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레아21 - 완결
엘프들이 술렁였다. 아까와는 다른 인물이 아니냐며 믿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저, 전하께서 살아계셨어!”
여왕벌 기사단과 함께 있던 랜턴은 소리치며 기뻐했다.
“신화 같은 무용담이 하나 더 늘어나시겠군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겠습니다!”
그가 부축해주고 있는 갈테르도 존경 어린 표정으로 버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전하…… 허무하게 떠날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에스텔라와 릴리도 멍하니 버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릴리, 그러니까 아까 그 전하는 가짜란거지?”
“응.”
“그럼 우린 진짜 전하를 목격하고 있는거네?”
“응.”
“아……”
“왜 ‘아……’ 그래?”
“전하를 직접 보는게 신기해서.”
“가사. 또 수정해야 돼.”
“윽……”
일대에 있는 모든 자들이 버나드를 주시하고 있었으나 버나드는 그들의 관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오직 한 여자만을 바라보며 그녀가 풍기는 달콤함에 한창 빠져있었다.
‘오오, 레아…… 만약 왕국이냐 레아냐 골라야 한다면 나는 너를 고르겠어.’
버나드는 많은 하객들의 축복속에서 새하얀 신부드레스를 입은 레아와 결혼식을 올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와 똑같이 레아도 한창 상상속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괴력이 생겨나 자신을 가둔 물방울을 단숨에 찢고 버나드에게 달려가서 안기는 상상.
‘근데 투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을 모르겠어. 가만히 서서 날 쳐다보기만 하니 왠지 무뚝뚝한 느낌도 들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모르겠어.’
버나드를 향해 온갖 예쁜척을 다하던 레아는 결국 애간장이 타 그에게 힘껏 소리칠려고 했다.
“버, 버나드 님! 투, 투……!”
하지만 그때 케파이스테와 살라두일이 하나로 합쳐진 괴물, 즉 케살 괴물이 버나드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는 중이었다.
“분명히 죽였는데 어떻게 된거지?”
“큭큭, 보면 모르겠나? 네놈이 속은거야. 조롱당한거라고.”
“저 빌어먹을 인간 자식이 감히 날 속여!”
분노한 케살 괴물이 쿵쿵 땅을 울려대며 넋이 나가 있는 버나드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거대한 주먹을 들어올려 산을 파괴할 정도의 어마무시한 힘을 담아 힘껏 휘둘렀다.
머리가 반드시 박살날거라고 직감했을때,
텅!
버나드가 차고 있던 칼집에서 분해되어 날아온 마름모꼴 조각들이 군집을 이루며 케살 괴물의 주먹을 가뿐히 막았다.
“이건 뭐야!?”
케살 괴물이 잠시 당황하고 있을때 방벽을 형성한 마름모꼴 조각들 뒤에서 버나드가 걸어나왔다.
“엘프와 마족의 콜라보인가. 양산해서 전쟁 병기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태평스럽게 턱을 어루만지며 말하는 그 생뚱맞은 발언에 괴물의 두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닥쳐!”
괴물은 양손을 깍지끼며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쏜살같이 버나드를 향해 내려쳤다.
깍지를 끼고 내려치는 동작이 매우 빨라서,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버나드는 그보다 웃도는 속도로 가볍게 괴물의 두 팔을 잘라버렸다.
허공으로 날아간 절단된 두 팔에 불이 붙더니 이내 재가 되어 공기중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케살 괴물은 재차 크게 당황했다.
쉽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인간이 뜻밖에도 놀라운 힘을 발휘하고 있다.
두 팔을 잃은 케살 괴물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인간이 어찌 이런 힘을……!”
“힘?”
버나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교수님처럼 차분히 말했다.
“인간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영걸은, 사람 대 사람간의 전쟁 영웅을 뜻하는게 아니라 포악한 괴물들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자를 일컫는 것이다.”
말하면서 칼을 들어올렸다.
“즉, 사람을 상대할때보다 마물을 상대할때야말로 영걸의 능력은 눈부시게 빛이나지. 방금 날아간 두 팔에 붙은 영겁의 화염 또한 같은 이치다. 마물을 상대할때만 내게 특별히 주어지는 영걸의 힘이지. 너희가 불운한건, 세계 최강의 갑옷 이드리스를 가진 영걸이며 비기인 세븐로얄까지 익힌 우르프스 왕국의 왕 버나드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나지막이 덧붙였다.
“현재 나, 버나드왕은 전성기를 구가중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말했다.
“설령 엘프와 마족이 콜라보를 이룬 해괴한 마물이라 할지라도 날 상대하긴 벅찰 것이다.”
버나드는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두 손으로 칼을 쥐고 상체를 숙이며 괴물의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괴물의 심장을 찔렀다.
“크아아아아아악!”
마검에 찔린 가슴에서부터 퍼져나간 화염이 케살 괴물의 전신을 눈 깜짝할 사이에 집어삼켰다.
버나드는 빠르게 칼을 뽑아들며 뒤로 물러났고 푸르른 화염에 휩싸인 괴물은 미친듯이 날뛰며 고통과 두려움으로 울부짖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대던 케살 괴물은 까맣게 탄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며 완전히 소멸했다.
괴물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야브라스 일족의 보물 루베니언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 전하께서 해치우셨어!”
랜턴이 감격한 눈으로 버나드를 바라봤다.
그는 한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우리가 승리했다!”
환희에 찬 외침에 인간과 엘프 가릴 것 없이 종족을 뛰어넘어 다 같이 함성을 내질렀다.
“전하께서 또 멋진 이야기를 쓰셨다!”
“인간의 왕이 복수해줬어!”
“놈들이 죽었다!”
환호성으로 사방이 들썩이는 가운데 디가티르가 한 엘프의 부축을 받으며 버나드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버나드왕인가요?”
버나드는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날개 투구를 벗었다.
귀밑까지 자란 금발이 찰랑 거리며 바람에 휘날렸다.
그 모습을 보고 물방울속에 갇혀있던 레아는 눈을 크게 뜨며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와…… 머리 길이만 다르고 꿈에서 봤던 것과 똑같아!’
버나드는 당당히 디가티르를 마주보았다.
“내가 우르프스 왕국의 왕 버나드입니다.”
디가티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뒤 말했다.
“우선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할 일을 했을뿐입니다.”
버나드는 말을 마치며 허공에 떠있는 레아를 올려다봤다.
그의 두 눈빛에 레아를 향한 애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를 잠시 눈여겨 보던 디가티르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레아는 우리 헤이라닌 일족과 혼인을 올려야 합니다. 두 일족이 그렇게 약속했지요.”
물방울속에서 밝게 손을 흔드는 레아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던 버나드가 그녀를 돌아봤다.
“레아는 저와 함께 갑니다.”
“그건 안됩니다. 일족간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약속을 어기는 일족은 모든 엘프들에게 지탄과 외면을 받게 될 겁니다.”
진지하게 대꾸한 디가티르는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그녀는 즉시 레아를 올려다보며 선언했다.
“레아! 잘 들으세요! 우리 헤이라닌 일족은 본래 야브라스족과 연을 맺으려 했으나 당신의 일족을 이끌던 살라두일이 마족에 더럽혀지고 타락한 자였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헤이라닌 일족을 대표해서 온 나를 공격하며 몸에 상처까지 입혔죠! 이번 일을 통해 우리 헤이라닌 일족은 더 이상 야브라스족과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두 일족간 맺었던 혼약을 파기하겠습니다!”
디가티르의 말이 끝나는 순간 레아는 합장을 하며 크게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디가티르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버나드를 바라봤다.
“결혼식때 우리 헤이라닌 일족도 당신의 왕궁으로 초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버나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입을 열었다.
“참석해주신다면 더 없이 기쁠 것입니다. 최고로 좋은 숙소를 마련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가끔 육식도 즐깁니다.”
“네? 아, 네. 각종 산해진미를 잔뜩 준비하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말씀이군요. 그럼 이만.”
뒤돌아서려던 그녀가 다시 돌아섰다.
“아참, 잊고 있었네요.”
디가티르는 완드를 쥐고 레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조리자 물방울이 두둥실 움직이며 버나드에게 날아왔다.
곧이어 버나드의 머리위에서 멈춰선 물방울이 퍽하고 터지며 레아가 밑으로 떨어졌다.
“꺄악!”
버나드는 잽싸게 그녀를 두 팔로 받아냈다.
“선물입니다.”
디가티르는 그런 말을 남기고 헤이라닌족 엘프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휴……”
버나드의 목을 꼬옥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레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버나드의 얼굴을 보고는 급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버나드 역시 레아를 보고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황급히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바,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뇨. 벼, 별말씀을……”
막상 마주 보고 서자 두 사람 사이에 서먹서먹한 기운이 감돌았다.
양쪽 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린듯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색한 분위기를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빨리 말을 해! 어서 아무 말이라도 하라고!’
버나드는 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레아 또한 속으로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말을 건네면 좋을까? 미치겠어!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버나드는 괜히 헛기침만 연발했다.
“크흠! 크흠! 크흐흠!”
레아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인채 몸을 베베 꼬기만했다.
“아, 음……”
그렇게 두 사람이 말을 할 듯 말 듯 오물거리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버나드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즐거운 짝짓기를 원한다면 뻔뻔해져라!
-여성을 기쁘게 만드는 대화법
책 구절중에 하나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그렇지!”
그가 불쑥 소리치자 레아가 움찔 놀랐다.
“네!? 왜, 왜요?”
“레, 레아 씨! 아, 아니 레아!”
버나드는 침을 꿀꺽 삼킨뒤 쑥스러운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저기 괜찮으면…… 내일 아침밥 차려줄테니 먹고 갈래?”
“네……?”
레아는 그 자리서 굳은듯 눈만 깜빡이다가, 금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버나드를 향해 밝게 웃어보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먹고 갈게요!”
그녀는 몸을 베베꼬며 수줍게 말했다.
“오늘 저녁엔 필히 버나드님의 숙소에서 묵어야겠네요. 아침 먹고 갈려면……”
먼 발치에서 두 사람을 숨 죽여 지켜보고 있던 에스텔라가 환하게 웃으며 릴리를 돌아봤다.
“릴리, 우리가 나설 차례야.”
“응!”
에스텔라와 릴리는 즉시 버나드와 레아가 있는 곳으로 뛰어나갔다.
곧 릴리는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에스텔라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당신은 들어보셨나요?
긴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늑대와 엘프의 사랑얘기
라라 라라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