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레아18
엘프들에게 포위된채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버거워하던 여왕벌 기사단은 왕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리에 떨어졌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가며 더욱 힘을내기 시작했다.
반대로 엘프들은 지평선 너머에서 펄럭이는 다수의 깃발을 보고 더 이상 여왕벌 기사단을 몰아붙일 의욕이 나지 않았다.
인간의 군대와 정면으로 충돌하면 그때는 모든 인간과 전면전이 벌어진다.
엘프들은 그것을 거북스럽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기세가 한풀 꺾이며 모두 살라두일의 지시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번 일에 함께하게된 헤이라닌족의 여인 디가티르가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살라두일에게 다가왔다.
“서두르는게 좋겠습니다.”
“그럴겁니다.”
엘크 위에 탄 살라두일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평선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칼을 쥔 레아가 서 있었다.
“계속 저항한다면 거칠게 다루는 수 밖에 없다.”
초조함이 깃든 살라두일의 목소리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했다.
그러나 레아의 의지는 굳건했다.
“안갈거예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살라두일이 두 손으로 창을 꼬나 쥐는 찰나였다.
그때 그의 등뒤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
“존귀하신 레아님에게서 떨어져라. 너같은 하찮은 것들이 넘볼 분이 아니시다.”
살라두일이 뒤를 돌아본 순간 자신의 얼굴을 뒤덮은 그림자를 보고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했다.
체격이 좋은 인간 사내가 서 있었고, 그가 머리 위로 들어올린 칼 끝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이가 허공에 떠있었다.
그 광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레아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저건 설마……! 4년전 갈테르 경이 버나드님과 싸울때 사용했다던 메테오 스트라이크……?’
랜턴의 말로만 전해 들었던 것을 실제로 보게 될줄이야……!
‘전하께서는 정통으로 맞으셨지만 끄덕없으셨죠! 헤헤!’
갈테르는 살벌한 눈으로 살라두일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한때 영걸의 꿈을 쫓았던 자의 내공을 보여주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칼을 내리쳤다.
작열하는 불덩이가 살라두일에게 떨어지며 그대로 폭발했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귀청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화염이 뒤섞인 먼지구름이 살라두일이 서있던 자리에서 피어올랐다.
레아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멀리 나가떨어졌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갈테르 경!”
랜턴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레아님께서 다치시면 어쩔려고 그런 무지막지한 기술을 쓰십니까!”
“최대한 계산해서 썼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초에 그걸 왜 씁니까! 저기 우리 전하께서 오고 계시는데!”
호통을 치는 랜턴 앞에서 갈테르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그놈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통으로 싸워서는 버겁겠다는 생각에 그만…… 레아님도 위험했고……”
갑자기 먼지가 자욱한 곳에서 불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하하하. 크큭……!”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먼지가 서서히 걷히며 곧 사람 형태의 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체격은 오우거처럼 크고 근육이 울퉁불퉁 솟아있었다.
뾰족한 두 귀만이 그의 뿌리가 엘프에서 비롯된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가 이르베로아나……!?”
헤이라닌족의 디가티르는 괴물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엘프의 수치스러운 유산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니!”
‘수가 이르베로아나’ 란 수백년전 엘프족의 풍습으로 인해 아주 희박한 확률로 태어난 괴물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그들은 엘프처럼 아름답지 못했고, 또 온화한 성품을 지닌 엘프와 달리 시도때도 없이 꿈틀거리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으며, 게다가 마물을 부르는 존재들이었다.
“염려마십시오 디가티르님.”
괴물이 말했다.
“내 이성은 멀쩡합니다. 겉모습만 변했을 뿐이죠.”
“삼촌!?”
레아는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듯이 크게 놀라있었다.
“사, 삼촌인가요?”
“너 때문이야.”
살라두일은 스스로 이성이 멀쩡하다고 단언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수가 이르베로아나의 형태로 변한 그는 벌써부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스물스물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레아가 들어오자마자 벌컥 화부터 났다.
“네가 내 말만 들었어도……!”
살라두일은 입밖으로 돌출된 아래 송곳니를 번뜩이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덧붙였다.
“썩을 계집년.”
그는 이어 갈테르를 돌아봤다.
“네놈한테 아주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덕분에 내 본모습이 드러났으니까 말이다. 정체를 밝힐까 말까 밤새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편해.”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바람이 짧게 휘몰아쳤다.
위기감을 느낀 갈테르가 눈을 부릅떴다.
살라두일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다가와 갈테르의 목을 움켜쥐고 그를 번쩍 들어올렸다.
“변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난 죽었을게야. 크큭.”
“크윽! 놔, 놔라 요물!”
“너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어. 내 본모습을 본 인간들을 전부 죽여야겠다. 우선 너부터 시작하지.”
“멈추세요!”
살라두일의 살기가 하늘을 찌르는 찰나 디가티르가 다급히 소리쳤다.
“인간을 해치지 않는게 우리의 약속이었습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엘프 대 인간의 전쟁을 보고 싶은 겁니까!”
살라두일은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 그렇죠 그렇죠. 그럼 적당히 손만 보겠습니다.”
그는 즉시 그 자리에서 갈테르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다.
갈테르도 온힘을 다해 저항해보려 했으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실감하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시시하군.”
살라두일은 검을 쥘 기력도 없는 갈테르를 휙 집어던졌다.
갈테르의 몸이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다 멈췄다.
랜턴이 황급히 달려가 온몸에 멍이든 그를 부축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으…… 으윽……”
다행히 정신은 있었다.
갈테르는 힘겹게 먼 곳을 가르켰다.
모두가 난데없이 출현한 괴물에게 한 눈을 파는 사이 수백명에 달하는 왕의 군대가 이곳을 죄여오고 있었다.
열과 오를 맞춰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머리위로 포효하는 늑대가 그려진 깃발이 힘차게 펄럭거렸다.
“이, 일단 살라두일 님의 명령을 기다리자. 모두 빠져!”
여왕벌 기사단과 싸우던 엘프들은 점점 뒷걸음질을 치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살라두일의 뒤쪽으로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이윽고 왕의 군대가 진군을 멈췄을때, 인간군과 엘프군이 일정 거리를 유지한채 서로를 마주보며 대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쪽 진영에서 날개 투구를 쓴 자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고귀한 말을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레아는 단숨에 그가 버나드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만사제쳐두고 당장 그에게 달려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만났어!’
하지만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디가티르가 가만 놔두지 않았다.
레아가 인간들에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무기인 완드를 꺼내들었다.
“레아, 당신이 갈 방향은 그곳이 아닙니다.”
그녀가 마법을 부리자 완드에서 물방울 하나가 솟구치더니 곧장 레아에게 날아갔다.
물방울의 부피가 순식간에 커지며 레아를 집어삼켰다.
“뭐, 뭐지!?”
투명한 물방울속에 갇힌 레아가 인간군과 엘프군 사이에서 둥둥 떠다녔다.
“놔줘! 날 풀어주세요! 제발!”
레아는 표면을 치며 발버둥쳤으나 물방울은 부드럽고 질긴 탄력성을 자랑하며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인간쪽 진영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와 물방울을 쏴맞췄지만, 표면에 세게 부딪히고는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저쪽에서 꼼수 쓰네.”
활을 쥐고 있던 줄리안이 혀를 차고는 이내 웃었다.
그의 아내 로잘리나가 타박을 줬다.
“레아님이 맞았으면 어쩔뻔했어요?”
“안맞을줄 알고 쏜거야.”
“진짜로요?”
“진짜야. 그나저나 레아는 여전히 아름답네.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재회한 전우에 대한 반가움과 깊은 감회에 젖어있었다.
곧이어 줄리안의 시선은 선두에 서있는 버나드에게 향했다.
날개 투구를 쓰고 있는 버나드에게서 어떠한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 묵직한 침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양군이 정적속에 대치하는 가운데, 엘프군쪽에서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모두가 각 종족을 대표하는 지휘관인 버나드와 살라두일의 대화수순으로 진행되리라 예상했건만, 돌연 살라두일이 흉포한 흉성을 내지르며 폭주하고 말았다.
“버나아아아드으으으!”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짜고짜 살기를 발산하며 버나드를 향해 튀어나갔다.
“너만 아니었어도! 네놈 때문에 계획이 전부 틀어져 버렸다!”
그 엄청난 살기에, 버나드도 타협을 할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곧바로 대응했다.
자신의 군대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걸어나가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었다.
“멈추세요 살라두일!”
엘프군과 함께 있던 디가티르가 황급히 물방울을 날렸으나 질주하는 살라두일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디가티르의 마법을 가뿐히 깨부쉈고, 오로지 버나드를 죽이고 말겠다는 일념하에 그를 향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한 지점에서 충돌했다.
현재 괴물이 된 살라두일의 손은 곰발바닥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자랑하며 매우 컸다.
그 사나운 괴물의 손이 바람 소리를 내며 버나드의 머리위에서 내려쳐졌다.
버나드의 검은, 살라두일의 손바닥이 자신의 머리를 강타하기 전에 재빨리 놈의 허리를 그었으나 허사였다.
단단한 몸에 부딪힌 칼날은 허무하게 부러졌고, 살라두일의 손은 버나드의 날개두구를 박살내버린 것도 모자라 버나드의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내버렸다.
“크하하하하!”
살라두일의 웃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버나드는 일격을 당한뒤 잠시 비틀거리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갈라진 얼굴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살라두일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내면은 광기를 마구 분출하고 있었다.
‘죽여!’
살라두일의 얼굴에 잔혹한 희열이 그려졌다.
소중한 보물인 레아를 빼앗으려 했던 자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얼굴에 피를 흘리며 무릎꿇고 버티고 있는 버나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어떠한 말이나 경고도 없이, 살라두일은 빛보다 빠르게 버나드의 목을 후려쳐서 그대로 뽑아버렸다.
촤아아악!
왕의 목이 뽑혀 날아가는 광경을 보고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물방울속에 갇혀 있던 레아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크게 경악했다.
“안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줄리안은 양손을 펼쳐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저런.”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며 모두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살라두일은 목이 없는 버나드의 사지를 갈가리 찢으며 즐겁게 소리쳤다.
“나도 4년전에 그 자리에 있었지! 네놈의 비밀을 안단 말이다! 팔을 잃으면 입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나와 하얀 고치속에 들어가더군!”
그는 시신을 갈기갈기 분쇄한 것도 모자라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버나드의 머리쪽으로 걸어갔다.
“자, 질문! 네놈의 부활을 막으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그가 스스로 답했다.
“주둥이를 없애면 그만이지!”
콱!
버나드의 머리를 밟은뒤 발로 짓이겼다.
두개골이 우두둑 부서지고 살들은 반죽처럼 뭉개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