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레아20
버나드는 힐그리테가 건네주는 날개 투구를 쓰고 한 손에 마검 피의 숙청을 거머쥐었다.
떠나기전 뒤를 돌아보며 힐그리테를 쳐다봤다.
“네 인형은 훌륭했다.”
그러자 힐그리테가 예를 다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저를 아껴주셨기에 좋은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모습이 은근히 성욕을 일으켰다.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묘하게 색기가 흘러넘치는 여자다.
같은 마녀로서, 젊은 시절 모습으로 돌아갔을때의 멜라니아는 외향적이고 건강한 섹시미가 느껴졌다면 이 여자, 힐그리테란 마녀는 음침하고 조용한 성격에 무표정으로 있으면 우울해보이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생기없고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얼굴로 소리없이 히죽댈때마다 묘한 색기가 흘렀다.
“나와 아주 똑같이 생겼더군. 걸음걸이부터 체형까지 정말 완벽했어.”
재주도 멜라니아와 달라서, 멜라니아가 약학이나 연금술에 소질이 있었다면 힐그리테는 강령술이나 흑마법쪽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살라두일에게 살해당한 가짜 버나드는 그녀가 시체를 반죽처럼 뒤섞어 빚어낸 언데드였다.
“침대 위에서 전하의 존함을 부르짖으며 신음했던 결과물이지요. 신체 구석구석에 나있는 점까지 똑같답니다.”
“……”
버나드는 혀로 입술을 핥아보이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점잖게 입을 열었다.
“궁중마녀는 많은 비밀을 주인과 공유해야한다. 서로간에 변함없는 신뢰를 갖기 위해선 내밀한 관계유지는 필수지.”
그러고 나서 뒤돌아 걸어나가자 주위를 막고 있던 병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인간군과 엘프군이 마주보는 공터에서는 살라두일과 케파이스테가 아직도 시끄러웠다.
추악한 과거가 드러난 살라두일은 전부 거짓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케파이스테를 쳐죽일 생각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박살내주마!”
“박살나는건 너겠지! 킥킥.”
케파이스테는 그를 약올리며 피해다녔고 살라두일은 소리를 질러대면서 계속 덤벼들었다.
그러다 돌연 케파이스테의 분위기가 바꼈다.
그는 사악한 눈빛을 발하며 살라두일이 지근거리에 이르길 기다렸다가, 그가 덮쳐오는 순간 입이 쭈욱 크게 늘어나더니 자신보다 몇배나 큰 살라두일의 몸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꿀꺽!
놀란 엘프들이 멍하니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머, 먹혔어!”
“결국 저놈이 이긴건가!?”
꺼억.
트림을 뱉은 케파이스테의 몸이 징그럽게 들쭉날쭉하더니 급격하게 부풀어올랐다.
“킥킥, 이왕 이렇게된 마당에 여길 다 때려부수고 떠나야겠다.”
그는 이내 살라두일과 똑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마물로 진화했다.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는 보라색 피부에 이어 이마에 두 뿔이난 마족!
꼬마 악마에서 성체로 변한 케파이스테가 씨익 웃었다.
“장난감으로서 날 만족시킬때까지 한놈도 살아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
디가티르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모두 마귀를 공격하세요!”
그녀가 보석이 박힌 완드를 들고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케파이스테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엘프년들은 항상 상큼하지.”
앞으로 손을 내밀자 검지손톱이 쭉 늘어났다.
길게 늘어난 손톱은 화살처럼 빠르게 완드를 쥔 디가티르의 팔을 꿰뚫었다.
푹!
“큭!”
디가티르는 완드를 놓치며 다친 팔을 감쌌고, 길게 늘어났던 케파이스테의 손톱은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갔다.
“죽이지 않은걸 감사히 여겨라.”
케파이스테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쿡쿡 웃었다.
“내 성으로 데려가서 발가벗긴 채로 천장에 매달아 채찍으로 후려칠거야. 거기서 잠시 대기하고 있도록.”
어이없이 살라두일을 잃은 야브라스족이 머뭇거리는 가운데, 헤이라닌족 엘프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케파이스테의 주위를 에워쌌다.
“우리가 시간을 끌테니 어서 디가티르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거라!”
“뭐? 시간을 끌어?”
케파이스테는 주위를 둘러보며 엘프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크르르. 너희는 5초면 충분해.”
그는 자신이 공언한대로, 달려드는 엘프들을 하나씩 손쉽게 처리했다.
첫 번째로 덤빈 엘프의 팔을 붙잡아 팔을 뽑은뒤 던져버렸고, 두 번째로 덤빈 엘프에게선 자신을 향해 내지른 창을 빼앗은뒤 심장에 창을 박아주었다.
세 번째 엘프는 머리를 잡고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네 번째 엘프를 상대하는 사이 세 번째 엘프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머리를 박살내서 죽여버렸다.
잠시 싸움을 멈췄던 네 번째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상대는 겁을 집어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가, 강해……! 제길!”
케파이스테는 관대한 신처럼 자비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항하지 마라. 너희는 어차피 죽을테니까.”
그때였다.
돌연 케파이스테는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끄윽! 이게 뭐지!?”
그는 순간 새로 얻은 육체에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가 대응을 하기도 전에 곧바로 찾아왔다.
케파이스테의 머리가 왼쪽 어깨로 천천히 이동을 했다.
오른쪽 어깨에서는 무언가가 느릿하게, 볼록하니 튀어나오고 있었다.
“끄아아악.”
괴로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또 하나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아……!”
새로 자라난 머리는 소름끼칠 정도의 기쁨이 흘러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후! 맑은 공기로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새로 자라난 머리는 다름아닌 살라두일의 얼굴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대, 대체 저게 뭐야!”
“끔찍한 괴물이다!”
당황한 것은 케파이스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옆을 돌아보며 화를 냈다.
“어째서 살아있는 것이냐!”
“크큭…… 왜 그럴까. 이유는 나도 모른다.”
“설마, 네놈의 태생 자체가 저주받은 돌연변이여서 인가!”
케파이스테는 다른 개체를 삼키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살라두일이 가진 돌연변이의 특성이 사라지지 않고 발현되는 바람에 흡수와 변화의 과정에서 변수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참 재수가 없었던건 두 개의 머리가 각각 다른 이성과 지능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몸이 하나란게 문제다.
팔다리가 따로 움직이며 혼란이 찾아왔다.
“케파이스테, 내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네 머리를 뽑아주마.”
“이 괘씸한 놈이! 이 몸의 주인은 나다! 저리 꺼져!”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인간군쪽에서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열과 오를 맞춰 서 있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버나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깄군……”
버나드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레아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멀리서 봤지만, 그녀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버나드는 심장이 떨려왔다.
살아있는 그녀와 마주하는게 얼마만인가……!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함이 가슴을 치고 올라와 목이 메었다.
물방울속에 갇힌 그녀는 반대쪽에 있는 케파이스테와 살라두일, 즉 케살 커플을 보느라 이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버나드는 차라리 그녀가 그렇게 해주는 편이 고마웠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본다면 숨이 막혀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후우…… 가자. 가서 레아를 데려오자.”
잠시 멈춰서서 마음을 다 잡고 있는 와중에 란과 로잘리나가 다가왔다.
다소 긴장한 기색의 로잘리나가 차렷자세로 보고했다.
“조금전 아르키나 씨가 다녀갔습니다. 저쪽에 보이는 머리 두 개 달린 괴물 때문에 이 사단이 났다네요. 괴물만 처리해주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맡겨달랍니다.”
“알겠다.”
옆에 있던 란이 살며시 버나드의 손을 붙잡았다.
“어서 가. 당신이 그토록 바라왔던 레아가 저기 있어.”
“응.”
란은 그의 손을 꼬옥 쥐고 나서 곁에서 멀어졌다.
버나드는 곧장 발걸음을 내딛으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이윽고 둥둥 떠다니는 레아의 밑을 통과할즈음,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레아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밑을 내려다봤다.
버나드는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레아가 눈을 휘둥그레떴다.
“아까 죽었던 버나드님과 똑같은 갑옷……! 설마 진짜 버나드님?!”
실라르의 위에 탄 채 물방울 주변에 머물러 있던 아르키나도 버나드를 발견하고는 레아에게 속삭였다.
“그가 맞아. 저 사람이 진짜야.”
“저, 정말이니!? 이번엔 진짜야?”
레아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자세를 고쳤다.
봉긋 솟은 가슴을 도드라지게 내밀고 긴 머리를 귀뒤로 쓸어넘기며 예쁜척 눈을 깜빡깜빡.
비좁은 물방울속에서 나름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그녀가 해맑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날개 투구를 쓰고 있는 버나드의 입가에 자동으로 헤벌쭉한 미소가 그려졌다.
‘예쁘다……’
버나드는 그새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을 처리해야한다는 목적을 잊고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는 레아를 홀린듯 바라보았다.
레아 역시 똑같았다.
그동안 간절히 소망했던 만남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버나드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얼굴을 보고 싶어. 투구를 벗어달라고 할까?’
이처럼 두 사람이 모든걸 잊고 둘만의 세계에 푹 빠져있을때, 엘프들은 뒤늦게 버나드가 다가와있음을 눈치챘다.
“어? 저 자는 인간의 왕 아냐? 아까 죽지 않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