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레아4
기세 좋게 날아가고 있던 실라르가 갑자기 크게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밑으로 추락해버렸다.
“꼬꼬댁!”
“실라르!”
레아는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는 실라르의 등위에서 민첩하게 뛰어내렸다.
높이 자란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그녀는 서둘러 밑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지면으로 추락한 실라르의 커다란 몸뚱이를 풍성하게 자란 덤불이 떠받쳐주고 있었다.
“휴, 살았어.”
레아는 나무에서 내려와 실라르가 덤불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실라르의 상태를 살펴본 결과 우측 날개에 두 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삼촌에게서 탈출할때 화살에 맞은 모양이다.
“치료가 필요해. 근데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지……”
“레아! 난 괜찮아! 걷는다! 걷는다!”
“아냐, 이대로 놔두면 상처가 덧날거야. 잘못하면 평생 못 날수도 있어.”
“꺼억! 못 날면 안된다 꼬꼬댁!”
레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처에 바를 약초가 없나 꼼꼼이 찾아다녔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와중에 늑대 세 마리가 소리없이 나타났다.
늑대들의 눈빛은 험악하거나 굶주린 그것이 아니었다.
엘프인 레아가 풍기는 상냥한 냄새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이곳에 온 것이었다.
늑대들은 실라르의 상태를 보더니 레아를 쳐다봤다.
그러곤 따라오라는듯 뒤돌아서며 숲속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저쪽에 뭔가가 있나봐. 가보자. 걸을 수 있겠어?”
“걷는다! 걷는다!”
레아와 실라르는 서둘러 늑대들을 따라갔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반딧불처럼 밝은 빛을 뿜어대는 작은 요정들이 날아다니는 정령의 샘이었다.
“와, 이런 곳에 정령의 샘이 있었다니!”
요정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레아와 실라르를 보더니 이내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얼굴 주변을 날아다녔다.
“꺄르르!”
“안녕, 난 레아야.”
레아는 요정들에게 인사를 건넨뒤 늑대들을 쳐다봤다.
“고마워.”
늑대들은 말없이 바라만 보더니 금세 어디론가 떠났다.
레아는 옹달샘 근처에서 물속을 들여다보던 실라르를 쳐다봤다.
“물고기도 있다! 먹고 싶다!”
“실라르, 당분간 여기에 머물면서 상처를 치료해. 요정들이 도와줄거야.”
“레아는?”
“난 떠나야 해.”
“안된다! 나도 간다!”
“날개가 다 나을때까지 안돼.”
“레아가 걱정된다! 꼬꼬댁!”
“난 괜찮을거야.”
말을 마친 레아는 정성을 다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치료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정령의 언어였으며, 요정들은 노래에 반응하며 즐겁게 춤을 추다가 일제히 실라르에게 날아갔다.
“히히.”
요정 하나가 작디 작은 주머니에서 빛나는 가루를 꺼내 실라르의 콧등에 흩뿌리자, 실라르는 몇 번 기침을 하다가 금세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샘 근처에 높이 자라있던 고목나무에서 수백가닥의 줄기가 내려오더니 잠든 실라르의 몸을 휘감았다.
실라르는 나무 줄기속에 완전히 갇힌 채 위로 들어올려지며 울창한 나무속으로 사라졌다.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줄기안에서 이틀 정도 자다가 깨어나면 그의 다친 날개는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레아는 안도하며 미소지었다.
“실라르를 잘 부탁해.”
그녀는 요정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뒤 정령의 샘을 떠났다.
애당초 실라르를 인간 세상으로 데려가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인간들에게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고, 실라르가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마을로 돌아가 엘프들과 지내는 것이 실라르를 위한 길이란걸 알기에…… 레아는 홀로 떠났다.
***
레아는 해가져도 쉬지 않고 이동했다.
하루 수면 시간은 단 두 시간이 고작이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여행길에 그나마 활력을 불어넣어주는게 있다면 단언코 자는 시간이었다.
하루 두 시간의 취침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잠을 자면 버나드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일밤 버나드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전날 꿈속에서 버나드를 만나고 나면 아침에 깨고나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아울러 날이 갈수록 버나드를 만나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커져만 갔다.
풀과 이슬만 먹고 사는 생활이 나흘째, 엘프의 영역을 벗어나기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노력한 끝에 그녀는 마침내 인간 세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어두운 밤, 언덕위에 자란 나무옆에 서 있던 레아는 저 멀리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여러대의 마차와 수레, 짐을 짊어진 당나귀라든지 가축들, 여행자들이 줄지어 서서 야영지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면서 얼마전 멜라니아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들이 운영하는 플랫폼을 찾아 함께 이동하거라. 비교적 안전한 여행길이 될거야.’
레아는 언덕에서 뛰어내리며 곧장 플랫폼으로 향했다.
인간의 언어를 할줄 몰랐으나 멜라니아가 적어준 쪽지가 있어서 그것만 믿고 무작정 다가갔다.
-우르프스 왕국의 왕도까지 갑니다. 요금은 손가락 제스쳐로 말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인간의 화폐는 멜라니아가 준게 있어서 걱정없었다.
‘낄낄, 예전에 늑대의 정액을 팔아 번 돈이지. 이 돈이면 웬만한 영지는 통째로 살거야. 양이 많아 무거우니 아공간속에 넣어두고 다니거라.’
야영지 입구에 다다르자 검문을 대기중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녀도 똑같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주변에는 갓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남루한 행색의 여자라든지 어깨에 짐을 짊어진 여행복 차림의 남자, 술병을 홀짝이며 자신의 짐수레에 기대고 서 있는 털보 사내도 보였다.
그들 가운데 레아를 특별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몸에 두른 갈색 로브에 달려있는 후드를 뒤집어 써서 뾰족한 양귀를 가렸기 때문에 주목 받을 일이 없었다.
줄이 점점 줄어드는 사이 레아는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귀는 쫑긋 세워져 주변의 잡다한 소리를 전부 주워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갑자기 조금씩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뭐지? 난 인간의 언어를 배운적이 없는데……?’
의문을 품던 그 순간, 버나드에게 인간의 언어를 배우던 옛시절이 불현듯 뇌리에 스쳐지나가며 그녀는 깨달았다.
‘배운적이 있었구나! 맞아! 발음은 이렇게 하는거였어!’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혼잣말을 중얼대기 시작헀다.
“과자…… 사과…… 사랑해…… 늑대…… 레아…… 나 좋아요…… 반가워……”
레아는 줄을 서서 대기하는 와중에 빠른 속도로 우르프스 왕국의 언어를 터득해 나아갔다.
“우르프스 왕국의 왕도까지 갑니다. 얼마죠? 우르프스 왕국의 왕도까지 갑니다. 얼마 입니까? 우르프스 왕국의 왕도…… 아이다썬까지 갑니다. 이 플랫폼은 어디까지 가나요?”
이윽고 그녀는 우르프스 왕국의 언어를 완벽히 터득했다.
“나 정말 인간 세상에서 지냈었나 봐.”
신이 난 얼굴로 즐거워하며 멜라니아가 적어준 쪽지를 고이접어 주머니속에 넣었다.
이제 필요없었다.
그녀는 당장 아무나 붙잡고 대화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에 띌 것을 우려하며 들뜬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는 사이 어느덧 앞에 세 사람이 남았다.
“오~ 우리에게 동전을 던져주세요~♬ 우리는 연약한 떠돌이 자매~♬”
야영지 입구에 피워진 모닥불 근처에는 한 소녀가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주변을 돌며 춤을 추고 있는 여자도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색을 자랑하는 여자는 소녀의 노래에 맞춰 아름답고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잘 춘다……”
레아는 자신이 배운 엘프의 춤과는 다른 인간의 춤을 몰입해서 바라봤다.
엘프의 춤은 순수하고 깨끗하다면 눈앞의 여자의 춤은 섹시하고 강렬했다.
그녀가 손을 휘저으며 다리를 뻗을때마다 육감적으로 흔들리는 젖가슴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들 모두 넋놓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남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헤벌쭉한 얼굴로 소녀와 여자 앞에 놓인 빈 그릇에 동전을 던져넣는 자들도 많았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곳에 왔다네~♬ 오늘밤 우리를 보살펴줄 이는 어디 없을까~♬”
후렴부에 이른 소녀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고,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붉은 머리 여자의 섹시한 춤도 끝이났다.
사람들은 박수를 쳐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레아는 검문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후드 내리고 얼굴을 보이시오.”
“네?”
병사의 말에 레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꼭 벗어야 하나요?”
“당연한걸 왜 묻소? 당신이 누군줄 알고 받아?”
잠시동안 레아는 당황스런 감정과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휩싸여 행동을 망설였다.
하지만 튀는 행동을 해봤자 더 오해만 살뿐이었다.
“알았어요.”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후드를 벗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함께 뾰족한 양귀가 드러났다.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예뻐!”
그녀의 얼굴을 본 다른 사람들도 탄성을 자아냈다.
“헐, 엘프다!”
“우와!”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병사는 냉큼 얼빠진 표정을 고치고 크게 소리쳤다.
“다들 조용! 조용! 검문에 방해되니 조용히들 해주시오!”
그가 헛기침을 했다.
“흠, 엘프시군요.”
“혹시 엘프는 플랫폼을 이용할 수 없나요?”
“아뇨, 아뇨! 무슨 그리 서운한 말씀을! 저 딴 못믿을 부랑자들보다 오늘 처음 만난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의 신용이 백만배는 낫습니다! 엘프의 이미지는 착하고 순수하니까요!”
그는 중얼거리며 사족을 덧붙였다.
“책으로만 엘프를 접한 제 생각에는 말이죠. 흠흠.”
멀뚱히 서 있던 다른 병사가 끼어들었다.
“근데 엘프 여자면 검문이 더 까다롭긴 합니다. 남자 엘프는 쉽게 통과가 되는데, 여자 엘프는 가능한 신원을 파악해두라고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거든요.”
레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죠?”
“글쎄요. 그건 영주 님께 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 같네요. 우리 영지를 방문한 여자 엘프는 발견 즉시 영주님께 알리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분과 만나 면담도 해야되구요.”
“그런……”
잠시 고민하던 레아가 웃으며 말했다.
“저 돌아갈게요. 실례했습니다.”
“안됩니다. 여자 엘프는 영주님을 뵙고 가야하는게 우리 영지의 법입니다.”
“저는 인간이 아닌걸요. 인간의 법은 제게 효력이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단순히 질문 몇가지만 하고 돌려보내주실거예요. 전에도 몇 번 그랬거든요.”
병사들은 그녀를 은근 슬쩍 둘러싸며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곤란한 상황에 닥치자 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라도 들어볼까.’
결국 그녀는 한 병사를 따라 야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야영지 곳곳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어서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는 길에 잘 길러진 군마를 비롯해 투석기 같은 병기도 세 대가 보였다.
사방에서 무장한 기사와 종자들이 빼곡히 돌아다니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레아가 지나칠때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뒤를 돌아보며 감탄하기 일쑤였다.
“밤인데도 철소리로 시끄럽고 좀 삭막하죠?”
“좀 그렇긴하네요.”
“곧 있을 전투를 앞두고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 그래요.”
레아를 안내하는 병사가 말하길, 자신들은 현재 영내에 나타났다는 거대한 벌레를 잡으러 가는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요몇년 풍작이 계속되서 그런지 괴물들도 살맛났나봅니다. 백성들이 굶고 살았을때보다 더 늘어난 느낌이에요. 덕분에 용병들만 신났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여비를 벌기 위해 영주가 잠깐이나마 플랫폼을 운영하는 것이라고.
“얘, 이름이 뭐니?”
병사를 따라가는 와중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자 아까 춤을 추던 여자가 헝겊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와 함께 자신을 뒤따라오는중이었다.
“난 에스텔라. 여기 이 아이는 릴리. 너는?”
병사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에스텔라. 지금 일중이니까 돌아가.”
“영주님 뵙기 전에 잠깐 대화도 안돼?”
“빨리해 그럼. 빨리 빨리.”
병사는 귀찮은듯 다시 정면을 보며 걸어갔고, 에스텔라는 옆으로 다가와서 나란히 걸었다.
“넌 정말 아름답게 생겼어.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 이름이 뭐야?”
레아는 의아하게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 대답했다.
“레아.”
“레아? 얼굴처럼 예쁜 이름이구나. 어디서 왔어? 아 물론 엘프 마을에서 왔겠지. 여기 영지는 엘프의 숲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까. 너 혹시 우리 같은 무희가 되지 않을래? 춤에 자신 없으면 릴리처럼 노래만 불러도 좋아.”
“네……?”
레아가 어리둥절해하자 에스텔라가 밝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우린 나쁜 사람이 아니야. 널 섭외하러 온거야. 내 훌륭한 춤과 네 우월한 미모 마지막으로 우리 릴리의 황홀한 노래까지!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춤과 노래로 세상을 씹어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한껏 기대하는 그녀와 달리 레아는 별 흥미없는 표정으로 즉각 대답했다.
“미안해요. 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그래, 많이 고민되는 일일거야. 내일 아침까지 시간을 줄게. 잘 생각해 봐.”
그녀가 말귀를 못알아듣자 레아는 목에 힘을주며 확실히 말했다.
“안해요.”
그러자 에스텔라는 기지개를 켜며 능청스럽게 하품을 했다.
“오늘 춤을 너무 췄더니 피곤하다. 빨리 가서 자야지.”
그러고는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팀에 들어오는게 싫으면 우리가 널 따라다녀도 돼? 어느 지방에 갈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