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레아16
새벽 어스름이 조금씩 걷힐 무렵, 저 멀리 비하이브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여왕벌 기사단의 본부이자 멀리 떨어져 지내던 그들의 처자식들이 하나 둘 이주해오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작은 마을이었다.
“여기서 결혼해서 가족을 만든 친구도 있고, 다른 지역서 지내던 가족을 데려온 친구도 있고, 왕가에서 직접 나서서 정착을 도와줬습니다. 사람이 모여 사니 상인들이나 외지인들도 자주 드나들고요.”
랜턴은 레아의 뒤를 따라 걸어가면서 마을에 관한 잡다한 얘기를 해주었다.
“저희는 오로지 레아님만을 위해 특별히 조직된 기사단이기에 레아님께서 무사히 왕도에 도착하신뒤 곧바로 해체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몇몇은 끝까지 남아서 살겠다는 이들도 있구요. 저요? 저는 이야기꾼답게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며 이 소문 저 소문 주워듣는 재미로 살게 되겠지요. 하하.”
마을 주변에 높은 산은 없었고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루어진 구릉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농지로 개간된 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농사는 짓지 않는듯 싶었다.
마을까지 가는 내내 소나 돼지 같은 가축들만 보였다.
“평시에는 지역 감시 및 괴물 토벌, 엘프만 이용 가능한 숙박시설 운영, 인간과 엘프간의 분쟁 해결 등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덕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엘프분들이 다수 있죠. 레아 님의 소식도 그들의 첩보로 알게된 것입니다. 얼마전 오그넨 영주의 영지에서 있었던 일도 보고 받았고요. 많이 걱정했는데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마을 안에 들어서자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주민들이 미리 소식을 듣고 나와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레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레아님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정말 많이 기다렸습니다.”
“저희가 책임지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레아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모두에게 일일이 고마움을 표했다.
에스텔라와 릴리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레아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릴리, 좋은 가사가 떠오르는 것 같지 않아?”
릴리는 핌을 꼬옥 끌어안고 대답했다.
“인간왕과 엘프의 사랑 이야기?”
“너무 평범해. 조금 야한 것이 들어간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어야 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여엘프와 멋진 페니스를 가진 인간왕이 침대 위에서 질척하게 뒤엉키게된 사연?”
“그건 제목부터 저질이야. 하지만…… 내 취향이네.”
에스텔라가 빙긋 웃었다.
“그 야한 노래에 우리 둘도 가사에 넣자.”
“어떤식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같은 존재들로 표현하는 거야.”
“여왕벌 기사단은?”
“우리의 존재감이 희미해질텐데 가사에 꼭 나올 필요가 있을까?”
그날밤 레아를 위한 환영회와 환송회가 동시에 열렸다.
릴리는, 술잔을 들고 모여든 사람들 앞으로 나와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낭만적인 노래를 불렀다.
에스텔라는 노출이 많은 무희옷을 입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은 느리지만 섬세했고, 때로 우아하고, 때로 눈물겹고, 때로는 황홀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고혹적인 눈빛과 더불어 춤출때마다 노출되는 야릇한 살결까지 정말로 완벽해서, 사람들은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과 귀가 즐거운 밤이다.
레아는 그 떠들썩한 장소에서 조금 떨어져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은 처음 따라진 그대로 여전히 가득 차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막연히 먼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머릿속엔 온통 버나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자신을 잊지않고 여왕벌 기사단을 만들어준 그의 배려에 코끝이 시큰거렸고, 뜻하지 않은 선물에 감동을 받아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울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번 눈물을 흘리면 마구 쏟아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자신이 울어버리면 남들한테 힘들다고 자인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아직 끝난게 아니기에, 그와 만나기 전까지는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기에 아직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날은 오직 버나드와 만난 그날뿐.
그 기쁜날로 미뤄두자며 그녀는 꾹꾹 참아냈다.
‘반드시 전하 앞에서 울거야.’
자신이 펑펑 우는 순간이 마침내 소원을 이룬 순간이다.
도시 하나를 삼켜버릴 정도로 방대하고 후련하게 울어주리라.
그런데 힘껏 참은 것이 무색하도록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심지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레아 님?”
뒤에서 불쑥 랜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시간되세요?”
“아, 네.”
레아는 급히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대충 눈물을 닦아내고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어두워서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무슨 일이세요?”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어서요. 어쩌면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
친근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랜턴의 뒤에 키 크고 체격 좋아보이는 남자의 그림자와 그에 비해 작고 아담한 여자의 그림자가 나란히 서 있는게 보였다.
랜턴이 손으로 뒤에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혹시 이 사람 기억나세요?”
그가 한 손에 들고 있던 횃불로 사내의 얼굴을 비췄다.
처음보는 인물이었다.
남자는 뭐랄까, 남자답고 우직하게 생겼다.
그를 빤히 보던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기억이 안나요.”
“앗,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억을 잃으셨으니 어쩔 수 없죠.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랜턴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분은 전에 레아 님 밑에서 일했던 갈테르 경입니다. 옆에는 그의 여동생 레길라 고요.”
레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제 밑에서 일했다고요?”
“네.”
랜턴이 남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 나와보세요. 얼른!”
“자, 잠깐만! 조금만 시간을 주게……!”
“에잇!”
갈테르는 제자리에서 완강하게 버티다가, 옆에 있던 여동생이 힘껏 미는 바람에 앞으로 튕겨져 나왔다.
“레, 레아 님……”
그는 쑥스러워하며 제대로 눈도 못 마주쳤다.
“예, 예전에 잠깐 밤의 늑대들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상관이셨죠……”
“당시 갈테르 경이 너무 잘나가서 한때 영걸 유망주로 불리기까지 했대요. 신참이 말이죠.”
랜턴과 갈테르는 레아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과 그녀가 죽고 나서 그 이후에 일어난 많은 일을 털어놓았다.
오해로 인해 갈테르가 버나드와 싸운 일화라든지, 프레드릭왕이 죽은 후 버나드가 갈테르에게 받은 라리가나의 심장이라는 아티팩트를 돌려준 이야기까지 그들이 아는 것들을 전부 말해주었다.
“저희 오빠는 심장이 안좋거든요. 그럼에도 전하께 참회를 할겸 죽음을 무릅쓰고 라리가나의 심장이라 불리우는 반지를 바쳤는데,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끝난 후 전하께서 다시 돌려주신거예요. 덕분에 아직까지 잘 살아있죠.”
레길라의 말에 이어 랜턴이 흐뭇하게 덧붙였다.
“갈테르 경이 우리 여왕벌 기사단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전하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이랍니다.”
레아는 연회가 끝난 후 취침에 들기전까지 끝내 갈테르에 대한 기억을 되찾을 수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자신이 인간세계와 얼마나 깊게 얽혀 있는지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있어야할 곳이 여기인거야.’
엘프 마을을 나와 고되고 힘든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절대 잘못된 선택이 아님을, 그녀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언젠가 만날 버나드를 상상하면서.
다음날 아침. 기사단 사람들은 먼 여정을 떠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여왕벌 기사단은 오직 이 날만을 위해 만들어진 부대인만큼, 레아를 무사히 왕도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어떤 길이 가장 빠른지, 당장 무엇을 해야하는지, 또 무엇이 필요한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단장 랜턴은 따로 지도가 필요없을만큼 왕도까지 가는 지름길을 모두 꿰고 있었다.
“헤헤, 싸움도 못하는 제가 이런 재주마저 없었으면 대장 노릇도 못했겠죠.”
꼼꼼히 여행 물자를 챙기고 각자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눈뒤 모두 레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전부 늑대 머리에 여왕벌이 내려앉은 문양이 박힌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빛바랜 갑옷 곳곳에 나있는 흠집들은 그들이 마냥 손가락만 빨며 레아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출발을 앞두고 있는 그들의 표정부터가 남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당장 무쇠라도 씹어먹을듯이 군기가 꽉 차 있었다.
“레아님, 충성의 서약을 받아주십시오.”
“서약이요?”
“네, 말그대로 레아님을 향한 충성의 맹세입니다.”
랜턴을 포함 삼십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레아 님. 레아 님께서 돌아오심으로서 지난 4년간 잠들어있던 저희의 임무가 깨어났습니다.”
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크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4년전 전하의 어명에 따라, 지금 이 시간부로 저희 여왕벌 기사단은 레아님을 자랑스런 우르프스 왕국의 왕비님이자 여왕벌 기사단을 이끄는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여왕벌 기사단은 레아 왕비 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전하를 뵙는 그날까지 목숨도 마다 않는 검이, 그리고 방패가 되겠습니다!”
랜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한 목소리 외쳤다.
“목숨과 명예를 걸고 왕비님을 반드시 전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목숨과 명예를 걸고 왕비님을 반드시 전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목숨과 명예를 걸고 왕비님을 반드시 전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레아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스텔라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으며 부러워했다.
“멋지다…… 나도 받아봤으면……”
릴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와……”
자신을 향해 무릎 꿇은 기사들을 내려다보는 레아의 눈빛에는 상냥함이 깃들었다.
“저는, 어제까지 기억을 잃은 보잘 것 없는 엘프였고 오늘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엘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맹세는 제게 크나큰 영광입니다. 오늘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숨을 소중히 다뤄주세요. 모두가 무사히 여행을 마무리하는게 저의 바람이며 또한 여러분을 아는 가족 지인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닥쳤을때 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세요. 어떤 선택을 하든간에 누구도 뭐라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저로 인해 여러분이 다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다친다면 제가 목숨을 잃는 것처럼 크게 아플거예요. 이러한 제 생각을 여러분에게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자 노력했던 레아의 연설은 뜻하지 않게 기사들의 충성심만 드높였다.
“우리를 끔찍히 생각해주시다니! 흐윽! 과연 레아님이시다!”
“나 감동 받았어! 두고 봐! 왕비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어!”
“나도 나도! 아내를 위해 따라죽을 수는 없지만 레아님을 위해서라면 따라죽을 수 있을것 같아!”
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올라갔지만 레아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역효과가 나자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버나드를 떠올렸다.
‘전하, 갑자기 인간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되었어요. 저 잘할 수 있을까요?’
같은 시각.
엘프 부대가 출정을 서두르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살라두일이 백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레아…… 네 응석을 받아주는 것도 이젠 질렸다. 인간의 왕과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데려오마.”
그가 중얼거렸다.
“도망가지마. 너는 내 중요한 도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