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레아15
아침.
레아는 결린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났다.
맨바닥에서 잤더니 자도 잔것 같지 않고 전신이 쑤셨다.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먼저 일어나있던 에스텔라가 혼자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그녀의 웃음은 야영지를 정리하고 떠날때까지 사그라들줄 몰랐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요?”
“아침에 꿈을 꿨는데, 굉장히 기분 좋은 꿈이었어.”
“부자되는 꿈이요?”
“아니. 우리왕국의 통치자 버나드 우르프스 왕이 나오는 꿈.”
“정말요?”
“들어봐, 들어봐. 멋진 몸매를 가진 그분이랑 아주 야한 섹스를 즐겼어. 어찌나 박력있고 대단하시던지, 꿈같지 않고 너무 생생한거야. 아직도 짜릿해……!”
“예……?”
레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에스텔라 씨가 왜 그런 꿈을 꿔요?”
“어머, 얘 봐. 꿀 수도 있지.”
에스텔라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해마, 난 전하의 얼굴을 몰라. 꿈에 나온 전하의 얼굴은 내 어린시절 옆집에 살던 박피공집 아들의 얼굴이었어. 옷은 왕처럼 차려입고 몸만 성인이된 코찔찔이 얼굴이라니 웃기지 않아? 그놈이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두껍고 단단한 좆으로 박아대는 꿈을 꾼거야 글쎄. 근데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거 있지? 깨고 나서도 황홀하니까 미치겠어.”
“친했었나 보죠?”
“친하긴 무슨, 어버버하면서 나한테 말도 제대로 못 걸었던 놈이야.”
에스텔라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립네. 아무생각없이 뛰어놀던 그 시절이 좋았는데. 지금의 난 너무 더러워졌어.”
꼬르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레아와 에스텔라는 헝겊인형을 안고 있는 릴리를 쳐다봤다.
릴리가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
그녀의 말에 모두 웃음바다가 됐다.
아침 식사를 숲에서 자란 버섯을 채집해서 때우기는 했으나 레아를 제외하고 에스텔라와 릴리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우리 우선 마을부터 찾자. 그래야 걸을 힘도 나지.”
에스텔라의 말에 레아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가는 길이 급했지만, 일행이 배가 고프다는데 참으라고 고집을 부릴만큼 그녀는 매몰찬 성격이 아니었다.
두 세 시간 정도 걸으면 곧 마을이 나올거라 예상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숲은 넓고 보이는건 울창하게 자란 나무뿐이었다.
정오무렵 세 사람은 불타버린 오두막 한 채를 발견했다.
황폐해진 주변을 기웃거리다 안으로 들어가자 검게 탄 시체 두 구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보지마.”
에스텔라는 즉시 릴리의 눈을 가렸다.
시체는 남자와 여자였다.
아무래도 부부로 추정되었고,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 같았다.
고대부터 세상에는 불한당들이 넘쳐났기에, 외딴 곳에서 살다 도적한테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어왔다.
에스텔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광경이었다.
“가져갈게 있나 찾아 보자.”
레아는 가까이 가서 기도를 올리며 두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에스텔라는 불에 탄 잔해들을 나무 막대기로 일일이 뒤척이며 쓸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검게 그을린 동전 몇 푼과 타죽은 닭 두 마리를 발견해냈다.
운좋게도 닭 한마리는 완전히 타지 않고 먹을만한 부위가 남아있었다. 상한 냄새도 없었다.
에스텔라는 그 자리서 그을린 털과 껍질을 벗겨내고 릴리와 함께 살점을 나눠먹기 시작했다.
핏물이 보일 정도로 덜익은 부분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않고 덜익었으면 덜익은대로 맛 좋게 먹어치웠다.
레아는 굶주렸던 두 사람이 포식자처럼 와구와구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는동안 홀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습한 곳에 자란 이끼를 보고 그녀는 방향을 가늠했으며, 희미하게 드러난 발자국 흔적으로 사람들이 오가던 길도 발견했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세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흙구덩이가 움푹 파인 경사면으로 들어가 세찬 비를 피했다.
비는 저녁까지 계속 내렸다.
낯처럼 빗줄기가 굵지않고 보슬보슬 내렸지만 구덩이에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그 상태로 잠에 들었다.
새벽에는 늑대의 시체를 물고 지나가던 곰이 우연히 그들을 발견했다.
레아는 서둘러 에스텔라와 릴리를 깨웠다.
“일어나요.”
“아침이야……?”
“아뇨, 곰이 나타났어요.”
“곰!?”
“쉿.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세요.”
“엘프들은 동물이랑 친하지 않아?”
“사냥하고 와서 예민해져 있어요. 이럴땐 기싸움을 해서 짓눌러야해요. 제가 달래고, 두 분이 쳐다보면 바로 단념할거예요.”
“나랑 릴리가 눈싸움 하나는 기가막히지. 걱정마.”
곰은 구덩이속에 있는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곧 입에 물고 있는 늑대의 시체를 질질 끌며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은 숲 전체에 안개가 깔려있었다.
을씨년스러운 안개 때문에 시야가 극히 좁아졌으나 레아는 바닥에 깔린 이끼를 보며 곧잘 방향을 찾아냈다.
“하아, 배고파.”
힘없이 걷고 있던 에스텔라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뿐한 걸음으로 앞서 걷던 레아가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조금 있으면 마을이 나올거예요.”
“어떻게 알아?”
“아까 가축의 배설물이랑 바퀴자국을 봤어요.”
“정말? 난 못봤는데.”
그때 수풀 너머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자, 돌연 수풀속에서 작고 귀여운 여우 한마리가 튀어나왔다.
“꺄아! 귀여워라!”
에스텔라는 쪼그리고 앉아 여우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여우는 사람이 두렵지 않은지 그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정말 귀엽게 생겼다. 털도 너무 부드러워.”
“나도, 나도.”
릴리가 제자리에서 깡총뛰면서 자기한테 달라고 보챈다.
에스텔라는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그녀에게 건네줬다.
“물리지 않게 조심해.”
“예쁘다……”
릴리는 눈을 빛내며 품에 안은 여우한테 푹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털 전체가 까만 색깔에 귀가 큰 저런 품종의 여우는 처음 보는군요.”
“희귀종인가 보지. 우리 돈 벌었다.”
“돈이요?”
“저거 희귀종이니까 잘하면 귀족들이 비싸게 사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로 우연히 마주친 까만 여우도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릴리는 까만여우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며 ‘야푸’ 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릴리가 유난을 떨 정도로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레아는 별말을 안했지만, 그녀는 사실 야푸가 내키지 않았다.
엘프만이 알아볼 수 있는, 평범한 동물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기운을 야푸에게선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연의 힘이 아닌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설 수 없었다.
잃어버린 기억탓도 있고 세상물정을 모르기에 뭐가 어떻다고 딱 꼬집어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 난 모르는게 많아. 인간세계에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처럼 만들어진 키메라가 탈출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경계하는 편이 좋겠어.’
이후 빠르게 숲길을 걸어 마침내 마을을 발견했다.
주민이 서른명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반나절을 걷기만한 까닭에 배가 고팠던 세 사람은 식사부터 하고자 했으나 마을 내에 여관이나 식당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주민에게 부탁해야만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레아대신 에스텔라가 직접 주민들을 만나고 다녔다.
잠시 후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에스텔라가 웃으면서 떠들어댔다.
“저기 보이는 집에 사는 나무꾼이 우리한테 점심을 주겠다고 약속했어. 내 미모를 보더니 갑자기 홀린 사람처럼 사근사근해지는 것 있지? 하여튼 남자들이란.”
“점심값으로 얼마나 달래요?”
레아는 멜라니아 덕분에 돈이 많았기에 대신 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스텔라가 사양을 했다.
“이딴 마을에서 무슨 진수성찬을 차려주겠어. 끽 해봐야 야채죽이겠지. 돈 주는게 아까워. 먹고 도망가자.”
“그러면 안돼요.”
“이미 합의 봤어.”
에스텔라가 씨익 웃는다.
“그 나무꾼은 내가 한번 대줄줄 알고 희망에 부풀어 있거든.”
“무슨 말씀이세요?”
“점심값으로 내 몸을 원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줄것처럼 굴면서 밥을 달라고 했지. 근데 내가 미쳤어? 밥만 먹고 튈거야.”
레아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돈으로 드려요.”
“해준다고도 안했어. 분위기가 그랬다는거지.”
“그래도 드려요. 여깄어요.”
레아가 은화 한닢을 건넸다.
“이 정도면 되나요?”
“어머나! 프레드릭왕의 레온왕조 시절 주조된 은화잖아?”
얼마뒤, 세 사람은 냄새가 나는 마구간에서 식사를 했다.
에스텔라한테 홀딱 반한 나무꾼이 아내 몰래 부엌에 있는걸 전부 털어왔는지 빵과 생선, 술까지 마련된 나름 괜찮게 차려진 식사였다.
“마, 맛있으시죠?”
“네, 감사해요.”
“아뇨, 뭘. 헤헤헤. 부족하시면 말씀주세요. 다른거 더 있나 찾아볼게요.”
나무꾼은 아내한테 걸릴까봐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자주 마구간에 기웃거렸으며, 보란듯이 한쪽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식사를 하는 에스텔라를 볼때마다 군침을 삼키며 헤벌쭉한 시선을 보내곤 했다.
식사가 끝나자 나무꾼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그런 그에게 에스텔라는 자랑스럽게 은화 한닢을 건넸다.
“자요. 잘 먹었습니다.”
“에……? 은화?”
“왜요? 적나보죠?”
“그, 그건 아닌데……”
은화를 두 손으로 받아든 나무꾼은 멍하니 눈을 깜빡 거렸다.
식대보다 값비싼 은화도 좋지만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랴.
에스텔라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안녕~ 잘 있어요~”
쪽 하며 손뽀뽀를 날린 후 그녀는 떠나갔다.
나무꾼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손안에 든 은화를 보더니 얼굴이 급 환해졌다.
“여, 여보!”
그는 즉시 마구간을 뛰쳐나가 아내에게 달려갔다
“여보! 나 돈 벌었어!”
그렇게 세 사람은 배부르게 먹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해가 떠 있으니 조금이라도 날이 밝을때 많이 이동하는 편이 좋았다.
엘프 추격자들이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마을에 머물러봤자 오그넨 영주의 플랫폼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마을 주민들에게 뜻하지 않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었다.
그날 밤, 릴리는 야푸를 데리고 놀다 잠이 들었고 에스텔라는 모닥불 앞에 앉아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레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잠에서 깨어난 레아는 의심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곤히 잠든 릴리의 품에서 빠져나온 야푸가 그녀의 머리쪽으로 걸어가더니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하려는 중이었다.
‘역시 마물이었나……?’
자는척하며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레아는 야푸의 쩍 벌어진 입에서 검은 기운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광경을 보고 즉시 품안에 쥐고 있던 단검을 내던졌다.
쉬이익!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으나 야푸가 재빠르게 피하면서 바닥에 꽂혔다.
탁!
“캬아앙!”
네 발로 착지한 녀석이 털을 곤두세웠다.
레아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을 가해왔다.
“넌 누구니!”
레아가 소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자고 있던 에스텔라가 그녀의 움직이는 소리에 깨더니 졸린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으음…… 뭔일 있어……?”
그녀가 반쯤 감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야푸는 잽싸게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 후 레아는 자신이 느꼈던 것과 본 것들을 에스텔라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에스텔라는 웃으며 레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너 없었으면 큰일날뻔했다.”
“릴리한테도 잘 설명해주세요. 갑자기 없어졌다고 울지도 모르니까.”
“걔? 걔는 문제없어.”
에스텔라는 릴리쪽을 바라보았다.
잠든줄 알았던 그녀가 어느새 깨어있었다.
“야푸 그놈 마물이었대. 잊어버려.”
에스텔라의 말에 릴리는 안고있던 헝겊인형을 더욱 끌어안으며 하품을 했다.
“똥 치우는 것도 귀찮았어. 난 똥 안싸는 우리 핌이 제일 좋아.”
핌은 그녀가 안고 있는 곰인형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모닥불 근처에 앉아있는 세 사람 주위로 수많은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단숨에 세 사람을 에워쌌으며 몇몇은 나무 위에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당신들 누구야!”
에스텔라가 황급히 릴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고, 레아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칼을 꺼내들며 그들을 응시했다.
복면인들중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기를 들지 않은 그에게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실례지만, 혹시 레아님이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레아는 주의를 살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레아입니다만, 무슨 일이죠?”
“오오……!”
질문을 한 복면인 옆으로 어떤 복면인이 다가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난 레아님의 얼굴을 안다고.”
“와우, 놀랍군요!”
질문을 한 복면인은 감탄하며 요란을 떨더니 이내 복면을 벗어던졌다.
이마에 띠를 두른 그가 레아를 밝은 얼굴로 쳐다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레아님! 저는 레아님의 수호부대 여왕벌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자 이야기꾼 랜턴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을 둘러싼 복면인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레아님!”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레아님!”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레아님!”
난데없는 광경에 레아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 저를 수호한다고요?”
“예! 저희는 4년전에 전하의 명으로 창설되어 그동안 대삼림 부근에서 엘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며 쭉 활동을 해온 특별 기사단입니다!”
그가 이어말했다.
“레아님께서 전하와 만날 의향이 있으실때, 레아님을 왕도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는 것이 저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존재의 이유랍니다!”
〈 194화 〉레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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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레아는 결린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났다.
맨바닥에서 잤더니 자도 잔것 같지 않고 전신이 쑤셨다.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먼저 일어나있던 에스텔라가 혼자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그녀의 웃음은 야영지를 정리하고 떠날때까지 사그라들줄 몰랐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요?”
“아침에 꿈을 꿨는데, 굉장히 기분 좋은 꿈이었어.”
“부자되는 꿈이요?”
“아니. 우리왕국의 통치자 버나드 우르프스 왕이 나오는 꿈.”
“정말요?”
“들어봐, 들어봐. 멋진 몸매를 가진 그분이랑 아주 야한 섹스를 즐겼어. 어찌나 박력있고 대단하시던지, 꿈같지 않고 너무 생생한거야. 아직도 짜릿해……!”
“예……?”
레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에스텔라 씨가 왜 그런 꿈을 꿔요?”
“어머, 얘 봐. 꿀 수도 있지.”
에스텔라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해마, 난 전하의 얼굴을 몰라. 꿈에 나온 전하의 얼굴은 내 어린시절 옆집에 살던 박피공집 아들의 얼굴이었어. 옷은 왕처럼 차려입고 몸만 성인이된 코찔찔이 얼굴이라니 웃기지 않아? 그놈이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두껍고 단단한 좆으로 박아대는 꿈을 꾼거야 글쎄. 근데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거 있지? 깨고 나서도 황홀하니까 미치겠어.”
“친했었나 보죠?”
“친하긴 무슨, 어버버하면서 나한테 말도 제대로 못 걸었던 놈이야.”
에스텔라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립네. 아무생각없이 뛰어놀던 그 시절이 좋았는데. 지금의 난 너무 더러워졌어.”
꼬르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레아와 에스텔라는 헝겊인형을 안고 있는 릴리를 쳐다봤다.
릴리가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
그녀의 말에 모두 웃음바다가 됐다.
아침 식사를 숲에서 자란 버섯을 채집해서 때우기는 했으나 레아를 제외하고 에스텔라와 릴리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우리 우선 마을부터 찾자. 그래야 걸을 힘도 나지.”
에스텔라의 말에 레아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가는 길이 급했지만, 일행이 배가 고프다는데 참으라고 고집을 부릴만큼 그녀는 매몰찬 성격이 아니었다.
두 세 시간 정도 걸으면 곧 마을이 나올거라 예상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숲은 넓고 보이는건 울창하게 자란 나무뿐이었다.
정오무렵 세 사람은 불타버린 오두막 한 채를 발견했다.
황폐해진 주변을 기웃거리다 안으로 들어가자 검게 탄 시체 두 구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보지마.”
에스텔라는 즉시 릴리의 눈을 가렸다.
시체는 남자와 여자였다.
아무래도 부부로 추정되었고,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 같았다.
고대부터 세상에는 불한당들이 넘쳐났기에, 외딴 곳에서 살다 도적한테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어왔다.
에스텔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광경이었다.
“가져갈게 있나 찾아 보자.”
레아는 가까이 가서 기도를 올리며 두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에스텔라는 불에 탄 잔해들을 나무 막대기로 일일이 뒤척이며 쓸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검게 그을린 동전 몇 푼과 타죽은 닭 두 마리를 발견해냈다.
운좋게도 닭 한마리는 완전히 타지 않고 먹을만한 부위가 남아있었다. 상한 냄새도 없었다.
에스텔라는 그 자리서 그을린 털과 껍질을 벗겨내고 릴리와 함께 살점을 나눠먹기 시작했다.
핏물이 보일 정도로 덜익은 부분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않고 덜익었으면 덜익은대로 맛 좋게 먹어치웠다.
레아는 굶주렸던 두 사람이 포식자처럼 와구와구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는동안 홀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습한 곳에 자란 이끼를 보고 그녀는 방향을 가늠했으며, 희미하게 드러난 발자국 흔적으로 사람들이 오가던 길도 발견했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세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흙구덩이가 움푹 파인 경사면으로 들어가 세찬 비를 피했다.
비는 저녁까지 계속 내렸다.
낯처럼 빗줄기가 굵지않고 보슬보슬 내렸지만 구덩이에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그 상태로 잠에 들었다.
새벽에는 늑대의 시체를 물고 지나가던 곰이 우연히 그들을 발견했다.
레아는 서둘러 에스텔라와 릴리를 깨웠다.
“일어나요.”
“아침이야……?”
“아뇨, 곰이 나타났어요.”
“곰!?”
“쉿.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세요.”
“엘프들은 동물이랑 친하지 않아?”
“사냥하고 와서 예민해져 있어요. 이럴땐 기싸움을 해서 짓눌러야해요. 제가 달래고, 두 분이 쳐다보면 바로 단념할거예요.”
“나랑 릴리가 눈싸움 하나는 기가막히지. 걱정마.”
곰은 구덩이속에 있는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곧 입에 물고 있는 늑대의 시체를 질질 끌며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은 숲 전체에 안개가 깔려있었다.
을씨년스러운 안개 때문에 시야가 극히 좁아졌으나 레아는 바닥에 깔린 이끼를 보며 곧잘 방향을 찾아냈다.
“하아, 배고파.”
힘없이 걷고 있던 에스텔라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뿐한 걸음으로 앞서 걷던 레아가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조금 있으면 마을이 나올거예요.”
“어떻게 알아?”
“아까 가축의 배설물이랑 바퀴자국을 봤어요.”
“정말? 난 못봤는데.”
그때 수풀 너머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자, 돌연 수풀속에서 작고 귀여운 여우 한마리가 튀어나왔다.
“꺄아! 귀여워라!”
에스텔라는 쪼그리고 앉아 여우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여우는 사람이 두렵지 않은지 그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정말 귀엽게 생겼다. 털도 너무 부드러워.”
“나도, 나도.”
릴리가 제자리에서 깡총뛰면서 자기한테 달라고 보챈다.
에스텔라는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그녀에게 건네줬다.
“물리지 않게 조심해.”
“예쁘다……”
릴리는 눈을 빛내며 품에 안은 여우한테 푹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털 전체가 까만 색깔에 귀가 큰 저런 품종의 여우는 처음 보는군요.”
“희귀종인가 보지. 우리 돈 벌었다.”
“돈이요?”
“저거 희귀종이니까 잘하면 귀족들이 비싸게 사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로 우연히 마주친 까만 여우도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릴리는 까만여우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며 ‘야푸’ 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릴리가 유난을 떨 정도로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레아는 별말을 안했지만, 그녀는 사실 야푸가 내키지 않았다.
엘프만이 알아볼 수 있는, 평범한 동물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기운을 야푸에게선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연의 힘이 아닌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설 수 없었다.
잃어버린 기억탓도 있고 세상물정을 모르기에 뭐가 어떻다고 딱 꼬집어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 난 모르는게 많아. 인간세계에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처럼 만들어진 키메라가 탈출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경계하는 편이 좋겠어.’
이후 빠르게 숲길을 걸어 마침내 마을을 발견했다.
주민이 서른명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반나절을 걷기만한 까닭에 배가 고팠던 세 사람은 식사부터 하고자 했으나 마을 내에 여관이나 식당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주민에게 부탁해야만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레아대신 에스텔라가 직접 주민들을 만나고 다녔다.
잠시 후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에스텔라가 웃으면서 떠들어댔다.
“저기 보이는 집에 사는 나무꾼이 우리한테 점심을 주겠다고 약속했어. 내 미모를 보더니 갑자기 홀린 사람처럼 사근사근해지는 것 있지? 하여튼 남자들이란.”
“점심값으로 얼마나 달래요?”
레아는 멜라니아 덕분에 돈이 많았기에 대신 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스텔라가 사양을 했다.
“이딴 마을에서 무슨 진수성찬을 차려주겠어. 끽 해봐야 야채죽이겠지. 돈 주는게 아까워. 먹고 도망가자.”
“그러면 안돼요.”
“이미 합의 봤어.”
에스텔라가 씨익 웃는다.
“그 나무꾼은 내가 한번 대줄줄 알고 희망에 부풀어 있거든.”
“무슨 말씀이세요?”
“점심값으로 내 몸을 원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줄것처럼 굴면서 밥을 달라고 했지. 근데 내가 미쳤어? 밥만 먹고 튈거야.”
레아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돈으로 드려요.”
“해준다고도 안했어. 분위기가 그랬다는거지.”
“그래도 드려요. 여깄어요.”
레아가 은화 한닢을 건넸다.
“이 정도면 되나요?”
“어머나! 프레드릭왕의 레온왕조 시절 주조된 은화잖아?”
얼마뒤, 세 사람은 냄새가 나는 마구간에서 식사를 했다.
에스텔라한테 홀딱 반한 나무꾼이 아내 몰래 부엌에 있는걸 전부 털어왔는지 빵과 생선, 술까지 마련된 나름 괜찮게 차려진 식사였다.
“마, 맛있으시죠?”
“네, 감사해요.”
“아뇨, 뭘. 헤헤헤. 부족하시면 말씀주세요. 다른거 더 있나 찾아볼게요.”
나무꾼은 아내한테 걸릴까봐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자주 마구간에 기웃거렸으며, 보란듯이 한쪽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식사를 하는 에스텔라를 볼때마다 군침을 삼키며 헤벌쭉한 시선을 보내곤 했다.
식사가 끝나자 나무꾼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그런 그에게 에스텔라는 자랑스럽게 은화 한닢을 건넸다.
“자요. 잘 먹었습니다.”
“에……? 은화?”
“왜요? 적나보죠?”
“그, 그건 아닌데……”
은화를 두 손으로 받아든 나무꾼은 멍하니 눈을 깜빡 거렸다.
식대보다 값비싼 은화도 좋지만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랴.
에스텔라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안녕~ 잘 있어요~”
쪽 하며 손뽀뽀를 날린 후 그녀는 떠나갔다.
나무꾼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손안에 든 은화를 보더니 얼굴이 급 환해졌다.
“여, 여보!”
그는 즉시 마구간을 뛰쳐나가 아내에게 달려갔다
“여보! 나 돈 벌었어!”
그렇게 세 사람은 배부르게 먹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해가 떠 있으니 조금이라도 날이 밝을때 많이 이동하는 편이 좋았다.
엘프 추격자들이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마을에 머물러봤자 오그넨 영주의 플랫폼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마을 주민들에게 뜻하지 않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었다.
그날 밤, 릴리는 야푸를 데리고 놀다 잠이 들었고 에스텔라는 모닥불 앞에 앉아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레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잠에서 깨어난 레아는 의심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곤히 잠든 릴리의 품에서 빠져나온 야푸가 그녀의 머리쪽으로 걸어가더니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하려는 중이었다.
‘역시 마물이었나……?’
자는척하며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레아는 야푸의 쩍 벌어진 입에서 검은 기운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광경을 보고 즉시 품안에 쥐고 있던 단검을 내던졌다.
쉬이익!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으나 야푸가 재빠르게 피하면서 바닥에 꽂혔다.
탁!
“캬아앙!”
네 발로 착지한 녀석이 털을 곤두세웠다.
레아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을 가해왔다.
“넌 누구니!”
레아가 소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자고 있던 에스텔라가 그녀의 움직이는 소리에 깨더니 졸린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으음…… 뭔일 있어……?”
그녀가 반쯤 감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야푸는 잽싸게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 후 레아는 자신이 느꼈던 것과 본 것들을 에스텔라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에스텔라는 웃으며 레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너 없었으면 큰일날뻔했다.”
“릴리한테도 잘 설명해주세요. 갑자기 없어졌다고 울지도 모르니까.”
“걔? 걔는 문제없어.”
에스텔라는 릴리쪽을 바라보았다.
잠든줄 알았던 그녀가 어느새 깨어있었다.
“야푸 그놈 마물이었대. 잊어버려.”
에스텔라의 말에 릴리는 안고있던 헝겊인형을 더욱 끌어안으며 하품을 했다.
“똥 치우는 것도 귀찮았어. 난 똥 안싸는 우리 핌이 제일 좋아.”
핌은 그녀가 안고 있는 곰인형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모닥불 근처에 앉아있는 세 사람 주위로 수많은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단숨에 세 사람을 에워쌌으며 몇몇은 나무 위에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당신들 누구야!”
에스텔라가 황급히 릴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고, 레아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칼을 꺼내들며 그들을 응시했다.
복면인들중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기를 들지 않은 그에게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실례지만, 혹시 레아님이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레아는 주의를 살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레아입니다만, 무슨 일이죠?”
“오오……!”
질문을 한 복면인 옆으로 어떤 복면인이 다가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난 레아님의 얼굴을 안다고.”
“와우, 놀랍군요!”
질문을 한 복면인은 감탄하며 요란을 떨더니 이내 복면을 벗어던졌다.
이마에 띠를 두른 그가 레아를 밝은 얼굴로 쳐다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레아님! 저는 레아님의 수호부대 여왕벌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자 이야기꾼 랜턴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을 둘러싼 복면인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레아님!”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레아님!”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레아님!”
난데없는 광경에 레아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 저를 수호한다고요?”
“예! 저희는 4년전에 전하의 명으로 창설되어 그동안 대삼림 부근에서 엘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며 쭉 활동을 해온 특별 기사단입니다!”
그가 이어말했다.
“레아님께서 전하와 만날 의향이 있으실때, 레아님을 왕도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는 것이 저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존재의 이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