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레아11
***
오전에 줄리안이 집무실을 찾아왔다.
금실이 수놓인 검은색 바탕의 더블릿 상의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피곤해보이시네요.”
서류가 수북히 쌓인 책상에 앉아있던 버나드는 말대신 하품으로 대신했다.
줄리안이 심술궂게 웃었다.
“제가 권해드린 책들은 잘 써먹으셨습니까?”
그 순간 버나드는 어젯밤 일이 불현듯 떠오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돌린 시선의 끝에는 책장에 꽂힌 두 권의 책이 보였다.
“다른 사람인척 흉내내는 연기야 한창 공작활동 벌일때 통달하셨으니까 책속에 나온 비법 외우는 것 말고는 딱히 어려운건 없었죠?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소리나 늘어놓으면 되니까 쉬웠을테죠. 사랑한다, 황홀해, 끝내줘, 너 예뻐 등등.”
“……”
-즐거운 짝짓기를 원한다면 뻔뻔해져라!
-여성을 기쁘게 만드는 대화법
평소 자신의 무뚝뚝한 성격때문에 왕비들을 외롭고 지루하게 만드는건 아닌지 고민하던 버나드의 명령으로 줄리안이 구해다준 책들이다.
버나드는 이틀에 걸쳐 두 권을 완독했고, 어젯밤 책에 써진 기술들을 수차례 사용했었다.
“여길 봐 클레어. 우리가 하나로 이어져 있어.”
“헉! 헉! 클레어! 그대는 나의 진정한 여신이야! 으으윽! 싼다!”
“언제 방문해줄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참이었어. 계속 데보라만 생각했다니까.”
“빨리 벗고 이리와. 가슴을 빨면서 화끈하게 안아줄테니까.”
“아니 이게 누구신가! 천재 발명가 이드리스 왕비님이 납시었구려! 보고 싶었습니다!”
“발명품도 좋긴 하지만, 내가 가장 기분 좋은건 당신을 찌르는거야. 당신 몸안에 있을때가 제일 황홀하다고.”
“내 아이를 벌써 셋이나 낳아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괘씸한 년 같으니! 네 이름은 베아트리스가 아니라 포로번호 777번이다!”
“부끄러워? 솔직히 말해. 내게 귀여움을 받기 위해 이곳에 온거잖아. 그렇지?”
“샤를, 당신은 옆모습이 정말 아름다워.”
“이것봐 내 페니스가 당신때문에 섰잖아. 당신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어. 자기 전에 한번만 빨아줘.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해 달란 말이야.”
“내숭은 여자의 좋은 무기죠.”
“정성을 들이는 겁니다. 제일 맛 좋은 요리를 허겁지겁 먹어치울수야 없죠. 그것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물고, 뜯고, 핥고, 하나씩 정복해나가는 맛이 있어야……”
밤새 있었던 일들이 뇌리에 스쳐지나가자 버나드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안봤어.”
“안봤다고요?”
줄리안이 갸우뚱하더니 이내 실실 웃는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안본 눈치가 아닌데?”
책장 앞으로 가더니 두 책을 꺼내서 살펴본다.
“여기 본 티가 다 나는구만. 뭘 안봤다고 발뺌을 해요?”
“그냥 대충 훑어본 것 뿐이야.”
“창피해서 그래요?”
“피곤하니까 귀찮게 굴지말고 나가게.”
버나드가 인상을 쓰고 말했지만, 줄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침에 로잘리나 경이 전하의 침실에서 나오는 전하와 미셸님을 봤다더군요. 미셸님의 옷가지들을 검은망토에 둥글게 말아서 그녀의 방까지 운반해줬다면서요?”
버나드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그런 불필요한 내용은 남편이랑 공유하지 말라고 네 아내한테 전해!”
현재 보안사령관 줄리안의 밑에서 일하는 로잘리나는, 버나드의 그림자로 활동하며 왕과 관련된 추문이 발생하지 않도록 왕비들을 비롯해 왕이 만나는 여자들을 특별관리하는 역할을 수행중이었다.
즉, 어젯밤 버나드의 침실에 누가 다녀갔고, 얼마나 머물렀는지, 로잘리나는 어둠속에서 모든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왕족들이 머무는 건물의 출입을 막고 밤새 사람들을 통제했다.
만약 그녀의 철저한 감시가 없었다면 어젯밤 벌어진 일들이 오늘 아침 시녀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 했을지도 모른다.
“생이별도 이런 생이별이 어딨습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아침에 복귀신고할때뿐이라니. 내가 출근하면 그녀는 집에서 근무취침을 해야하고. 하아……”
장난섞인 줄리안의 넋두리에 버나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안갔나?”
“로잘리나 경이 전하를 무척 걱정하더군요.”
“왜?”
“미셸님과의 밀회를 그만뒀으면 하는게 소원이랍니다. 저보고 꼭 말해달라더군요.”
버나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없어.”
줄리안은 늘 그렇듯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 일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백성들은 물론 신전까지 나서서 전하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벽에 붙이고 도끼를 던질텐데요?”
“나는 그녀를 보고 욕정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왕비의 모친을 범하는 배덕감을 즐기는 변태도 아니고.”
“그럼 남은건 하나네요. 엄마의 젖이 그리운 마마보이.”
“줄리안!”
버나드는 소리치고 나서 목이 아픈지 인상을 쓰며 목을 어루만졌다.
“난 미셸을 엄마라고 생각 안해.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내 친구 같아.”
줄리안은 양손을 펼쳐보이며 눈썹을 위아래로 들썩였다.
“정답은 섹스프렌드였군요. 전하의 지치지 않는 정력이 부럽습니다.”
버나드는 그냥 그를 무시했다.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댄채 눈을 감았다.
“난 잘테니 멋대로 떠들게. 자네의 헛소리엔 익숙해서 자장가처럼 들리니까.”
“제가 납득이 가도록 설명을 해주세요. 왕국에 널린 젊고 아리따운 처녀들을 놔두고 왜 애 딸린 위험한 아줌마랑 잠자리를 하는 겁니까? 돈? 돈이야 넘치잖아요. 땅? 땅은 그녀보다 다섯 배는 크잖아요. 미모와 몸? 열살이상은 더 어린 왕비님들이 훨씬 낫습니다.”
“영리한 자네도 여기선 머리가 안돌아가나보군.”
버나드가 쿡쿡 웃었다.
눈을 뜨며 줄리안을 바라봤다.
“미셸님은 말일세. 너무 젊어. 나와 고작 두 살 차이지.”
“그래서요?”
“임신이 가능한 나이대이며 독신이란 점이 그녀의 강력한 무기야.”
버나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내다봤다.
“샤를 왕비는 이제 스무살. 그녀는 최소 40년은 아킨테 가문의 영원한 2인자로만 살아야 해. 아무런 권한이 없는 2인자일뿐이지.”
“아킨테의 미셸이 아직 30대니까 최소 40년은 더 살 것이다?”
“맞아. 따라서 난 그녀에게 연인이 생기는걸 경계하고 있어. 만약 그녀에게 연인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줄리안은 잠시 턱을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아킨테의 미셸이 아들을 낳게되면 그놈이 전재산을 독차지하게 되겠네요.”
“샤를은?”
“재산 한푼 못 받을지도 모르죠. 장남이 최고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애당초 샤를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여자야. 만약 아킨테 가문과 우리 왕가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면 그녀는 결코 중재를 잘할 성격이 아니야.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이 내가 최전선으로 나가 직접 미셸님을 관리하는게 최선이란 말일세.”
버나드는 검지손가락으로 줄리안을 가리키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제 내 마음이 이해되나?”
“아킨테의 미셸에게 연인이 생기지 않게끔 그녀의 외로운 마음을 대신 달래주시겠다?”
“딴놈이 아킨테 가문을 냅다 먹어버리면 내 큰 지지기반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셈이야.”
줄리안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웃었다.
“간만에 제 마음에 드는 일을 하시네요. 멋지십니다. 전 뒤에서 음흉하게 모략짜는게 너무 좋거든요.”
“알아들었으면 로잘리나 경한테도 잘 전해줘. 그리고 모략이 아냐. 나는 언제나 진심으로 미셸님을 대하고 있고 그녀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이 마음만은 진짜일세. 각자의 상황과 처지만 잘 맞았어도 아마 그녀와 정략결혼도 했을거야. 그러지 못해 아쉬울뿐이지.”
“욕 먹을까봐?”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버나드는 도로 책상에 앉으며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펜을 들고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오후에는 괴물을 토벌하러 나갈거야. 인근 마을에 사흘전부터 괴물들이 날뛴다는군.”
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또 직접 나가시는 겁니까?”
“왕으로서 최선을 다해야지.”
“기사들을 시키시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가능하면 내가 처리하려고 하네.”
“그러다 탈나요.”
버나드는 쓰는 것을 멈추고 줄리안을 바라봤다.
“난 백성들에게 두 가지 큰 빚을 졌어. 하나는 그릇된 왕을 도와 그자를 왕좌에 앉히는 바람에 나라에 큰 혼란을 초래했고, 두 번째는 백성들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 곡식과 그들이 낸 세금 때문에 나와 우리 가족들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지.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지금, 내가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뿐이야.”
“진짜 딴세상 사람 같아……”
줄리안은 버나드의 입바른 말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뭔데요?”
“매해 계속된 풍년때문에 갑자기 늘어난 괴물들을 모두 소탕하는 것과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탐관오리들을 때려잡는 것.”
줄리안이 싱긋 웃었다.
“전하께서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백성들이 알아야할텐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또 헛소리를 나불댈 것 같군. 보고 끝났으면 그만 나가게.”
“그럴 생각입니다. 여기 계속 있었더니 슬슬 두통이 오려고해요.”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나가려던 그가 멈춰섰다.
“아, 그러고 보니 서쪽 지방에 기반을 둔 워터그란드 가문의 장남이 전하를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왕의 눈에 들게하기 위해 지방 영주가 자식을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알현비를 지불해야했고, 금액은 영주의 능력에 따라 달랐다.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고 앉아서 공돈 버는건데 당연히 만나봐야지.”
버나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드리스가 만들어준 금빛 늑대 왕관을 머리에 썼다.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알현실은 천장이 높아 소리가 울리고 중앙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출구까지 길게 깔린 널따란 홀이었다.
튜닉에 망토를 걸친 젊은 기사와 몸매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새까만 로브를 입은 붉은 머리의 마녀가 버나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나드는 이드리스가 만들어준 다이아 옥좌에 앉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호기심을 갖게하는 마녀의 미모에 이어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게 있었으니, 기사의 바지가 볼썽사나울 정도로 볼록하게 텐트를 치고 있었다.
버나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바지는 왜 그런가?”
“아, 저, 그, 그게……”
기사는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전하께 감히 아뢰옵건데, 몸이 건강해서 그런지 아랫도리에 달려 있는 녀석이 자주 말썽을 일으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전하.”
“매음굴이라도 가보게.”
“그렇잖아도 여기 오기전에 잠깐 들렸다왔는데 금세 또 이럽니다…… 전하 앞에서 송구스럽습니다.”
“축복받은 건강이로고만.”
버나드는 오늘 새벽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다가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네 소개를 하라.”
기사는 긴장한 기색으로 크게 말했다.
“저, 저는 워터그란드 가문의 장남 디보크 라고 합니다! 오늘 오후에 괴물 토벌이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데려가주십시오! 큰 활약을 펼쳐 앞으로 계속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디보크의 말이 끝나자 옆에 나란히 서있던 붉은 머리 마녀가 보라색으로 짙게 칠해진 입술을 열었다.
“저는 마녀 힐그리테입니다. 디보크 경을 돕기 위해 따라왔습니다.”
들을땐 단조롭기도 하고 듣고 나면 뇌쇄적으로 들렸던듯한 느낌을 주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좌우간 버나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했다.
“디보크 경.”
“네!”
“오후 토벌에 합류하게.”
“가, 감사합니다! 제 활약을 꼭 지켜봐주십시오!”
디보크는 기뻐하며 자리를 떠났고, 힐그리테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알현실에 계속 남아있었다.
왕좌에 반듯하게 앉아있던 버나드는 그녀를 물끄러미 주시하며 물었다.
“짐에게 할 말이 남았는가?”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를 가진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듣는 귀가 많네요. 전하, 여기 말고 좀 조용한 곳에서 독대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버나드는 그녀의 당돌함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떤 대화가 하고 싶지?”
“마녀 멜라니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입문 근처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외쳤다.
“전하! 해괴한 주술을 부리는 마녀란 것들과 단둘이 계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옵니다!”
버나드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가 왕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괴며 힐그리테를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봤다.
“우르프스 왕조 건국사가 세상에 널리 퍼진 이후로 너 같은 자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봤다. 거짓과 날조를 고했다가는 널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다. 두렵지 않나?”
힐그리테가 요염하게 웃었다.
“네.”
버나드가 피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그리고 허공에 대고 외쳤다.
“란! 거기 있느냐! 당장 가서 내 마검을 가져와라!”
고양이처럼 생긴 란이 다이아 왕좌의 하단에서 작은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