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3화 〉레아14 (193/200)



〈 193화 〉레아14

그물을 들고 있던 버나드는 잔디가 깔린 경사를 내려가 연못으로 들어갔다.
노을이 진 하늘 보다 더욱 진한 하늘이 담겨 있는 연못은 허리까지 물이 차오를뿐 그리 깊지 않았다.

“……”

버나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재빨리 그물을 던졌다.
촤아악!
군더더기 없이 펼쳐진 그물이 이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곧바로 그물을 끌어당겼다.
수면밖으로 꺼내진 그물속을 확인하자 깡총깡총 뛰는 개구리 두 마리와 자잘한 새우들, 송어 한마리가 힘차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버나드는 아쉬운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한방에 안잡히네……”

전부 풀어주었다.
그가 잡으려는 물고기가 따로 있었다.
수초가 걸려있는 그물망을 대충 정리한뒤 다시 던지려는 와중에 불현듯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 토벌을 마치고 복귀한지 얼마나 됐다고 낚시입니까? 피곤하지도 않으세요?”

고개를 돌리자 물가에 줄리안이 서 있었다.
갑옷속에 덧입는 내갑의만 입고 어슬렁 거리는 중이었다.

“자네야말로 일과 끝났는데 안쉬고 뭐하나?”
“저 위에서 내려다보니 전하께서 아끼시는  경치좋고 확 트인 연못에서 누가 낚시를 하고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속으로 이런 괘씸한 놈 하면서 혼내주러 왔더니, 아이쿠야 못 혼내주겠네요.”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일하다 왔어?”
“급한 보고가 있다길래 집무실에 잠깐 들렸다왔습니다.”
“갑옷을 벗다 말 정도로 급한 일이었나보지?”
“아뇨, 듣고 보니 별일 아니더라구요.”

줄리안은 뒷짐을 지고 연못 주변을 서성거렸다.

“곧 날이 어두워질텐데 뜬금없이 웬 투망질입니까? 왕비님들한테 줄 금반지라도 빠뜨렸어요?”
“금보다 더 값비싼 물고기를 낚는 중이지.”

버나드는 힘껏 그물을 던졌다.

“오늘은 나와 레아가 처음 만난지 17년째 되는 날이야. 기념으로 저녁 밥상에 메기를 올릴 생각이지. 레아가 이 연못에서 사는 메기를 굉장히 좋아했거든.”
“레아가 여기 사는 메기를 잡아먹었다고요? 처음 듣는데요?”
“언제였더라……”

버나드는 그물을 끌어당기며 옛일을 떠올렸다.

“프레드릭 밑에 있을때, 정원 순찰을 돌다가 우연히 죽어있는 메기를 발견했던적이 있어.”

끌어올린 그물을 확인했으나 이번에도 허사다.
새우들뿐이었다.
버나드는 혀를 차며 그물을 털었다.

“미관상 보기도 안좋고 일단 연못에서 꺼냈는데, 살이 통통하게 오른것이 갑자기 구워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뭔가. 그래서 내 숙소로 가져갔지. 화로 위에서 한창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데 때마침 레아가 놀러온거야. 잘 구워진 메기를 보더니 군침을 흘리더군. 그러면서 한 입만 달라고 하도 졸라대서 줬더니, 글쎄 손뼉을 치며 기막히게 맛있다는거야.”

줄리안은 바닥에 자란 잡초를 뜯어 입술에 물고 킥킥 웃었다.

“걔는 엘프 주제에 육식을 오지게 좋아한다니까요.”
“아무튼 그날부터 레아가 여기 사는 메기 요리를 엄청 좋아했어. 하지만 연못의 모든게 왕의 것이니 함부로 손을 못대잖나. 메기가 죽어서 떠오르지 않는 이상 먹을 기회가 없었지. 일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했나.”

그 시절 레아를 회상하는 버나드의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죽은 메기 한마리만 달라고 맨날 신들께 기도할 정도였어. 그러다 가끔씩 죽은 메기가 생기면 엄청 신나 하면서 나한테 구워달라고 미치도록 보챘지. 어찌나 귀찮든지. 내가 구워준게 아니면 맛이 없다는거야. 그게 말이나 돼?”

동작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붉은 노을이 흐르는 수면을 막연히 바라보던 버나드는 흐뭇하게 웃다가 이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눈치 안보고  터지게 먹여줄 수 있게 됐는데 이젠 그녀가 없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물을 던졌다.
바로 꺼내진 그물속에는 송어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버나드는 그것을 꺼내서 물속에 던졌다.
줄리안은 잠시 침묵속에 콧등만 살살 긁다가 말을 꺼냈다.

“어차피 레아도 메기 따위 잊었을거예요. 생각도 안날걸요? 뻘짓입니다 뻘짓. 시간만 아까운 짓이라고요.”
“이봐 줄리안. 그거 아나?”
“뭐요?”
“난 우리 왕국에 사형제도가 있다는게 아주 자랑스러워. 왕 앞에서 제멋대로 나불대는 놈들을 바로바로 처형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편한가.”
“저는 충성스러운 신하니까 사형대에 목이 걸릴 일은 없겠네요.”
“요즘 신하중에 가장 거슬리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바로 줄리안이라는 놈이지. 왕앞에서 함부로 나불대는 그놈의 목을 당장 분지르고 싶어.”

버나드는 웃으며 말한뒤에 줄리안을 돌아봤다.

“그녀가 기억해주길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야. 내가 해주고 싶은거야.”

하지만 줄리안의 표정은 어딘가 심각해보였다.
평소와 매우 다른 모습이다.
그는 연못속에 있는 버나드와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레아를 보내주시죠.”
“보내줬잖아.”
“마음은 아직이잖아요.”
“마음은  마음대로  수 있는게 아니야.”
“레아 없이도 잘 생활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일만 안하면 되잖아요. 레아를 위해 메기 잡고, 만난 기념일 챙기고, 이런 일만.”

버나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잘 생활하고 있는게 아니야. 매일매일 아무렇지 않은척 감추고 살아갈 뿐이지. 그녀가 자꾸 생각나는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렇게 대답한뒤 괜히 연못을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이놈의 메기는 왜 이렇게 안잡히는 거야.”

딴청을 부리는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줄리안이 불쑥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레아…… 결혼한대요.”
“뭐?”

버나드가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자, 줄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갑옷을 벗다 말고 긴급하게 받은 정보요. 레아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2주전 얻은 정보가 거리때문에 지금 도착한거니 어쩌면 벌써 결혼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젠장……”

버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뱉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좌우간 그 놈은 복 터졌군.”

연못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그가 뒤돌아서 물가로 나왔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그물을 땅위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줄리안이 물었다.

“그물은 왜 패대기치십니까? 메기 잡는다면서요?”

씩씩대듯이 약간 숨이 거칠어진듯한 버나드의 모습은 화가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충격과 슬픔, 실망, 절망, 화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침착했다.

“딴놈이 잡아주겠지.”

그러나 이내 생각이 바뀐듯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젖은 바지채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다시 그물을 주워들었다.
줄리안이 또 물었다.

“딴놈이 잡아줄텐데  주워요?”
“내가 해준게 더 맛있을거야.”

한 손에 그물을 쥐고 첨벙첨벙 도로 연못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을 향해 줄리안이 소리쳤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겁니다! 확 쳐들어가서 쟁취해버려요! 레아도 그것을 바랄테고요!”

버나드가 뒤를 돌아보며 검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거야. 엘프들과  약속을 어기면 다른 나라에서 우리 왕국의 신용을 어떻게 보겠어!”
“만약 전하가 저처럼 음흉한 사람이었다면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은 본디 자기랑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잖아요. 하지만 아니니까, 그래서 전 당신을 존경하죠. 내가 결코 따라잡을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가끔씩 답답할때도 있어요. 바로 지금처럼요. 지금만큼은 저처럼 교활하고 비겁한 성격이었음 참 좋겠다 싶습니다.”

버나드는 그의 말을 듣고난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아. 자네말대로 내가 엘프 왕국에 쳐들어가서 레아를 얻었다고 쳐. 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아. 내가 평생 만족을 느끼고 죽은 다음에는? 홀로 남겨진 레아는?"
“그건 레아가 선택할 문제죠. 전하가 떠난 이후의 삶이 그녀에게  행복할지 누가 알아요?”

대답이 너무 쉽게 나오자 버나드는 코웃음을 쳤다.

“사형 제도는 자네가 죽기전까지  유지할거야.”
“세상사 복잡하게 생각해봐야 골치아파요.”

갑자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그래서 레아한테 안가고 버나드랑 지내고 있지!”

연못가에 울창하게 자란 한그루 나무 위에 누군가 있었다.
버나드와 줄리안이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자 꼬리로 나뭇가지를 붙잡은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란이 보였다.

“나도 버나드보다 수명이 길어서 오래살거든. 버나드가 생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부 기록해뒀다가 나중에 버나드가 세상을 떠난뒤에 레아한테 가서 전부 말해줄거야! 방금 둘이 대화한 것도 내 수첩에 적어둘게!"

그녀는 훌쩍 뛰어내리더니 사방에 물을 튀기며 연못속에 풍덩 착지했다.

“앗!”

물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는 표정이 밝아졌다가 금세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물속으로 민첩하게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올렸다.

“히히, 잡았다!”

란의 날카로운 손톱에 붙잡힌 물고기는 다름 아닌 메기였다.
눈앞에서 팔딱팔딱 뛰는 메기를 보며 버나드는 믿을  없다는듯 크게 눈을 떴다.

“라, 란……!”
“이히히 맛있겠다!”
“내놔!”

란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 베어먹으려는 것을 버나드가 홱 낚아채갔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인상을 쓴다.

“왜 뺏어가?”
“다른거 잡아줄게. 이건 나한테 넘겨.”
“치. 여기 메기가 맛있는거 나도 알고 있는데. 예전에 레아한테 들었단 말이야.”

버나드는  들은척 헛기침을 하며 메기를 얼른 허리에 차고 있던 자루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그물을 집어 들었다.

“자, 송어 잡아줄게. 송어 먹자 송어. 알았지 란?”

란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내밀고 있다가 말했다.

“아르키나한테서 연락이 왔어. 지금 기다리는중이니 빨리가봐.”
“아르키나?”
“응, 레아의 여동생. 설마 잊은건 아니겠지?”
“갑자기 왜……?”
“왜라니? 기쁘지 않아?”
“물론 놀랍고 기쁘긴 한데……”

버나드는 멍한 표정으로 물가에 서 있던 줄리안을 돌아봤다.
그가 양손을 펼쳐보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가지마요. 무슨 말할지 뻔해. 분명 뒷목 잡고 쓰러질겁니다.”

버나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레아의 결혼식에 오라는건가……?”

왕궁으로 돌아온 버나드는 즉시 수정구가 있는 방으로 가지 않고 엘레나를 불러 가장 독한 술부터 찾았다.

“전하 딱  잔만 드세요. 정말 위험한 술입니다.”
“괜찮다.”

엘레나가 걱정스레 쳐다봤지만 버나드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손가락으로 병마개를 따고 그대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독하기 그지없는 액체가 목구멍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목이 심하게 타는 것 같았다.
괴로웠지만 버나드는 웃었다.

“맛있군.”

술병을 들고 수정구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알콜 기운이 금세 온몸으로 퍼지며 비틀거리며 도착한 어두운 실내.
중앙 탁자에 놓인 수정구만이 밝은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각오는 됐어.”

알딸딸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아 수정구속을 들여다보니 아르키나의 얼굴이 보였다.
레아와 어렴풋이 닮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건 4년만이었지만, 술 기운과 슬픈 소식 때문인지 반갑게 인사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버나드는 술병을 쥔 손을 들어올리며 건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여어, 반갑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손에 들고 있는건 술인가요?
“어, 술이야. 오늘처럼 기분째지는 날에는 술을 마셔야지. 안그런가?”
-축제라도 있었나보죠?
“축제?”

버나드는 곰곰이 생각하다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인생은  축제지! 축제야! 딸꾹!”
-기분이 좋은가 보네요.
“그럼! 기분 좋고 말고!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연락 안한다면서. 딸꾹!”
-긴급한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버나드는 술병을 입에 가져다대며 씩 웃었다.

“긴급하겠지. 결혼식만큼 긴급한 일이 어딨겠나!”
-알고 계셨군요.
“왕은 모르는게 없어. 뒤에도 눈이 달려 있다고.”

술을 한모금 마신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미소지었다.

“그래서 언제 가면 돼?”
-네?
“결혼식에 초대하려고 부른 것 아냐?”
-초대……?

수정구속의 아르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닙니다.
“뭐야,  빠지잖아. 그럼 다른 일인가? 혹시 레아가 도망치기라도 했어?”

버나드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아냐, 그럴리는 없겠지.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 못해.”

고개를 저으며 술병을 막 입에 댔을때였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걸.”
-언니가 당신한테 갔습니다.
“푸훕!”

버나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입안에 머금었던 술을 뿜었다.
수정구 표면에도 몇방울 튀겼다.

“거짓말……?”
“사실입니다.”
“진짜로……?”
“네.”
“정말 레아가 나한테 오는 중이라고? 딸꾹!”

아르키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덕분에 이쪽은 난리가 났어요. 모두가 언니를 찾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언니가 붙잡힐거예요.
“붙잡혀?”
-우리 일족에게 붙잡히면 언니는 자기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엘프족과 강제로 결혼을 해야되요. 그러니 빨리 당신이 나서서 구해주세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버나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레아!”

라고 외치는 순간 세상이 빙빙 도는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뒤로 발라당 자빠지고 말았다.

“히, 힐그리테……!”

어찌나 심하게 취했는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바닥에서 허우적대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제기라아알…… 안되는데…… 힐그리테…… 힐그리테…… 어서 내 몸을 해독해…… 해독…… 쿠울…… 음냐음냐.”

잠시 후 코고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졌다.
수정구속의 아르키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치는 언니나, 주정뱅이 왕이나, 그야말로 둘이 천생연분이군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힐그리테가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실내에 진동하는 술냄새에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을 내려다 보자 곯아 떨어져 있는 버나드를 발견했다.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궁중마녀의 첫 임무가 술 취한 전하의 알콜 분해라니.”


***


다음날.
떠날 채비는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버나드는 왕으로 즉위한지 처음으로 소수 병력을 데리고 원정에 나섰다.

“엘프들이 사는 대삼림까지 가는데 이용할 수 있는 포탈은 현재까지 총 세 군데입니다. 나머지 영지 다섯 곳은 준비중이니 시간을 달랍니다.”
“돈은 얼마든지 내줄테니 서둘러 완성하라고 해. 시간이 없다.”
“예! 분부대로 전하겠습니다!”

왕도를 빠져나오자마자 버나드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중간에 포탈을 이용할  있는 영지가 있으면 포탈을 이용해서 시간과 거리를 단축했고, 그렇지 않으면 말을 타고 이동했다.

원정에는 줄리안과 로잘리나, 란, 힐그리테도 동행했다.
걔중에서 줄리안은 무척 신이나 보였다.

“아자아아아! 기다렸다고오오오! 드디어 널 데리러 가는구나아아아! 마스터울프의 오른팔아!”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 신나게 소리를 지르는 줄리안의 모습은 정말 드문 광경이다.
늘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듯한 그가 저렇게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그도 옛 전우였던 레아와 재회하는게 기쁘다는걸까.

“애처럼 굴기는.”

버나드는 줄리안에게 핀잔을 줬지만, 오히려 자신이 줄리안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미치도록 기쁨을 표현하고 싶은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걱정스럽고 설레는 한편 레아에게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풍파를 거쳤어도 항상 난 똑같구나. 매번 네가 먼저 해주길 기다리는 나…… 나는 늘 늦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빠르게 달리는 라벤다 위에서 추운 겨울날 작전을 수행하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야외.
레아와 함께 잠복해있던 와중에 그녀가 불쑥 자신의 손을 감싸며 차가워진  손을 녹여주었다.

“뭐하는 짓이야.”

버나드는 인상을 쓰며 손을 빼려고 했으나 그녀가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가만있어봐요.  시렵잖아요.”
“손을 비벼.”
“둘이 손 잡고 있는게  따뜻해요.”

얼마 후 자객들이 두 사람을 급습했고, 버나드와 레아는 신속히 그들과 맞서싸웠다.
이후 자객들의 시체가 나뒹구는 눈밭에서 버나드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레아가 아니었으면……”

만약 레아가 미리 손을 녹여주지 않았더라면 추위로 손이 굳은 바람에 칼을 잘 다루지 못해 자객한테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레아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그러나 쑥스러운 나머지 끝내 전하지 못했다.
항상 자연스레 나오던 어리석은 한마디.

“다음에 해야겠어.”

자신만 바라보던 레아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해 이제와 아쉽고 안타까운건 비단  기억뿐만이 아니다.
과거에 레아를 붙잡을 기회는 여러차례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말투로 레아를 상대하며 그런 기회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레아는 상처를 입고도 변함없이 다가와줬지만 자신은 결국 그녀를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그랬는데……
놀랍게도 레아가 돌아왔다.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그녀가!

‘듬뿍 사랑해주겠어!’

지금의 자신은 그 시절의 바보가 아니다.
고통스런 세월을 거쳐 몇 배는 더욱 성숙한, 레아를 향한 마음만큼은 거의 완벽에 다다른 로맨티시스트!
과거의 아쉬움과 후회는 레아를 결코 놓칠 수 없다는 굳은 의지와 사랑, 열정으로 변한지 오래다.

‘이번에는 내가 너의 손을 녹여줄게. 조금만 기다려 레아!’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린듯 라벤다가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버나드를 뒤따라 들판을 달리던 기사들은 라벤다의 속도에 맞춰 열심히 따라가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라벤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삼백미터 이상 앞서 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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