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레아5
레아는 그녀의 제안을 한사코 거부했지만 에스텔라는 영주의 막사까지 따라들어왔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영주에게 부탁해 레아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분이 편히 대화나누시라고 저희가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춰드릴게요.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면 대화가 더욱 잘될거예요.”
영주의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앳된 얼굴로 헝겊인형을 끌어안고 있던 릴리가 기다렸다는듯이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소녀의 노래는 조용한 강물이 흐르듯 감미롭고 어둑어둑한 밤과 잘 어울렸다.
함께 곁들어진 에스텔라의 춤은 밖에서 본것처럼 야하지 않고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오오, 아름다워라!”
영주는 두 사람의 재주가 마음에 든듯 혼쾌히 합석을 허락했다.
레아는 황당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생면부지인 영주를 혼자서 독대하는 것보다는 에스텔라와 릴리 같은 제 3자와 함께 있는게 그나마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중년사내인 오그넨 영주는 뚱뚱했다.
후덕한데다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인상은 좋아보였다.
“갑작스레 만나자고 해서 놀라지는 않으셨는지요? 몇 가지 간단히 여쭙고 보내드릴테니 부디 양해를 바랍니다.”
오그넨 영주는 미소를 짓고 정중하게 말을 건네왔다.
레아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물어보고 싶으신거죠?”
“우리는, 전하의 명으로 4년전부터 어떤 여자 엘프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아, 오해는 마십시오. 나쁜 일은 아닙니다. 4년전, 전하께서는 즉위하시자마자 엘프 마을과 인접한 모든 영지들에게 은밀히 특명을 내리셨죠!”
오그넨 영주는 검지를 추켜세우며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레아라 불리는 여자 엘프가 영내에 들어왔을시 눈에 띄지 않게 잘 보호해달라! 라고 말입니다!”
레아의 눈이 커졌다.
“전하께서요?”
“네, 전하께서 말입니다. 티나지 않게 조용히 관찰한뒤 보고만 올리라고 당부하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건 아니다 싶은거죠. 신하된 도리로서 전하의 마음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하하하! 딱 봐도 전하께서 그 레아란 엘프에게 마음이 있으신것 같아서 말이지요! 즉 제 말은, 제가 직접 나서서 그 레아라는 분과 전하를 연결시켜드려야겠다 싶은 겁니다! 짝사랑! 아아 전하께서 다른 종족의 여인을 짝사랑하시다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일인가! 이종족과의 결혼을 혐오하는 일부 백성들한테 눈치가 보여 만나기도 쉽지 않고!”
영주는 손뼉을 마주치며 고개를 쭉 내밀었다.
“이 오그넨, 두 분을 이어주기 위해 사랑의 중매자를 자처했지요. 스스로 뿌듯합니다.”
그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한 나머지 반짝반짝 빛이났다.
“아리따운 엘프님께서 여기까지 오시게된 사정은 대충 이렇습니다. 혹시 성함이……?”
“레아입니다.”
“헉!”
오그넨 영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신이 레아? 아니 레아님이라고요?”
영문을 모르는 에스텔라는 춤을 멈추고 아리송한 눈길로 레아와 영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아가 당차게 말했다.
“제가 레아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저를 관찰하라고 하신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레아는 자신을 잊지 않은 버나드에게 감동하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저를 사랑하시니까요!”
“원래는 다른 사람인데, 이야기에 감동한 나머지 분위기에 휩쓸려 레아님이 되신건 아니겠지요?”
“제가 진짜 레아예요!”
“저, 전하께서는 레아님의 오른쪽 눈가에 눈물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잠깐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여기 있어요.”
레아는 뺨을 살짝가렸던 머리를 귀뒤로 쓸어넘겼다.
눈을 동그랗게 뜬 영주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폈다.
이내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 진짜다! 진짜 우측 눈가에 눈물점이 있어!”
너무 놀란나머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 사년을 고생하다 드디어 찾았어!”
“저도 전하가 보고 싶어요!”
레아는 기쁜 얼굴로 허리를 숙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던 영주의 두 손을 맞잡았다.
“어떻게 하면 그분께 빨리 갈 수 있죠?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소, 손 좀! 아리따우신 엘프분께서 갑자기 손을 잡아주시니 몸이 찌릿찌릿 합니다!”
“죄송해요!”
레아가 뒤로 물러나자 영주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때가 아니지! 내 예상은 정확했어!”
그는 뒤뚱거리며 곧장 책상으로 달려갔다.
“레아님께서 전하를 보고 싶어하신다고 당장 왕도로 비둘기를 날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책상에 철푸덕 앉아 빠르게 서신을 써내려갔다.
“전하! 당신의 피앙새는 제가 잘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레아님을 데려가고 싶으시면 빠른 시일내에…… 으응? 이러면 제가 무슨 인질을 붙잡고 협박하는 인질범 같군요. 수정합시다!”
잠시 후 열심히 적어내려가던 그가 퍼득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서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레아님임을 확실히 알아보실 수 있도록 간략히 한줄 정도 안부 말씀을 적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영주가 자리를 비켜주자 의자에 앉은 레아는 잠시 뭐라고 써야할지 고민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전하기로 다짐했다.
-멜라니아 할머니와 같이 왕도로 가는중이에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레아가 수줍어하며 쓰는 것을 마치자, 영주는 서신을 둘둘 말아서 작디 작은 전서통에 넣어 뚜껑을 닫은 다음 사람을 시켜 비둘기를 날려보냈다.
‘늑대님께서 꼭 보시기를……!’
레아는 밤하늘 멀리 날아가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가슴을 움켜쥐었다.
비둘기가 무사히 왕도에 닿기를 바라며 그녀의 눈동자 가득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장 노래라도 부르지 않으면 기쁨과 불안감이 뒤섞인 이 흥분된 마음을 어찌 달래야할지 방법이 없어보였다.
그녀는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아름답고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연인을 그리워하는 엘프의 노래였다.
“호오, 아름답도다!”
오그넨 영주는 레아의 노랫소리를 조용히 음미하며 하녀들에게 술을 가져오라 시켰다.
함께 있던 에스텔라와 릴리도 레아의 재주에 많이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영주의 막사 앞에서 부르는 레아의 노랫소리는 곧 밤하늘에 울려퍼지며 야영지 전체에 들려오는 가운데, 야밤에 각자 할일을 하고 있던 병사와 기사, 여행자들은 흐릿하게 들려오는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에 한동안 넋을 잃고 별들만 쳐다봤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부랴부랴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야영지 내에 짧은 소란이 일기도 했다.
***
허공을 날아가던 비둘기의 눈알이 붉게 물들었다.
비둘기는 돌연 방향을 틀어 야영지 근처 숲속으로 향했다.
깜깜한 숲속에는 무장을 한 아르키나가 병사들과 함께 대기중이었다.
아르키나가 손바닥을 내밀자 비둘기는 그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르키나는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있는 작은 전서통을 풀고는 비둘기를 날려보냈다.
마법이 풀리며 원상태로 돌아온 비둘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왕도쪽으로 날아가버렸다.
“미안해 언니.”
아르키나는 작은 통안에서 서신을 꺼내 읽어내려갔다.
버나드를 보고 싶어하는 언니의 간절한 글귀를 보고는 반사적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신을 와그작 구긴뒤 바닥에 던져버렸다.
“모두 준비 됐나요?”
“네!”
“예!”
“시작합시다.”
아르키나는 머리에 검은 두건을 둘러 인간처럼 위장한 병사들을 바라본뒤 근처의 나무기둥에 손을 갖다댔다.
짧게 주문을 읊조리자 기둥의 중심에 눈, 코, 입이 생기며 울창하게 자란 나무가 뿌리를 딛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신장이 무려 5미터에 달했다.
아르키나는 다른 나무에도 다가가서 똑같이 주문을 읊조렸다.
평범한 나무의 기둥에서 금세 두 팔이 뻗어나와 밑동의 뿌리를 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우우우…… 레아…… 포획…… 알겠다……”
그런식으로 아르키나가 나무정령을 앞세워 야영지를 덮치려는 무렵, 레아는 막사에서 차를 마시며 영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실례되는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정말 궁금해서 말입니다. 엘프들은 고립된 지역에서 살아가는 특성상 마을 전체가 핏줄이 같은 형제고 그래서 근친혼이 자리잡고 있다던데 사실입니까?”
“오래전 그런 풍습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에스텔라가 끼어들었다.
“영주님, 엄청 결례되는 발언이신데요?”
“그, 그런가요?”
당황한 오그넨 영주가 헛기침을 했다.
“실은 반세기전 저희 할아버지께서 영지를 다스리고 계실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괴물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엘프의 근친혼으로 태어난 돌연변이 괴물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했었는데, 어쨌든 할아버지께서는 끝내 그 괴물을 죽이지 못하셨드랬죠.”
레아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그러면 괴물이 아직도 살아있나요?”
“아뇨. 다행히도 괴물은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는걸 목격했다고 하는데 한 사람만의 증언인지라 사실여부는 모릅니다. 아무튼 난동을 부리던 녀석이 사라졌으니 할아버지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지금 생각난 김에 여쭤보는데 혹시 그 괴물을 엘프 마을에서 보신적이 없으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레아가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한 기사가 막사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영주님!”
“무슨 일이길래 그리 숨을 헐떡이느냐?”
“야영지가 커다란 나무정령을 부리는 도적단에게 공격 받고 있습니다!”
“뭣이 도적단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만!”
영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즉시 레아를 돌아봤다.
“호위병을 붙여줄테니 여기 계십시오. 당장 가서 놈들을 처부수고 오겠습니다!”
영주가 말을 마치는 순간 천막이 찢어지며 천장에서 여러가닥의 나무줄기가 내려왔다.
“으악! 이게 뭐란 말이냐! 놔라 이놈!”
나무줄기는 빠르게 영주의 뚱뚱한 몸을 휘감고는 그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찢어진 천장을 통해 영주를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붙잡혀간 영주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이 몸은 고소공포증이 있느니라! 내려놔아아아아아아!”
“우리 영주님을 내려놔라 이놈들아!”
기사가 고함을 지르며 칼을 뽑고 뛰쳐나갔다.
이어 막사 밖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영주와 기사의 것이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칼을 부딪히는 쇳소리도 곳곳에서 나는걸 보니 단순히 한 두 명이 아닌 다수가 침입한 모양이었다.
“우리 일족이야……!”
레아의 안색이 굳어지며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날 쫓아왔어!”
에스텔라가 헝겁인형을 안고있는 릴리의 몸을 감싸안으며 다급히 물었다.
“일족이라니?”
“내가 떠나야 해요. 제가 여기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쳐요!”
레아는 즉시 보석상자가 든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며 발걸음을 옮겼다.
“레아……? 우리도 같이가!”
에스텔라는 릴리의 손을 붙잡고 레아를 따라나섰다.
세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야영지 곳곳에 불길이 가득했고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정체 모를 자객들과 싸우는 늠름한 기사들을 비롯해 영내를 마음껏 활보하며 막사를 때려부수는 거대한 나무정령이 보였다.
아기를 안고 급히 달아나는 애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인간들에게 해를 입혀선 안돼!”
레아는 가슴 아파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난 여기 있어! 날 잡으러 와! 내가 레아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엘프들이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레아는 황급히 야영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신을 따라오게 해서 야영지의 피해를 줄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처 야영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엘프 자객들에게 둘러싸였다.
“레아님! 모시러 왔습니다!”
“저희와 같이 돌아가시죠!”
“이 짓을 멈추세요! 인간들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됩니다!”
“어차피 저들은 우리를 도적단으로 알테니 염려마십시오!”
뒤따라온 에스텔라와 릴리가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레아를 보호했다.
“곤란해 보이네? 이놈들이 누군지간에 우리한테 맡겨. 우린 동료잖아.”
“동료?”
“그래, 동료.”
에스텔라가 윙크를 날리더니 릴리를 내려다봤다.
“부탁해, 릴리.”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에스텔라가 양손을 뻗어 레아의 귀를 막았다.
“실례할게. 좀 시끄러울거거든.”
릴리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쇳소리처럼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를 뒤흔들었다.
“윽!”
“크악!”
엘프들은 전원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했다.
레아는 놀란 눈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어떻게 된거죠?”
“내 동생의 비밀 무기지. 뭐해? 얼른 도망가자.”
비명 소리가 끝나고도 엘프들이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 세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그러나 야영지를 빠져나오자마자 또 한차례 엘프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이번에는 에스텔라가 직접 나섰다.
“내 춤에 홀리지 않는 자가 없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한 에스텔라는 각종 무기를 든 적들 앞에서 대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은 아주 매혹적이었다.
상체가 흔들릴때마다 젖가슴이 탄력을 자랑하며 세차게 출렁거렸고, 적들에게 다가가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거칠게 골반을 흔들어 그들의 하반신에 엉덩이를 비비며 애간장을 태웠다.
“이, 이런 놀라운 춤은 처음 봐……!”
에스텔라의 춤에 순식간에 홀려버린 엘프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모두 제자리서 얼어버렸다.
그러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들처럼 하나같이 정신상태가 멍해졌다.
“나…… 여기 왜 있는거지…… 뭐하러 왔더라……?”
“여긴 어디지…… 나른해……”
“내 페니스는 왜 커진거야…… 뭐지……”
춤의 마력이 발동하자 에스텔라는 즉시 춤을 멈추고 레아를 돌아봤다.
“지금이야!”
레아는 옆에 있던 릴리의 손을 붙잡고 잽싸게 뛰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야영지를 벗어나 무사히 탈출하는가 싶었는데, 정처없이 무작정 들어간 숲에서 아르키나와 맞닥뜨렸다.
“언니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얌전히 돌아가자.”
“너부터 그만둬 아르키나! 인간들을 다치게 하지마! 병사들을 물려!”
“언니가 돌아오면 돼.”
화려한 금빛활과 화살통, 단검, 가죽옷으로 완벽 무장을 한 아르키나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달은 에스텔라가 다급히 소리쳤다.
“릴리!”
“응!”
비명을 지를 생각에 릴리가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아르키나는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쏜살같이 날아온 사탕이 릴리의 목구멍속으로 들어갔다.
꿀꺽!
“컥!”
릴리는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던 에스텔라가 빠르게 나섰다.
“레아는 오늘부터 우리의 동료야! 동료의 위험을 모른척 할 수 없지!”
에스텔라는 아까처럼 최선을 다해 허리를 흔들며 매혹적인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효과가 없는지 빤히 춤을 바라보던 아르키나는 곧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시시해. 다른거 더 없어?”
그러자 힘이 빠진 에스텔라는 추던 것을 멈추고 시무룩한 얼굴로 레아를 돌아봤다.
“사실 내 춤은 여자한테 안통해.”
퍽!
아르키나는 그녀의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레아를 마주보고 섰다.
“일이 더 커지는걸 원해? 돌아가자 언니.”
레아는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그가 있는 곳이야.”
“……”
레아를 지그시 바라보던 아르키나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등에 메고 있던 활과 화살통을 바닥에 버렸다.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겠네. 안심해. 언니는 싸울줄 모르니 심하게 하진 않을게.”
레아는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아르키나를 이기는건 불가능해! 어떡해야하지?’
한결 몸이 가벼워진 아르키나가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무기를 사용하면 다치잖아. 그러니 맨손으로 제압해줄게.”
레아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버나드를 떠올렸다.
‘어떡해야 하나요? 제게 힘을 주세요 제발! 당신이 보고 싶어요!’
속으로 애절하게 외치던 그때였다.
레아는 안광을 번뜩이며 몸이 얼어붙었다.
“!”
오래전 버나드와 함께 했던 장면이 불시에 떠오르며 그녀의 머릿속은 강제로 재경험에 빠져들었다.
오전 훈련으로 지쳐있던 레아는 잡초가 무성한 바닥에 드러누워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버나드가 다가왔다.
그는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휴식 끝났으니 일어나. 지금부터 맨손 격투를 가르쳐주마.”
“얼마나 쉬었다고 또 해요? 이제 고작 5분 지났어요.”
“5분이면 충분히 쉰거야.”
“일어설 기운도 없다고요.”
“불평하지마. 전하와 백성을 위해 우리는 수련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네가 매일 먹는 밥,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 우리가 쓰는 무기하며 우리 백성들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중얼중얼)”
레아는 버나드의 잔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단장님은 정말 벽 같은 사람이라니까.”
“힘들어도 열심히 하는 이 성실한 성격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자랑이에요?”
“응, 자랑이다. 그리고 난 벽이 아니고 사람이다. 사람보고 벽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국어 공부를 똑바로 해.”
“농담도 안통하니 미치겠어.”
레아는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나 기운없이 말했다.
“빨리 시작해요. 얼른 끝내고 쉬게.”
“서두르지 마. 그러니까 맨손 격투는 말이지……”
버나드에게 격투를 배우던 나날들의 기억은 고스란히 되돌아와 지금의 레아에게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회상을 끝낸 레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세를 고쳐잡으며 아르키나를 힘 있게 응시했다.
“덤벼, 동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