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6화 〉레아17 (196/200)



〈 196화 〉레아17

여왕벌 기사단은 곳곳에 조력자들을 두고 있었다.
덕분에 셋이서 여행할때처럼 불편하게 야영을 하지 않아도 됐다.
거쳐가는 마을마다 조력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항상 서른 세 명이나 되는 레아 일행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다.

왕도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된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레아 일행은 붉은 흙으로 지어진 마을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날밤 랜턴과 갈테르는 버나드와 관련된 일화들을 늘어놓았다.
버나드가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버나드와 레아가 함께 있었을때  사람의 모습은 어땠는지, 랜턴과 갈테르는 지치지도 않고 즐겁게 떠들었다.

“전하께서 손에 들고 계시는 붉은검은 가히 명검중의 명검입니다. 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 검을 보는 순간……”

얼마전 들었던 멜라니아의 이야기에 자세히 살이 더해지며, 타인의 입을 통해 버나드를 알아갈수록 레아는 흥미있고 재밌었지만 그와 비례해서 그녀의 마음 또한 더욱 애가탔다.

‘빨리 만나고 싶어.’

일행들과 함께한 식사자리는 에스텔라와 릴리의 조촐한 공연으로 마무리되며 기분 좋게 끝났으나 레아는 그날밤 잠을 이룰  없었고 밤새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나왔다.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녀는 견디기가 힘든 나머지 외롭고 허전한 감정을 크게 느꼈다.
평소에는 외롭다는 감정을 일절 겪어본적이 없는 그녀였으나 사랑이란 눈 먼 감정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외로움이란 것과 쓸쓸함 그리고 기다림의 고통을 절실히 가르쳐주었다.

그러한 감정 때문인지 다음날의 레아는 일행의 이동속도를 보채듯 빨리 달리게 하다가, 들판을 달리다 숲이 나오면 홀로 울창한 나무 위로 뛰어올라가 뒤따라오는 일행보다 한참을 앞서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말에서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 나무와 나무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나무가 없으면 말을 타고 달렸다.
각각 랜턴과 갈테르의 뒤에 타고 있던 에스텔라와 릴리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말위에서 엉덩이가 아프다고 불평할 정도였고, 며칠전 말타는 법을 순식간에 익힌 레아는 말을 타는게 너무나 능숙해 때때로 일행들이 휴식을 취할땐 그녀 혼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 추격이 없는지 꼼꼼이 살피는 여유까지 보였다.

‘아르키나는 몰라도 삼촌은 반드시 쫓아올거야.’

레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식으로 그녀의 여정이 시작된지 정확히 3주째 되는 날.
그날도 이른 아침부터 이동했고, 며칠전 자연발화로 인해 불타버린 평원에서 휴식을 취할 무렵이었다.
꼭두새벽에 탐색을 나갔던 랜턴 일행이 돌아와 레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쳄불던이라는 커다란 도시가 있습니다. 본래는 그곳에서 머물 예정이었으나 오늘따라 왠지 일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도시의 군기가 삼엄하고 소란스러웠습니다. 혹시 모르니 쳄불던에 들리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알았어요. 랜턴 경의 생각대로 추진해주세요.”
“예, 마마.”
“엘크를 탄 수상한 자들이 몰려옵니다!”

갑자기 긴급한 외침이 들렸다. 일행이 쉬는 동안 주변을 정찰하기 위해 언덕에 올라간 자의 목소리였다.

“한  명이 아닙니다! 최소 오십! 아, 아니 일백! 백명 이상입니다!”

쉬고 있던 기사들이 칼을 꺼내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엘크?’

수많은 종족중에 사슴을 길들여서 타고다니는건 엘프뿐이다.
그리고 한  마리도 아닌 상당수의 엘크를 부릴 수 있는건……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삼촌이야. 삼촌이 왔어……!”

레아는 서둘러 언덕으로 올라가 코앞에 다다른 자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녀는 일백이 넘는 무리들을 선두에서 이끄는 화려한 복장의 우두머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확신했다.

‘삼촌!’

엘크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정체도 또렷이 드러났다.
저마다 화려한 갑주로 무장한 엘프들.
인간의 땅을 침범한 엘프들은 정체를 숨기지 않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삽시간에 레아의 일행속으로 달려들었다.

“(공주님을 돌려받으러 왔다!)”

엘크를 탄 엘프들은 일제히 엘프어로 고함을 치며 레아 일행을 덮쳤다.

“레아님을 지켜라! 레아님을 보호해!”

랜턴은 급히 소리를 치며 레아쪽으로 달려나갔고, 갈테르는 사방에서 날뛰는 엘프들을 향해 태풍처럼 칼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서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 고함소리, 욕설소리, 비명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여왕벌 기사단은 열심히 맞서 싸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숫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위인 엘프들은 인간들을 상처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죽이지 말라고 명령을 받은듯 그들의 칼끝은 매번 급소 가까이에서 멈춰지고 있었다.
엘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기사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밧줄에 목이 걸린  끌려다녔다.

“저희가 막을테니 얼른 피신하십시오!”

상황이 불리하다는걸 깨닫고 랜턴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싸움이에요. 끝까지 이곳에 남겠어요.”

그때 릴리의 손을 붙잡고 뛰어온 에스텔라가 칼을 빼든 레아의 팔을  움켜잡았다.

“잊지마! 네겐 우리가 있어! 같이 싸워줄게!”
“고마워요. 일단 삼촌과 얘기해보겠어요.”

갑자기 엘크 한마리가 언덕쪽으로 단숨에 뛰어올라왔다.
에스텔라는 릴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고, 랜턴은 재빠르게 엘크에게 달려들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엘크의 등에 타고 있던 엘프는 쥐고 있던 창으로 가뿐히 그의 공격을 맞받아친뒤 그를 걷어차버렸다.
랜턴은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엘크에 타고 있던 자는 다름아닌 화려한 갑옷으로 완벽무장한 살라두일이었다.
그는 친근한 눈빛으로 레아를 내려다 보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레아야, 이 길은 네 길이 아니란다. 널 구해주러 왔어.”

레아는 눈에 힘을 주고 그에게 소리쳤다.

“우선 멈추고 대화부터 해요! 방법이 잘못됐어요! 인간들에게 피해를 줘선 안된다고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 마음을 돌릴 수가 없겠다 싶었다. 강경한 방식을 원치않으면 어서 이 자리에서 나와 약속하거라. 돌아가겠다고 맹세한다면 병사들을 물리마.”

레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멈추지 않을거예요! 이래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삼촌께 알려드리겠어요!”

그녀는 손에 쥔 검을 살라두일을 향해 겨누었다.
덩치 큰 엘크에 타고 있던 살라두일은 자신을 향해 칼을 정조준한 조카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나와 싸우겠다는 것이냐? 진정 그게 네 뜻이야?”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삼촌을 쓰러뜨리면 간단히 끝날 일이에요! 걱정마세요. 치명상을 입힐 생각은 없으니까.”
“네 바보짓은 끝이없구나.”

그는 코웃음친뒤 여유롭게 레아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에스텔라와 릴리를 번갈아본뒤 다시 레아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흐음, 아르키나는 보이지 않는군.”
“아르키나도 왔나요?”
“이틀전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더구나. 너와 있는줄 알았지.”

레아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전 아르키나를 보지 못했어요.”
“그런것 같구나. 아무튼 너나 아르키나나 삼촌을 참 힘들게 한단말이야.”
“여기 올게 아니라 엘프들을 동원해 아르키나부터 찾으셔야죠! 나쁜자들에게 납치라도 당했으면 어떡해요!”
“시집가라고 했더니 싫어서 투정부리나보지.”
“시집?”
“여긴 시끄러우니 얘기는 돌아가서 하자구나.”

살라두일은 그렇게 말하더니 엘크의 등위에서 창을 꼬나 쥐었다.

“조카한테 창을 겨눌줄이야. 돌아가신 형님이 알면 화를 내겠군.”

그때였다.
불쑥 뿔나팔 소리가 장엄하게 울려퍼졌다.

‘레아를 지키던 놈들의 것이 아니야.’

불길한 생각이든 살라두일은 레아에게 시선을 거두고 이내 다른 방향을 쳐다봤다.
동시에 레아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평소 인간들에게서 듣던 뿔나팔 소리가 아니야. 이건 뭔가 좀…… 좀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지평선쪽으로 향했다.
뿔나팔 소리에 이어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둥둥둥.

“오, 말도 안돼……! 오, 나의 군주시여……! 오, 나의 신이시여……!”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 랜턴은 파르르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그, 그 분께서 오셨어! 이 먼 곳을 어, 어떻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만큼 크게 고무된 그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저, 전하께서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셨다! 모두 희망을 잃지말고 끝까지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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