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레아19
“어쩌지?”
에스텔라가 멀뚱히 눈을 껌뻑거렸다.
머릿속에 저장해놨던 ‘엘프와 인간왕의 사랑 노래’ 가사가 싹 날아가버렸다.
그녀는 옆에 서 있는 릴리를 내려다봤다.
“가사 바꿔야겠는데?”
“응.”
릴리는 조각난 살점들과 핏물이 흘러넘치는 현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꾸자.”
“우리 이름도 빼야겠지?”
“응.”
“우리 이미지는 슬픈 노래에 안어울리니까.”
“응.”
“야한 것도 빼자.”
“응.”
“슬픈 노래에 야한건 들어갈 수가 없어. 게다가 연인이 죽어서 떡칠 사람이 없잖아.”
“응.”
“제목은 뭘로 바꿀까?”
“음……”
릴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여엘프가 고난을 극복해가며 힘겹게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갔더니 둘이 미처 상봉 하기도 전에 인간남이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노래.”
***
물방울속에 갇혀 있던 레아는 주먹으로 투명한 벽을 치며 오열하고 있었다.
“전하! 전하! 전하……! 흑흑……!”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된 그녀에게 갑자기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바로 아르키나였다.
아르키나는 독수리를 타고 바람처럼 날아와 허공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물방울속을 들여다보았다.
“언니!”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던 레아는 숨결이 닿을듯한 거리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르키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르키나……?”
“레아, 레아, 보고 싶었다! 꼬꼬댁!”
실라르의 목소리다.
레아는 밑을 내려다보고 아르키나가 실라르의 등위에 타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실라르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하고는 다시 아르키나를 바라봤다.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돌아가셨어……!”
“알아, 봤어.”
“난 이제 어떡해야 하니……?”
“희망을 잃지마. 일단 귀 좀.”
“귀?”
“내쪽으로 귀를 대봐.”
아르키나는 투명한 물방울 벽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귀울 기울인 레아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소근소근.
레아가 눈을 번쩍 떴다.
“저, 정말이니?”
그녀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르키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인간의 왕에게 전하라고 부르지마.”
“왜……? 우리의 왕이 아니라서 그래?”
“아니, 언니는 그를 버나드라고 불러도 돼.”
“반말이잖아. 전하께서 기분 나빠하실거야.”
아르키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을걸?”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부를 수 있는건 언니의 특권이니까.”
아르키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살라두일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너희 왕처럼 되고 싶거든 얼마든지 덤벼봐라 인간놈들아!”
버나드가 왕도에서부터 직접 데리고 온 부대와 현재 땅의 주인인 영주의 부대가 뒤섞여 총 수백명에 이르는 인간군은 기세가 한풀 꺾인 눈치였다.
다들 안색이 파랗게 질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와중에 디가티르는 단단히 화가나 있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살라두일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호통을 쳤다.
“지금부터 우리 헤이라닌 족은 이 일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당신들 야브라스족이 홀로 감당해내야할 시련입니다!”
살라두일은 그새 이성이 되돌아온듯 점잖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여기 있는 모든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겠습니다. 오래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거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목격자가 없다면 엘프와 인간이 싸울일도 없겠지요. 또한 레아도 무사히 당신들에게 시집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디가티르는 싸늘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살라두일. 난 지금껏 당신이란 사람을 잘못보고 있었군요. 당신은 그 끔찍한 겉모습처럼 속도 시커멓기 그지 없다는걸 오늘 절실히 느꼈습니다. 따라서 우리 헤이라닌족과 야브라스족의 혼담 얘기는 이 시간부로 파기하겠습니다.”
“놀라운 얘기군요. 제게는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살라두일은 그녀에게 실망했다는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 노망난 계집도 죽여야겠어.’
살라두일은 자신의 힘을 믿었다.
본모습으로 변하면서 전보다 몇 배는 강해졌다.
그리고 버나드를 살해한 이후 온몸에서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힘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넘쳐나며 더욱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분노를 기반으로 한, 살육을 벌일때마다 한층 더 강해지는 자신의 무한한 힘이 있는 한, 인간군과 엘프군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는 일쯤은 어렵지 않다고 예상했다.
“당신은 겁쟁이입니다 디가티르. 겁쟁이는 우리에게 필요없어요.”
“뭐라고요?”
디가티르가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치려는 찰나 갑자기 멀리서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킥킥킥! 인간의 왕이 고작 저것 밖에 안되다니! 킥킥!”
검은여우가 두 발로 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곰인형을 끌어안고 있던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푸?”
검은여우는 자신보다 덩치가 몇배나 큰 살라두일 앞에 다다르자 이마에 두 뿔이 솟아난 꼬마 악마의 모습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해버렸다.
그러곤 검은손톱이 길게 자란 손가락으로 살라두일을 가리켰다.
“난 이 새끼가 이기는게 싫어.”
살라두일은 눈을 껌뻑껌뻑하며 무엇인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돌연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케파이스테!”
“그래 이 빌어먹을 놈아. 이 몸이 바로 케파이스테 님이시다!”
꼬마 악마는 짓궂은 장난꾸러기처럼 낄낄 웃어대며 폴짝폴짝 뛰었다.
“니놈이 뿌린 가루 때문에 저주를 받아 이 모양이 됐지! 그래서 열이 받아!”
“야비한 사기꾼 자식!”
살라두일은 다짜고짜 케파이스테에게 달려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케파이스테는 가뿐히 피하며 금세 디가티르의 주변에서 총총 뛰어다녔다.
“어이, 꽉 막히게 생긴 엘프년아. 내가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당신은 마족이군요.”
디가티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무슨 말이 하고픈 거죠?”
“아주 재밌는 이야기야. 난 사실 지금까지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어. 얌전히 지켜보다 얌전히 돌아갈려고 했지. 방관자처럼.”
그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을 향해 씩씩 대는 살라두일을 가리켰다.
“저놈이 인간들한테 당하는 것만 보고 갈 생각이었다 이거야.”
이어 말했다.
“근데 인간의 왕이란게 병신처럼 당해버릴줄 누가 알았겠어? 그리고 저 쫄아있는 인간 놈들의 면상 좀 봐. 저래갖고 이 새끼를 죽일 수나 있겠어? 내가 나서지 않을려 해도 나서지 않을 수 있어야 말이지. 자칫 하다가는 이 새끼 마음대로 흘러갈것 같더라고. 난 그게 너무나 배알이 꼴렸던거야.”
케파이스테는 고개를 들어 물방울속에 갇힌 레아와 독수리의 등에 타고 있는 아르키나를 올려다봤다.
“야이 먹음직스럽게 생긴 것들아! 난 너희를 알아! 왜냐하면 나와 내 부하들이 너희의 부모를 죽였거든! 킥킥!”
깜짝 놀란 레아와 아르키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떴다.
케파이스테는 이내 시선을 거두며 뒤쪽에 포진해있는 엘프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멍청한 엘프놈들아 잘 듣거라! 여기서부터가 진짜배기야! 이십년전 야브라스족 마을을 습격한 그날 우리를 도와준 놈이 하나 있었지! 과연 누구일까?”
“입닥쳐!”
살라두일이 번개처럼 접근해 재차 주먹을 휘둘러봤으나 소용없었다.
케파이스테는 바람처럼 사라지더니 어느새 릴리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다시 디가티르가 있는 곳으로 여유롭게 걸어왔다.
그는 악마의 꼬리를 흔들며 신이난듯이 떠들어댔다.
“지금 발작난것처럼 구는 저 새끼가 바로 우리를 도와준 장본인이지! 너희는 뭣도 모르고 등신같이 배신자를 섬기고 있었던거야!”
그간 숨겨져 있던 진실을 폭로한 악마는 목청을 드높이며 낄낄 웃어댔다.
동시에 엘프들 사이에선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지, 진짜야?”
“살라두일님이 설마……!?”
“사실이라면 즉시 처형감이야!”
살라두일은 다급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거짓말이다! 이 놈은 악마라고! 너희는 악마가 지껄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냐!”
“조용!”
디가티르가 웅성대는 엘프군과 살라두일을 다그쳤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듯 떠들던 목소리들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디가티르는 자신 또한 내심 놀란 것을 숨길 수 없는지 한손을 가슴에 얹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케파이스테를 응시했다.
“증거는요?”
“증거?”
케파이스테는 픽 웃더니 말했다.
“그때 빼앗은 야브라스족의 보물 루베니언을 보여주면 믿을려나? 아냐, 아냐. 이것으론 부족할지도 모르지. 아예 그때의 기억을 보여줘볼까?”
곧바로 악마의 눈에서 광채가 나더니 허공에 영상이 비쳐졌다.
움직이는 과거의 그림속에 케파이스테와 은밀히 만나는 살라두일의 모습이 보였다.
“마을의 수호석을 전부 파괴했다. 복구하려면 반나절은 걸릴거야.”
“큭큭, 수고했다.”
케파이스테는 살라두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족 군단의 수장자리는 네 차지야. 기대해.”
그 순간 숨죽인 채 영상을 지켜보고 있던 엘프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살라두일의 모습이었다.
머리부터 복장까지 과거의 살라두일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던 몇몇은 살라두일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 배신자! 동족을 팔아넘기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우린 지금까지 속고 있었어!”
한편, 엘프들간에 벌어지는 일을 잠자코 지켜보던 줄리안은 피식 웃으면서 뒤돌아섰다.
그는 느긋이 뒷짐을 지고 병사들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병사들이 밀집한 진영 한중간에 작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하는 버나드와 곁에서 그를 보필중인 마녀 힐그리테의 모습이 보였다.
“슬슬 나서실때가 된 것 같습니다.”
“벌써?”
“벌써라니요? 아직도 떨려요?”
버나드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초조한듯 입맛을 다셨다.
“레아를 만나면 먼저 무슨 말을 건네야할지 모르겠어. 마치 선보러 나온 자리 같다네.”
“이 와중에? 저쪽은 지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 그리고 저번에 제가 책 구해다 줬잖아요?”
“무슨 책? 아…… 그 책? 다 까먹었어.”
버나드는 목이 탔는지 탁자에 놓여있던 물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빈 물잔을 탁 내려놓고 그나마 나아진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힐그리테.”
“네, 전하.”
옆에 서 있던 힐그리테가 사근사근한 얼굴로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버나드가 작심한 눈빛으로 손을 내밀었다.
“투구랑 칼 주게.”
“드디어 그 분께 해줄 말이 떠오르셨습니까?”
“우선 그녀를……”
버나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아줄거야. 그리고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 생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