 블러디 나이츠의 동맹군주도 에버라스트 출신의 군주가 맡고 있을 거예요.”
로만의 설명에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이미 막사의 문 앞까지 와 있었다. 다크엘프 계열의 보초가 우리에게 건틀릿을 겨누며 앞길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
초면부터 반말 짓거리라니? 이 녀석들 보게.
“우리는 혈의 눈물이라는 혈맹입니다.”
“그런데?”
“블러디 나이츠 동맹에 가입하기 위해 위원회의 동의를 얻으러 왔소.”
“하하하하!”
갑자기 그 다크엘프 녀석이 웃어댔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블러디 나이츠 동맹은 이미 충분한 동맹군을 조직했다. 더 이상 혈맹군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게 동맹 군주 선젝터 님의 지시다.”
“뭐, 뭐라꼬? 지금 침묵의 대륙에서 여기까지 무려 열다섯 번의 죽음을 참아내며 왔는데, 동맹 가입이 안 된다고?”
쎄미트리는 버럭 화를 내며 다크엘프에게 다가갔다.
놈의 스파이크 건틀릿이 어느새 쎄미트리의 목젖에 와 있었다.
“돼지머리를 한 괴물 놈아,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
‘제법 동작이 빠르군.’
“랏사드 형, 어떻게 좀 해보세요.”
로만이 내가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쎄미트리, 뒤로 물러서.”
“쳇, 젠장.”
성미 급한 쎄미트리도 역시 자신이 그 다크엘프의 상대가 아님을 직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혈의 눈물의 혈맹 군주 랏사드다. 침묵의 대륙에서 이곳까지 오직 동맹에 가담해 공성전에 참가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왔다. 너 같은 문지기에게 쫓겨날 거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캬~ 네 명의 혈원을 책임지는 혈맹 군주로서 이 얼마나 카리스마 있고 폼 나는 말이냐. 나는 스스로 또 만족했다.
“그래서?”
“그… 그래서? 그래서라니? 뭐가 그래서야? 당연히 동맹에 가담하겠다는 거지.”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야. 아까 말했듯이 더 이상 혈맹은 필요 없으니 눈앞에서 꺼져.”
“이 자식이?”
성미 느긋한 로큰롤메이지도 다크엘프 녀석의 작태에 화가 났는지 욕설을 하며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오라, 엘프 마법사군. 허접한 카키 망토나 걸친 걸 보니 고작해야 레벨 50이나 되는 초보 같은데 나하고 한번 붙어보자는 건가?”
“이… 이 자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너 이리 나와.”
“그만, 그만둬.”
나는 로큰롤메이지를 만류했다.
이거 정말 답답한 노릇이네. 그렇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도 없고 말해봐야 사이코 취급이나 당할 게 뻔하고…….
“어이, 다크엘프. 나는 죽어도 군주를 만나봐야겠으니 내 앞을 가로막지 말고 옆으로 비켜.”
“이런 허접한 쓰레기들이 어디 와서 행패야, 행패가.”
다크엘프 녀석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고작 다섯 명의 혈원들은 누가 봐도 초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만약 놈의 입장이었어도 녀석처럼 행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랏사드 님, 잘됐네요. 받아주지도 않는데 뭐 하러 전쟁에 나가요. 우리 그냥 침묵의 대륙으로 가서 파티 사냥이나 하고 퀘스트나 수행하면서 재밌게 놀아요.”
세나5가 슬쩍 웃으며 본심을 드러낼 때 막사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러워?”
“예, 허접한 초글 혈맹이 블러디 나이츠 동맹에 가담하겠다고 찾아와서 쫓아내는 중입니다.”
“내일 새벽 임파젤 성을 공격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혈맹은 필요 없다고 전해라.”
제법 무게감 있는 음성. 아마 그가 동맹군의 동맹군주겠지.
“선젝터 군주, 그러지 말고 여기까지 찾아온 정성을 봐서 어떤 자들인지 한번 보기라도 합시다.”
선젝터? 동맹군주의 이름이 선젝터인 모양이군.
“프레드릭 님께서 그리 말하신다면야… 그분들 안으로 들여보내.”
“예? 하지만 이들은…….”
다크엘프 녀석은 상당히 당황했다.
“흥! 니놈은 그릇이 그렇게 작으니까 문지기나 하고 있는 기다. 에스엔, 기억해두겠어. 뒤통수 조심해라.”
막사를 지키고 있는 다크엘프의 이름이 에스엔이었다. 쎄미트리는 막사 안으로 들어서며 우리를 박대했던 다크엘프에게 가당치도 않은 협박을 했다.
우리 다섯 명의 혈의 눈물 인원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탁자에 앉아 있던 혈맹 군주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시오. 전투를 앞두고 그대들 같은 용사들이 먼 길을 찾아와 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오. 나는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 현재 가드리안 혈맹의 군주로 있소.”
프레드릭, 휴먼 나이츠 계열의 캐릭터. 입술을 덮고 있는 덥수룩한 수염이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러나 인자한 자태와 말투 속에는 알 수 없는 강함이 느껴졌다.
선젝터 군주가 나와 혈의 눈물을 내치려 했을 때 얼굴이라도 보자고 했던 사람이 바로 이 프레드릭이라는 자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저는 혈의 눈물이라는 혈맹의 군주 랏사드입니다.”
“혈의 눈물?”
내가 혈의 눈물이라고 하자 탁자에 앉아 있던 숱한 군주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혈의 눈물을 외쳤다.
“저희들을 아십니까?”
“아니, 너무 생소한 이름이라 놀란 거요. 오해는 마시오.”
“하하하하하!”
“뭐고? 지금 우리 혈의 눈물을 무시하는 기가?”
쎄미트리는 또다시 성질을 못 이기고 분통을 터뜨렸다.
“저놈은 또 뭐야? 우리 블러디 나이츠 동맹은 오크를 거의 받지 않는데…….”
“그래, 오크면 어벤저 오크 같은 동맹을 찾아갈 것이지… 하긴 뭐 몰골을 보니 그런 동맹 찾아가 봐야 받아주지도 않겠는걸.”
“와하하하!”
“이… 이 자식들이…….”
쎄미트리는 화가 났는지 말도 제대로 못했다. 나는 그에게 눈짓을 보내 만류했다.
“여러 군주들께서는 그래도 전투에 참가하고자 일부러 찾아온 손님들이니 그렇게 박대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시지요.”
“프레드릭 님은 너무 자상해서 탈이야. 그러니 가드리안 혈맹의 수준이 다른 혈맹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게요.”
“매드니스, 나를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 가드리안 혈맹을 욕하는 것 참을 수 없소.”
탁자에 걸터앉아 있던 군주가 프레드릭의 혈맹을 비꼬자 순간 프레드릭은 엄청난 위압감을 드러내며 그를 쏘아봤다.
‘좀 전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군. 역시 무시 못 할 자야.’
“자, 다들 조용히 하시오. 그래, 혈의 눈물의 군주이신 랏사드 님은 레벨이 얼마나 되십니까?”
선젝터 동맹군주가 좌중을 압도하며 나의 레벨을 물어왔다.
“레벨은 20이지만 실력은 200이 넘죠.”
“뭐라고? 레벨 20?”
누군가의 탄성에 막사 안에서는 또다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군. 레벨 20의 혈맹군주라니.”
“하하하하! 군주가 레벨 20이면 혈원들은 도대체 얼마라는 거야?”
“설마 레벨 1이나 2는 아닐 테고?”
“와하하하!”
“조용들 해요.”
선젝터 동맹 군주는 다시 혈맹군주들의 비아냥거림을 제지한 후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블러디 나이츠 동맹군은 내일 임파젤 성을 총공격할 겁니다. 현재 군주들이 보유한 NPC까지 포함한다면 우리 블러디 나이츠는 약 2만 5천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소. 이 정도면 파이온 게임을 통틀어서 거의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규모요. 그러니 우리에게 레벨 20의 초보가 이끄는 혈맹은 필요 없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소?”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젝터의 한마디에 로만, 세나, 로큰롤, 쎄미트리의 얼굴에 침통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우리 혈의 눈물이 초보 중의 초보라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틀림없이 뭔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아직은 서투르지만 동맹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테니 우릴 좀 거둬주십쇼.”
나는 속이 뒤틀렸지만 선젝터에게 거듭 우릴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봐요, 랏사드. 공성전이 장난인 줄 알아요? 이봐, 에스엔. 이들을 밖으로 모셔다 드려.”
“예, 군주님.”
다크엘프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선젝터 군주님, 그러지 말고 저들에게 한번 기회를 줘보시죠. 다섯 명밖에 안 되니 우리 동맹군에게 그다지 해를 끼치지도 않을 것 같고… 또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니 한 명의 용사라도 제 발로 찾아온다면 내치지 않는 게 우리 동맹군의 위상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허참, 매번 나를 당황케 하는군요, 프레드릭.”
선젝터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젝터 군주님, 군주님께서 어렵다면 제가 저들을 우리 가드리안 혈맹의 부군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우리 블러디 나이츠 동맹에 끼워줍시다.”
“뭐, 프레드릭께서 그러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저들은 가드리안에서 관리하도록 하시오.”
“그럼 동맹에 가입되는 건가요?”
나의 물음에 선젝터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맹위원 여러분, 혈의 눈물을 우리 블러디 나이츠의 동맹에 포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의가 있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보시오.”
선젝터 군주. 그는 우리 같은 초보들을 무시하기는 했지만 제법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갖춘 군주 같았다. 그의 한마디에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
“좋소. 혈의 눈물이 블러디 나이츠에 가입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 랏사드 그리고 혈의 눈물, 블러디 나이츠 동맹을 위해 개와 말의 수고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짝짝짝짝.
뭔가 찝찝한 박수소리가 막사 안에서 터져 나왔다.
“고맙습니다, 선젝터 군주님 그리고 프레드릭 군주님.”
나는 선젝터와 프레드릭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나의 경의는 선젝터보다는 프레드릭을 향한 것이었다.
혈의 눈물의 블러디 나이츠 동맹 가입이 끝나자 선젝터 군주는 다시 혈맹군주들과 작전 회의를 벌이기 위해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선젝터 님, 저는 부군이 된 혈의 눈물과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세요. 자, 그럼 작전 회의를 시작합시다.”
선젝터는 프레드릭에게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다시 군주들을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나는 혈맹원들과 함께 프레드릭을 따라 나섰다.
약간 어색함이 흐르자 내가 먼저 프레드릭에게 말을 꺼냈다.
“아까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게임하는 사람들 입장이야 게이머들이 잘 아는 거죠. 더구나 지금은 파이온 온라인상에서 거의 전쟁에 버금가는 비상시국 아닙니까? 지금은 레벨 10, 20이 아니라 레벨 1, 2라고 해도 한 명이 아쉬운 시점이죠.”
“우리 군주 랏사드는 그냥 레벨 20의 초보가 아닙니다.”
“그래요?”
로큰롤메이지가 나를 거들고 나서자 프레드릭이 관심을 그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저도 랏사드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감탄했어요. 아까도 중국 게이머 다섯 명의 목을 한칼에 베어버렸죠. 그것도 레벨 150정도 되는 중수들을요.”
“하하, 그랬겠죠.”
“이 사람이 지금 건성으로 듣는 기가? 거짓이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고. 우리 같은 초보들의 눈을 뜨게 해준 고마운 분이란 말이다.”
쎄미트리는 또다시 광폭한 성미를 드러냈다.
“아,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로 그랬을 거라 믿어요. 전 로큰롤메이지 님의 말씀을 100%는 아니어도 거의 신뢰합니다.”
“진짜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으신다는 거죠?”
세나5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붉은 늑대 레더 갑주 세트를 걸친 레벨 20의 초보를 파이온 게임 안에서 만나는 건 드문 일이죠. 아니, 어쩌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일걸요.”
나는 프레드릭의 성품뿐만 아니라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동맹 군주인 선젝터마저도 무시하고 지나쳐버린 내 붉은 늑대 갑주 세트를 한번에 알아보다니. 역시 선젝터보다는 프레드릭이 동맹의 군주로서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겠구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젝터는 실력이나 가능성보다는 레벨 같은 형식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했고 프레드릭은 레벨 같은 숫자에 불과한 껍데기보다는 가능성을 보고 맡기려는 그런 타입의 군주였다.
“와,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더니 역시 대단하시네요, 프레드릭 님. 전 처음부터 랏사드 형의 플레이를 지켜봤어요. 그때 랏사드 형님 정말 대단했어요. 싸일리엄 하우스 앞에서 윈드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파괴자의 검을 휘두르며 중국 게이머 50명과 맞짱 뜨던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 같았다니까요.”
로만은 그때 자신과 세나를 구해주던 이야기를 프레드릭에게 늘어놓았다.
“대단하군요. 파괴자의 검에 윈드 플레이트 메일이라니. 도대체 랏사드 당신의 정체는 뭐요? 재벌 2세? 붉은 늑대 갑주 세트도 대단한데 거기에 윈드 플레이트 메엘에 파괴자의 검이라니. 도대체 돈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거요?”
“뭐 그냥 운이 좋았다고 치죠…….”
나답지 않은 겸손이다.
“당신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가드리안 혈맹에 큰 보물이 들어온 거군요.”
가드리안 혈맹의 보물? 이 녀석 봐라. 내가 왜 가드리안 혈맹의 보물이냐. 나는 어디까지나 혈의 눈물의 군주란 말이다. 나는 결코 남의 밑에서 길들여질 생각은 없어. 내 뜻은 단호했다. 설령 세나, 로만, 로큰롤메이지, 쎄미트리와 함께하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나를 믿고 따라온 내 동료들을 버릴 수는 없다.
“프레드릭 님. 전 혈의 눈물의 군주입니다. 가드리안 혈맹의 혈원이 아니고요.”
“아… 제 말씀을 오해하셨군요. 저 역시 랏사드 님을 잡아두려는 건 아닙니다. 또 제가 잡는다 해도 잡을 수 없을 것 같고요. 전 결코 제가 담을 수 없는 물건을 제 그릇에 담지 않습니다. 잘못하다간 그릇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임파젤 공성전에서만큼은 저의 부군으로 참가하는 겁니다. 제가 말하려는 의도는 그것이었어요.”
“와… 두 분 너무 멋져요.”
세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깍지 끼고는 우리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가 대장 하나는 잘 뽑았다니까. 역시 랏사드야. 나는 우릴 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버려? 우릴 버렸다간 나 쎄미트리의 배틀액스가 가만두지 않을 기다.”
“에이, 쎄미트리 형, 내가 보기엔 형이 먼저 파괴자의 검에 반쪽이 날 것 같은데.”
“와하하하!”
오랜만에 우리 혈맹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프레드릭 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뭐죠? 말씀해보세요.”
“내일 공성전에서 저와 혈의 눈물이 선봉에 서겠습니다.”
“뭐라고요?”
“들으신 그대롭니다. 내일 전투에서 우리 혈의 눈물이 선두에 서겠습니다.”
놀란 듯한 프레드릭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냉철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건 안 됩니다.”
“왜죠?”
“우선 선젝터 군주의 성격상 당신의 혈맹을 선봉에 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랏사드 당신의 실력을 제가 확인한 적이 없고 또 당신 혈맹원들의 실력 역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파이온 게임은 선봉대가 무너지면 동맹군의 사기가 저하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어요. 만에 하나 잘못했다간 우리 동맹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프레드릭 님 역시 선젝터와 다를 바가 없군요. 그렇게 랏사드의 실력에 대해 이야기해드렸는데 결국은 숫자에 불과한 레벨을 이유로 랏사드의 제의를 거절하다니요.”
로큰롤메이지가 첫날밤 남편의 물건을 본 신부의 표정만큼이나 실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혈의 눈물의 선봉이 어렵다면 나 혼자서라도 선봉에 서도록 해주세요.”
“혼자서 선봉에 선다니?”
“내일 임파젤 전투에서 제가 놈들에게 일기토 대결을 신청하겠다는 말입니다.”
“일기토 대결이라고요?”
이번에는 프레드릭뿐만 아니라 우리 혈맹원들까지 시원찮은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만리장성을 쌓는 걸 보며 놀라는 신부만큼이나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일기토 대결. 쉬운 말로 맞짱.”
“일기토 대결 역시 동맹과 혈맹의 사기를 저하시키기도 하고 상승시키기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프레드릭은 바둑을 두는 프로기사처럼 장고에 들어갔다.
그가 침묵을 지키자 내가 한 발짝 더 치고 들어갔다.
“만약 내가 일기토 대결에서 실패한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아이템을 당신께 드리겠소.”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좋습니다. 몇 천만 원대에 달하는 아이템을 걸겠다니 그 정도 결의면 충분하겠군요. 내가 선젝터 군주에게 말해서 내일 공성전에서 우리 가드리안이 선봉에 서겠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랏사드는 가드리안의 부군의 좌장으로서 일기토 대결을 신청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죠.”
됐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최상조와 김민우에 비해서 현저히 뒤처지고 있는 나로서는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뜻하는 바대로 일이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프레드릭, 빨리 막사로 돌아오시오. 비상회의를 열어야겠소.]
[무슨 일입니까?]
[첩자 계열의 도둑들이 임파젤 성을 정탐하다가 모두 사망했어요. 생각보다 개전(開戰)이 더 빨라질 수도 있겠어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죠.]
“전 다시 막사로 가봐야 할 것 같군요.”
“그래요? 무슨 급한 일인가요?”
“임파젤 성에 잠입한 첩자들이 모두 사망했답니다. 어쩜 전투가 더 빨리 벌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어머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하노.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전투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기다.”
쎄미트리는 배틀액스를 붕붕 휘두르며 어린애마냥 즐거워했다.
“내가 우리 혈맹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니 우리 가드리안 진영으로 가서 그분들과 함께 쉬도록 하세요. 체력도 좀 비축하면서. 곧 처절한 전투가 시작될 것 같으니.”
“가드리안 혈맹 진영이 어디죠?”
“저쪽 에버라스트 혈맹 우측에 있는 은빛 방패 문양의 혈맹이 바로 가드리안 혈맹입니다. 그럼 전 이만.”
프레드릭은 우리에게 깃발을 가르쳐준 후 막사로 떠났다. 우리는 가드리안 혈맹을 향해 걸어갔다. 가드리 이라는 글자가 양각된 은빛 방패의 깃발 아래 도달했을 때 누군가가 나와 우리를 반겨줬다.
“프레드릭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우리와 함께하게 될 혈의 눈물이라면서요? 반갑습니다. 저는 프레드릭의 좌장 썬라이트 스타리스입니다. 그냥 편하게 스타리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프레드릭의 좌장이어서일까? 스타리스 역시 소탈하면서도 강직한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예, 저희들은 혈의 눈물의 혈맹원들입니다.”
“이쪽이 우리 혈의 눈물의 대장 랏사드 형님 그리고 이쪽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약간 공주 같은 세나5. 그냥 세나라고 부르면 되고 이 뒤에 있는 늙수그레한 엘프 마법사는 로큰롤메이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돼지코 오크는 쎄미트리, 종족만큼이나 성질이 더러운 분이고요. 전 혈의 눈물의 마스코트 로만21입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분이군요. 프레드릭 님께서 곧 전투가 있을 거라고 체력을 비축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기다리는 동안 병장기나 손질하면서 우리 가드리안 혈맹원들과 인사도 나누시죠.”
“알겠습니다.”
우리는 가드리안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프레드릭의 혈맹원들이 우리를 반겨줬다. 프레드릭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다 받아들여서인지 그의 혈맹원들은 각양각색의 종족과 캐릭터가 섞여 있었다.
“대장, 대장은 인사 안 할 거야?”
“나는 잠시 앉아서 칼이나 갈고 있을 테니까 너희들은 인사도 드리고 또 병장기도 손질 좀 하고… 그래라.”
나는 인벤토리에서 드워프의 숫돌을 꺼내 그간 짱꼴라들과의 싸움에서 날이 무뎌진 내 검들을 손질했다.
오지랖 넓은 로만이 녀석은 제법 가드리안의 식구들과 빨리 어울리며 적응해갔다. 내 식구들이 모나지 않고 다른 식구들과 쉽게 적응하고 어울리자 뿌듯해졌다.
[가드리안의 전사들이여, 출전이다.]
“뭐, 뭐라고? 벌써?”
프레드릭이 혈맹원 전체에게 보낸 메시지에 가드리안 진영에는 동요가 일어났다.
“이거 엄청 긴장되는걸. 지금까지 애써 키워놓은 내 캐릭, 한순간에 죽는 건 아니겠지?”
좀 전의 군주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한 듯했다.
“랏사드 님, 떨려요.”
세나가 가슴을 쓸어안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 역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두근거림은 불안과 공포가 아닌 전투에 대한 기대와 피에 대한 갈망이었다.
[우리 가드리안이 임파젤 공성전에서 선봉에 서게 됐다. 모두들 병장기를 챙겨 진채 앞으로 나와라. 가드리안의 용사들이여, 명예를 위해 가드리안의 문장을 걸고 용감하게 나서자.]
“와아아아아!”
가드리안의 진영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헤드셋을 통해 들려오는 함성 때문에 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돌비 시스템을 갖춘 극장의 스피커 바로 아래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강미영 팀장에게서 쪽지가 왔다.
[수혁 씨, 기쁜 소식이 있어요. 수혁 씨가 PK한 게이머들 IP 추적 결과 51명 모두 중국인이 국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그들의 아이디를 삭제한다는 쪽지를 발송했고 51명 모두의 계정을 삭제했어요. 그리고 현재 중국에 있는 국정원 요원들이 작업장을 상대로 수사에 들어갔다는군요. 이 모든 게 수혁 씨의 공로예요.]
[그래?]
나의 심드렁한 반응에 미영의 목소리에 실망스러움이 가득 찼다.
[뭐예요? 그 반응은?]
[지금 모니터링 안 하고 있어?]
[하던 중이에요.]
[그럼 눈앞을 봐.]
눈앞에서 수천의 기사들이 병장기를 치켜들고 임파젤 성을 향해 진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개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온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뿌우우뿌우우!
형형색색의 깃발을 든 혈맹들이 대오를 갖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한편의 영화 같았다.
[와, 드디어 시작인가요?]
[응, 내가 선봉에 설 거야.]
[멋져요, 수혁 씨. 계속 지켜보겠어요.]
[그래, 잘 지켜봐, 나의 활약을.]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수혁 씨, 그렇게 진지한 모습 처음이네요. 매사를 장난처럼 사는 분인 줄 알았더니…….]
나는 그녀의 말에 일부러 대꾸하지 않고 레버를 잡았다.
[그럼 건투를 빌어요. 전 이만.]
미영이가 메신저를 끌려고 할 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미영아.]
[왜요?]
[웹디자이너한테 말해서 짜장면 하나 아이템으로 만들어서 보내줄래?]
[갑자기 웬 자장면이요?]
그녀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응, 요긴하게 쓸 데가 있거든. 이번 전쟁의 신호탄은 바로 짜장면이야.]
[언제까지 해주면 되는 건가요?]
[지금 당장. 뭐 간단하게 만들어줘도 돼. 꼭 완두콩이나 오이 채 썬 걸로 장식 안 해도 그냥 누가 봐도 짜장면이라고 생각할 정도면 돼.]
[알았어요. 웹디자이너보고 자장면 제작해서 오빠에게 전해주라고 할게요.]
그녀는 수학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의 말투로 이야기했다.
나는 파이온 게임에 중국집이나 피자가게 같은 것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임 도중 배달도 해주고 캐릭터가 그거 먹으면 배도 부르고…….
내가 헛된 망상에 빠져 있을 때 게임 속에서는 프레드릭과 선젝터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프레드릭, 도대체 제정신인 거요?”
“…….”
“나뿐 아니라 모든 혈맹의 군주들이 당신이 혈의 눈물을 동맹에 끼운 점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데 이제는 랏사드라는 생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를 일기토 대결에 내보낸다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냔 말이오!”
“이미 랏사드에게 가드리안을 대표해 일기토 대결에 나가도 좋다고 약속을 했어요.”
“위원회의 허락도 없이 그렇게 멋대로 전투의 핵심이 될 수도 있는 사항을 결정해도 된단 말이오?”
“그래요, 프레드릭. 당신 요즘 규율도 없이 멋대로 하는 것 같아. 그렇게 할 거면 도대체 동맹의 군주는 뭐고 위원회는 뭐겠소?”
“맞아, 쉐이비 말이 맞아.”
이게 무슨 당나라 군대야? 나는 소위 군주라는 자들이 결전을 앞두고 동맹의 사기를 꺾는 작태에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도대체 그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전략이란 게 뭐냐? 나는 그들에게 반문하고 싶었다.
“좋소. 랏사드가 일기토 대결에서 실패한다면 나 프레드릭의 모든 아이템과 가드리안의 혈맹 군주 자리를 그대들에게 내놓겠소.”
프레드릭의 폭탄선언에 벌판에는 일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은 냉기가 흘렀다. 자신과 나를 못 믿는 군주들의 흔들기에 프레드릭이 초강수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들은 프레드릭의 말에 아무 말 없이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프레드릭, 제법 마음에 드는 인물인걸.’
“뭐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럼 일단 프레드릭 그대의 확신을 믿어보겠소.”
비열한 자식들. 대의를 위해 각지의 군주와 혈맹들을 소집해놓고 결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신념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 녀석들. 이미 놈들의 머릿속에는 나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되어 있고 프레드릭의 혈맹 군주 자리와 아이템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 들어 있을 것이다.
“랏사드가 패배한다면 바로 총공격을 감행할 것이니 모든 전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세요.”
선젝터의 마지막 명령이 떨어지자 프레드릭이 나에게 다가왔다.
“랏사드, 당신의 칼에 나와 그대의 모든 것이 걸려 있소.”
그는 나의 어깨를 힘껏 쥐었다. 그의 굳은 믿음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신호 보내면 바로 공격을 감행하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랏사드 님, 조심하세요.”
세나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형, 우리 놔두고 죽는 건 아니지?”
“그래, 랏사드. 보여줘, 너의 실력을.”
나는 동료들의 걱정을 가슴에 품은 채 포부도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동맹군을 등지고 적진을 향해 홀로 걸어가는 기분이란…….
얼마 걷지 않아 3만에 가까운 병력이 운집한 임파젤 성이 바로 앞에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겁을 먹을 사람인가? 파이온 게임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아닌가?
나의 등에 매달린 거대한 브로드 소드가 걸음걸이에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검의 폭이 무려 30cm나 되고 길이는 2m에 육박하는 살인무기다.
처음부터 짱꼴라들을 기죽이기로 마음먹고 우선은 검을 조금 무식한 걸로 골랐다.
나는 드디어 임파젤 성의 도개교 앞에 섰다. 이 정도는 놈들 중에 실버 애로우 이상 되는 고급 활을 지닌 엘프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내 몸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그런 것에 겁을 먹고 물러선다면 나의 호기는 기껏해야 만용밖에 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블러디 나이츠 동맹은 나를 비웃을 것이다.
“내 이름은 랏사드. 캐릭터는 기사이고 레벨은 무려 자그마치 20이다. 우리 블러디 나이츠 동맹을 대표해 너희 임파젤 성의 기사와 일기토를 신청하러 왔다.”
나는 간략하게 사자후를 토한 후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성벽 위에 있는 수많은 적들이 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자식 뭐야? 저거 또라이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혈혈단신으로 찾아온 거야?”
“가만, 레벨이 몇이라고 했지? 몰라, 너무 낮아서 들리지 않던걸.”
“하하하하!”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음 같아서 성벽을 밟고 올라가 나를 비웃는 저놈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다시 한 번 점잖게 그들에게 일기토를 신청했다.
“나는 혈의 눈물의 대표 기사 랏사드다. 임파젤에는 용맹한 기사가 없단 말이냐? 누구든지 나와서 나와 함께 검을 맞대보자.”
“야이 자식아, 레벨 20이면 파이온 게임 시작한 지 고작 1주일쯤 된 놈인데 그런 놈이 일기토를 하자고? 고블린 같은 몬스터에게도 도망 다니는 실력일 텐데… 네가 어떻게 사냥터를 뚫고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만 일기토 전에 먼저 정신병원이나 갔다 와라, 이 또라이 같은 자식아!”
그럴 것이다. 나는 기껏해야 현재 레벨 20. 저들에게는 완전 초보로밖에 안 보일 테고 나 같은 놈 하나 PK한다고 해도 떨어지는 아이템이래야 뭐 돈도 안 되는 장갑 같은 것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이제 작전 변경이다. 드디어 내가 미영이에게 부탁한 짜장면 아이템이 빛을 발할 때였다. 나는 미영이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미영아, 짜장면 아이템 다 됐어?]
[방금 디자이너 언니가 제작해서 디부아르 대륙으로 건너가 오빠에게 선물하기 했을 거예요. 인벤토리 열어보세요.]
나는 재빨리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그 속에는 웹디자이너가 보낸 짜장면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먹음직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충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섬세한 디자이너가 짜장면 위에 완두콩까지 장식하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하게 표현을 해서 정말이지 먹음직스러웠다.
미영이가 보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욕은 자제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놈들을 도발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할 상황이다. 저 녀석들을 도발해서라도 우리 혈맹의 사기를 올릴 수만 있다면 나는 욕쟁이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나는 특수 아이템인 짜장면 아이템을 불러내서 놈들의 성 앞에 주저앉아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짜장면의 표준어가 자장면이라는 게 무지 기분 나쁜 사람이다. 왠지 자장면 하면 짜장과 함께 비벼서 먹는 그 감칠맛이 없어져버리는 것 같다.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부르는 건 왠지 특유의 냄새가 없어진 청국장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원래 짜장면은 중국의 직장에서 유래가 됐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콩과 밀가루로 만들어 면과 비벼 먹는 음식이었는데 화교들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맛과 빛깔을 변형시킨 게 지금의 짜장면이라고 했다.
짜장면이 자장면이든 중국음식이든 한국음식이든 현재 우리나라에서 중국인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 짱깨, 짱꼴라, 떼놈 등이었고 일본인들을 쪽발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하는 것처럼 중국인들 역시 그들을 짱깨라고 부르면 매우 기분 나빠했다.
“헤이, 짱꼴라들. 네놈들 주로 이런 짜장면 먹고 산다면서? 네놈들이 이런 짱깨나 먹고 사니까 세상 사람들이 떼놈들이라고 너희들을 비웃는 거야, 이 자식들아. 하긴 뭐 네놈들이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살겠냐? 뱃속에 거지 들어 있는 놈들 있으면 이리 내려와라. 내가 짜장면에 들어 있는 완두콩이라도 한 개 던져줄게. 기분 내키면 단무지 하나라도 남겨주마. 들리는 바로는 짱꼴라들은 짜장면 먹을 때 침이 많이 나와서 나중에 가면 짜장의 녹말이 침 속에 들어 있는 아밀라아제와 융합되어 짜장이 홍수처럼 불어난다면서?”
나는 임파젤 성의 망루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짜장면에 옵션으로 딸려 온 단무지로 이빨에 낀 고춧가루를 닦는 등 온갖 추접한 짓을 하면서 놈들을 자극했다.
나의 더티 도발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저런 개자식, 누가 저 자식 주둥이를 틀어막아버려라.”
“야이 십 원짜리들아, 내 입이 주둥이면 너희들 입은 아가리냐? 터진 아가리라고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콱 그냥 아가리를 귀 밑까지 쫙 찢어버린다.”
“저… 저런 X놈의 새끼.”
“뭐? 썅X의 새끼? 이런 떼놈들이 감히 박혁거세왕의 45대 손을 보고 쌍놈이라고?”
박씨 중에 양반이 얼마나 많은데… 연암 박지원, 또… 아… 나의 무지함이여. 박씨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왜 박상아, 박경림, 박수홍뿐이란 말이냐.
어찌됐든 그때부터 나의 입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짱꼴라 자식들, 강냉이를 다 털어주마. 이 자식들 먹물을 빨대로 쫙 빨아버릴라. 껍데기 벗겨버릴라.”
이 모든 욕들을 어디서 배웠냐고? 군대에서 고참들에게 맞아가며 몸으로 터득한 욕들이다.
나의 거침없는 욕설에 임파젤 성의 짱꼴라들은 분노를 넘어 광기를 드러냈다.
“뭐 저런 무식한 자식이 다 있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욕을 퍼붓다니…….”
“저 자식 죽여 버려. 드퐁, 저 녀석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어라.”
“됐다, 됐어. 고작 레벨 20의 하수에게 화살 세례라니. 화살도 아깝다. 내가 직접 나가서 저놈의 목을 따 오마. 도개교를 내려라.”
끼기기기깅.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작전이 성공했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할 필요도 있단 말이야. 근데 설마 내가 욕하는 걸 미영 씨가 다 모니터한 건 아니겠지?
육중한 성문이 해자 위에 걸쳐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성문 쪽을 살폈다. 흙먼지 사이로 인영의 윤곽이 드러났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게로구나. 너 같은 놈 죽여 봐야 인건비도 안 나온다마는 하는 짓을 두고 볼 수 없어 임파젤 성의 주태가 몸소 네놈의 목을 따러 왔다.”
녀석, 이름은 좋구나. 주태. 삼국지에서 손권을 구한 강표의 호랑이 신 주태. 어디 네놈 실력에 이름에 걸맞은가 한번 보자.
“주태라고? 설마 추태는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지하철에서 추태 부리던 놈이 너하고 닮았던 것 같기도 하고. 또 며칠 전에 술 처먹고 여중학교 앞에서 추태 부리던 아담족이 너하고 닮았던 것 같기도 하구나.”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태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놈, 주둥이는 거의 레벨 300 이상 수준이구나. 네놈의 주둥이를 썰어다 초고추장을 발라 안주 삼으리라.”
주태는 메이스를 쓰는 캐릭터. 그는 육중한 메이스를 들고 나를 향해 범처럼 달려들었다.
차창.
나는 2m의 브로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하룻강아지, 네놈 칼은 검이 아니라 완전 기둥이로구나. 초보 레벨 주제에 그런 브로드 소드를 제대로 컨트롤할 수나 있겠냐?”
나의 검이 녀석의 메이스를 받아 치자 녀석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아마 손끝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의 실력으로 봐서는 기껏해야 레벨 120 정도. 나와는 차원이 다른 하수라고 볼 수밖에. 아마 파이오닉의 센서를 타고 놈의 손끝까지 진동이 전해졌으리라.
나의 검과 녀석의 메이스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병기들이 부딪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빠른 속도로 나눈 일합의 공격과 방어. 하지만 나는 일부러 실력을 감추며 뒤로 밀리는 척했다.
누가 봐도 겉으로는 주태의 현격한 우세였다. 나는 점점 뒤로 물러서고 주태는 태엽 감은 인형처럼 전진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틀었다. 몇 합을 겨룬 뒤 선회하고 있는 주태에게 일직선으로 쳐 들어가며 검을 찔러 넣었다. 주태 역시 내 경로를 예상했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촤차창.
병기가 연속적으로 부딪치며 불똥이 어지럽게 튀었다. 몇 합의 대결이 오가자 주태는 나를 완전히 멸시하기 시작했다.
‘이놈, 아까의 그 강렬한 기운은 나의 착각이었나?’
“레벨 20치고는 제법이다마는 승부는 여기까지다.”
놈은 나의 실력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듯이 머리끝까지 메이스를 치켜 올려 순식간에 나의 머리를 으깨버리려고 했다.
“잘한다, 주태. 그대로 끝장내버려. 녀석을 다져서 만두 속에 넣어 먹자.”
“아냐, 저놈은 주둥이만 산 놈이니까 주둥이가 제일 맛있을 거야. 저놈 주둥이에 밀가루를 입혀 튀겨 먹으면 제 맛이겠는걸.”
모니터를 가득 채우는 대화는 비단 임파젤 성의 적군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동맹군 측에서도 승부에 대한 섣부른 판단들이 쏟아져 나왔다.
“끝났군.”
“그러기에 고작 레벨 20주제에 깝치고 나설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게 말이야. 녀석 또 저 레벨까지 만들려면 며칠은 고생하겠군.”
“프레드릭 군주, 이제 그대의 혈맹은 우리가 접수해도 되겠소? 껄껄껄.”
중국 놈들의 비아냥거림은 그렇다 치지만 우리 동맹의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예상하는 듯한 체념과 비꼬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여기서 끝내기는 너무 이르지만 우리 편 사기도 있고 주태 저 녀석이 하는 짓도 너무 불충스럽다.
슈슛.
갑자기 엄청난 피보라가 쏟아져 나왔다.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는 것은 당연히 내가 아니라 주태였다. 주태는 치켜든 메이스를 차마 내려치지도 못하고 목이 잘린 채로 바닥에 처박혔다.
“이럴 수가, 랏사드가 이겼어!”
“정말! 믿을 수 없군.”
“어떻게 된 거야? 일격에 목이 날아가다니!”
“이거 버그 아냐?”
“와아아아!”
우리 편 진영에서 갑작스러운 장면에 놀라움과 함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대로 임파젤 성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한겨울에 벌거벗겨놓고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해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주태가 일격에 뻗어버렸어. 이럴 수도 있는 거야?”
“그러게. 파이온, 버그가 좀 심하다더니… 빨리 신고센터에 글 올려.”
“주태 그 녀석, 마우스 컨트롤이 좀 서툴긴 하더라고.”
나는 임파젤 성 사람들의 말은 무시한 채 주태가 떨군 아이템을 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랏사드, 이제 그만 우리 진영으로 돌아오시오. 당신은 당신 몫을 충분히 했소. 아니, 솔직히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으니 그만 돌아오시오.]
동맹의 군주인 선젝터는 나에게 귓속말로 귀대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놈들의 사기를 꺾어놓고 우리 혈맹의 사기를 올려야만 쉽사리 공성전에서 성을 정복할 것이다. 또한 랏사드의 이미지를 모든 게이머들에게 확실히 심어 놓을 수 있겠지.
파이온 온라인 게임은 공성전과 수성전에서 일기토를 벌일 경우 일기토 대결의 승자 측은 사기가 5% 향상되고 패자 측은 사기가 7% 꺾이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공성전에서 유리한 쪽은 분명 성을 지키는 쪽이다. 전략적 위치로도 그렇고 안전도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예부터 병법에서도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 3배 이상의 병력과 물자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임파젤의 병력은 3만, 우리 측 혈맹은 2만 6천. 수적으로 우리가 불리하다.
저들의 사기를 훨씬 더 떨어뜨려야 한다. 더구나 나 같은 저급 레벨에게 그들의 기사들이 연속으로 떨어져나간다면 사기 저하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일기토 대결을 몇 번만 더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일기토 대결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면 그때 선젝터 군주님께서 총공격을 명령해주십시오.]
[지금 감히 군주의 명을 거역하는 거요? 당장 귀환하시오.]
[선젝터 군주, 랏사드에게 기회를 줍시다. 레벨 20의 초보가 150 정도 되는 기사의 목을 단칼에 베지 않았소. 우리 혈맹의 사기도 올라가고 있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지요.]
[그러다가 만에 하나 일기도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거요? 우리 측 사기가 또 떨어질 거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저 랏사드는 초보가 아닙니다. 적어도 300 이상의 고수급이에요. 수치상으로는 20이지만 그에게는 뭔가가 있어요. 지금 랏사드가 입고 있는 붉은 늑대의 갑주 세트만 해도 그래요. 저 갑옷을 입을 수 있는 기사라면 틀림없이 실력 또한 그에 뒷받침이 되는 자일 겁니다. 랏사드의 말대로 그가 일기토에서 한 번 더 승리하면 총공격을 감행해 성을 탈환하도록 하죠.]
그제야 선젝터는 내가 입고 있는 붉은 갑옷과 나의 가공할 만한 위력의 검들이 눈에 들어왔는지 군소리 없이 나와 프레드릭 군주의 의견에 따랐다.
“하하하하, 뭐냐? 나를 그렇게 업신여기더니 네놈들이 자랑하던 주태가 나의 한칼에 목 없는 귀신이 되었구나? 어디 더 용맹스런 장수는 없느냐? 도대체 임파젤 성에는 나 같은 초보 하나 상대할 배짱 있는 놈들이 없더란 말이냐? 레벨 20이라 무시하더니, 방금 죽은 그 주탠가 추탠가 하는 놈은 그렇다면 레벨 10 정도 된단 말이냐?”
내가 계속 자극하자 성 위의 엘프 하나가 활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있던 마법사가 그를 만류하였다.
“아무리 저놈 하는 짓이 얄밉더라도 일기토를 신청하는 기사를 성 위에서 활로 저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네. 아무리 우리가 돈을 목적으로 이 게임을 한다지만 최소한의 룰은 지켜야 돼.”
“젠장, 저놈 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울화통이 터져서 그런단 말이요.”
“좋수다. 내가 나가서 저놈의 목을 꿰어 오겠소.”
제법 의기를 발휘하는 녀석은 화염계열의 마법을 쓰는 엘프로 보였다. 그가 성루에서 내려오려 하자 한 인영이 그를 제지했다.
“놈은 너 같은 중수들의 상대가 아니다.”
“예? 한당 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레벨 20인 저놈을 레벨 180인 제가 상대를 못한단 말씀이세요?”
“분명 놈의 레벨은 20일지 모른다. 하지만 저 녀석의 플레이와 움직임은 이미 300을 넘어선 상급 캐릭터야. 내가 직접 상대한다.”
제법 그럴싸한 기운을 풍기는 그는 다크엘프 계열의 캐릭터였다. 성문을 나오는 그에게서 엄청난 기운의 마나가 느껴졌다.
스킬이나 능력치 모두 상당한 실력이군. 적어도 레벨 350은 되는 흑기사야.
“그대가 나의 두 번째 희생양이 될 자인가?”
“입으로만 싸우는 이놈아, 여기 임파젤 성의 흑기사단장 한당이 네놈의 목을 꿰러 나왔다.”
어랍쇼? 이것들 봐라. 완전히 삼국지 오나라의 이름으로 닉네임을 만든 놈들이구나. 한당은 오나라 손권의 대표적 무장이 아닌가. 이것들 혹시 오나라 길드 아냐?
“굳이 내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지? 아까 다 들었을 테니. 한당이라, 혹시 네놈 성이 불씨 아니냐? 불한당?”
“주둥이만 산 놈, 네놈은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뜰 테지?”
“천만에, 나는 물에 빠지면 엉덩이가 뜬다. 나는 물에 빠져도 물고기하고 농담 따먹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입이 가라앉고 엉덩이가 뜨지.”
“긴 말 필요 없다. 무사는 검으로 말한다.”
한당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롱소드가 급속히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랏사드, 소드 마스터급 기사다. 조심해.]
군주 프레드릭이 귓속말을 전해왔다.
[나도 알고 있수다.]
검에 오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분명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검사. 이번 싸움은 꽤 만만치 않겠군. 하지만 나 역시 이미 마나 연공법 아이템을 소화해냈지 않은가. 저 정도 검사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한당은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브르도 소드에서 샐러맨더 검으로 바꿨다. 그리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의 몸을 파고드는 한당의 검의 경로를 막았다.
촤촤창.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누구의 검이 어떤 것인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다. 그저 한쪽은 붉은빛의 오러를 발하고 다른 한쪽은 그 붉은빛과 어울려 비무를 출 뿐이었다.
오러를 발하는 기사의 몸을 에메랄드빛의 원형이 개똥벌레의 불빛처럼 어지럽게 휘감아 돌았고 그의 오러 블레이드가 깃든 검이 나의 샐러맨더 검과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었고 그때마다 양 진영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나는 한당과는 달리 나의 샐러맨더 검에 오러를 불어넣지 않았다. 한당의 검술은 파워보다는 스피드에 주안점을 둔 쾌검.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오러를 막기 위해 나 역시 오러를 끌어 모았다가는 체력소모가 심해져 이어질 공성전에서 자칫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
한당 녀석, 아까 주태와의 대결 때 내가 사용한 브로드 소드를 보면서 나를 파워 위주의 공격을 하는 유저로 생각하고 쾌검을 구사할 계획을 세워 왔구나.
그러나 그것은 너의 완전한 오판이다. 나는 이미 파이온 온라인에 투입되기 전부터 게임 상 가능한 모든 병법, 검법, 창법, 궁법, 체술법, 보법, 경공법, 대마술 방어법 등을 로딩했다. 쾌검술이라면 너는 내 상대가 아니다.
나는 이미 로딩을 통해 파이온의 비기인 빛의 쾌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몇 번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가장 완벽해진 빛의 쾌검술은 도합 스물네 가지의 초식에 파생된 변초가 이백 개가 넘는 최고의 쾌검술이다.
그러니 한당의 검술이 제아무리 빨라도 그 공격이 먹힐 리가 없다. 더구나 나는 이미 아니지, 무 등을 통해 마우스 컨트롤 및 게임 신경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상태다.
한당 역시 그간 파이온 온라인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일기토와 공성전, 대전투를 벌여온 실력자임에는 틀림없다. 어쩌면 파이온 하에서는 그의 경험이 나의 경험을 훨씬 상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당은 빛의 검술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의 검의 궤적이 점점 단순해지며 변초 또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그 결정적 증거였다.
‘세상에, 이게 레벨 20이 펼칠 수 있는 초식이란 말인가?’
내가 펼쳐내는 검술은 극히 생소할뿐더러 한당은 아직까지 경험도 못해본 파격적인 초식들임에 틀림없었다. 공격과 방어는 그의 예상을 철저히 무시해버렸고 틈틈이 약점을 찔러 오는 그의 검날은 오금을 저리게 했다.
이게 실제 상황이라면 그는 이미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른다.
나의 뜻밖의 선전에 혈맹 진영에서는 탄성과 놀라움이 터져 나왔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저런 초보가 레벨 300 이상의 고수와 맞서 전혀 밀리지 않고 싸우다니.”
“그러게 말이야. 더구나 그는 오러를 불러내지 않고 그저 초식과 검으로만 저자를 상대하고 있지 않나?”
“도대체 저 검의 정체가 뭐지? 어떻게 오러를 불어넣은 검을 맨검으로 막을 수 있는 거지?”
“저건 샐러맨더의 검. 내구성으로 따진다면 파이온 온라인 최고의 검이라 할 수 있지.”
누군가가 샐러맨더 검에 대해 아는 체를 했다.
모두들 내가 한당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캐릭터인 랏사드의 검술의 위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그들이 더더욱 놀라는 이유는 어떻게 레벨 20의 초보 기사가 샐러맨더 검을 사용할 수 있냐는 것일 게다. 파이온 온라인 게임 안에 있는 검 중에서 내구성과 강도로 따지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검이 샐러맨더 검이다.
놈은 오러 블레이드를 불어넣은 공격이 전혀 먹혀들지 않자 마나를 더욱 불어넣었다.
‘이놈 봐라. 이러다 내공이 뒤틀려 내상을 입으면 HP가 턱없이 소모될지도 모르는데 나 하나 잡기 위해 이렇게 무리를 한 단 말이야?’
나는 장검인 샐러맨더의 단점을 노리고 근접전을 시도하려고 하는 한당의 눈을 보통 검보다 10센티가 더 긴 검의 가드로 찔러버렸다.
그의 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철철 넘쳐흐르는 피 때문에 그의 시야는 흐릿해졌다. 눈앞이 캄캄해지자 그는 두려움에 빠지는 듯했다.
녀석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그런 마구잡이식 초식이 내게 통할 것 같으냐?’
푸슉.
나의 샐러맨더 검이 한당의 몸을 목부터 옆구리까지 찢고 들어갔다.
파아아악.
허공을 향해 분수처럼 치솟는 피보라. 목을 중심으로 검을 든 오른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푸슈슉.
연이은 나의 쾌검에 놈의 몸은 발기발기 찢겼다.
스르릉.
힘을 잃고 비틀거리는 한당의 목을 샐러맨더의 예리한 검날이 훑고 지나갔다. 검날이 얼마나 예리했는지 떨어져 나간 목에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피가 터져 나왔다.
두 번째 대결 역시 나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의기 등등하게 임파젤 성의 망루를 향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임파젤 성의 일기토용 기사들이 고작 이것뿐인가?”
“기다려라. 여기 텔팍 님이 나가신다.”
텔팍, 그는 좀 전 한당이 나오기 전 호기를 부렸던 엘프 유저였다.
“텔팍 녀석, 성주님 허락도 없이 뛰쳐나가다니…….”
“텔팍 녀석, 한당과 친구잖아. 한당 죽는 걸 보며 분을 참지 못했겠지.”
망루 위의 대화로 봐서 지금 나오는 녀석은 좀 전에 내 검에 쓰러진 한당과 아는 사이 같았다. 녀석의 인영이 점점 드러났다.
엘프? 기사를 상대로 엘프가 나오다니… 그렇다면 활이나 마법으로 장거리 공격을 하면서 게릴라전을 펼칠 속셈이겠구나.
녀석은 성문을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왔다.
“나 임파젤 성 오씨 혈맹의 텔팍이다. 혈의 눈물의 하룻강아지에게 일대일 대결을 신청한다.”
“그래, 한번 놀아보자.”
[이 녀석을 쓰러뜨리면 바로 성을 공격해야 합니다.]
나는 프레드릭과 선젝터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래, 알았소. 이거 뜻밖의 한 놈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빨리 끝내주시오.]
프레드릭은 두 번의 대결이 끝나면 바로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뜻밖의 결투 신청에 또다시 한 합을 기다려야 했다.
내가 대결 신청을 받아들이지 텔팍이라는 엘프는 활을 꺼내 들어 화살을 재었다.
그러나 파이온 공간에서 원거리 공격수들의 단점은 화살을 장착하고 마나를 불러일으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물론 원거리 공격수와 기사 같은 근접전 공격수들이 싸울 경우 실력이 비슷하거나 차이가 크지 않다면 원거리 공격수가 훨씬 유리하다.
접근전 공격수들이 다가오기 전에 화살이나 마법으로 견제하면서 게릴라전을 펼치면 접근전 공격수들은 조금씩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체력 고갈로 죽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원거리 공격수들은 야금야금 기사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텔팍이 활에 화살을 재고 마나를 불어넣는 시간은 대략 실제 시간으로 10초 정도. 그러나 나는 이미 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수와의 일대일 대결에서는 적이 무기를 장착하기 전에 승패를 결정지어야 한다. 빠른 시간 안에 기사의 공격거리를 잡지 못하면 계속되는 원거리 공격과 게릴라전으로 근접전 파이터들은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윈드 워크(Wind walk).
소위 바람의 보법으로 불리는 경공술에 붉은 늑대의 갑주에 달린 솔이 심하게 날렸다.
“죽어라.”
화살에 마나를 불어넣은 텔팍이 나를 향해 활시위를 놓으려 할 때에 나는 이미 그의 눈앞에 다가가 있었다.
“헉… 이렇게 빠를 수가…….”
반월 자르기.
화살은 나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급한 마음에 활시위를 놔버렸기에 공격의 정확도가 떨어진 것이다. 나는 허공으로 뛰어 올라 내리며 내 검에 체중을 실어 반월 자르기로 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텔팍의 몸이 수직으로 이등분될 때 나는 연이어 돌려치기와 사선 베기를 이어갔다.
스파파팟.
반월 자르기에 반으로 갈라진 텔팍의 몸은 돌려치기와 사선 베기로 수평으로 갈리고 사선으로 갈려 여섯 조각이 나버렸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넌 누구…냐?”
놈의 내 정체를 묻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라져갔다.
“누구 저 자식을 죽일 놈이 없단 말이냐? 누구든 저 랏사드를 죽인 놈에게 부성주의 지위를 내리겠노라!”
“부성주라고?”
“하지만 누가… 한당과 주태도 안 되는데…….”
“그러게. 텔팍 녀석 괜히 나섰다가 자기 목숨까지 잃고 말았잖아.”
망루의 간닝은 광분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대꾸하며 선뜻 일대일 대결에 나서는 자들이 없었다.
임파젤 성의 사기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총공격 명령을 내리세요.]
나는 선젝터와 프레드릭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라고 귓속말을 보낸 후 한당과 주태, 텔팍을 내보내기 위해 내려놓은 도개교를 향해 뛰어갔다.
내가 갑자기 성을 향해 뛰자 망루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뭐야? 저 자식 왜 성문 쪽으로 뛰는 거지?”
“미친 놈, 성문에 박치기라도 하려는 건가?”
“큰일 났다. 저 자식을 막아! 빨리! 궁수들, 저 자식을 죽여야 해.”
“빨리 도개교를 올려라! 성문을 올리란 말이다!”
“성주님의 명이다! 성문을 올려라!”
뿌우우뿌우우.
성문을 올릴 것을 명하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임파젤 성의 군주인 간닝이 나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다급하게 궁수들을 불러 모았고 성문을 닫기 위해 도르래를 감았다.
끼기기깅.
그러나 간닝의 판단은 이미 시기를 놓쳐버렸다. 버스 떠난 뒤에 손들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이다.
다급하게 성문의 도르레를 감아올리던 병사들은 온 힘을 다 쏟아 부었으나 무거운 도개교는 거의 지상에서 30CM 밖에 들려 올라가지 않았다.
공성전에 있어서 성문의 중요성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비단 파이온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RPG게임 과 실제로 역사 속에서도 성문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공성전에서 성문이 뚫리지 않는다면 성을 뺏을 방법은 구름사다리나 꼬챙이를 이용해 성벽을 기어 올라가는 방법, 아니면 투석기 같은 공성병기를 이용해 성벽 자체를 무너뜨리는 방법, 또는 성 앞에 토산을 쌓아 사다리를 연결해 넘어가는 방법, 또는 성안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방법 등으로 제한된다.
그 과정에서 공성 측의 병력은 수성 측보다 몇 배에서 많게는 몇 십 배까지 소모된다.
하지만 성문이 뚫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돌파 위주의 기병들이 말을 타고 성안으로 잠입하기도 쉬워지고 또 중무장 보병들이 방패를 이용해 일사불란하게 성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공성전과 수성전에서 성문은 사람의 척추만큼이나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나 파이온 같은 가상현실게임에서도 성문의 역할은 실제 상황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도개교를 여닫기 위해 도개교의 양쪽에 달려 있는 팔뚝만 한 쇠사슬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연이어 무기 인벤토리에서 파괴자의 검을 꺼내 들어 오러 블레이드를 불어넣었다. 파이온 게임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불러낸 오러였다.
파괴자의 검에 푸른빛 오러가 맺혔고 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이용해 양쪽으로 연결된 쇠사슬 중 한쪽의 쇠사슬을 내리쳤다.
“타이푼 참.”
빠카캉.
소드 마스터급 이상의 마나와 레벨을 보유해야 시전 가능한 상승 무공인 타이푼 참. 씰드페이톰도 한방에 작살내버리는 타이푼 참에 사람의 팔뚝만큼 두꺼운 쇠사슬이 무 잘리듯 반 토막이 나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는 도개교를 발판 삼아 맞은편 쇠사슬 쪽으로 뛰어오르며 남은 쇠사슬마저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큰일 났다. 성문이 올라가지 않아!”
“녀석을 공격해라! 저 녀석을 죽여 버려!”
“세나, 로큰롤메이지, 나에게 방어 마법을 걸어줘.”
나는 급하게 세나와 로큰롤에게 프로텍션 마법을 부탁했다.
“알았어요, 랏사드 님. 조금만 기다려요.”
슈슈슈슈.
나를 둘러싸는 엘리멘탈 프로텍션과 리버스 어택.
나는 그 방어 마법을 바탕으로 타워 실드를 꺼내 들었다.
프로텍션 인챈트. 인챈트라는 것은 공격력과 방어력을 순식간에 증폭시키는 기술인데 나는 프로텍션 마법이 걸린 나의 방패에 방어력을 높여주는 인챈트를 걸었다.
임파젤 성의 망루에서는 수십 발의 화살이 나를 향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랏사드를 도와라!”
“성문을 향해 진격하라!”
뿌우뿌우. 둥둥두두둥.
블러디 나이츠의 공격을 알리는 뿔피리와 군주들이 보유한 NPC들의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온 하늘과 대지를 뒤덮었다.
수천의 기사들이 말에 올라타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대지를 흔드는 말발굽 소리 속에서 내 타워실드는 어렵게 적들의 일점사를 견뎌내고 있었다.
“스타리스, 랏사드를 보호해. 가드리안의 모든 방어 마법을 동원해 랏사드를 엄호해.”
프레드릭은 좌장인 스타리스에게 명령을 내려 나를 도울 것을 알렸다. 선젝터가 말에 올라탄 채 검을 들어 임파젤 성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망루 위의 궁수와 마법사들을 먼저 죽여라! 놈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성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모든 원거리 공격수들은 적들의 원거리 공격수를 제압하라. 공격, 공격이다!”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