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Meet a Chance (3/51)

chapter 2 Meet a Chance

친구 호성이를 여느 때처럼 제압한 나는 드디어 황제 임요강과 친선 게임을 하게 됐다.

스타크래프트의 황제, 테란의 귀재, 임요강과 악수를 했다. 손에 전율이 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마치 연예인 대 스타를 만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호호호, 평생 이 손 씻지 않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예인 같은 스타들의 손을 잡으면 어김없이 하는 이야기다. 나 역시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왠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크래프트의 스타, 임요강의 플레이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특히 그의 드랍쉽은 멀티 타이밍을 견재해가며 내가 쳐놓은 자원 줄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벌쳐 비비기 역시 변함없이 등장했다.

대형 스크린으로 중개하는 나와 임요강의 플레이에서 임요강이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일 때마다 관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근근이 그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던 나는 다행히 몰래 멀티를 성공시켰고 중반이 넘어섰을 때 물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리버와 싸이오닉 스톰을 활용해 중앙 싸움에서 탱크 컨트롤을 하며 버티는 임요강의 대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의 병력 역시 대부분 소진된 상태였다. 옵저버로 관찰한 결과 임요강의 본진에는 대 부대는 없었다.

나의 게이트웨이가 무려 18개. 여기서 쏟아지는 물량으로 지금 러시를 들어간다면 승산이 있을까? 순간적으로 엄청난 갈등을 했다. 가느냐, 병력을 더 모으느냐? 하지만 대 물량전이라면 몰라도 현재의 한 부대 반 정도의 병력으로 임요강의 컨트롤 을 막아낼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자원 줄에서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종반전 대 물량공세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임요강이 누군가? 그의 얌체 같은 벌쳐는 나의 멀티 기지에 캐논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교묘하게 프로브를 사냥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무시무시한 드랍십이 나의 멀티들을 견제하며 당황케 했다. 이곳저곳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자 마음이 급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이대로 지고 마는 것인가? 남은 병력은 질럿 1부대, 드라군 1부대, 하이템플러 3기. 나는 결국 최종 러시를 감행했다. 모 아니면 도. 복걸복. All or Nothing. 우리 같은 노름꾼들이 좋아하는 말이다.

쏟아지는 씨즈탱크의 포격을 뚫고 앞마당을 밀었다. 이런, 이러다 이기는 거 아냐?

그러나 내 멀티들을 야금야금 갉아 먹던 벌쳐들이 드랍십을 타고 본진으로 회귀, 언덕 탱크와 마인 대박에 내 질럿들이 폭사했다.

임요강은 벌쳐를 희생해가며 나의 템플러만 선택적으로 사냥했다.

인공지능이 떨어지는 멍청한 드라군. 결국 언덕 시즈의 포격에 우왕좌왕, 좌충우돌, 컨트롤하다보면 결국 폭사.

끊임없는 게릴라전에 돈줄이 막혀갔고 나는 더 이상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내게 남은 마지막 비기는 무엇인가?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 내게도 아직 희망은 있다.

첫째, 기지 이곳저곳에 파일런을 지으며 얼라이를 요청한다.

둘째, 포즈 게임(Pause Game)을 눌러가며 시간 벌기를 하면서 얼라이를 요청한다.

셋째, 강제 종료(Ctrl+alt+delete)로 무승부를 만들어버린다.

‘하하하, 맛이 어떠냐? 임요강. 나의 필살기다. 나는 배틀넷 최고의 더티 매너의 소유자 랏사드(Rassad)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열한 짓을 하지 않는다. 대학축제기간의 신성한 스타게임에서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을 해야 하겠는가?

나는 조심스럽게 키보드의 G키를 두 번 눌렀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황제에게. 한 시간 육 분간의 대장정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박수와 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분명 그것은 황제 임요강이 아니라 깨끗이 패배를 인정한 나를 위한 축하일… 리가 없다.

어릴 적부터 전자오락의 신동이라 불렸던 나는 적잖은 정신적 공황에 빠져들었다.

스트리트파이터, 철권, 거의 모든 경기에서 무패행진을 기록했으며 심지어는 전국 수원게임올림피아드에 참가해 철권 전국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고 다음해에는 펌프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던 박수혁이 아닌가.

동네 형들의 협박을 참아가며 지금껏 전자오락의 신동 자리를 차지해왔던 나는 생애 처음으로 쓰라린 패배의 잔을 마셨다.

물론 5000원을 바꿔와 무력시위 했던 돈질쟁이형 인간에게 철권을 지긴 했지만 그건 패배라기보다는 관용을 베풀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패배를 쉽게 인정했다.

실력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운이라는 것은 하수들이나 바라는 것이다.

그로써 무 캐릭터 레벨업 시켜서 계정 매매하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두 달 동안 늦춰졌고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나의 야망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마치 미혜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갔던 것처럼…….

호성이는 나에게 화를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미소를 지어줬다. 역시 나의 좋은 친구다.

“수혁아, 역시 너는 대단해. 황제 임요강과 막상막하로 싸웠잖아. 솔직히 센터싸움에서 네가 막았을 때 병력으로 밀어버렸으면 네가 이겼을지도 몰라.”

“아냐, 임요강 선수 진짜 잘하더라. 컨트롤, 타이밍 포착, 병력 운용, 전략전술, 모든 면에서 그는 우리 같은 아마추어와는 상대도 안 됐어. 프로게이머는 아무나 하는 게 아냐. 나는 오늘 에야 깨달았어.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호성이 말대로 센터 싸움이 끝난 후 지상병력으로 임요강의 멀티를 공격했더라면 승산이 있었을 거라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마치 바둑 선수들이 바둑이 끝나고 복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임이 끝나고 임요강 선수에게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축제기간에 임요강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중고등학생들도 제법 많았다.

황제는 몰려드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총학생회 간부들이 몰려드는 인파들을 제지하며 그를 총학생회 휴게실로 인도했다.

다음 날에는 임요강의 특강이 있다고 했다. 주제가 뭐라더라. 워낙 강의라는 단어를 싫어해서. 암튼 멀티미디어 시대의 게임 산업 어쩌고저쩌고 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았다.

부러웠다. 그의 주위에 몰려드는 인파들이. 축 처진 내 어깨를 호성이가 두드려줬다.

며칠 동안 나는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내가 처음 PC게임에 미쳐서 외박을 밥 먹듯이 할 때 우리 어머니는 어김없이 전화를 하셨다.

“수혁아, 어디냐? 집에 안 들어올 거냐? 도대체 뭐 하기에 허구한 날 외박이야, 외박이? 너 자꾸 그러면 아버지한테 말해서 용돈 지급 중단한다. 알았지?”

몇 달이 지나자 어머님의 태도는 많이 달라지셨다.

“수혁아, 어디냐? 밥은 먹고 다니니? 제발 집에 들어와만 다오.”

그러고도 몇 달을 그렇게 지냈다.

“수혁아, 어디냐? 제발 무사히 살아만 있어다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진짜 나는 말 그대로 불효자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며칠을 두문불출하며 집안에 틀어 박혀 있기만 하자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히려 더 불안해하셨다.

가끔 저녁에 간식을 가지고 오실 때면 엄마는 오히려 내 눈치를 살폈다.

“수혁아, 과일 좀 먹어라. 어디 몸이 불편하니?”

“수혁아, 요즘은 왜 밖에 안 나가니? 무슨 일 있니? 왜 그러는지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말해봐. 무슨 사고 쳤어? 여자친구하고 헤어졌니? 밖에서 뭐 하다가 사채라도 끌어 썼니? 왜 그러고 있어? 말 좀 해! 말 좀! 엄마 답답해 죽는 꼴 보려고 그러니?”

나는 엄마가 그럴 때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엠피쓰리의 볼륨을 높여버렸다.

‘미안해요, 엄마. 이제 곧 정신 차릴게요.’

2주일을 그렇게 밥만 먹고 이불 뒤집어쓰고 자고 또 밥 먹고 그렇게 폐인처럼 보냈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나를 백수건달 불한당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2주 뒤부터는 다시 밖에도 나가고 이런저런 게임도 하게 됐지만 사라진 의욕은 다시 불타오르지 않았다. 적당히 대학교를 졸업한 후로도 나의 백수건달 짓은 2년이나 계속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 기업체에 원서도 넣어봤고 보습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쳐도 봤다. 그러나 사회는 나를 사회 부적응자로 봤는지 어느 한곳에서 쉽게 정착하지 못했다.

백수 생활도 오래되자 만성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렇게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차라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안정적인 공무원이 최고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다.

사실 나는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그저 공무원하면 동사무소에서 등초본 떼어주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결심했다. 내 나이 29세. 언제까지 이렇게 건달, 불한당으로만 살 수 없다. 아니, 백수로만 살 수 없다.

이제 장가도 가야 할 것 아닌가?

불현듯 미혜가 그리워졌다.

그녀의 잔소리… 일찍 일어나라, 규칙적으로 생활해라, 장래를 생각해라, 등등등.

갑자기 나는 미혜와 통화가 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정도 울렸을까?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때마침 내 엠피쓰리에서는 나비효과의 첫사랑이라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술 취한 오늘밤도 전화를 들지만, 힘없는 내 손끝은 버튼을 못 눌러. 다 잊겠다고 큰소리치지만 한 손에 나도 몰래 들려진 니 사진. She’s all I need. 사랑을 몰랐던 나. 너 보고 싶어. 이렇게 다 구겨진 작은 사진 또 바라보며. She’s all I need.

누구나 이 곡의 대사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혹은 혼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전화를 끊어버리면서 자신의 용기 없음에 대해 탄식하는…….

노래가 끝날 무렵 나는 갑작스런, 전혀 나답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그래, 공무원시험을 봐야겠다. 안정적인 직업이라니까 공무원이 돼야지.

“아버지, 저 내일부터 공무원학원에 등록하겠어요.”

“이게 웬일이냐? 드디어 우리 아들이 정신 차렸구나. 그래, 얼마면 되겠니? 일단 아빠가 100만 원 줄 테니까 공무원 학원에 접수해라.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요즘은 공무원 합격하기가 쉽지 않다더라. 아빠는 우리 수혁이를 믿는다.”

나는 다음 날 아버지에게 100만 원을 받아 학원으로 갔다. 뜻밖에도 학원 수강료는 종합 반 두 달에 45만 원이었다.

55만 원의 공돈이 생긴 것이다. 역시 제 버릇 개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나는 호성이와 춘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 제일 당구장으로 나와라.”

“그래, 알았어.”

나의 잠적으로 심심해하고 있던 호성이와 춘기는 눈썹이 휘날려라 당구장으로 달려왔다.

우리는 중국집 김사장, 영문과 준문이를 불러서 포커판을 벌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날은 또 이상하게도 카드가 안 됐다.

거의 노페어, 잘하면 투페어… 그것도 박스 없는 걸로. 어쩌다가 줄 메이드 만들면 플러시에게 밟혔다.

그날 나는 여윳돈의 3분의 2를 날렸다.

‘오, 하느님! 저를 버리시나이까.’

역시 신은 있었다. 아버님이 주신 학원비를 노름으로 탕진하려는 나에게 하느님은 풀하우스는 고사하고 플러시 한번 내려주지 않으셨다.

매번 나에게 용돈을 보태주던 중국집 김사장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마음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 우리끼리 왕서방이라 부르던 김사장의 얼굴이 유난히 꼴 보기가 싫었다. 성질 같아선 카드 판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좋다고 웃는 거 봐라, 매너 없는 놈. 으이그, 열 받아. 내 친구들, 후배들한테 연락해서 너네 집 짜장면 시켜 먹지 말라고 해야겠다. 두고 보자.’

그렇게 불량한 마음을 먹고 뜨지 않는 카드패를 원망하고 있을 때 당구장의 문이 열렸다.

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문 쪽을 향했다. 당구장 사장은 먹고 있던 짜장면을 토해내며 사레가 들릴 정도로 놀랐다.

나 역시 마시고 있던 커피를 엎지를 뻔했다. 중국집 김사장은 부리나케 담요를 덮었다.

출입문 쪽에서 제일 당구장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 차림의,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같은 에이전트의 분위기를 풍기는 두 명의 사내와,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다운, 지구상의 내가 아는 형용사로는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의 바지정장 차림의 미녀가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짭새들 아냐?”

“글쎄요, 이거 감이 좋지 않은걸요.”

“야,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우릴 불러가지고. 짭새들이면 어떡해.”

“짭새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리들끼리 소곤거리며 경계심을 표하고 있을 때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머지 두 명은 출입문 쪽에 서 있었다. 특히나 문 앞의 그 검은 옷은 우리들 중 한 명이라도 튈 것을 대비하는 듯한 인상을 주며 매서운 눈으로 우릴 쏘아보고 있었다.

“박수혁 씨 맞죠?”

순간 뇌리에 번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머릿속에 백열등이 깜빡거렸단 말이다.

그렇구나. 드디어 SK, KTF 등 명문 프로게이머 구단에서 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헤드헌터를 보냈구나. 어쩐지 짭새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위엄을 풍기더라니. 그럼 그렇지. 임요강과 백중세로 싸웠는데. 물론 이미 2년이나 지났지만 그건 보통 일이 아니지. 어쩐지 오늘 카드도 안 되고 당구도 안 되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 역시 신은 공평하셔. 어머니, 아버지, 저도 이제…….

“박수혁 씨, 맞습니까?”

그는 내가 생각에 사로잡혀 대답이 없자 재차 물어왔다.

“네, 맞습니다. 그…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박수혁 씨,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그래, 서울 KTF 같은 본사로 가자는 말인가?

“근데 어디서 나오셨죠? KTF인가요, SK인가요?”

그의 표정은 말 그대로 생뚱맞다는 표정 그 자체였다.

“무슨 말입니까? 웬 핸드폰 회사를 들먹이는 거요? 여기서 말하기는 곤란하오. 일단 같이 갑시다.”

“여보세요, 당신들이 누군데 수혁이를 오라 마라 하는 겁니까? 신분증을 보여주시든가요.”

호성이가 우리의 대화에 껴든다.

“지금 여기서 포커판을 벌인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여기 있는 모든 분을 연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수혁 씨에게만 볼일이 있으니 따라오시죠.”

‘헉, 역시 짭새.’

나의 기대는 또다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호성이는 나를 위해 그들에게 대들었다가 무안만 당했다. 그들은 이미 우리가 노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듯했다. 그런데 왜 나만?

그들 말대로 잡아가려면 우리 모두 잡아가야 할 거 아냐?

불안감이 기습해 들어오는 적군처럼 몰려왔다.

“우선 당신들이 누군지 알아야겠어요. 그래야 집에다 연락이라도 드리죠.”

검은 양복의 사내는 나를 한번 째려보더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 푸른 글씨로 국가 정보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네모난 신분증은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붉은색의 사선이 그어져 있었다.

“헉!”

“국정원?”

“국정원이면 안기부 아냐?”

“수혁아, 너 학교 다니면서 데모했냐?”

중국집 사장과 당구장 사장은 국정원 신분증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국정원. 군인들이 정치하던 시절 안기부로 통하고 그 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불리던 그 국정원.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코끼리도 냉장고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그 국정원이다.

내 몸 속의 혈류가 급속도로 빨리 회전하며 좌심방 우심방을 오가며 심장을 두드려 그렇지 않아도 콩알만 한 가슴이 콩닥 거리는 소리가 저 멀리 아메리카까지 들릴 정도로 커졌다.

“구… 국정원에서 왜 저를…….”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같이 가서 하시죠.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민감한 사안이라…….”

“싫다고 해도 잡혀가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소.”

“수혁아, 뭐 하고 있어? 빨리 따라가지 않고.”

중국집 사장은 혹시라도 나 때문에 자기에게 피해가 갈까봐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해치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여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나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문 앞에 선 양복 입은 사내가 초절정 고수의 내공으로 인광을 쏘아대고 있었다.

“수혁아.”

춘기와 호성이가 동시에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호성이와 춘기를 돌아봤다.

“혹시 모르니까 우리 엄마한테 전화 한통 해주라.”

학창시절 과거 안기부가 저질렀던 각종 의혹에 싸인 공안 사건들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 길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알았어.”

“수혁아, 별일 아닐 거야. 겁먹지 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들을 따라 나가는 나를 호성이와 춘기가 따라왔으나 이내 검은 양복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어딜 따라오려고? 찌그러져 있어.”

내가 그들을 따라 나설 때 문 앞의 검정 양복의 사내가 호성이와 춘기를 협박한 후 우리 하우스 멤버들에게 다가갔다.

“한 번만 더 당구장에서 노름했다가는 모두 영창 갈 줄 알아. 알았어?”

눈매가 날카로운 그는 마치 장수가 부하들에게 명령하듯이 무섭게 쏘아붙였다.

“예… 예… 알겠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안 했으나 돈 따서 좋아하던 소심쟁이 중국집 김사장만 이등병처럼 대성박력으로 복창을 했다.

나는 당구장 밖으로 그들을 따라 나왔다.

당구장 앞에는 검정색 NF쏘나타가 세워져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내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검은 옷의 사내가 차에 나를 밀어 넣었다.

“놔요, 나도 탈 수 있단 말예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나는 그 젊은 검은 양복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무섭게 생긴 검은 양복의 손을 뿌리쳤다.

“이 자식이 근데…….”

“어허, 유경위. 극진하게 모시라고 했잖나.”

극진하게? 순간 나는 그 단어에 적잖게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극진하게 모시라니? 조폭 영화 같은 것 보면 대부분 보스들이 상대방 보스를 연행할 때 극진하게 또는 정중하게 모시라고 해놓고 나중에 지하 창고 같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연장질 하고 폭행하고… 극진하게 라는 의미는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어휘다.

“아… 예… 죄송합니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검은 양복의 말에 무섭게 생긴 검은 양복은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나와 바지정장의 예쁜 여자는 뒷자리에 앉았고 무섭게 생긴 검은 양복은 운전석에, 점잖아 보이는 양복은 조수석에 앉았다.

“임과장님, 뒤로 앉으시죠.”

“아닐세, 나까지 뒤에 앉으면 자리가 좁아.”

“그래도 그렇지 과장님이 조수석에 앉다니요. 차라리 저 녀석을 조수석에 앉히시지요?”

“유경위, 그냥 가세. 그리고 내 극진하게 모시라고 말했을 텐데. 허험.”

“아! 예… 예…….”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도대체 이들이 왜 나를 잡으러 온 걸까? 도박? 그렇다면 나보다는 중국집 김사장이나 당구장 권사장을 먼저 잡아가야 되는 거 아냐? 솔직히 우리 정도 포커 치는 수준이면 도박이라고 하기도 좀 뭐한데…….

그리고 위대한 국정원이 도박범이나 잡으러 다니겠어?

학생회? 에이, 설마. 나는 고작 과학생회 부대표 한 번 한 적밖에 없고 집회나 시위에는 거의 참석한 적도 없는데 나를 잡아가? 커닝으로 대학교 들어간 건 공소시효가 지났을 테고…….

뭘까… 도대체 뭘까… 아… 미치겠네. 뭔지 알아야 짱구 굴려서 구라를 치더라도 칠 거 아냐.

혹시 미혜 아버님이? 그래. 미혜 성이 유씨니까… 아까 저 험상궂은 아저씨가 유경위라고 했지.

가만, 보아하니 서른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데 저 나이에 미혜 정도의 딸을 낳으려면 적어도 열 살에는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에이… 미친 놈. 이런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니 역시 난…….

내가 짱구를 굴리고 있을 때 그들이 입을 열었다.

“이거 정중하게 소개를 하고 모셨어야 하는데 미안하게 됐네. 우리들이 하는 일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본의와는 다르게 강압적으로 비칠 때가 있네. 이해해주게.”

‘어랍쇼? 이건 또 무슨 분위기야?’

흔히 듣는 당근과 채찍 중 당근 아냐? 이것들 봐라. 내가 토끼로 보이나, 이것들이…….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단점이 참 많은 놈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속마음과 다른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점이 가장 나쁜 점이다.

“우리 소개가 늦었지. 나는 국정원 해외분야 외사 3과장 임승수라고 하네.”

국정원 해외분야 외사과장이라고? 그렇게 잘난 당신이 날 왜?

“나는 경찰청 사이버테러 대응센터 수사1팀 유경호 경위일세.”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렇구나. 이제야 이들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겠다. 이런 멍청한 놈, 그러고도 프로게이머 스카우트로 착각하고 있었다니. 난 죽어야 돼.

나는 사이버테러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섭게 생긴 경찰아저씨의 이름이며 직함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내가 아니지 온라인과 무 온라인을 하면서 다른 사람 아이디 해킹해서 몇 번 캐릭터 팔아먹고 아이템 현금거래 하고 했던 일들이 사단이 되어 저들을 불러들였구나 하는 생각만 되풀이했다.

갑작스럽게 오락신동, 게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시절들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제 이 못난 아들은 감옥행이군요. 취직해서 해외여행도 보내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못 다한 효도하려고 했더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생각에 눈물이 날 뻔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새끈한 아가씨의 소개를 듣기 전까지는…….

“안녕하세요. 사진보다는 훨씬 미남이군요. 키도 크고. 내 스타일인걸요, 호호호. 저는 김씨소프트의 웹서버관리팀 팀장 강미영이에요.”

어랍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미남이군요? 내 스타일이야? 얘가 지금 개그하나? 김씨소프트면 아니지 게임 만든 곳 아냐? 역시 그거였군. 젠장, 아니지 게임해서 벌어들인 돈이 얼마나 된다고 셋이서 합동 작전이냐, 합동작전이…….

“저는 박수혁입니다.”

그들의 릴레이 소개 때문에 나도 마지못해 내 소개를 했다.

갑자기 슬퍼졌다. 국정원 해외분야 외사과, 사이버테러 대응센터 수사 1팀, 웹서버관리팀장, 나는 왜 저런 화려한 수식어구가 이름 앞에 붙지 않는 걸까? 백수는 서러운 것이구나. 처음으로 내가 백수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명절 때, 친구 결혼식 때, 친척들과 친구들이 뭐 하냐고 물어보고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봐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나였거늘…….

감색 바지 정장에 어울리는 화장 톤에 천하지 않을 정도로 빨갛게 칠한 저 섹시한 입술, 옷 사이로 드러나는 글래머러스한 실루엣 그리고 늘씬한 몸매, 사슴 같은 눈동자의 여인 앞에서 ‘사성 주식회사 박 대리입니다.’ 또는 ‘서울지방법원 강력계 박검사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00대학교 00학번 박수혁입니다.’도 아닌 그냥 ‘저는 박수혁입니다.’

정말 비참하다. 차 안에 쥐구멍은 없으니까 재떨이 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자네 소개는 할 필요 없네. 충분히 조사를 하고 왔으니까. 자네 정말 또래 청년들에 비해서 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더군.”

이력? 무슨 이력? 내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동안 그 흔한 반장 한 번 못해보고 제대해서 후배들 챙겨주려고 대학교 과 부대표 한 번 한 적밖에 없는, 아참, 군대에서 내무반장 한 번 했구나. 암튼 그런 내가 독특한 이력이라고……?

“저기, 죄송하지만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국정원이라고 해서 많이 당황했을 거야. 우린 자네를 구속시키거나 해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닐세. 자세한 이야기는 사무실에 가서 하면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예? 뭐, 뭐라구요?”

“자네 얼굴 보니 너무 경직되어 있고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걱정하지 말라고. 자네의 신변에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편안하게 앉아 있으라고.”

나는 편하게 앉으라는 임과장이라는 사람의 건의에 그들에게 얕보이면 안 된다는 소박한 마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차는 어느덧 시내를 벗어나 외곽의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강미영 팀장님과 박수혁 씨는 여기서부터 안대를 착용해주십시오. 머지않아 보안구역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정말 환장하겠네. 사이버테러 대응센터와 국정원직원이 나를 잡으러 와서 아무 일 아니라고 하고, 안대나 뒤집어쓰라고 하면 나는 그냥 ‘예, 알겠습니다.’ 해야 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쁜 일 아니라고 하니까 더 불안하잖아. 혹시 이게 꿈이 아닐까? 내가 2년간 게임이나 하고 백수로 지내니까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하느님이 이런 꿈을 보여주시는 건 아닐까?

머릿속에서 오만 잡동사니들이 조합과 해체를 반복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몇 번의 오르막길과 몇 번의 내리막길을 가는 것 같더니 차의 속력이 줄어들었다.

“자, 다 왔습니다. 이제 안대를 푸시지요.”

안대를 풀자 마치 장편 영화를 본 후 극장을 빠져나왔을 때처럼 눈이 부셨다. 고교시절에 배운 암순응인가 명순응인가 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눈앞에는 무슨 시골 농장 같은 건물이 있었다. 이곳이 어디쯤일까? 외곽도로를 타고 왔으니 나주 정도나 되려나?

“따라오시죠.”

점잖은 검은 양복과 무서운 검은 양복이 앞장서자 미녀 팀장과 나는 그들을 따라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때 허름했던 시골 농장 건물의 내부는 잘 꾸며놓은 회사 건물 같기도 하고 비밀 회의실 같기도 했다.

‘설마, 여기서 날 고문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으로 내려간 나는 그들을 따라 회의실이라고 써진 방으로 들어갔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모셔서 미안합니다, 박수혁 씨.”

임승수 과장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거만한 자세로 말했다. 나머지 두 명도 자리에 앉자 나도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박수혁 씨, 이곳에 끌려온 이유가 궁금할 테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내가 말을 하다 말았는데, 박수혁 씨 참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1977년생, 아버지는 현직 공무원이시고 어머니는 간호원 하시다가 현재는 전업주부. 여동생은 캐나다 어학연수 중. 초등학교 때 개근상 한 번… 음… 그 외는 뭐 특이한 사항은 없고… 아, 1사단 전진부대 내무반장 한 번. 그 외에는 정말 없군. 우리가 관심을 갖는 건 당신의 그 화려한 오락 이력입니다. 수원올림피아드 철권대회 우승, 다음해 수원올림피아드 펌프대회 우승, 아니지 최고 레벨 64, 물론 불법 현금 거래로 팔아먹었고, 무 온라인 최고레벨은 341, 현재 339짜리 또 키우고 있더군요.”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대한민국 국정원이 나처럼 쓸모없는 인간에 대해 저렇게까지 상세하게 안단 말인가? 이 정도면 정보원이 아니라 스토커 아닌가? 대한민국 정부가 이토록 할 일이 없단 말인가?

“그 외에도 포트리스, 카운트 볼 등 숱한 게임을 거의 안 해본 게 없을 정도고 단기간에 고수의 레벨로 올라섰더군요.”

“그… 그런데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리바리하게 반문했다.

“자, 누가 먼저 하실래요? 유경위, 강팀장? 누가 먼저 하실 건가요?”

‘한다고? 뭘 해? 설마 나를 강간하는 건 아닐 테고… 강팀장이 해준다면야 뭐 어쩔 수 없이…….’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새끈한 쭉쭉빵빵 강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자 프로젝트가 켜졌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김씨소프트에서 작년 한 해 아니지와 아니지2로 벌어들인 외화수익은 총 235억 원입니다. 이 수치는 국내 수익을 제외한 순수 외국수익 통계치입니다. 반 면 중국의 공작 세력 및 이용자들에게서 국내 이용자들이 캐릭과 아이템을 현금 구매하면서 빠져나간 돈이 130여 억 원 됩니다.”

그래, 나도 언젠가 인터넷 뉴스에서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최근 우리 김씨소프트에서는 파이온 온라인 가상현실게임을 6개월간의 베타서비스 통해 석 달 전부터 상용화에 들어갔습니다. 총 77개의 방대한 서버가 운영 중이고 한 서버 당 최대 10만 명까지 동시 접속이 가능한 전 세계 최초의 온라인 가상현실게임입니다.”

와아!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프리젠테이션도 수준급이네. 그러니까 팀장 하겠지. 역시 나 같은 백수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가만, 가상현실게임이라고? 설마 얼마 전에 춘기가 말하던 김씨소프트에서 개발했다는 그 가상현실게임? 별도의 게임기기 때문에 이용 요금이 비싸다는 그 게임 말하는 거야? PC방에서 봤을 때 무슨 관처럼 생겼던 그 기계로 하는 그 게임? 하지만 아직까지는 초보적인 수준의 가상현실게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 저 여자가 그 게임 개발에 참여한 건가?

나의 생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프리젠테이션을 이어갔다.

“현재 중국, 미국, 일본에서 동시 접속 가능하고 중국과 일본, 미국에 별도의 팀을 꾸려 자체 서버를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베타서비스 때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를 통틀어 450만 명 정도가 유료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프리서버 이용자들까지 고려한다면 약 600에서 700만이 즐기는 명실 공히 세계 가상현실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서버는 아무래도 국내인들만 즐길 수 있는 한국 서버입니다. 계정도용이 심한 곳도 이곳이구요.”

그래, 나도 춘기 따라 파이온 오픈 베타테스트에 참가할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무 캐릭 키우느라 포기했는데 인기가 제법 있다는 소리 들은 적 있었어. 실지로 춘기랑 승연이는 지금도 파이온에 미쳐 있기도 하고…….

“앞으로 오픈베타테스트 기간에 발견된 여러 가지 버그와 문제점을 해결해가면서 세계적으로 공격적 마케팅과 홍보를 활발히 할 경우 전 세계 천만 가입도 가능할 걸로 생각됩니다. 특히 현재 파이온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파이오닉이라고 불리는 전용 파이온 컨트롤러를 구입해야 하는데 이 기기의 생산단가만 현실화되면 명실 공히 세계 최초이자 세계 최대의 가상현실게임이 완성되는 거죠.”

“처… 천만!”

나의 갑작스런 탄성에 강미영의 양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럴 경우 파이온 게임 하나가 벌어들이는 외화 수익은 대략 매년 2500억 원 정도. 장래성과 중국, 미국의 시장 규모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는 더욱 많은 수익을 올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지? 뭐야? 회사 채용박람회 하는 거야? 아까 내 게임 이력이 훌륭하다고 하더니 혹시 특채하려고 데리고 온 건가?

“그런데 최근 아니지와 아니지2에 이어 파이온 온라인까지 중국인들의 공작 활동 및 해킹 활동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근 3달 동안 피해액만 260억 정도 되고 회사 이미지나 피해 복구에 드는 기회비용까지 생각한다면 피해액이 500억에서 700억 정도로 계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유경호 경위님께서 설명해주실 겁니다.”

그녀의 명쾌하고 물 흐르는 듯한 브리핑이 끝나자 무서운 검은 양복이 앞으로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사이버테러 대응센터 유경호 경위입니다.”

‘아까 소개했잖아, 인마. 하여튼 뻘쭘한 분이라니깐.’

“2000년 출범 이래 저희 사이버테러 대응센터는 인터넷 해킹, 음란물이나 불건전 정보 유통, 전자상거래 사기, 사이버 도박 바이러스 유포, 개인정보 유출,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 운용, 사이버 저작권 침해, 사이버 명예훼손 및 협박, 스토킹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이 표를 보시면 1997년 121건에 지나지 않던 사이버 범죄가 2002년에는 60,068건으로 5년 사이 무려 500배가 늘었음을 알 수 있고 현재 사이버 범죄 수는 저희들의 수사망에 파악된 건수만 해도 180,782건으로 2002년보다 3배가 더 늘어났습니다. 프리젠테이션에는 음란물이나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관한 슬라이드들이 있어서 그 부분은 통과하고 인터넷 해킹과 개인정보 유출에 관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유경위라는 자는 그 후로도 무려 십여 분간 중국인들의 국내 게임 해킹 사례, 사이버 범죄 등에 관해서 장황하게 브리핑했는데 지겨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국정원 임과장이 유경위의 브리핑을 짧게 끊었다.

“수고했네, 유경위. 자, 그럼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겠네. 박수혁 씨,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 국정원에서도 해외팀 내에 특별 팀을 꾸려 국내의 지적재산과 기업정보를 보호하고 인터넷 해킹 및 사이버테러를 사전 차단하는 일을 하고 있네. 강팀장이 자세하게 설명해주겠지만 박수혁 씨가 국가와 김씨소프트를 위해 몇 가지 도와줘야 할 일이 있네.”

“예? 뭐라구요?”

나는 정말 태어나서 두 번째로 깜짝 놀랐다. 가장 심하게 놀랐던 것은 군 시절 부대 앞 학다방 미스 리의 수박만 한 가슴이 뽕브라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고 두 번째가 지금이었다.

정말 이건 영화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세상에 나 같은 백수에게 국정원 과장이 도와달라니. 이게 꿈인가, 생신가? 그래, 이건 꿈이다. 지금까지 강팀장 같은 미녀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하하하! 그래,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자네가 우릴 도와줘야겠어. 어때, 그래줄 수 있겠나?”

“강미영 씨, 제 볼 좀 꼬집어주실래요?”

“예? 왜, 왜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해서요.”

“호호호, 박수혁 씨 제법 엉뚱한 구석이 있네요. 한편으론 좀 귀엽기도 하고.”

그녀는 아프로디테의 손길로 내 볼을 꼬집었다.

“아야! 아니, 이렇게 세게 꼬집으면 어떻게 해요? 아이고, 아파라…….”

“어머, 미안해요. 살짝 꼬집는다고 꼬집었는데 손톱이 길어서 그만.”

정말 많이 아파서 화가 나려고 했지만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오, 나의 여신이여…….’

“그럼 제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라는 게… 설마 저보고 국정원 직원이 돼서 중국 가서 짱꼴라들과 액션을 벌이라는 이야기는 아닐 테고. 또 저는 중문과를 나와서 오락 빼고는 컴퓨터나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는데 사이버 수사대에 들어와서 일하라는 것도 아닐 테고…….”

“바로 그거네. 자네 말대로 자네는 너무 무능력해. 전형적인 백수건달이지.”

나는 또 건달의 고귀한 의미를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자칫 좋은 분위기가 깨질까봐 얌전하게 있었다.

“우리가 조사해본 결과 자네가 취직을 한다면 이상한 일이지. 낙하산이라도 타면 몰라도. 하지만 이번 일에 협조해준다면 내 자네 취직 문제를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줌세. 아마 강미영 팀장도 자네의 취직 문제에 도움이 될 거고.”

‘아, 그니까 내가 할 일이 뭐냐고? 이 사람들 정말 사람 애 터져 죽는 꼴 보고 싶나?’

“제가 말씀 드리죠.”

오! 나의 여신님이 나서는구나. 집중해야겠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리 김씨소프트가 만들어낸 야심작 파이온의 순수 제작비는 무려 510억입니다. 거기에 해외 마케팅 및 잡지, 케이블TV, 해외 광고비용이 또 50억가량 들어갔습니다.”

오우… 대단하군. 내가 들은 바로는 아니지2가 약 150억 정도 제작비가 들어간 걸로 아는데 그 4배를 들여 만들었다니…….

“그런 야심작이 중국의 해킹 세력에 철저히 농락되어 회사의 이미지 손실과 순수 이용자들의 피해가 천문학적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박수혁 씨를 선택했습니다. 박수혁 씨의 탁월한 게임 감각으로 중국의 도용 계정 이용자들을 찾아내어 게임 속에서 소탕해주시고 그들이 해킹해놓은 버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저희 프로그래머들에게 보고해주세요. 더불어 파이온이 아직까지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박수혁 씨가 게임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들을 지적해주시고 개선사항을 건의해주시면 됩니다. 당신이 할 일을 대략 그런 것들입니다.”

“이상하군요.”

“아니,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허물없이 물어보게.”

“첫째, 왜 저여야 하는 겁니까? 국내에 활동하는 프로게이머들만 대략 50에서 100명, 그 외에도 수많은 게임광들이 있을 텐데요.”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첫째 게임에 대한 센스가 뛰어난 사람, 그리고 전략시뮬레이션뿐만 아니라 RPG 게임이나 슈팅게임, 파이팅게임, 보드게임, 액션, 스포츠게임, 캐주얼게임 등 각종 게임에 능수능란한 사람, 프로게이머들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수인 사람. 직장이 있는 사람은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이 프로젝트에 부적합하지.”

“좋아요. 제가 게임센스가 있다는 건 인정하죠. 과장님 말대로 각종 게임에 능수능란한 편이구요. 하지만 왜 프로게이머는 안 되는 거죠?”

나는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점들을 물어갔다. 이러고 보니 내가 취조관이고 저들이 죄인 같았다.

“우선 프로게이머들은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네. 이건 대외비 사항이네만 이번 파이온의 해킹 세력은 단순한 중국 게이머들이나 국내 작업장들이 아니야. 물론 그들이 대다수지만 게임 아이템과 캐릭터 매매가 돈이 된다는 걸 알아낸 삼합회가 그들을 배후조종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네.”

삼… 삼합회? 분명 삼합회라고 했지? 홍어 삼합도 아니고 야쿠자, 마피아와 함께 세계 3대 갱단에 들어간다는 그 삼합회?

“3년 동안 중국으로 들어간 아이템 구매비만 1000억이 넘네. 이 엄청난 이권에 삼합회가 눈독을 들인 거지. 중국 정부 역시 암묵적으로 그들의 활동을 방관하고 있고. 그런데 만약 임요강같이 알려진 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들의 신변 보호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자칫 프로젝트가 무산될 수도 있지.”

뭐야, 그럼 나는 삼합회 애들한테 맞아 죽어도 된다는 거야?

“그렇게 위험하다면 제 안전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 국정원과 경찰청에서 자네에게 전담 경호원을 붙여줄 걸세. 또 궁금한 점은?”

‘맙소사, 전담 경호원?’

“또 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백수들이 백만 정도 된다 치면 그들 중에 젊은 백수들이 40만, 그들 중 게임에 천재적인 실력을 가진 애들이 10%만 된다 해도 4만인데 왜 하필 저를 택하신 거죠?”

“몇 가지 이유가 있네. 우선 이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아마추어 게이머는 자네 한 명이 아니네. 자네는 남부 권역, 즉 전라도와 경상도, 제주도를 대표하는 한 명에 불과하네. 자네 외에도 권역별로 두 명이 더 이 프로젝트에 투입되네. 남부 권역에서 몇 명이 경합이 붙었어. 하지만 그들 중 신원조회에서 탈락한 자들도 있네. 집안 문제나 혹은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한 이력이 있는 자들은 제외했네. 자네는 아버님이 공무원이시기에 신분보장 측면에서 가점이 있었고, 특히나 우리 아들이 바로 요즘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임요강이라네.”

“프로게이머 임요강이요?”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래, 자네가 2년 전 대학 축제에서 스타크 게임을 펼쳤던 테란의 황제로 불린다는 임요강이네.”

“예? 정말요? 그럼 과장님이 임요강의 아버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을 듣고 찬찬히 살펴보니 임승수 과장은 정말 임요강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 임요강이 임승수를 닮은 게 맞겠구나.

“그래. 내가 바로 임요강의 아버지일세. 요강이가 게임을 잘한다기에 주위의 길드나 아는 선후배 중에 이 일에 참가할 애를 추천해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그 녀석이 대뜸 자네 이야기를 하더군. 그날 축제 때 친선게임에서 프로게이머인 자신을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골탕 먹였다고. 자칫 잘못했으면 지방까지 내려가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 망신당할 뻔했다고 하더군. 아마추어 게이머 중 그런 실력을 가진 자는 자네밖에 없었다더군. 요강이는 중반에 센터싸움에서 밀렸을 때 자네가 밀고 들어왔더라면 자기가 패했을 거라고 하더군. 또, 그날 게임이 끝나고 총학생회 간부들과 이야기하다가 자네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자네가 00대학교 스타크 대회 챔피언이라고 하더라고. 더구나 자네가 스타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오락에 능통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더군. 그래서 자네의 신변과 이력을 조회한 거네.”

“박수혁, 자네가 중문과 출신이라는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어. 아무래도 중국인들을 골라내려면 중국어나 중국문화들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합격점을 받은 거고.”

유경호 경위가 거들고 나섰다.

“궁금한 점이 더 있습니다.”

“아, 뭐, 뭐가 그리 궁금하나?”

“우선 아니지나 무 같은 RPG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짱꼴라 유저들을 구분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거만 말씀드리자면 짱꼴라들은 아이디만 봐도 표시가 납니다. 한글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꿕, 타밚, 탋, 같은 이상한 글자들의 아이디가 많지요. 또 그들은 한결같이 타자가 느리거나 ㅎ ㅁ 미히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입니다. 만약 타자가 느린 아저씨들이라면 속도는 느려도 글씨는 똑바로 쓰거든요. 특히 짱꼴라들은 스틸에 먹자 등은 기본이고 자동사냥 프로그램 깔아서 레벨업 하고, 아무튼 척 보면 압니다. 몹스틸에 돈 벌려고 환장한 놈들 보면 대부분 짱꼴라들이죠. 저도 게임하다가 영어로 ni hao 쳐서 말 안 되는 이상한 답변하면 바로 척살해버리곤 했습니다.”

“그건 저희도 잘 알죠.”

듣고만 있던 강미영이 나섰다.

“지금 아니지에서는 중국 게이머들과 한국 게이머들 간에 전쟁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지만 파이온은 좀 달라요. 아직 파이온을 안 해보셔서 잘 모르겠지만 짱꼴라 구분하기가 아니지만큼 쉽지 않아요. 해당국가의 자체 서버뿐만 아니라 통합서버에서도 5개국 자동언어번역이 되기 때문에 대화로 색출하기는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박수혁 씨를 택한 거예요.”

“그리고 또 게임 버그나 해킹, 또는 게임의 문제점은 이미 오픈 베타테스트에서 건의사항을 다 수렴했을 테고 저 말고도 게임 모니터 요원으로 활동하는 분들도 많은 걸로 아는데 왜 저에게 그런 걸 요청하시는지…….”

“제가 한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파이온의 가장 대표적인 해킹 사례입니다. 팜파스 서버의 팜파스 성이 대표적인 중국인들의 성인데 이곳 공성전에서 얼마 전에 비행기가 등장했어요.”

“뭐라고요? 가상현실 RPG 게임에 비행기라니요? 그게 가능합니까?”

“저희들도 현재 소스 분석중이지만 아직까지도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한국 게이머들이 혈맹을 조직해 팜파스 성 공성전에 들어갔다가 그 비행기에 모조리 사망했습니다. 파이온 가상현실게임이 여타 MMO와 가장 다른 점은 파이온 온라인은 한 번 사망하면 레벨 50이하는 20%의 레벨다운, 레벨 100이상은 10% 레벨이 다운되는 것입니다. 일정 정도의 레벨이 돼서 전직을 하게 된 상태에서 죽으면 전직 후 레벨이 10% 다운됩니다. 아이템 역시 사망하면 10%를 잃게 되어 있습니다. 이용자들의 적극적인 전략과 파이팅을 유도하기 위해 프로그래밍한 것이 중국유저들의 배를 불리고 있는 거죠. 더구나 RPG게임을 즐기는 분들은 슈팅게임이나 전략시뮬레이션은 잘하지 않아서 갑작스러운 비행기 같은 버그의 등장에 대처를 잘 못하더군요. 우리 김씨소프트는 세 분의 선택된 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특히 박수혁 씨에게요. 또 게임 모니터 요원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생들이고 전문적인 게이머들이 아니어서 피상적인 이야기 외의 적극적 건의는 없는 편입니다. 진짜 게임 잘하시는 분들은 저희 게시판에 글도 안 올리시고요. 이제 이해가 되셨나요?”

“좋습니다. 짱꼴라 척살이야 원래부터 하던 거고, 게임 건의사항은 제가 여러 게임을 많이 해봤으니까 어떻게 하면 더욱 재미있어질지 하는 도중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버그나 해킹은 발견하는 즉시 보고 드리죠.”

“좋았어. 그럼 같이 일해보는 건가?”

“그러죠. 근데 또 궁금한 점이 있네요.”

“또 뭐? 정말…….”

“중국 놈들의 해킹이 그렇게 심각한데도 왜 정부나 국정원은 가만히 있는 거죠? 또 사이버 범죄가 그렇게 심각하다면 왜 경찰청은 가만히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자네가 한 질문 중 가장 수준 높은 질문이군.”

임과장은 웃으며 답변했다.

“현재 계정도용 피해에 대해서는 김씨소프트에서 적극적으로 계정 삭제 등의 방법으로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고 린 OTP를 이용해 안전 체계를 구축했네.”

“파이온에서는 계속해서 해킹툴을 개발 중이에요.”

강미영의 덧붙임 설명이었다. 임과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특히 중국의 차이나 닷컴처럼 주민번호 생성이 가능한 사이트에 대해서는 외교부에서 공식적으로 폐쇄 및 항의를 건의하고 있고 우리 국정원에서도 비공식 루트를 통해 중국 정보기관과 협의 단계에 와 있네. 또 구 형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사이버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1995년 형법이 개정되어 특수한 범죄유형들에 대처하기 위한 특별법을 마련하는 등 정부에서도 나름대로 발 빠른 대처를 하고 있는 중이지.”

“하지만 현행법상 온라인상에서 주민등록 도용으로 인한 피해는 금전적 피해가 없는 경우는 거의 처벌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고 급속도로 발전해가는 IT 및 인터넷 기술에 비해서 현행법이나 정부의 행정이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우리 경찰청에서는 구 해커수사대와 사이버범죄수사대를 사이버테러 대응센터로 확대개편해서 수사요원을 70여 명 양성했고 각 경찰서에도 사이버범죄 전담부서를 운영 중이지.”

얌전히 듣고 있던 유경위도 거들고 나섰다.

하여튼 정치가 문제다. 만날 국회에서 쌈질이나 하는 정치인들, 법이나 만들 것이지 말이야. 나 같은 백수들 취직 빨리 되는 법 같은 건 없나.

“방금 계정 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방안이 떠올랐어요.”

“그래? 그게 뭔가?”

“사이트나 게임에 회원가입 할 때 핸드폰 인증을 하게 하는 거예요. 그럼 011, 016, 019, 010 같은 국내번호를 적으면 한국 사람이고 이상한 번호 적으면 외국 사람일 거 아니에요.”

“하하하하. 일단 현행법상 회원가입 시 인증시스템을 거치는 부분에 어려움이 많고 실상 그렇게 핸드폰으로 회원가입 인증절차를 거치더라도 대포폰(가입자와 소유자가 다른 폰) 등으로 얼마든지 인증할 수 있지.”

그렇구나. 실로 무서운 세상이다.

“좋습니다. 제 한 몸 불살라서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뭐든지 말해보게.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네.”

“저는 파이온 게임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타 온라인 게임과 큰 차이가 없다면 쉽게 적응하겠죠. 하지만 처음 레벨부터 시작한다면 짱꼴라들을 색출하기는커녕 짱꼴라들한테 PK 당하기가 더 쉽겠죠. 그러니 우선 김씨소프트에서 저를 고수 레벨로 만들어주셔야겠습니다. 아이템도 중급 이상으로 주시고요.”

“그건 염려 마십시오.”

강미영 팀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에이전트 3명에게는 최고수의 레벨 캐릭터를 제공해드릴 예정이고 아이템도 최고급으로 장착해드릴 계획입니다.”

“또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셋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가 김씨소프트를 도와서 성과를 올리고 회사와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취직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하! 아까 내가 서두에 말했잖아. 이미 김씨소프트와 이야기가 끝났네. 세 명의 요원들이 성과를 올린다면 그에 따른 합당한 성과금과 급여를 활동기간 중 지급할 예정이네. 그리고 국부 유출 및 국민 게임에서 세계인의 게임으로 성장해가는 파이온을 해커들로부터 지켜낸다면 자네가 원하는 직종으로의 취직을 알선해주겠네. 원한다면 우리 국정원이나 경찰청에서 일하는 것도 알아봐 주겠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제게도 서광이 열리는군요. 이 기쁨을 누구와 함께해야 하나.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 안에서 보안상 핸드폰을 꺼두라는 임과장의 지시 때문에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정말 유비가 제갈공명과 조자룡을 얻었을 때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이 기쁨을 나는 형언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긴, 우리가 자네에게 부탁하는 건데. 암튼 이렇게 임의 동행시켜서 정말 미안하네. 그리고 오늘 일에 대해서는 자네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일절 함구해야 하네. 여기 보안 서약 각서가 있으니 작성하게. 그리고 취업 관련해서는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가 각서를 작성해주지. 어떤가? 원한다면 서면 약속을 해줄까?”

거기까진 생각도 못했는데 각서까지 써준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그러면 너무 속 보이는 건 아닐까? 신용사횐데 말이야. 그래, 그냥 임과장의 인품을 믿자. 백수 주제에 그런 걸 요구하기도 좀 뭐하고…….

“예, 확인서 형식으로 하나 써주세요. 죄송합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놈이다.

“아니야, 뭐가 미안한가. 당연한 거지. 그래, 내 확인서를 하나 써주지. 여기 보안각서에 기재사항 적고 서명란에 서명하게.”

나는 보안준수각서에 서명을 했다. 임과장은 부하직원을 시켜 워드로 문서를 하나 만들어줬다. 내용은 이번 일과 관련하여 성과를 내고 국익에 도움이 될 경우 취업을 알선해주겠다는 일종의 각서 같은 것이었다.

“자, 그럼 부모님께는 우리 국정원에서 잘 말씀드릴 테니까 자네는 강팀장, 유경위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장소를 옮겨 이야기하도록 하세. 참, 국정원에서 왜 잡아갔냐고 친구들이 물으면 온라인 게임 불법 해킹 및 아이템 현금 거래 때문이라고 대충 둘러대도록 하게. 그럼 나중에 또 보자구. 자, 여기 내 명함이네. 연락할 일 있으면 이리로 연락하도록 해.”

주원 엔지니어링 전무 임승수

Office: 062-000-0000

Mobile: 010-0000-0000

이게 뭐야? 국정원 과장이라면서 웬 주원 엔지니어링 전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명함에 직책과 회사가 달라서 그러나? 우리 국정원 직원들은 대부분 그렇게 된 명함을 가지고 있네. 심지어는 직업이 두세 개씩 되는 요원들도 있어. 이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그럼 나는 이만.”

“안녕히 가십쇼, 과장님.”

“그래, 유경위. 수고하라고. 강미영 씨, 또 연락하자구.”

“예, 조심히 가세요.”

임과장은 각서 한 장을 남긴 채 보안준수각서를 챙겨 수행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수혁 군, 일단 우리 사이버테러 대응센터와는 추후 협의할 예정이니 강미영 팀장을 따라가도록 해. 그리고 당구장 권사장한테 전해. 한 번만 더 당구장에서 하우스 열면 가만 안 둔다고.”

“예.”

젠장, 저 녀석은 처음부터 재수가 없더니 끝까지 밥맛이구나. 쩝.

“가시죠, 수혁 씨.”

수혁 씨? 나의 여신님이 수혁 씨라고 부르다니. 대학 2학년 때 후배들이 수혁 오빠라고 불러줬을 때만큼이나 설레는구나. 우리는 다시 눈에 안대를 착용한 후 국정원의 비밀 안가를 빠져나왔다. 승용차는 농가로 위장한 국정원의 비밀 안가를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강미영 씨, 어디에 내려드릴까요?”

“그랜드 호텔에 세워주세요. 박수혁 씨와 마저 이야기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야겠어요.”

“그러죠. 그럼 이야기 잘 나누시고 나중에 꼭 좋은 일로 만나도록 합시다.”

그랜드 호텔? 어랍쇼? 이 여자 엄청 적극적으로 나오는 거 아냐? 그랜드 호텔이면 무궁화급 호텔, 물침대라면 더 좋겠는데. 요즘 호텔에는 전신 마사지기도 있다던데… 나는 또 혼자 되지도 않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자, 여기가 그랜드 호텔입니다.”

“유경위님, 고마워요. 그럼 또 뵙도록 하죠. 운전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요, 잘 가세요.”

나는 그냥 건성으로 인사를 꾸벅 했다.

해가 질 무렵이라 주위는 약간 어두워지고 있었다. 초저녁 호텔 입구에 서 있는 두 남녀를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여하튼 나는 미녀와 함께 호텔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싫지는 않았다.

“박수혁 씨, 무슨 생각 하세요? 절 따라오시겠어요?”

“아, 예.”

우리는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상상은 결국 상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녀는 룸이 아닌 1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젠장.’

그녀는 우아하게 자리에 앉은 후 몇 가지 서류들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뭐예요?”

“서울 올라오실 때 준비해 올 것들을 적어뒀습니다. 신변 정리를 끝내고 3일 후 영등포역으로 오세요. 제가 마중 나와 있도록 하겠습니다. 박수혁 씨를 비롯한 3명의 에이전트들은 회사의 별도 룸에서 미션을 수행하게 될 겁니다.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 정도는 챙겨 오시길 바라구요. 아마 댁에는 국정원 측에서 취업이 돼서 올라가는 걸로 처리해줄 겁니다. 더 궁금한 점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뭐 아까 다 이야기 들었으니까요. 아… 하나 있네요.”

그녀는 나를 쳐다봤다.

“혹시… 남자친구 있으세요?”

피식.

그녀는 실없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지금까지 몰랐는데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가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럼 더 궁금하신 게 없는 걸로 알고 저도 이만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여기 제 명함이니까 출발하는 날 연락 주세요. 그럼 전 이만.”

역시 남자친구가 있겠지. 아까의 그 웃음은 남자친구가 있다는 의미의 웃음이었어. 그래, 세상이 그런 거지. 꽃은 가만히 있으려 해도 벌들이 내버려두지 않고, 나무는 조용하려고 해도 바람이 가만두지 않는 것.

“그래요, 그럼 며칠 후 서울에서 봅시다. 조심해서 가세요.”

나는 호텔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현듯 핸드폰을 꺼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집에서 엄청 걱정 하고 있을 텐데. 핸드폰을 켜자 문자메시지가 5개나 와 있었다.

[수혁아, 어떻게 됐냐? 궁금해서 전화했더니 전화기 꺼져 있구나. 집에는 잘 말씀 드렸다.]

[수혁아, 왜 전화기가 꺼져 있니?]

[수혁아, 지금 어디니? 호성이 말로는 어디 연행된 거라며. 엄마 걱정돼서 죽을 지경이다.]

[수혁아, 아빠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별일 아닐 거야.]

[수혁아, 아빠한테 연락 왔다. 아빠 친구 분하고 아빠 친구 분의 아는 사람하고 만났다는구나. 별일 아니라니 안심해라.]

그날 나는 집에 들어가서 엄청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임과장이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지 아버지는 나를 엄청 대견스럽게 바라보셨고 어머니는 진수성찬을 준비해두고 나를 반겼다.

왠지 뿌듯함이 느껴졌다.

“캐나다에 있는 동생한테도 연락했다. 너 취직됐다고. 은주가 정말 잘됐다며 좋아하더구나. 세상에 이런 경사가 어디 있냐? 엄마는 기분이 좋아서 친척들에게도 다 연락했다.”

“하여튼 엄마도.”

“수혁아, 이 엄마 오늘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네가 몇 년간 얼마나 우리들 속을 썩였니?”

“엄마, 앞으로도 울 일 많으실 거예요. 음하하하.”

나는 최근 몇 년간 처음으로 집에서 목에 힘을 줬다.

며칠간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아버지께서 이럴 때는 친구들에게 술도 사고 그래야 한다며 거금을 주셨다. 3일이라는 시간은 신변정리를 하기에는 모자란 기간이었다.

중국집, 당구장 사장과 마지막 큰 게임을 펼쳐 보이고 싶었으나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들처럼 편한 사람이 아니다.

조국과 김씨소프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흐흐흐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