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2화 〉레아13 (192/200)



〈 192화 〉레아13

“평생 미움만 받고 살아가도록 얼굴에 십자 흉터를 만들어주마!”

난데없이 칼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버나드는 걸음을 멈추고 디보크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힐그리테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적당히를 모르는군……”

힐그리테가 디보크한테 매질을 당하는 건 그녀가 응당 치러야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와 그의 가문을 속이고 이곳에 온거니까.
그러나 그녀가  상해를 입는건 원치 않았다.

버나드는 즉시 힐그리테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기사들이 눈치껏 나서며 디보크에게 고함을 치고 제지했다.

“전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당장 칼을 거둬!”
“예!?”

화들짝 놀란 디보크는 즉시 칼을 버리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저, 전하!”
“무슨 소란이냐?”

버나드가 싸늘하게 묻자 디보크가 바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 마녀가 자신이 맡은 책무를 다하지 못해 벌을 주고 있는 중입니다! 형편 없는 실력으로 계약을 맺고 저를 속였습니다!”

버나드는 힐끗 힐그리테를 쳐다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던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헝클어진 붉은 머릿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기분 좋게 토벌을 마치고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버나드는 엄중한 목소리로 다그치며 말을 이었다.

“짐은, 직할군이 괴물을 토벌하고 돌아와서 나약한 마녀를 때렸다는 소문이 도는걸 원치 않네. 이 얼마나 난폭하게 비치는 소문인가. 우리는 야만적이고 광기에 휩싸인 군대가 아니야. 따라서 추문을 사전에 잡을겸 지금  자리에서 재판을 열겠네.”
“예에!? 재, 재판이라뇨!?”

디보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버나드는 무섭게 소리쳤다.

“디보크 경! 외부인인 자네는 직할군의 위신과 명예를 훼손시키는 부적절한 행위를 저질렀다!”
“허억!”
“그렇기에 나 버나드 우르프스는……!”

갑자기 버나드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조금전의 매서운 목소리와 달리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평범한 말투로 물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달동안 감옥에 갇히고 싶은가 아니면 이대로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좋다!  버나드 우르프스! 디보크 경의 추방을 명령한다!”
“가, 감사합니다!”

판결이 떨어지자 디보크는 꽁지가 빠져라 얼른 병영을 떠났다.
허둥지둥 도망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버나드는 힐그리테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궁으로 들어가서 치료부터 받거라.”
“전하의 깊은 배려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힐그리테는 피 흘리는 입술로 웃으며 감사를 표하더니 이내 끈적이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버나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의 소변을 술잔에 가득 담아 제게 하사하신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이킬 겁니다.”

마녀의 민망한 발언에 버나드는 별다른 반응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래, 훌륭한 충심이다.”

그가 말했다.

“나중에 화장실을 못찾게 되거든 네 입을 이용하도록 하지.”

***

레아가 마을을 떠난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녀가 살던 야브라스족 마을에 헤이라닌 일족의 선발대가 도착했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먼저 도착한 그들은, 신부인 레아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결혼식이 코앞에 닥쳐왔는데 신부가 사라졌다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신랑쪽 결혼 준비를 담당하고 있는 디가티르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있었다.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아름다운 중년 여인은 살라두일의 말을 믿지 못했다.

“파혼을 위해 일부러 숨긴 것 아닙니까? 다른 종족에서 좋은 제안을 해왔나보죠?”

그녀와 마주보고 서 있던 살라두일은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나를 뭘로 보는거요! 정 안된다면 레아의 여동생 아르키나라도 당신들한테 넘기고 싶은 심정이오!”

그가 씩씩 거리며 말했다.

“만약 레아를  찾게 되거든 아르키나 라도 드리겠소!”
“우리측이 원하는건 레아 입니다. 진행이 잘 되어가다가 왜 이렇게 됐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갑자기 뛰쳐나갔습니다.”
“모른다는게 말이되요? 정말 다른 곳에 숨긴게 아닌지요?”
“아닙니다!”

잠시 언성을 높였던 그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했다.

“할 수 없군요. 우리 일족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아르키나도 드리겠소. 우선 아르키나와 먼저 혼인을 올리고 그  레아를 찾게 되거든 레아와도 혼인을 올리는건 어떤지 장로님께 여쭤보시오.”
“자매를 전부 주신다고요?”
“그렇소. 둘 다 장로님의 아드님께 시집 보내겠소. 그러니 그쪽에서도 레아를 찾는걸 도와주시오.”

레아에 이어 아르키나까지 주는건 불공평한 거래라는걸 알기에 살라두일은 속이 끓었다.
하지만 엘프종족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헤이라닌 일족과의 끈을 반드시 붙잡고 싶었다.

“일단 장로님께 말씀은 전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선발대도 레아를 찾는데 협력하도록 하죠.”

말을 마친뒤 방을 나서는 디가티르의 발자국 소리가 정적속에서 뚜벅뚜벅 울려퍼졌다.
수많은 식물줄기가 천장과 벽을 감싸고 있는 넓은 공간에 홀로 남겨진 살라두일은 분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니놈들도 언젠가 두고 보자……”

그는 출구쪽을 노려보며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
레아의 부모가 살아있을때였다.
마을의 엘프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당시 100살이 넘었던 그는 특이한 병을 앓고 있었다.
아름다운 엘프의 모습과 흉측한 괴물의 모습을 시도때도 없이 오가는 병이다.
엘프의 모습일때 마음이 평화롭고 차분했지만, 괴물로 변했을때는 불타는 분노와 함께 무엇이든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그러나 레아의 아버지였던 그의 형은 달랐다.
형은 자신과 달리 완벽한 엘프로 태어났다.
성격도 워낙 성실하고 친절해서, 끔찍한 괴물로 변하는 자신을 돌봐주고 보호해주는 듬직한 기둥이었다.
살라두일은 그런 형을 믿고 동경하는 한편 반듯한 외모를 갖고 태어난 그를 질투했다.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살라두일을 늘 괴롭게 만들었다.
가끔씩 모두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정도였다.
그때마다 형이 그를 잘 달랬고, 형의 노력 덕분에 살라두일은 간신히 증오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살라두일에게 마족이 찾아왔다.
케파이스테 라는 이름을 가진 그 고위 마족은, 달콤한 제안을 건네며 살라두일을 유혹했다.

“너희 엘프 마을의 보물을 가져오너라. 그것을 가져오면 마족 군단의 지휘관 자리를 상으로 주마.”

케파이스테가 원하는 것은 야브라스족이 오래 간직해온 보물 ‘루베니언’ 이라는 하프 악기.
연주를 들으면 마음과 육신의 상처가 말끔히 치유되는 신비한 힘이 담긴 아티팩트였다.

“어쩌지……?”

몇날며칠을 고민하던 살라두일은 결국 케파이스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마을 주민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게다가 엘프 마을에 계속 있어봤자 자신은 평생 주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흉측한 괴물 소리만 들을 터, 차라리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마족들의 수장이 되는 삶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경계가 심해서 혼자선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가주지. 너희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석들을 제거해 놓거라.”
“예.”

결국, 마족들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마을의 모든 것을 짓밟고 학살했다.
마을을 이끌던 형을 비롯해 형수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형은 죽기 직전, 갓난 아기였던 레아와 아르키나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려고 노력중이었다.
살라두일이 달려가 두 아기를 각각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려는 형을 말렸다.

“형! 레아와 아르키나는 내가 보호할게! 이러다 모두 뿔뿔이 흩어지겠어!”
“셋이 몰려다니다가는 자칫 한꺼번에 몰살당할지도 모른다! 셋 중  명이라도 살아남을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 레아는 인간 세계로! 아르키나는 다른 엘프 종족에게로! 살라두일! 너도 어서 멀리 도망쳐라! 마을은 나와  형수가 지키마!”
“레아를 인간한테 보낸다고?! 인간 세계는 위험해! 그들도 마족과 똑같아!”

만류하는 그에게, 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인간은 대부분 선한 존재다. 신께서 꼭 레아를 좋은 인간에게 인도해 주실거야.”

그렇게 말하고 그는 전송 주문을 영창했다.
요람 바구니 안에서 해맑게 웃고 있던 레아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그녀의 동생 아르키나는 독수리 실라르가 요람 바구니를 물고 저 하늘 멀리 날아갔다.

그 뒤 마족에 맞서 끝까지 싸우던 형과 형수가 죽고난뒤 얼마나 지났을까……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마족들은 손쉽게 루베니언을 손에 넣고 곧장 귀환했다.

며칠  살라두일은 마족들의 본거지에서 케파이스테와 은밀히 만났다.

“자, 이제  차례다. 약속대로 날 마족군의 수장으로 앉혀줘.”

케파이스테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지?”
“뭐라고? 이놈이!”
“자고로 전쟁에서 승리했을때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이 뭔줄 아는가? 포로 처단? 아니지 아니야.”

그가 사악하게 웃으며 눈을 빛냈다.

“적을 배반하고 우리쪽에 붙은 놈들을 싸그리 박멸하는게 먼저다. 배신자는  배신하는 법. 놔둬봤자 혼란만 초래하거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속에서 무기를  마족들이 기어나오며 살라두일을 에워쌌다.
살라두일은 분통을 터뜨렸다.

“지랄마! 이 개자식아!”

그 역시 빈 손으로 오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서 가지고  마법 가루를 냅다 사방에 뿌려버렸다.

“평생 짐승으로 살아가거라!”
“으아악!”

정체 모를 마법 가루가 눈에 들어간 케파이스테가 괴로워했다.

“으윽! 이게 뭐야! 내 몸이! 내 몸이 작아지고 있어!”
“크악 나도!”

살라두일은 마족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서둘러 본거지를 탈출했다.

그로부터 이십년이 지난 오늘날.
살라두일은 일족을 재건하는데 크게 힘쓰며 엘프들로부터 무리의 지도자로 추앙받게 되었고 추악한 과거를 숨긴 채 존경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
흉측한 괴물로 변하는 그의 병도 차츰 줄어들게 되어 어느순간부터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케파이스테에게 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레아의 결혼을 시작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엘프 부족들을 규합한뒤 케파이스테 그놈에게 꼭 복수하겠어! 두고 봐!”

살라두일이 이를 갈며 다시금 복수를 다짐하던 그때, 안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 왔어요 삼촌.”
“오, 아르키나!”

살라두일은 언제 인상을 썼었냐는듯 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레아는?”
“놓쳤어요.”
“놓쳤어?”
“네.”

고개를 숙이는 아르키나 앞에서 살라두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뜻대로 안되는구나.”
“다시 추격을 명령하신다면 정비한뒤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만 됐다. 이후부터는 내가 직접 나서마. 그보다 당장 해줘야할 일이 있다.”
“어떤 일이요?”

아르키나가 갸우뚱하며 묻자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아의 약혼자와 너도 혼인을 올릴 예정이다.”
“언니의 약혼자와 혼인을 하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에게 먼저 시집 가서 헤이라닌 일족의 후계자를 낳아주거라.”
“마, 말도 안돼……”

아르키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살라두일은 그녀의 양팔뚝을 붙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레아를 빼돌렸다지 뭐니? 헤이라닌족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우리의 진정성을 보여줄겸 너도 함께 혼인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단다. 우리 마을의 번영과 일족을 위해서 해줄  있지?”

아르키나는 멍한 표정으로 수차례 눈을 깜빡이다가 이윽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알겠습니다.”
“고맙다. 너야말로 진정한 야브라스족이야. 네 언니는 너무 철이 없다.”


얼마뒤, 정신나간 사람처럼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온 아르키나는 침대에 누워 깊은 고민에 잠겼다.

“결혼이라니…… 그것도 언니의 상대와 이중결혼……”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결혼하기 싫은데……”

갑작스레 찾아온 낙담적인 상황은 결국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를 부여했다.

“그냥…… 내가 그와 결혼하고 언니는 버나드와 결혼하는게 좋겠어. 그러는게 우리 자매한테 행복할테니…… 어쩔 수 없네.”

아르키나는 즉시 침대를 걸어나와 벽지 뒤의 숨겨진 방안에 마련된 수정구 앞에 앉았다.
‘그’와 처음 연락을 개통할때를 제외하고 무려 4년 만에 앉아보는 자리다.
그때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무 이상없다. 잘 보이고 잘 들린다.
“여기도 완료 입니다.”
-알았어. 레아를  부탁한다.
“한평생 쓸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언젠가 쓸일이 있었음 좋겠어.
“이만 끄겠습니다.”

이번 사건처럼 레아가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졌을때, 버나드에게 긴급히 연락해서 그녀의 행방을 캐묻고자 했던게 당시 설치 목적이었다.
즉, 우르프스 왕국의 왕 버나드와 직통으로 대화가 가능한 비상 연락 수단이 바로 이것.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졌네요.”

아르키나는 수정구에 양손을 얹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양손바닥에서 밝은 빛이 작게 뿜어져 나왔다.

“기쁜 소식을 전할테니 어서 수정구 앞에 앉으세요, 버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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