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혈의 눈물, 평균레벨12의 초보혈맹을 결성하다 (5/51)

chapter 4 혈의 눈물, 평균레벨12의 초보혈맹을 결성하다

“세나5 님, 저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은 이만 로그아웃해야 겠네요.”

“정말요? 랏사드 님 없으면 저 죽을 것 같은데… 근데 랏사드 님 어깨 위에 있는 그 요정은 뭐예요? 계속 말씀 없으시더니 그 요정하고 대화 나눈 건가요? 그 꼬마 요정도 게이머에요? 신기하다.”

얘가 무슨 질문을 서라운드 동시다발로다가…….

“아… 크림베리라는 요정인데요. 그냥 NPC예요. 운 좋게 또 이런 꼬마 요정 NPC를 습득하네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봐요. 엄마가 밥 먹으라고 성화셔서.”

세상에 나는 도대체 진실을 말할 줄 모른단 말인가? PC방에서 오락하느라 집에도 안 들어가는 놈이 엄마가 밥 먹으라고 한다고 하던 게임을 그만둘 놈이겠냐? 히유, 갑자기 나 자신이 한심해진다.

“정말 랏사드 님은 볼수록 신비하시군요. 그래요. 그럼 저녁 맛있게 드세요.”

정말 아쉬워하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회식이고 뭐고 세나와 함께 게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주책없는 내 배는 꼬르륵 트림을 했다.

[랏사드 님이 로그아웃하셨습니다.]

나는 게임을 끝내고 허겁지겁 겉옷을 챙겨 입었다.

“대충 입고 나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나는 미영을 따라 나가며 최상조 씨와 김민우가 오늘 실적을 얼마나 쌓았는지 제법 궁금해졌다.

좀 쌀쌀하긴 했지만 미영이의 뒷모습, 그림이 됐다.

쇠고기나 회를 예상했던 나의 기대는 삼겹살집 앞에서 멈춰 선 박만호 영업부장 때문에 산산이 무너졌다. 그릇 작은 김씨소프트와 박민규 대표이사를 씹고 싶었으나 요즘 경기도 어렵고 또 삼겹살도 어디냐는 마음도 없진 않았고 뒤에 듣게 된 이야기 때문에 나는 삼겹살 집 앞에 멈춰 선 박만호 부장의 그 원망스러운 두 발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자, 우리 최상조, 박수혁, 김민우 이 세 분의 활약에 저뿐만 아니라 우리 김씨소프트가 거는 기대가 큽니다. 부디 여러분들 많은 성과를 거두셔서 대한민국의 국부유출을 방지하고 또 세계적인 게임회사로 거듭 성장해나가고 있는 우리 김씨소프트와 파이온 온라인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자, 다 같이 건배합시다. 우리 모두의 파이팅을 위하여.”

“위하여.”

꼭 군대에서 연대장님이 건배 제안하면 밑에 있는 쫄다구들이 대성박력으로 파이팅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노릇노릇 익어가는 삼겹살 앞에서 소주잔을 들고 있으니 제법 분위기가 괜찮았다.

건배가 끝난 후 나는 소주잔을 들고 박민규 사장에게로 가려고 했다.

“수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잔 돌려야죠.”

나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표정으로 미영을 바라봤다.

“우리 회사는 그런 분위기 아니네요. 그냥 처음 건배만 하고 다음부터는 마시고 싶은 사람만 마시고 술을 강권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회식문화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죠.”

“그렇군요. 뭐 그렇다면야 굳이… 그래도 사장님인데… 쩝.”

“술을 잘하시나 봐요?”

“왜요?”

“원래 술잔은 그만큼 받아 마실 자신이 있는 경우에만 돌리는 거잖아요.”

“아… 국정원에서 아직 제 주량은 파악을 못했나 보죠? 아직까진 술 마시면서 남들보다 먼저 쓰러져본 적 없습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회식자리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누꼬? 지금 술 마셔서 나가떨어진 적이 없다고 한기?”

“누가 아직까지 술 마시기에서 져본 적이 없다고?”

경상도 아저씨 최상조 씨와 영업부장 박만호가 동시에 나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박민규 사장의 곁에 앉아 있던 영업부장과 프로그래머들 옆에 앉아 있던 최상조 씨가 내 옆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런, 이놈의 주둥이. 이놈의 주둥이가 화근이라니까.’

나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가 내 앞에 앉은 강미영 팀장과 나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녀는 박민규 사장과 김민우가 앉아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제길, 이왕 이렇게 된 거 코가 삐뚤어져라 한번 마셔보자.

“그래, 박수혁 씨가 그렇게 술을 잘 마셔?”

“아뇨, 그냥 남들 마시는 정도만…….”

“이거 오랜만에 강적 만났는걸. 뺄 줄 모르네.”

박만호 부장은 나를 향해 술병을 들어올렸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의 술잔을 받았다.

“그래, 박수혁 씨 오늘 활약상 한번 들어볼까?”

박만호 부장이 술잔을 따르며 한 말이었다.

“활약상이랄 게 뭐 있겠어요. 게임보다는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던걸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강미영의 찍는 소리에 대표이사 박민규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게임하던 중에 여성 유저에게 작업 걸더라니까요.”

“그래? 그런 뜻이었어? 하하하하!”

“와하하하! 영웅호색이라더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어. 예부터 술 잘하는 사람치고 영웅이 아닌 사람을 못 봤지.”

박만호 영업부장은 개똥같은 술 철학을 늘어놓으며 나와 잔을 부딪쳤다. 오늘 소주는 유달리 어머니가 지어온 한약보다 더 쓴 것 같았다.

“오늘 저, 작업만 걸었던 건 아니에요. 중국 유저들 51명을 쓸어버렸죠. 어디 그뿐인 줄 알아요? PK에 질려서 파이온을 떠날 맘을 먹고 있던 한국 게이머 두 명의 목숨을 구해줬죠. 눈앞에서 확인한 것만 두 명이고 아마 내가 짱꼴라들을 유인한 덕에 살아난 한국 초보들도 한두 명이 아닐걸요?”

“오, 그랬어요? 이거 대단한걸.”

박민규 사장은 제록스나 신도리코 복사기보다 더 사무적인 말투로 나에게 공치사를 했다.

“그래, 그럼 최상조 씨와 김민우 씨는 오늘 무슨 활약을 했는지 한번 들어볼까요?”

박만호 부장은 또다시 술잔을 비우며 김민우와 최상조를 바라봤다.

최상조 씨는 아무 말이 없었고 김민우는 그저 상추에 삼겹살만 싸고 있었다. 둘 다 대답이 없어 박부장이 조금 무안해하자 강미영 팀장이 최상조와 김민우를 대신해 대답했다.

“최상조 씨는 오늘 하루 종일 퀘스트만 하고 다니셨고요. 김민우 씨는 오늘 일대일 대결 신청만 하다가 번번이 거절당해 단 한 명과 일대일 대결을 펼쳤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한 거죠? 최상조 씨와 김민우 씨를 특별히 모신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잖소.”

최상조 씨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겸연쩍어 했으나 김민우는 별 반 미안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강팀장, 그럼 김민우 씨가 일대일 대결을 해서 이긴 자는 중국 유저였나?”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아니야? 그럼 설마 한국 유저하고 일대일 대결해서 이긴 거야?”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첫날부터 최상조 씨와 김민우 씨 왜 그렇게 플레이를 하시는 겁니까? 파이온 온라인의 고수들이라 별 다른 말 하면 잔소리로 들을 것 같아 믿고 맡겼더니 본인들이 평소에 플레이하던 대로 하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저희 김씨소프트사가 할 일이 없어서 두 분을 이곳까지 모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박대표는 깔끔한 외모와는 다르게 다혈질적인 성격인지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사장님. 가시게요?”

박부장이 깜짝 놀라 일어서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자리는 박부장이 주선하세요. 저는 집안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강팀장, 최상조 씨와 김민우 씨에게 교육을 다시 시키세요.”

“예, 사장님.”

박대표가 가버리자 회식장 분위기가 맞선 자리마냥 어색하게 변했다.

우리들이 앉아 있는 방이 박대표의 몽니로 썰렁해지자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TV 뉴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제7차 6자 회담이 미국과 북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베이징에서 NBC 뉴스 김정노였습니다.”

“그나저나 최상조 씨, 김민우 씨. 스카우터들에게 다 설명을 들으셨을 텐데 왜 그렇게 플레이를 하신 거죠?”

“미안합니더. 내 워낙 고급 아이템 취득에 버릇이 들어 있어가…….”

최상조는 뒤통수를 긁으며 베시시 웃었다.

그러나 김민우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기껏해야 초보 중국 게이머 50명 죽인 걸 가지고 큰 소리 치는 것보다야 레벨 402의 고수를 죽인 내가 더 훌륭한 거 아닌가요?”

차갑게 생긴 얼굴만큼이나 싸가지 없는 말이었다. 감히 나의 활약을 저렇게 무지르다니.

“하지만 김민우 씨가 상대한 고수는 저희들이 IP를 추적해본 결과 한국 유저였어요.”

“그거야 결과론이고, 녀석 닉네임이 진시황02여서 나는 당연히 중국인인 줄 알았단 말예요.”

분위기가 갈수록 을씨년스러워져갔다.

“자, 그만 합시다. 내일부터는 두 분 다 잘하시겠지. 고수들이니까. 한두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이제 그만들 하고 술이나 마시자고.”

박만호 영업부장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게 역력해 보였다.

소주잔이 몇 잔 돌았으나 김민우와 강미영이 계속해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탓인지 박대표가 똥을 싸놓고 사라져버려서인지 회식장의 분위기는 좀체 살아날 기미가 안 보였다.

“자, 그럼 1차는 여기서 그만 정리하고 2차 가지? 노래방 어때? 내가 노래방 쏘겠어.”

휘이이잉.

식어빠진 삼겹살마냥 얼어붙은 방안에는 찬바람이 일렁였다.

“뭐야? 반응들이 왜 이래?”

“그라지 말고 우리 다 같이 박부장님 따라서 노래방 갑시데이.”

휘이이잉.

찬바람은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결국 박만호와 최상조만이 노래방엘 갔고 김민우는 집에 좀 다녀오겠노라며 지하철을 타러 가버렸다. 그는 집이 서울 어디라고 했는데 내가 듣기에는 제법 부자들이 사는 동네 같았다.

김씨소프트의 몇몇 직원들은 퇴근한다며 집으로 가버렸고 나는 쓸쓸히 내 전용 룸인 김씨소프트의 13층 건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잠깐만요. 같이 올라가요.”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 할 때 강미영 팀장과 정광준 깔깔이 프로그래머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퇴근 안 하실 거예요?”

“마저 작업할 게 있어서요.”

“저도요, 수혁 씨에게 할 말도 있고.”

나는 13층으로 올라가 내 PC룸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12층에서 먼저 내렸다.

나는 컴퓨터를 켤까 하다가 술도 마셨고 해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멀뚱멀뚱 보고 있자니 잠도 오지 않고 심심해서 회사에 왔을 때 미영 씨가 줬던 파이온 가상현실게임 사용설명서와 매뉴얼이 생각났다.

“그래, 잠도 안 오는데 그거나 보자.”

나는 사용설명서와 매뉴얼을 들고 와 침대에 누운 채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매뉴얼의 표지에는 금색 글씨에 멋진 문양의 표제가 적혀 있었다.

파이온 가상현실게임 매뉴얼

<1장 파이온 온라인의 세계관>

태초에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제외하면 거의 무(無)에 가까운 우주에 생명을 불어 넣은 것은 전지전능한 신 아하스였다. 아하스는 입김을 불어넣어 파이온이라는 별을 생성했다.

태초의 별은 그러나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물질이었을 뿐 거의 무(無)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하스는 계속해서 파이온에 입김을 불어넣어 뉴클레오티드나 카미노산 같은 원시생명체를 만들어나갔다.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파이온을 건설해나가는 데 힘이 부치자 아하스는 창조시대를 열어갈 종족들을 만들었다. 최초에 탄생된 종족은 거인족 타이탄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힘으로 파이온별의 산맥을 뽑아 올리고 산맥과 대륙 사이에 바다를 채워넣었다.

두 번째로 창조된 종족은 엘프였다. 이들은 아하스 신의 총애로 마법능력을 부여 받아 파이온 대륙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산맥과 바다에 숲과 들, 해령과 해저를 만들어 미(美)를 불어넣었다.

세 번째로 창조된 종족은 난장이 드워프였다. 이들은 거인과 엘프들이 만들어놓은 지상 세계가 아닌 지하 세계를 건설하여 각종 동굴과 심연(Abyss)을 건설하였다. 또한 아하스 신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 불을 얻어 파이온 대륙의 불을 담당하게 되었다.

산맥과 바다를 뽑아내고 숲과 들을 만들고 지하세계를 건설하기까지가 쿰란(성서)의 창조 1세기에 해당한다.

“무슨 성경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제법 재미있는걸.”

나는 계속해서 매뉴얼을 읽어갔다.

창조 1세기에 만들어진 파이온은 그러나 오류와 모순투성이였다. 아하스 신은 전지전능하지만 그의 대리자들인 타이탄, 엘프, 드워프들이 아하스 신의 뜻을 완전히 따라가진 못했다.

각종 문제점들이 노출되자 아하스 신은 다시 파이온별을 관리할 종족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바로 아하스 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는 휴먼 종족, 즉 인간이다.

똑똑.

인간종족의 창조까지 읽었을 때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려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뭐 하고 계세요?”

열려진 문으로 미영이가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이 여자가 오밤중에 장성한 남자의 방에 웬일이란 말인가? 설마 이거 또 열차 안에서처럼 꿈 아냐?

“아,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파이온 게임 매뉴얼 좀 보고 있었어요.”

“와우, 그래도 정말 수혁 씨가 가장 기본이 돼 있군요.”

“그래요?”

“그럼요. 최상조 씨는 노래방 갔지, 김민우 씨는 집에 갔지, 우리가 요청하는 임무보다는 자신들만의 플레이만 하지… 근데 수혁 씨는 우리가 원하는 플레이를 해주지, 또 이렇게 늦은 밤까지 게임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 여자는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칭찬하다가도 갈구고, 갈구다가도 칭찬하고… 정말 변덕쟁이 여자야.

“미영 씨, ‘capricious’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커프리셔스? ‘변덕스러운’이란 뜻 아니에요?”

“와, 영어 공부 좀 하셨네.”

“이거 왜 이러세요? 김씨소프트에 입사하기가 쉬운지 아세요?”

“그럼 capricious가 왜 변덕스럽다는 뜻인지는 아세요?”

“어원은 잘… 모르겠네요.”

“옛날에 변덕쟁이 친구가 있었는데 술 마시러 가서 ‘뭐 마실래?’ 하고 물어보면 항상 라거 마실까, 밀러 마실까, 하이트 마실까, 카프리 마실까… 라거 주세요. 아니, 아니, 하이트 주세요… 아니… 그냥 카프리 주세요… 이럴 정도로 변덕스러운 놈이어서 카프리셔스. 변덕스러운. 그런 뜻이 된 거랍니다.”

휘이이잉.

“호호호호. 누가 남도 분 아니랄까봐 발음도 정말 촌스럽네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근데 매뉴얼 어느 부분 보고 있었어요?”

“아, 창조시대 관련된 부분요. 무슨 판타지 소설처럼 재밌군요.”

“수혁 씨, 내가 못살아. 어쩐지 밤늦게까지 게임을 연구한다 싶더라니… 창조시대 봐서 뭐 해요. 게임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 안 되잖아요. 그건 우리 게임 시나리오 작가들이 만들어놓은 이야기라 판타지 소설처럼 느껴지는 거고… 수혁 씨가 할 일은 그런 파이온의 세계관 같은 것 말고 각종 아이템의 특징, 각종 스킬의 특징 같은 걸 암기하고 외우고 응용하는 거예요. 그래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끔 대처할 거 아니에요.”

어쩐지 네가 웬일로 아까 칭찬한다 했다. 그럼 그렇지.

“와, 아까는 잘한다고 칭찬하더니 이제는 또 뭐라 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어머, 미안해요. 사장님도 그렇게 가버리고 최상조 씨랑 김민우 씨가 말도 안 듣고 해서 제가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 있었네요.”

“아니 뭐, 미안할 것까지야 없고. 한두 번 혼나는 것도 아닌데. 알았어요. 이제부터 아이템과 스킬, 종족들의 특성들 뭐 그런 것 공부할게요. 근데 각종 무기, 아이템은 대부분 특징들 암기하고 있는데…….”

“그럴 것 같아요. 아까 제 테스트를 쉽게 통과한 걸로 봐서도…….”

“참, 근데 왜 이 회사는 김씨소프트지요? 나는 사장이 김씨여서 김씨소프트라고 지은 줄 알았는데 사장은 박씨더구만.”

나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점을 미영에게 물었다.

“아, 그거요? 호호호. 수혁 씨 생각과 거의 비슷해요. 김씨소프트의 최대주주인 박민규 사장님의 처갓집이 김씨죠. 그래서 김씨소프트.”

“아… 그렇구나.”

“우리 사장님 너무 멋있게 생기지 않았어요?”

“멋있기는, 성질만 괴팍하던데요. 다혈질에 느끼남에…….”

나는 사장님 이야기를 하는 미영의 표정에서 그녀가 박민규 사장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냄새를 전문가로서 맡을 수 있었다.

이거 의외로 작업이 어려워지겠는걸. 라이벌이 너무 만만치 않아. 박민규 사장이 나를 라이벌로 인정해주든 말든 나는 그를 나의 라이벌로 삼아버렸다.

“피곤할 텐데 일찍 주무세요, 박수혁 씨. 아니, 수혁 오라버니. 호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에게 수혁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장난 같았지만 꽤 기분이 좋았다. 에이스 풀하우스를 2포카드로 잡는 기분이랄까?

“어… 그… 그래. 미영이도 잘 들어가구.”

나는 신인 탤런트의 책 읽는 듯한 연기만큼이나 어색하게 그녀에게 말을 놨다.

“수혁 오라버니도 빨리 레벨업 시켜서 공성전이나 수성전 같은 전투에 참가하셔야죠. 아시다시피 성 하나 뺏겨버리면 그만큼 우리 국부가 유출되는 거니까요.”

“그래, 알았어. 내일부터 죽어라 게임에 몰두해서 적들의 성을 우려내주지.”

“참, 오늘 PK한 중국인들 닉네임 저한테 넘겨주세요.”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나 머리 안 좋아.”

미영은 나를 귀엽다는 듯 쳐다봤다.

“호호, 오라버니 아이디로 로그인해보세요. 그럼 수혁 오라버니가 오늘 죽인 상대방 닉네임이 뜰 거예요. 그 명단을 파일로 저장하기 해가지고 저한테 주세요. 저희들 IP 추적 프로그램인 도마인 버전 3으로 추적해보고 불가능하면 사이버테러 대응센터 유경위님께 자료 넘겨줘야 하거든요.”

“아… 그렇구나. 알았어. 그럼 내일까지 출력해서 미영이 자리에 올려놓을게.”

“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푹 쉬고 잠 잘 주무세요.”

그녀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내 방을 나갔다.

가슴속에 뭔가 미혜를 처음 만났을 때 같은 설렘 같은 게 느껴졌다.

“정신 차려라, 박수혁. 조국이 너를 부르고 있는데 여자라니… 안 될 말이다. 정신 차려.”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창조시대 편을 넘겨버리고 스킬에 관한 설명이 나와 있는 쪽을 펼쳤다.

<휴먼 나이트 스킬>

올려치기 레벨 5 이상, 사용마나 3, 공격력 9, 내려찍기 레벨 3 이상, 사용마나 0 공격력 4

이런 시시한 스킬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야. 좀 더 파격적이고 강력한 스킬은 없는 거야?

회오리 베기 레벨 10 이상 사용마나 5, 공격력 10

‘오! 이건 제법 강력하군.’

반월 자르기 레벨 10 이상 , 사용마나 8, 공격력 12

나는 조금씩 내 캐릭터에 맞는 스킬들을 읽어보며 필요한 것들은 나중에 또 참고하기 위해 밑줄을 그어놓았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벌써 훌륭한 사람 됐을 텐데…….

분노의 참, 헬 버스트, 허리케인 스윙 등 고급 스킬들을 읽고 있을 때 드디어 내가 찾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승 스킬

기본 제한: 휴먼 나이트에서 소드 익스퍼트의 전직을 거쳐 소드 마스터로의 전직을 거쳐야 사용 가능.

스킬 종류

§ 빛의 검: 쾌검술의 대가 라이안 대륙의 군주 발터 켄야민이 창시한 상승 무공. 발도술과 초식에서 거의 엘프 소스 템플러의 오러 스피드를 능가하는 검술. 기본 12가지의 초식에 변초를 섞어 360여 개의 초식을 순식간에 시전하는 파이온 온라인 최고의 쾌검술.

§ 뇌검도래: 소드 마스터급 이상의 마나와 레벨을 보유해야 시전 가능. 검 역시 레벨 350 이상의 파괴의 검 이상을 필요로 함. 그 이하의 중급 검을 사용 시 검이 마나를 못 견디기 파괴되게 프로그램되어 있음. 파괴의 검 이상의 검을 사용 시 강력한 오러와 함께 우레와 번개를 동반한 스플래시형 데미지를 상대방에게 입힐 수 있음.

§ 타이푼 참: 소드 마스터급 이상의 마나와 레벨을 보유해야 시전 가능. 사용 가능한 검은 레벨 400 이상의 다크 브레이커 이상. 다크 브레이커 이상 급의 검을 통해 바람계열의 오러를 발산. 대다수의 적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음.

나는 휴먼 종족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마법사계열의 스킬들과 엘프, 드워프, 다크엘프, 오크 등의 각 스킬들을 밑줄 그어가며 읽어나갔다. 엄청난 분량이라 스킬만 읽는데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휴, 힘들다. 좀 지겨워지려고 하는걸.”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파이온 게임의 매뉴얼을 얼굴에 덮었다. 조금씩 눈이 뻑뻑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나의 김씨소프트에서의 생활은 규칙적이지 못했다. 규칙적이고 싶어도 규칙적일 수가 없었다. 지금껏 오전 12시나 오후 1시 정도에 일어나던 생활은 이제 지킬 수 없게 됐다. 아침이 되자 강미영 씨가 내 방으로 올라와 어서 빨리 게임을 시작하라며 종용했다.

“수혁 씨, 지금 난리 났어요.”

이 여자는 어제 밤까지만 해도 수혁 오라버니라더니 또 왜 난데없이 수혁 씨야.

“무슨 난리?”

“어제 사장님이 한소리 하셔서 그런지 최상조 씨랑 김민우 씨는 벌써 공성전을 위해 혈맹군주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두 분 다 레벨이 400 이상이라 파이온 각 대륙의 영웅들이 쥬다스 프리스트(최상조의 닉네임)와 엘리트PK(김민우의 닉네임)가 등록한 혈맹에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어요.”

나는 사십대 후반의 회사원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다가 놈들에게 밀려서 취직이고 뭐고 다 물거품 되는 거 아냐?’

하지만 혈맹 등록소에 가서 혈맹을 등록하려면 최소 레벨이 20 이상이어야 된다. 그러려면 퀘스트를 통과하거나 돈과 레벨이 되는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아니면 고수들을 PK해야 되는데…….

“미영아, 나는 어떻게 혈맹 등록 안 될까?”

“우선 레벨을 20까지 올려야 해요.”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야. 어떡해야 최대한 빨리 20까지 오를 수 있지?”

“수혁 씨 지금 레벨이 몇이죠?”

“지금 레벨 12이야.”

“섀도우 레벨이 400으로 시작했으니까 섀도우 레벨은 412정도 되겠군요. 그럼 오늘 조금만 하면 혈맹 등록은 가능하겠네요. 하지만 다른 게이머들이 보기에는 레벨 20으로 보여서 누가 그 혈맹에 가입을 할까요?”

파이온 공간 안에서 혈맹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최소 레벨이 20 이상이어야 하고 혈맹 가입 인원이 5명 이상이어야 한다. 더구나 혈맹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혈맹원들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군주 옹립이 경선으로 갈 경우는 혈맹원들 과반수의 득표를 얻어야 한다.

“좋았어. 지금 당장 고급 몬스터 몇 마리 때려죽이고 레벨 20 만들어서 바로 혈맹 등록해야겠어.”

“과연 혈맹 등록이 가능할까요? 누가 수혁 씨를 따라줄지 모르겠는걸요. 레벨 250, 300씩 되는 고수들도 혈맹 최소 인원이 부족해서 혈맹 등록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미영은 나를 못 미더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춘기와 승연이가 파이온 게임광이니까 둘을 끌어들이면 5명은 문제없는데… 하지만 나는 친구들을 내 일에 끌어들이기 싫었다. 그리고 녀석들 역시 이미 다른 혈맹에 가입되어 있거나 혈맹군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선 레벨 20을 만들고 생각해보자고.”

나는 부리나케 파이온 온라인에 접속하여 로그인을 했다.

[두 통의 쪽지가 도착해 있습니다.]

쪽지?

[랏사드 님, 저 세나 5예요. 그날 너무 서운하게 헤어져서요. 접속하시면 꼭 쪽지나 귓속말 보내주세요.]

[안냐세요. 전 로만 21이라구, 저번에 중국 놈들에게 맞아 죽을 뻔할 때 랏사드 님이 구해주신 사람입니다. 그때 랏사드 님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저 좀 데리고 다니면서 키워주세요.]

한 통은 세나5, 송세원이 보낸 쪽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로만21(?)… 잘 기억나진 않지만 첫날 내가 스트리킹할 때 세나5와 함께 짱꼴라들에게 테러 당하고 있던 녀석 같았다.

예전에 무나 아니지 할 때도 꼭 이렇게 자기 좀 데리고 다니면서 레벨업 시켜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로만21 같은 녀석이 꼭 그런 부류 같았다.

“으휴, 게임 잘하는 것도 이렇게 피곤한 거라니까…….”

그때 머릿속에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혈맹을 등록하려면 혈맹원이 최소 5명 이상이고 혈맹 신청하는 사람은 레벨 20 이상이면 된다고 했지?

그래, 세나5와 로만21에게 연락해서 내 혈맹에 가입시키고 그들의 친구나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내 혈맹에 좀 가입시키라고 해야겠다.

나는 즉시 게임을 로딩해 침묵의 대륙으로 이동해서 세나5 와 로만21에게 헤드셋을 이용해 귓속말을 보냈다.

[세나5 님, 지금 접속 중이신가요?]

[로만21 님, 쪽지 잘 봤습니다. 지금 접속 중이면 연락 주시죠.]

귓속말을 엔터 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귓속말이 들어왔다.

[어머나, 랏사드 님, 반가워요. 하루 만에 보는 건데 무지 반갑네요.]

[네, 저두요. 방가방가.]

처음으로 연락을 해오는 사람은 세나5였다.

[앗! 변태아저씨 랏사드네? 흐흐흐, 연락 기다렸어요. 저 좀 키워주세요.]

로만21은 인사고 뭐고 다짜고짜 자기 캐릭터 레벨업 시켜달라는 부탁부터 해왔다.

[변태도 아니고 아저씨도 아닌데… 크크크, 로만21 님,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젠더 사냥터에서 몬스터 사냥 중이에요.]

[세나5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죠?]

[저는 지금 젠더 사냥터에서 몬스터 사냥하고 있는데 곧 죽을 것 같아요.]

다행히 둘 다 젠더 사냥터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젠더 사냥터로 달렸다. 마치 몇 년 굶주린 홀아비가 과부를 만난 것처럼 나는 뛰면서 계속해서 그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제가 혈맹을 조직하려고 하는데 님들 제 혈맹에 가입하실 의향 있으세요?]

[???]

[혈맹이라고요?]

[네.]

역시 반응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레벨 12가 혈맹을 만든다니 웃기는 이야기로밖에 안 들리겠지.

[랏사드 님, 혹시 혈맹 조직 조건을 모르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알죠. 레벨 20 이상, 혈맹원 5명 이상.]

[지금 레벨 몇이나 되는데요?]

[현재 레벨 12입니다.]

[*^^*]

그래도 세나5는 예의 발랐다. 로만21 이놈은 대놓고 나를 무시했다.

[레벨 12로 어떻게 혈맹을 만들어요? 그러지 마시고 저랑 몬스터 사냥하시면서 제 캐릭터나 좀 레벨업 시켜달라니깐요.]

[오늘 내로 레벨 20 만드는 건 문제도 아니니까 제발 혈맹에 가입해주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제가 젠더 사냥터로 가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터스 동굴로 들어갔다.

어제의 그 어리바리한 흡혈귀는 동굴로 들어오는 게이머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더니 무서운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에게 씬 와이어를 꺼내 보였다.

놈은 내 와이어를 알아챈 듯 겁먹은 어투로 말했다.

“헉, 다… 당신은 어제 그… 무허가 치과 의사…….”

“그렇다. 남은 이빨마저 잘라버리기 전에 빨리 비켜라.”

“예… 어서 지나가십쇼.”

파이온 게임의 NPC들은 여타의 RPG 게임에 비하면 비교적 인공지능이 발달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파이온 온라인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까지 인기를 끌고 있는 게 이해가 됐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자 눈앞에 젠더 사냥터가 펼쳐졌다.

키케케케.

각종 몬스터들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병장기들의 파공성과 게이머들의 비명소리가 섞여서 조잡한 광시곡을 연주해내고 있었다.

[세나5, 로만21, 어디 있어요?]

[아… 랏사드 님, 이쪽이에요. 동굴 입구 동쪽으로 팡세 나무 있는 쪽에 저랑 로만 님이랑 같이 있어요. 근데 지금 저희 큰일 났어요. 얼른 와서 도와주세요.]

나는 팡세 나무가 있는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중간에 몬스터들이 나를 쫓아왔으나 섀도우 레벨 410이 넘은 나에게 그런 저급 몬스터들의 스피드는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재빨리 해치우고 달려가니 저 멀리 팡세 나무와 세나5, 로만21이 보였다. 그들은 고블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저런 멍청이들, 고블린을 건드렸군. 게임 초보자로서 매뉴얼 한 번도 안 읽은 거 아냐? 아니면 파이온 온라인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초보자를 위한 가이드가 얼마든지 있는데… 휴, 저런 사람들과 혈맹을 조직해야 한다니… 내 신세도 참 처량하구나.’

고블린은 여타의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동족을 공격하면 떼거지로 덤벼드는 속성을 지녔다.

세나5 아니면 로만21이 고블린을 가격했기에 저런 현상이 빚어졌을 것이다.

나는 숱한 게이머들과 몬스터들을 무시한 채 그들을 향해 급히 뛰어갔다.

“랏사드 님, 빨리 좀 도와주세요.”

기다려라. 기다려. 이 답답한 사람들아.

나는 즉시 단축키를 눌러 무기를 불러들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디스트로이어 소드가 제격이다. 나는 디스트로이어 소드를 뽑아 들고 세나5와 로만21을 할퀴고 있는 고블린들의 포위망을 향해 하이에나를 노리는 맹수와 왕처럼 뛰어들었다.

<뇌검도래>

나는 파괴의 검을 이용해 고급 스킬인 뇌검도래를 시연했다. 어젯밤에 매뉴얼을 읽길 잘했군. 지금 상황에서 딱 어울리는 스킬이야.

나는 일부러 마나를 불어넣지 않은 상태로 뇌검도래를 시연했고 파괴의 검에서 뻗어나가는 나무뿌리 모양의 금빛 번개들이 고블린들만을 목표로 삼아 쏟아졌다.

팡세 트리의 주변이 마치 전기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환해지며 번개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역시 파이온 게임의 3D그래픽은 거의 최고 수준이구나. 정말 몽환적이고 꿈을 꾸는 듯한 그래픽이다.’

꿰에엑.

순식간에 이십여 마리의 고블린들이 번갯불에 맞아 타버린 것처럼 즉사했고 나머지 고블린들도 스플래시 데미지를 입어 거의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럴 수가! 그 기술은 무슨 기술이에요?”

“세… 세상에, 고작 젠더 사냥터에서 활약하는 초보 유저가 어떻게 그런 상승 스킬을…….”

로만과 세나뿐만 아니라 젠더 사냥터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던 게이머들 중 나의 플레이를 목격한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고블린의 약점은 가느다란 목이다. 그들은 체격에 비해 머리가 너무 커서 목이 약하다. 이것은 파이온뿐만 아니라 김씨소프트사의 모든 게임들의 공통점이다.

아니지건 아니지2건 고블린은 머리가 큰 하이에나처럼 생긴 몬스터인데 두상에 비해 목이 너무 가늘어서 그들의 목이 항상 약점으로 거론됐고 초보자를 위한 매뉴얼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나는 파괴자의 검을 나무젓가락 휘젓듯이 휘저으며 고블린들의 목만을 겨냥해 공격해 들어갔다.

꿰에에엑.

고블린 목 따는 소리와 함께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의 목이 파도타기라도 하듯이 줄줄이 바닥에 떨어졌다.

몇 마리 남지 않은 고블린은 이제 건드리기만 해도 사망할 시점. 세나5와 로만21을 위해 나는 녀석들을 건드리지 않고 남겨줬다.

[랏사드 님의 레벨이 15로 올랐습니다.]

‘좋았어. 이제 5 남았다.’

로만21은 물 만난 고기마냥 글라디우스를 흔들며 고블린들을 두들겼다.

‘바보 같은 녀석, 내가 하는 걸 본 거야, 만 거야? 목이 약점이라니깐.’

세나 역시 가지고 있는 단활로 거의 죽어가는 고블린들을 확인 사살했다.

우리 셋이 서 있는 팡세나무 주변에는 고블린들의 피가 낭자해 마치 세 명이 빨간 융단 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랏사드 님, 역시 대단해요. 어떻게 그런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거죠?”

“그래요, 도대체 그 기술 이름이 뭐에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미영이 고수임을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아… 뭐… 뭐더라… 뇌물도라던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다보니까…….”

둘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근데 랏사드 님, 왜 닉네임이 랏사드예요?”

“그래요, 저도 그게 궁금해요. 뭔가 깊은 뜻이 있을 듯…….”

“어? 아닌데. 전혀 깊은 뜻 아닌데. 원래는 R이 아니라 L을 썼는데 LLASD는 키보드 영문 기본 자리거든요. 제가 영타는 젬병이라 치기 쉽게 기본 자리로 LLASD로 했는데 그게 RASSAD가 되다가 현재 그냥 랏사드로 굳어버린 거예요.”

“헉…….”

“난 또 뭔가 깊은 뜻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실망이에요.”

그때 로만이 닉네임에 관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랏사드 님, 차라리 닉네임을 변태 고수로 바꾸시는 건 어때요?”

“왜?”

“그때 아담족 흉내 내시는 게 너무 어울리시더라고요.”

이런 씨댕이. 혈맹구성만 아니면 콱 그냥.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빨리 혈맹을 조직해야 합니다.”

“왜요?”

“요즘 파이온 온라인에서 중국과 한국의 전쟁이 벌어졌잖아요. 우리도 몬스터나 사냥하면서 게임이나 즐길 게 아니라 전쟁에 참여해야 할 거 아니에요.”

“푸하하하! 랏사드 님, 그런 전쟁은 적어도 레벨 100 이상은 돼야 참전하는 거지, 우리들처럼 젠더 사냥터에서 저급 몬스터나 사냥하는 초보가 어떻게 전쟁에 참여를 해요.”

녀석, 정말 그렇게 나오면 너 안 데리고 다닌다.

나는 꼬박꼬박 바른 말 하는 로만21 녀석이 너무 미웠다.

“로만21 님, 앞으로는 로만이라고 부를게요. 제가 아는 바로는 레벨 20 이상이면 혈맹 등록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혈맹 군주도 될 수 있고요.”

세나5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기회를 잡아 한마디 던졌다.

“그치만 레벨 20의 초보가 만든 혈맹에 가입할 사람이 있겠어요?”

“물론 있지요.”

“……?”

그들은 내 입을 주시했다.

“그게 누군데요?”

“바로 세나5 님과 로만21 님. 그리고 두 명만 더 추가하면 혈맹 조직이 가능합니다.”

“와하하하!”

“호호호호!”

그래, 맘껏 비웃어라. 니들이 아직 모르나 본데 나는 섀도우 레벨이 무려 410 넘는 초특급 에이스라고.

더구나 나는 니들처럼 단순하게 게임이나 하고 캐릭터 키워서 돈벌이나 하려고 게임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젠장, 내 그런 사정을 녀석들이 알 리 없잖아.

“웃지들 마시고. 어때요? 혈맹에 가입할 거예요, 말 거예요?”

그들의 표정이 일순간 피곤한 여자의 다크서클마냥 어두워졌다.

“전 가입하겠어요. 랏사드 님의 능력을 믿어요.”

세나5가 먼저 반응을 보여 왔다.

좋았어. 이제 남은 건 3명.

“전 조건이 있어요.”

로만 이 녀석… 역시 너답다.

“그래, 조건이 뭐지?”

“저를 키워주셔야 해요. 저를 레벨업 시켜준다고 약속하면 혈맹에 들어갈게요.”

“그거야 당연하지. 혈맹에 가입해서 혈맹 레벨이 올라가면 혈맹원들의 레벨도 올라간다고요.”

“좋았어요. 뭐… 랏사드 님이 키워만 주신다면야 저도 가입할게요.”

이제 두 명만 더 가입시키면 혈맹 등록이 가능하다. 예전 아니지에서는 군주가 아니면 혈맹 등록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파이온은 종족이나 캐릭터에 상관없이 일정한 요건만 갖추면 누구든지 혈맹을 등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만큼 파이온은 몬스터들을 파티사냥 하는 등의 플레이보다는 혈맹과 혈맹과의 전쟁, 수성전과 공성전 등 대규모의 전쟁에 역점을 둬 훨씬 역동성 있는 게임을 즐길 수 있게 설계되었다.

“근데 랏사드 님, 굳이 그렇게 혈맹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냥 우리끼리 파티나 조직해서 몬스터나 사냥하며 레벨업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로만21이 나에게 정말 궁금한 것이라도 되는 듯 물었다.

“지금이 평시라면 그런 플레이하며 레벨업 시켜가고 아이템 모으는 것도 재미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전시입니다. 파이온의 각 대륙에서 중국 게이머와 한국 게이머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어요. 물론 전쟁의 원인은 중국인들의 국내 아이디 도용 및 파이온 게임 해킹 때문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한마디로 난세. 전 대륙의 영웅들이 짱깨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파이오니아 대륙이 전쟁에 휩쓸린 상태에서 한가하게 몬스터 사냥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 말이오.”

“와, 랏사드 님 너무 멋있어요. 무슨 장군님 같아요. 호호호.”

세나5는 가끔 아부가 지나쳤지만 듣기 싫진 않았다.

우리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가 우리 세 명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혈맹 조직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요……?”

그는 엘프 위저드 계열의 마법사로 캐릭터를 조금 늙수그레하게 만들어서인지 수염이 가슴까지 닿을 정도였고 얼굴에 주름도 자글자글했다. 로큰롤메이지라는 닉네임을 쓰는 그는 우리의 혈맹에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저, 사실 저도 파티나 혈맹 같은 데 가입하고 싶은데 파이온이 처음 해보는 가상현실게임이라 어떻게 가입하는지도 모르겠고 또 몬스터 사냥을 몇 주째 해도 레벨이 더 이상 늘어나지도 않고… 그래서… 좀 물어보려고…….”

“지금 레벨이 몇이죠?”

“레벨 50입니다.”

맙소사. 정말 이럴 때 허거덕, 헉, 쿵야, 꿔둥 같은 표현을 안 쓴다면 언제 쓰랴.

“레벨 50이 된 지 얼마나 됐죠?”

그는 대출받으러 은행 간 사람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2, 3주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어머, 로큰롤메이지 님은 저보다 더 심하시네요. 호호호. 파이온 게임에서 각 종족의 초보들이 스타팅하는 장소는, 예를 들면 휴먼 종족의 침묵의 대륙이나 엘프 종족의 이슬의 숲 같은 곳은 몬스터를 사냥하며 레벨업 하는 장소예요. 이런 곳에서는 어느 정도까진 레벨업이 되고 그 이상은 아무리 몬스터를 사냥해도 레벨업이 되지 않아요.”

“그 레벨이 바로 50입니다. 레벨 50이 되면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거나 퀘스트를 수행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돈이 많이 있으면 마을을 찾아가 워프 시스템을 이용해 다른 지역으로 공간이동하거나 하셔야지, 한 장소에서 몬스터 많이 때려잡는다고 그냥 계속 레벨업이 되진 않습니다.”

그랬다. 로큰롤메이지는 게임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죽어라 몬스터만 사냥하며 고독하게 레벨업을 하고 싶어 하는 우직한 성격의 바보 같은 놈이었다.

그래서 온라인 게임이나 가상현실게임에서는 파티나 길드, 혹은 각종 인터넷 사이트의 카페에 가입하거나 블로그를 만들어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오프라인 상에서 모임도 갖고 그러는 게 필요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 나 같아도 울고 싶겠다. 레벨에 제한 없이 아데나(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대륙이나 섬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도대체 정말 게임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없는 분이군.

“좋아요, 로큰롤메이지 님. 우리 같이 한 분만 더 구해서 혈맹 등록하러 가죠.”

“저, 정말요? 고맙습니다, 랏사드 님. 앞으로 랏사드 님께 충성할게요.”

“잠깐만요. 그라믄 내도 그 혈맹에 끼워주세요.”

너는 또 누구냐? 나는 대화를 걸어오는 유저를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칼을 꺼내 그의 목을 베어버릴 뻔했다.

“맙소사. 오크가 왜 침묵의 대륙에서 스타팅한 거요?”

“예? 오크는 침묵의 대륙에서 시작하면 안 돼요?”

오 마이 갓뎀. 도대체가 왜 이렇게 무지한 자들이 많은 거지?

“오크는 원래 스타팅 포인트가 불멸의 산 아닌가요?”

세나5는 그나마 제법 게임에 관해 연구 좀 했구나. 사람은 모름지기 배워야 한다. 모르면 연구라도 해야 한다. 지금 로큰롤메이지나 말을 걸어온 오크는 정말 게임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법도 있었나? 그냥 내는 눈에 익숙한 마을 찍어서 스타팅한 건데.”

“그런데 인간의 마을에서 용케 살아 있었네요.”

“아니에요. 벌써 열댓 번 죽어서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고 했어요.”

정말 이런 경우는 안타깝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끌끌…….

“그렇다면 열 몇 번이나 죽으면서 사람들이 왜 나를 공격할까 생각 안 해봤어요?”

“해봤죠. 내는 이 사람들이 내를 중국 게이머로 생각하고 그러나 보다 하고 ‘내 짱깨 아니에요’라고 말했는데도 번번이 구타당하고 죽어버렸어요. 근데 몇 번 죽다보니까 오기가 생기대요. 그래서 기어이 접속하다가 님들을 만난 겁니다.”

그 무식한 오크의 닉네임은 쎄미트리. 공동묘지라는 뜻인가? 오크에게 어울리는 닉네임이군. 하지만 정말 오크에게 어울리는 우둔함과 오기다. 어떻게 열 몇 번이나 죽으면서 그 이유를 PK로 생각할 수가 있는 거지? 인간들의 마을에 오크가 나타나니까 이곳 젠더 사냥터에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초보라 몬스터로 착각하고 죽여 버린 거 아냐… 쯔쯔쯔…….

“그럼 쎄미트리 님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도 혹시 혈맹에 가입하시려고?”

“예, 제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도 파이온 게임에서 이름 한번 날려보고 싶네요. 흐흐흑.”

그래, 울고 싶겠지. 나 같았으면 벌써 복장이 터져서 죽었을 게다. 에휴.

내가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혈맹에 꼭 등록을 해야 하나? 섀도우 레벨 410이 넘는 초고수 랏사드 님께서?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 명은 엘프 종족으로 내가 죽여 놓은 몬스터들 아이템이나 날름날름 받아먹는 초보 중의 초보다, 그래도 기본기는 갖췄지만.

또 한 놈은 오직 자기 캐릭터 좀 레벨업 시켜달라며 나를 쫓아다닐 셈으로 혈맹에 가입하겠다는 놈이고, 또 한 명은 몇 달째 레벨 50이 넘었음에도 침묵의 대륙에서 몬스터 사냥만 하고 있는 우둔한 고집불통.

그리고 마지막은 감히 오크의 신분으로 인간 마을에서 태어나 벌써 열댓 번째 시작만 하고 있다는 임전무퇴형 오기 부리기 오크.

이들을 데리고 혈맹 등록해서 전쟁 참가했다가 내 레벨만 다운되는 거 아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좋아요. 일단 난세에 우리들의 임무는 전쟁에 참가하는 거니까… 다들 같이 초심자의 마을로 이동해서 담당 NPC에게 혈맹을 등록하자고요.”

“네, 좋아요.”

“와후, 드디어 내 파이온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가?”

로만21 녀석, 도대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드디어, 이제 레벨 50 이상으로 올라가는 건가요?”

“와… 이제 더 이상 안 죽어도 되는 거죠?”

정말이지 염불에는 관심 없고 젯밥에만 관심 있는 작자들이로구나.

“근데 랏사드 님, 혈맹 이름은 뭐로 정할 거예요?”

“그래요. 혈맹 마크도 있어야 한다던데…….”

역시 로만21과 세나5는 기본은 되어 있었다.

“글쎄요? 뭐가 좋을까요?”

나는 혈맹 이름까지는 아직 생각해두지 않고 있었다.

“괴짜들의 혈맹 어때요?”

정말 로만21 네 수준에 딱 맞는 혈맹이다. ‘그런 혈맹 너나 만들어서 너 혼자 잘해봐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가리봉 공장 굴뚝같았다.

“에이, 그건 너무 유치하고…….”

그래, 세나5. 너를 믿는다. 어디… 너는 뭐라고 지을래?

“음… 다섯 명이니까 독수리 5형제? 동방신기?”

으다아… 나는 지금 세나5, 아니 송세원이가 내 옆에 있었다면 하이킥 한방을 그녀의 면상에 먹였을지도 몰랐다.

“쎄미트리와 쓰레기들은 어떻노?”

너 오늘 열여섯 번째로 죽고 싶냐? 지금이라도 파괴자의 검으로 이 무식한 오크 녀석을 도륙해버리고 싶은 심정이 가슴속을 뚫고 나올려는 것을 나는 꾹꾹 눌러 참았다.

“로큰롤메이지 님 한번 말씀해보시죠? 좋은 아이디어 없어요?”

“글쎄요… 제가 뭐… 혈맹이니까… 혈은 들어가면 좋을 것 같고… 초보들이고 그간 눈물 나게 고생도 많이 했으니까 눈물도 들어가면 좋겠고… 뭐… 혈의 눈물 어때요?”

글쎄… 뭔가 필이 팍 꽂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 같지도 않고. 괴짜들의 혈맹, 독수리 5형제, 쎄미트리와 쓰레기들에 비하면 훨씬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괜찮네요, 혈의 눈물. 뭔가 한이 서린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그냥 뭐 대충 혈의 눈물인지 혈의 누인지로 정하죠.”

그렇게 우리 다섯 명의 초보들, 아니 한 명의 엄청난 비밀 요원 초절정 고수와 네 명의 허접 바보, 울트라 초짜 파이온 유저들로 구성된 휴먼 둘, 엘프 둘, 오크 하나의 혈맹은 등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우리 다섯 명은 초심자의 마을로 같이 이동했다. 나의 머릿속은 앞으로 전개될 각종 혈전(혈맹들 간의 전투)과 공성전에 대한 구상, 앞으로 동맹 관계에서 어떻게 동맹의 좌장 역할을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로 복잡했다.

하지만 나머지 네 명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휘파람을 불어대고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마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같고 그 넷은 소풍에 나가는 유치원생들, 또는 초등학생들 같아 보였다.

“랏사드 님, 우리 팡세 나무 아래서 혈의 눈물을 결성할 것을 결의했는데 그 기념으로 여기 젠더 사냥터에서 기념에 남을 만한 파티사냥 한번 하고 가죠. 아직 랏사드 님 레벨도 올려야 하고.”

로만21 녀석, 오랜만에 제법 그럴싸한 제안을 해왔다.

어느 단체건 조직이건 결성을 할 때면 고사를 지내거나 출정식을 하는 법. 우리도 그럴듯한 결성식을 치를 겸해서 나는 그들에게 몬스터를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서 사냥해보자고 제안했다.

“좋아요. 그럼 레드 스파이더를 한번 잡아봐요.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힘으로 잡아 보지 못한 몬스터예요.”

로큰롤메이지가 레드 스파이더를 사냥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다들 어때요? 저기 앞에 레드 스파이더가 있는데 한번 사냥해보죠.”

“좋아요.”

“당근이죠. 명령만 내려주세요, 랏사드 대장.”

그들은 어느새 나를 대장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하긴 옛말에 낭중지추라 했으니 나처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야 어딜 간들 그 능력을 인정받지 않겠느냐마는… 허허허허.

“좋아요. 그럼 나와 로만21이 검으로 공격할 테니 세나5 님은 활로, 로큰롤메이지 님은 마법으로 공격해보시고 쎄미트리 님은 뭐 그냥 하고 싶으신 대로… 배틀액스를 사용하시든가 맨몸으로 하이킥을 날리시든가…….”

“오케이, 그럼 내가 먼저 갑니다.”

로만21 녀석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을 빼들고 레드 스파이더를 후려쳤다.

카오오오.

그러나 녀석의 허접한 일격은 오히려 레드 스파이더의 분노를 자아냈고 붉은 거미는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로만21을 덮쳤다. 거미의 날카로운 발들이 사정없이 로만21을 할퀴어댔다.

“랏사드 님, 좀 도와주세요. 나 죽겠어요.”

에구… 그러기에 천둥벌거숭이처럼 멋모르고 날뛰더라니…….

“로큰롤메이지 님, 혹시 힐링 계열 마법 구사 가능하신가요?”

랏사드는 거미에게 맞고 있는 로만을 구해주며 로큰롤 메이지에게 말했다.

“예… 조금 허접하지만 엘리멘탈 힐(Elemental heal)을 시연 가능합니다.”

그래, 레벨 50 되도록 허송세월만 한 건 아닐 테지.

“그럼 빨리 로만에게 힐링 마법을 걸어주세요.”

“예.”

그러나 로큰롤메이지의 치료 마법은 상상외로 빨리 걸리지 않았다. 일반 게이머들 같으면 벌써 힐링 마법이 발산하는 푸른빛의 연기가 로만21을 감쌌어야 했다.

“왜 그렇게 마법이 느린 거죠?”

“아… 레버 조종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 인벤토리 여느라… 조금 시간이 걸려서요.”

허거덕… 역시 초보들. 흔한 단축키 하나도 외우지 못하고 있구나.

“로큰롤 님, 우선 마법부터 걸구요. 시간 나시는 대로 파이온 온라인 홈페이지에 접속하셔서 단축키나 사용자 매뉴얼 같은 것도 좀 읽고 그러셔야 할 것 같네요.”

“아… 예… 죄송합니다. 엘리멘탈 힐.”

드디어 에메랄드빛의 연기가 로만21을 감싸며 회오리처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휘감아 올랐다.

“와… 체력이 조금 회복됐어요. 신기하네.”

“로만, 뒤로 빠져. 내가 상대할 테니. 세나하고 로큰롤 님은 지원 사격 좀 해주시구요.”

나는 얼마든지 혼자서 스파이더를 상대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제 한 팀이 될 식구들이기에 파티플레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그들에게 지원 사격을 부탁했다.

로만21이 뒤로 빠지는 동안 레드 스파이더가 그를 뒤쫓아 왔고 뒤로 회피하는 로만21의 머리 위로 엘프의 화살과 화염계열의 마법이 날아갔다.

슈슈슛.

퍼펑.

캬오오오.

파이어 버스트와 화살에 맞은 레드 스파이더가 신음을 토하며 미친 듯이 날뛰며 나를 향해 덮쳐 왔다.

“잘 들어둬요. 레드 스파이더의 약점은 저 지저분한 진액을 흘리는 입이에요. 녀석의 입을 공격하면 손쉽게 사냥이 가능하고 레벨과 무기에 따라서는 원킬도 가능하죠.”

파워스트라이크.

나는 디스트로이어 소드를 거미의 입에 쑤셔 박았다.

꾸에에에엑.

녀석은 신음을 토하며 중심을 잃더니 한쪽으로 넘어졌다.

“야호! 잡았다.”

“뭐야? 레드 스파이더가 이렇게 약한 몬스터였나? 엄청 쉽게 잡히네?”

거미가 죽은 자리에서 동화와 거미의 뿔 같은 동전과 아이템들이 떨어졌다.

“이야… 아이템이다. 아데나도.”

로만21 녀석은 한 것도 없으면서 아이템과 동전만 챙기기에 바빴다.

“이 정도면 비교적 훌륭한 파티플레이였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뭘요… 정말 랏사드 님 너무 멋져요. 특히 그 파괴자의 검. 너무 탐나요. 호호호.”

“세나5 님은 엘프라 파괴자의 검 휘두르기에는 힘이 모자랄걸요. 케케케.”

이번 파티플레이로 나의 레벨은 16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몇 명도 레벨이 조금 오른 듯했다.

‘레벨 20까지 앞으로 4. 레벨 50 정도 되는 게이머를 8명 정도 PK하든가 아니면 레벨 100 이상의 몬스터 4마리를 잡아야 하는데…….’

“우리 몬스터 또 잡아요. 너무 재밌네요. 지금까지 혼자 사냥하면서 고생 많이 했는데 파티플레이 하니까 너무 쉽게 사냥되네요. 이런 방법을 왜 내는 미처 몰랐을꼬?”

쎄미트리가 우리들이 몬스터를 잡는 걸 보고 신난 어린이처럼 떠들었다.

‘으이그… 그동안 죽었다 살았다 하느라 사냥이나 제대로 해봤겠냐? 사냥감으로 사냥이나 당했겠지.’

“랏사드 님, 우리 몬스터 몇 마리 더 잡아봐요.”

세나5도 나를 보챘다.

그때 내 눈에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는 게이머들이 보였다. 나는 그놈들이 짱꼴라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아무 대화 없이 몬스터만 죽이고 있는 녀석들. 그것도 이것저것 다양한 공격이 아니라 내려치기 같은 단순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는 녀석들. 저놈들은 아이템 줍기를 목적으로 하는 중국의 작업장 놈들이 틀림없다.

두세 번의 공격으로 레플루토 몬스터를 잡는 걸로 봐서 레벨이 40에서 50 정도는 되겠군.

좋았어. 몬스터가 아니라 놈들을 잡고 레벨업 한다.

“아니, 몬스터 잡기는 이제 끝났어. 저쪽에 보이는 녀석들 있지?”

“누… 누구요?”

“저쪽에 레플루토 사냥하고 있는 놈들… 저놈들 모두 짱꼴라들이야.”

“어머, 그래요? 어떻게 알죠?”

세나의 물음에 이번에는 로만21이 답하고 나섰다.

“그거야 척 보면 알죠. 녀석들을 봐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몬스터 사냥만 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여러 기술을 쓰는 것도 아니고 한 동작으로만 계속 내려치고 있어요. 녀석들 틀림없이 짱깨들이에요. 아마 중국이나 연변에서 12시간씩 교대해가며 캐릭터 돌리고 있을걸요.”

로만21 녀석, 제법인걸.

“그래, 로만이 말한 대로야. 녀석들은 짱꼴라들이 틀림없어. 어때? 녀석들을 처치하는 게.”

“저는 아직까지 몬스터 빼고는 게이머들에게 활시위 한번 겨눠본 적이 없는걸요…….”

세나5는 우는 소리를 했다.

“저놈들은 제가 해치우죠. 그동안 이 젠더 사냥터에서 PK 당한 횟수만도 열다섯 번. 그간의 원수를 저 짱깨들에게 갚아야겠어요.”

쎄미트리는 오크 특유의 호승심을 발휘하며 몇 달 굶은 호랑이가 토끼 굴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중국 유저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내 배틀액스 맛 좀 봐라, 이놈의 쉐리들.”

“쎄미트리, 잠깐만 기다려요!”

나는 그를 만류했으나 이미 그의 배틀액스가 중국게이머들의 등 뒤까지 가 있었다.

쎄미트리가 배틀액스를 휘두르며 레플루토를 사냥하는 중국 휴먼의 등 뒤를 가격했다.

퍼억.

붉은 선혈이 중국 게이머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켈켈켈, 맛이 어떻노? 이런 맛이구나. PK하는 기분이란 게. 와하하하!”

퍼퍼퍼퍽.

“위험해요, 쎄미트리. 뒤로 빠져요.”

배틀액스로 고작 한 방 때린 쎄미트리는 십여 명의 중국 게이머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 시작했다.

저런 바보 같은 놈, 그러니 그동안 열댓 번을 죽었지. 죽어도 싸다, 싸.

“쎄미트리, 내가 회복 물약을 줄 테니까 뒤로 빠지세요. 그리고 세나5, 로큰롤 님, 나에게 프로텍션을 걸어줘요.”

나와 혈맹원들이 쎄미트리를 둘러싸고 있는 적진으로 나서자 중국 유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대오를 정비했고 그사이 쎄미트리는 지옥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처럼 파김치가 된 상태로 기어 나왔다.

내가 가진 프로텍션 아이템만 해도 수십 가지, 그것도 모두 A급이지만 나는 일부러 세나와 로큰롤에게 보호를 부탁했다.

우선은 우리 혈의 눈물의 파티플레이 스킬을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빠르게 쎄미트리에게 버그베어의 물약을 선물했다.

“쎄미트리, 그거 먹고 빨리 체력 회복해요. 지금 스치기만 해도 사망할지 모르니까.”

“고맙데이, 랏사드 대장.”

리버스 어택.

프로텍션 실드.

로큰롤과 세나가 걸어준 프로텍션 마법이 나의 몸을 휘감았다. 상대방의 공격을 튕겨내는 리버스 어택과 내 방어구의 능력치를 20% 향상시켜주는 프로텍션 실드가 나를 지지했다.

‘훗, 이 정도 방어 마법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라. 하지만 이런 식으로 훈련을 해나가면 우리 혈의 눈물도 훌륭한 혈맹이 될 수 있어.’

나는 녀석들을 향해 달리며 붉은 늑대의 레더 세트를 세팅하고 골각방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마법 공격에 대비해 바이솜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이 정도면 두 부대의 초급 혈맹이 공격해도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다.

“저 녀석을 죽여라, 저 붉은 가죽 갑옷 입은 놈. 저놈을 집중 공격해!”

다섯 명의 중국 기사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후훗, 오버로드 없는 저글링 다섯 마리 다크 템플러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나는 최근 유행하는 속담(?)을 곱씹으며 파괴자의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나는 검을 꺼내 들며 세나와 로큰롤에게 엄호를 부탁했다.

“세나, 로큰롤 님, 녀석들에게 화살과 불의 세례를 퍼부어줘요.”

“알았어, 대장.”

슈슈슈슈.

내 머리 위로 화살과 불덩어리들이 짱꼴라들을 향해 날아갔다.

“원거리 공격이다. 막아랏.”

앞에 선 다섯 놈의 적들은 청동 방패를 들어 화살과 화염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퍽퍽.

세나5가 쏜 화살은 청동 방패에 막혀 분질러졌고 로큰롤메이지의 파이어 버스트 역시 청동 방패에 막혀 연기만 모락모락 피워냈다.

녀석들은 원거리 공격을 막아내자 방패로 막으며 주저앉았던 자세를 바로하고 방패를 들어올리며 일어섰다.

그러나 나는 이미 녀석들의 코앞에 서 있었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놀란 토끼눈을 했다.

“어… 어느새.”

슈가각.

파괴자의 검은 피를 원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네 놈의 목이 한 합에 몸통과 분리된 채 허공을 한 바퀴 돈 다음 땅바닥에 떨어졌다. 녀석들의 머리가 먼지를 일으켰다.

마지막 다섯 번째 놈은 간신히 방패를 모로 들어 내 파괴자의 검을 막아냈다.

“사… 살았다…….”

녀석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흘렀다. 내 파괴자의 검은 녀석이 내민 청동 방패의 한가운데까지 찢고 들어가 박혀 있었다.

“살았다고?”

나는 녀석의 기대감을 비웃으며 검을 잡은 두 손을 반대쪽으로 비틀었다.

쩌저정.

청동 방패는 뻥튀기 과자 부서지듯 반쪽으로 쪼개졌다. 그 모습에 나머지 짱꼴라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엄청난 검이다. 청동 방패를 반쪽으로 갈라버리다니.”

방패가 쪼개지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짱깨 녀석은 뒷걸음질 치며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몸짓이라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발광에 불과했다.

타핫.

나는 한 번의 점프로 놈의 눈앞까지 뛰어올라 위에서 아래로 파괴자의 검을 내리쳤다.

부우욱.

뼈와 살, 근육과 인대가 날카로운 검날에 쪼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놈의 몸은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하게 절반으로 쪼개져 피를 뿜어내며 박살이 나버렸다.

“놈…을 죽여라. 우리 헤이씽을 죽이다니…….”

헤이씽(黑星). 우리말로 검은 별을 뜻하는 중국어(이거 왜 이래. 공부는 못했어도 나 중문과 나왔다구).

검은 별이라. 마지막에 죽은 놈의 이름이 헤이씽인 모양이군.

나는 나를 포위하고 달려드는 여섯 놈의 중국게이머들을 둘러봤다. 모두들 각반(정강이 보호대)을 하지 않고 있는 초급 기사들. 나는 자세를 한껏 낮추며 파괴자의 검을 회오리처럼 휘둘렀다.

피피픽.

여섯 명의 적들은 모두들 다리가 부러지거나 인대가 잘려 나가 바닥에 주저앉거나 쓰러졌다.

나는 이미 레벨 20에 올라서 있었다. 혈맹을 조직하기 위한 최소한의 레벨업을 이뤘으므로 더 이상 저런 저급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랏사드, 왜 놈들을 살려두는 거야?”

“죽이고 싶으면 죽여서 아이템이나 동전을 나눠 가지세요. 나는 혈맹 등록이 우선이니까…….”

“어마… 어떻게 몬스터도 아닌 사람을 공격해요.”

세나5, 실제 이름 송세원. 정말 이 여자 한번 만나보고 싶다. 어떻게 보면 공주과 같기도 하고.

어마, 어떻게 몬스터도 아닌 사람을 공격해요? 내 참 우스워서. 저런 애들이 ‘전 파리 한 마리 못 죽여요’ 이러다가 쇠고기, 돼지고기는 쌈 싸서 잘만 먹지.

“사… 살려줘…….”

내게 치명상을 입은 놈들은 아니나 다를까 목숨을 구걸하고 나선다.

세나5나 로만, 로큰롤은 조금 찜찜해하며 선뜻 나서지 않았으나 쎄미트리는 배틀액스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녀석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간의 설움이 복받쳐 올랐음에 틀림없었고 지금 쎄미트리는 캐릭터에 걸맞게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있음에 분명했다.

“제발… 사… 살려줘…어…….”

붕붕붕.

나는 쎄미트리의 도끼가 토해내는 파공성을 뒤로한 채 혈맹 등록소가 있는 초심자의 마을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크하아악!”

뒤에서 방금 나의 일격에 다리를 부상당하고 쓰러진 놈들이 배틀액스에 다져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랏사드 님, 같이 가요.”

세나5는 차마 눈뜨고 못 보겠다는 복수심에 불타는 미친 오크 한 마리가 앉은뱅이가 돼버린 짱꼴라들을 다지는 장면을 등지고 나를 좇아왔다.

“랏사드 형님, 혈맹 등록할 때 혈맹 고유의 문장 같은 게 있으면 폼도 나고 그럴 텐데…….”

로만이 녀석은 실력에 걸맞지 않은 아이디어를 제법 낼 줄 알았다.

대부분의 RPG 게임의 혈맹들은 고유한 문장을 가지고 있다. 파이온 게임에서는 나 역시 초보라 잘 모르겠지만 아니지2나 무에서는 다들 그랬다.

휴먼 나이트 기사단으로 이름을 날리는 황금 사자단은 포효하는 황금 사자의 문장, 마법사들의 혈맹 중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블랙 매직은 악귀가 달린 마구, 복수의 화신으로 불리는 오크 최고의 체술 파이터 집단인 소사벌은 피 묻은 데이몬의 갑주로 유명했다.

혈맹 고유의 문장이나 문양은 그들의 실력과 명성만큼이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 대책 없는 동지들을 보라. 누구 하나 변변한 웹디자인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어 보이지 않는가? 갖춘 거라고는 초심자의 뽀록, 황소 같은 고집, 기초 없는 오기, 빌붙기에서는 거의 초고수급… 뭐 이런 것들이 아닌가.

“그래, 그럼 로만이 네가 문장 좀 만들어봐라.”

“에이, 랏사드 형님. 제가 그런 문장 만들 줄 알면 여기 있겠어요? 흐흐.”

그때 우리의 기대를 깨고 세나5가 뜻밖의 전혀 예상 밖의 거의 기적에 가까운 말을 꺼냈다.

“제가 조잡하나마 지금 하나 만들어볼까요?”

“와… 세나5 님, 웹디자인 하실 줄 아세요?”

쎄미트리가 놀랍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페인트샵 같은 프로그램 아주 기본 정도는 할 줄 알거든요…….”

“그래요? 그럼 한번 만들어서 저에게 파일첨부해서 보내주세요.”

나는 잘됐다 싶어 그녀에게 문장 디자인을 의뢰했다.

“예, 그럼 좀 허접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이런 경우를 두고 뭐라고 해야지? 봉사 문고리 잡기?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아니… 뭔가 어울릴 만한 속담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 혈의 눈물 혈맹에도 감격의 눈물 흘릴 날 있다.

우리가 대책 없는 동지(?)들과 함께 초심자(Novice)의 마을에 있는 혈맹 등록소의 NPC 바이론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세나5가 쪽지와 함께 파일을 보내왔다.

나는 곧바로 그 파일을 내 PC에 저장한 다음 혈맹 등록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초심자의 마을의 바이론입니다.”

“혈맹 등록을 하고 싶소.”

“혈맹 등록을 하시려면 최소한 레벨 20이상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레벨을 체크하겠습니다. …랏사드 님은 레벨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충족하니까 여길 찾아 왔을 거 아니오.”

로큰롤메이지가 바이론을 향해 투덜거렸다.

“다음은 혈맹가입을 위한 혈맹원 자격 조건입니다. 혈맹 등록을 위해서는 최소한 다섯 분 이상의 게이머들이 혈맹 가입에 동의해야 합니다. 랏사드 님의 혈맹은 다섯 분 이상의 게이머와 혈맹 가입을 결의하셨습니까?”

‘이 녀석은 인공지능이 떨어지는 NPC인가? 아니면 혈맹 등록을 관장하는 NPC라 관료적인 건가? 디게 말 많네.’

“그렇소. 혈맹 가입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모두 충족했소.”

“그럼 우측 상단의 혈맹 등록 태그를 클릭해주세요.”

나는 바이론의 지시를 따라 태그를 클릭했다. 모니터의 중앙에 조그마한 창이 열렸다.

나는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입력을 해나갔다.

<혈맹 등록>

혈맹이름: 혈의 눈물

혈맹군주: 랏사드(Rassad)

혈맹원: 세나5, 로만21, 로큰롤메이지, 쎄미트리

혈맹문장:

나는 혈맹문장에서 세나5가 보내준 첨부파일을 찾아 덧붙이기를 시도했다. 미리 보기 화면에 뜬 우리의 혈맹 문장은 피눈물을 흘리는 엘프의 얼굴이었다.

조금 섬뜩하긴 했지만 우리 혈맹 이름과 제법 잘 어울리는 문장이고 그래픽도 단순하면서 의도하는 바를 간략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음은 혈맹 타입.

총 36가지 종류의 혈맹 타입이 있으나 영웅 집단, 글래디에이터 같은 고급 혈맹은 조건이 되지 않고 우리들의 종족이 휴먼, 엘프, 오크로 구성되어 있어서 순수한 휴먼 나이트나 휴먼 메이지 같은 혈맹 타입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혈맹타입을 혼합 파티(Mixed Party)로 선택했다.

다섯 가지의 입력사항을 입력하자 NPC의 최종 확인 절차가 시작됐다.

“나머지 네 분은 랏사드 님을 혈맹 군주로 옹립하는 데 찬성하십니까?”

아마도 우리 네 동지들의 스크린에 확인 태그가 떴음에 틀림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혈맹 등록을 완료하는 메시지가 나의 시야에 나타났다.

“혈의 눈물 혈맹 등록을 승인합니다.”

“수고하셨수다, 바이론.”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시기 전에…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랍쇼. 이 녀석 보게.

“그래, 무슨 말이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 NPC 생애 동안 이곳 초심자의 마을에서 총 8,497건의 혈맹을 등록해줬는데 레벨 20이 혈맹을 등록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요.”

“그래서?”

“뭐 별 뜻은 없고, 도그(Dog)나 카우(Cow)나 할 것 없이 혈맹 등록했다가 혈전(혈맹간의 전쟁)에서 무참히 깨진 후 다시 찾아와서 혈맹 재등록 해달라느니 다른 이름으로 혈맹 등록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저를 피곤하게 하는 게이머들이 있어서요.”

나는 원래 성격이 워낙 느긋하고 차분해서 좀처럼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고, 우리 어머니는 나를 보고 법 없이도 살 놈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놈이 나를 자극하다니. 나는 순간 칼을 꺼내 놈의 목을 쳐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NPC 살인은 ID 도용이나 해킹에 맞먹는 중범죄이기에 꾹 눌러 참았다.

“걱정 마쇼. 당신 귀찮게 할 일은 없을 테니.”

“뭐 서운하게 생각은 마시고 다 잘되라고 드리는 말씀이니까… 암튼 잘 가세요. 건투를 빕니다.”

내 속도 모르고 혈맹원들은 혈맹 등록에 대해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떠들었다.

“이얏호! 드디어 혈맹 등록인 거야?”

“와… 멋져요, 세나 님. 우리 문장 너무 멋져요. 이름도 맘에 들고…….”

“아자! 이제 나도 레벨업 하고 전쟁에 참여도 할 수 있는 건가?”

“흐흐흑! 이제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되는 기다!”

모두들 감격에 겨워 한마디씩 던지는 건가?

나 역시 파이온 온라인에서 최초로 혈맹을 등록하게 되자 아니지나 무와는 달리 감회가 새로웠다. 호성이나 춘기 같은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할 때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아마도 나를 제외한 나머지 동료들이 초보 중의 왕초보라 책임감 같은 게 훨씬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라 혼자 생각했다.

“근데 랏사드, 언제까지 우리한테 존댓말 쓸 기고?”

“그래, 맞아요. 이제 혈맹군주로 옹립되셨으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쎄미트리가 제안하자 세나가 맞장구를 쳤다.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사실은 나도 그게 더 편했다.

나는 사내 메신저를 이용해 강미영 팀장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미영아, 현재 진행 중인 혈맹 전쟁이나 공성전에 관한 자료 좀 보내줘.]

[혈전이나 공성전 관련 자료가 하나 둘이어야 보내주죠. 원하시는 자료를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세요.]

역시 똑똑해.

문제는 내가 원하는 게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겠다는 거지.

[글쎄, 혈맹전쟁이나 공성전에 참가하려면 침묵의 대륙을 떠나야 하는 거지?]

[당연하죠. 그곳은 초보자들이 레벨업 하기 위해 사냥하고 퀘스트 수행하는 대륙이에요.]

[그렇다면, 전쟁에 참여하려면 어느 대륙으로 가야 하지?]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나에게 전쟁에 관한 팁을 보내줬다.

[현재 중국과 한국 간에 전쟁이 벌어진 곳이 17곳이에요. 그중에서 혈의 눈물 같은 초보가 가기에는 로타카 대륙, 카마파타 대륙, 디부아르 대륙, 다가스카르 섬 정도가 좋을 것 같군요.]

혈의 눈물, 완전히 동네 똥개 신세구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개무시하고… 하긴 NPC조차도 우릴 개무시했는데 뭐 이 정도야… 두고 봐라. 파이온 온라인에 랏사드와 혈의 눈물이라는 두 단어가 휘날리게 해줄 테니…….

[그럼 그 네 곳 중에서 침묵의 대륙과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지?]

[디부아르 대륙이요.]

[좋았어. 지금 당장 디부아르 대륙으로 이동하겠어. 나의 활약상을 지켜보라고.]

[호호호, 건투를 빌어요. 그 바보들 데리고 잘 살아 남을 수 있으려나?]

[그건, 미영이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

[수혁 씨, 참고로 말씀드리는 건데 최상조 씨와 김민우 씨는 현재 곤두라스와 노잠부르크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에요. 오락신동(?)이니까 그분들에게 뒤처지는 일은 없겠죠?]

얘가 또 나를 자극하네.

[당근이지. 조금만 기다려. 그럼 난 바빠서… 흐흐.]

“자, 모두들 디부아르로 가자구. 이제부터 우리 혈의 눈물 깃발이 전장을 뒤덮게 될 거야.”

“와, 형님 멋져요. 빨리 가자구요.”

“으… 나는 전쟁터 나가는 게 조금 무섭당.”

“15번의 죽음의 고통, 그대로 되갚아줄 기다.”

“드디어 로큰롤메이지의 환상적인 마법을 보여줄 수 있겠군.”

환상적인 마법? 제발 아군이나 공격하지 마라. 부탁이다.

우리는 혈맹 등록소를 빠져나와 디부아르 대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한중 전쟁 때문인지 초심자의 마을에는 유저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가끔 몇몇 파티들이 사냥터로 옮겨 다니며 말을 걸어 왔고 거기에 적당히 응답만 하며(혹시라도 말대꾸 안 해서 짱깨로 의심받아 공격당하기 싫었기 때문에) 우리는 디부아르 대륙으로 옮길 수 있는 워프 비콘을 향해 걸어갔다.

다섯 개의 원뿔 모양의 기둥이 중심부를 향해 활처럼 휘어 있고 기둥이 싸고 있는 중심부에는 빛을 뿜어내는 부적 같은 모양의 타원형에 각종 문양들이 어지럽게 음각되어 있는 워프 비콘. 워프 비콘을 지키고 있는 NPC 무클리 로이드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무클리 로이드의 워프 비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를 디부아르 대륙으로 보내줘야겠어.”

“디부아르 대륙은 현재 혈맹전과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많아 사냥이나 퀘스트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여행 중 전쟁에 휘말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디부아르 대륙으로 가실 겁니까?”

“이 멍청한 NPC들,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성미 급한 쎄미트리가 NPC의 관료적인 어법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겁니다. 디부아르 대륙에 갔다가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니까 사전에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이 녀석 보게. 한낱 NPC 주제에 게이머에게 설교하는 거야, 뭐야? 내가 누군지 알아? 파이온에서 공동묘지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살육자 쎄미트리야, 쎄미트리.”

쎄미트리는 분명 성질을 참지 못하고 말하면서 스스로 더욱 더 흥분하는 그런 타입이 틀림없었다. 살다보면 화를 누그러뜨리며 속으로 삭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쎄미트리처럼 자기 이야기나 주장을 하다가 오히려 더욱더 흥분하며 발광하는 류의 사람들이 있다. 쎄미트리는 내 생각에는 후자에 가까웠다.

NPC 로이드와 쎄미트리는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쎄미트리, 그만둬. NPC 역시 파이온 게임을 이루는 중심 축이니까. 그들을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도 없어.”

“랏사드 님이 뭘 좀 아시는군요. 보아하니 쎄미트리 님은 랏사드 님에 비하면 레벨도 훨씬 낮은 것 같은데… 자, 디부아르 대륙으로 워프하시려면 한 사람당 2만 아데나가 필요합니다.”

“뭐가 그리 비싸?”

내 말에 찌그러져 있던 쎄미트리가 워프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또 발끈하고 나섰다.

사실 타 게임에 비해서 공간이동 하는 비용이 비싸긴 하다. 다른 게임들에서는 보통 이런 초보자의 마을에서 다른 마을이나 대륙으로 이동하는 데 대략 1만 아데나가 드는 데 비해2만 아데나면 두 배에 달하는 비용.

그리고 또 워프 비콘이 아니라 배를 이용해서 이동하면 가격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편인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세상이란 게 그런 거니까. 어차피 이 온라인 게임의 세계도 현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계관은 지금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 운영하는 시스템은 거의 현실과 맞먹는 수준이다. 예전에 한번 아니지 게임에서 이벤트를 열어서 김씨소프트의 알파벳을 모으면 아이템과 아데나를 주는 행사를 개최했다.

그 당시 게임 상에서 대부분의 고수들과 군주들이 이벤트 개최를 반대했는데 그 이유인 즉슨 이벤트를 열어 아이템을 무작위로 살포하고 아데나를 뿌리면 시장의 질서가 어지러워져 자기들이 몇 년간 이룩해놓은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파이온 게임은 현재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온라인 게임. 김씨소프트에서 투자한 비용만 해도 몇 백억 원인데 그 비용을 회수하려면 당연히 게임 속 아데나 비용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겠지.

“됐어, 쎄미트리. 비용은 내가 지불한다.”

“와… 정말요? 역시 우리 혈의 눈물의 랏사드 군주는 짱이라니까.”

세나가 한마디 하자 모두들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왔다. 퉁퉁 불어 있던 쎄미트리도 그 순간에는 화가 풀린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