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2화 〉레아3 (182/200)



〈 182화 〉레아3

밝은 대낮.
레아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온몸의 힘을 짜내 마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중이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이렇게까지 멀리 나온 적이 없다.
첩첩산중이라 길도 없어서 어느쪽이 우르프스 왕국으로 향하는 방향인지도 몰랐다.
갈팡질팡 길을 헤매다 우여곡절 끝에 새 길을 찾고, 자신이 선택한 방향이 맞는 길인지 혼란스러워하다 불안감이 엄습하려 할때면 으레 멜라니아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저는 할줄 아는게 결혼을 위해 배운 노래와 춤 밖에 없고 여동생 아르키나와 달리 무예에 소질이 없어요. 제가 마을을 떠났다는걸 알면 헤이라닌족과의 파혼을 우려한 삼촌이 분명 잡으러 올텐데 괜찮을까요?”
“그건 걱정 말거라. 과거에  같은 아이가 또 있었어.”
“저 같은 아이라니요?”
“늑대지.”

멜라니아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죽고난 후 늑대도 나쁜 왕에 의해 무예에 대한 지식이 전부 지워졌었다. 하지만 강렬한 자극을 받을때마다 소실된 기억들이 하나씩 복원되었지. 마법으로 머릿속 기억이 지워졌을지언정 몸속 세포가 가진 기억까지 지워진건 아니야. 네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이전에 학습된 무예와 경험을 기억하고 있을거란다.”
“제가 무예를 익혔다고요?”
“너는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였단다.”
“!”

레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노래와  밖에 모르는 내가 전사……?”

멜라니아는 자못 기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럼. 게다가 고양이처럼 민첩하고 조용히 움직이며 많은 이들을 암살하고 다니던 자객이기도 했지.”
“말도 안돼!”

레아는 크게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심지어 엘프 주제에 육식도 거리낌없이 하던 아이였다니깐? 네가 엘프의 요리가 입맛에 안맞는 이유가 뭔줄 아니?  늑대의 취향대로  놈이 좋아하던 양갈비 스테이크를 즐겨 먹었던 아이여서 그래. 풀 따위는 일절 쳐다보지도 않았지.”
“오! 신이시여! 엘프의 친구를 잡아먹은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레아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경악했다.
멜라니아는 낄낄 웃으며 계속 말했다.

“식성이 변하지 않았다는건 네 몸이 아직도 무예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지. 염려 말거라.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잘 극복해낼테니. 그리고 나도 무겁지 않을거야.”
“네?”

멜라니아는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보라고 말했다.
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자  안에 보석상자가 들어있었다.

“아공간 상자란다. 네 몸을 보관하고 있던 장소지. 나도  안에 들어가 있으면 데리고 다니기 편할거야.”
“이 작은 상자안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니……”

레아는 한동안 보석상자를 바라보다 멜라니아를 돌아봤다.

“이 안에 들어가 계시면 몸 상태가 더 나빠지거나 그런건 없나요?”

삼촌 살라두일의 말에 의하면 멜라니아의 생명은 길어야 사흘이라고 했다.
우르프스 왕국까지 가려면 최소 몇 주, 어쩌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멜라니아가 살아있기는 힘든 일.
이에 멜라니아는 가볍게 웃으며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네게 고향으로 데려가달라 부탁할 생각에 지난주에 미리 만들어놓은 약이 있지. 내 몸에 그 약을 주사해주렴. 벽에 걸린 선반에 녹색병이 있을거란다.”

레아는 선반에 놓인 녹색병을 집어들었다.

“이게 무슨 약인데요?”
“사람의 체온을 영하로 낮추어서 신진대사를 멎게하고 동면을 시켜주는 약이지. 그 약을 주사하는 순간  몸은 지금  상태 그대로 꽁꽁 얼어붙을 것이란다. 단 저체온을 유지하는 기간은 대략 6주. 그 이상은 견디기 어렵다.”
“6주 안으로 우르프스 왕국의 왕도에 도착해야하는 건가요?”
“그렇지. 죽기 전에 늑대의 얼굴이라도 보고 죽게 해주렴. 물론 무리한 부탁이란걸 안다. 부질없는  희망일뿐이야. 고향에 묻힐 수 있다는 것과 그 얄미운 늑대의 뺨을 반드시 꼬집어주겠다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나는 편히 잠들거란다. 실패하면…… 어차피 나는 잠든 상태로 죽기때문에 실패했다는 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웃고 있겠지.”

레아는 입술을 앙다물며 의지를 불태웠다.

“희망을 현실로 이루어드릴게요. 저는 꼭 해낼거예요.”

잠시  멜라니아와 함께 보석상자의 아공간속으로 들어간 레아가 약을 투여하자, 멜라니아는 본인이 말한대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설레임 때문인지 웃는 표정으로 편히 잠들었다.
레아가 버나드와 만났는지 못만났는지의 여부는 그녀가 언젠가 알게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영영 모를 수도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지금 희망을 품고 잠들었고 설령 이대로 죽는다할지라도 계속 희망을 품고 있으리라는 것.
결과가 어찌되든 편히 잠든게 아닐까.
그녀의 몸은 급속도로 차가워졌으며 나중에는 꽁꽁 언것처럼 단단해졌다.

그렇게 멜라니아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험한 산속을 헤쳐나가던 무렵, 레아는 뛰던 것을 멈추고 우뚝 멈춰섰다.

“헉, 헉.”

평소에 무거운걸 들어본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멜라니아가 잠들어 있는 보석상자가 싸여진 작은 보따리와 장궁, 거기에 기다란 화살통까지 등에 메고 뛰려니 무척이나 무겁고 힘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는 땀에 젖어 이마와 뺨에 들러붙어 있었고 붉은 옷자락 역시 땀에 흠뻑 젖은  움직이는데 걸리적 거렸다.

부스럭.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났다.
급히 뒤를 돌아보자 남엘프 셋이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레아님.”

레아는 황급히 활을 빼들었다.

“오, 오지마세요!”

남엘프들은 레아를 만만히 보는지 전혀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친절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대했다.

“저희와 돌아가시지요. 마을까지 호위해드리겠습니다.”

그들이 거리낌없이 다가오자 레아는 황급히 시위에 화살을 메기며 정면을 겨누었다.

“멈춰요! 가까이 오면 쏘겠어요!”
“레아님, 저희는 레아님을 보호하러 온겁니다.”
“살라두일님과 아르키나님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경계하지 마시고 활을 내려놓으십시오.”

세 엘프가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자 레아는 주저없이 시위를 당겨버렸다.
그녀의 마음 같아서는 위협삼아 그들의 발앞을 맞출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어이없게도 엉뚱한 곳으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레아의 형편없는 실력을 본 세 엘프들은 미소를 지으며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저는 활을  레아님보다 춤을 추는 레아님을 더 좋아합니다.”
“저도요. 춤과 노래를 부를때의 당신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남심을 뒤흔들 정도로 황홀하지요.”
“그만 오라니까요!”

휘익!
레아는 재차 화살을 쏴날렸다.
이번 만큼은 경고 사격이 아닌 나름 조준 사격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버렸다.
세 엘프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레아님, 활을 내려놓으십시오. 생명을 죽이는 활은 레아님처럼 아름답고 신성하신 분이 가까이할 무기가 아닙니다.”
“날 우습게 보지마세요!”

레아는 활을 집어던지고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칼은 사용법이 쉬워요! 다치기 싫으면 물러나세요!”

단검을 허공에 휘저어 보이는 그녀의 용맹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 엘프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계속 그러시면 강제로 모실 수 밖에 없습니다. 부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칼을 내려놓으십시오.”
“당신들이 얌전히 떠나는게 더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되네요. 그러면 다치는 자가 아무도 없을테니!”
“저희는 레아님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마을을 떠나려는 생각을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모두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당신들도 마찬가지고요! 신뢰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레아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레아님을 위해서고요.”

가운데에 서 있던 엘프가 눈짓을 하자 양쪽에 있던 두 명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달려들었다.

“꺄악!”

레아는 신속히 대응하기는 커녕 두려운 나머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날 내버려 둬!’

속으로 절규하듯 외치던 그때였다.
잊혀졌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며 그녀를 지금으로부터 18년전 동굴로 안내했다.
당시 동굴에서 살던 순진한 소녀였던 레아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버나드는 그 보답으로 그녀에게 매일 무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남자보다 힘이 약하고 체격도 작은 여자들의 불리한 신체 조건상 한번 붙잡히면 끝이다. 고로 붙잡히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해.”

버나드는 눈앞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시범을 선보이며 레아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은 온전히 레아의 머릿속으로 되돌아와……
지금의 그녀와 하나가 되었다.

‘뭘 해야할지 기억났어!’

레아는 빛처럼 빠른 속도로 정신의 안정을 되찾고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번개처럼 움직였다.
왼쪽에서 뛰어오는 엘프가 부둥켜 안으려는듯이 두 팔을 쭉 뻗었다.
레아는 쏜살같이 주먹을 날려 그의 턱주가리를 가격했다.
퍽!

“으악!”

왼쪽 엘프가 턱을 잡고 휘청이는 사이 레아는 빠르게 오른쪽을 돌아보며 코앞까지 도달한 다른 엘프의 낭심을 걷어찼다.

“악!”

중요한 부위를 걷어차인 엘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펄쩍 펄쩍 뛰었다.
레아는 이어 고통스러워하는 두 엘프에게 연달아 타격을 가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녀의 현란한 몸놀림에  엘프가 어이없이 당하자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엘프가 혀를 찼다.

“제법이시군요.”

그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성큼성큼 다가오자 레아는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간 단검이 그의 허벅지에 귀신같이 꽂혔다.

“크윽!”

엘프는 다친 허벅지를 붙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세 명을 제압한 레아는 자신도 몰랐던 솜씨에 감탄하며 환하게 웃었다.

“내게 이런 실력이 있었다니!”

가슴이 연신 들썩이며 흥분이 멈추지 않았고 심장은 벌렁거렸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한히 솟구쳤다.
그런 와중에도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 은인을 향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할머니.”

레아는 등에 메고 있던 화살통을 던져버린 다음 저벅저벅 걸어가서 바닥에 쓰러진 엘프의 칼집을 빼앗아 자신의 허리에 찼다.
그 다음 자신의 상의 밑부분을 부욱 찢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집을 허벅지에 매달고  묵었다.
상의가 찢어져 매끈한 아랫배와 배꼽이 드러나 조금 춥다 느껴질 정도로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몸이 가볍고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현재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기억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버나드가 그리하라고 일러준게 떠올랐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활보다 칼을 더  다뤘다. 활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장비는 모두 버렸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제발 떠나지 마십시오!”
“난 가야만해요.”

레아는 허벅지에 단검이 꽂힌 엘프를 안쓰럽게 내려다봤다.

“다치게 해서 미안해요. 꼭 치료 받으세요.”

고통스러워하는 엘프의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아든 다음 피를 털어내고 단검집에 꽂았다.
곧이어 등에 비스듬히 둘러메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단단히 조여맨뒤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레아는 전보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불규칙한 지형을 훌쩍 뛰어넘고 순발력있게 방향을 바꿔나가며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근처에  다른 추격자들이 있었다.

“저기 계신다!”
“이쪽이야! 이쪽!”

나무가 무성히 자란 사방에서 엘프들이 바쁘게 소리쳤다.
이번에는  수가 상당했다.
레아는 둘러싸이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생각에 무리해서라도 뛰었다.
스무명이 넘는 엘프들이 잽싸게 나무를 타며 그녀를 뒤쫓아왔고, 레아는 얼마  갑자기 나타난 절벽으로 인해 도주길이 막혀버렸다.
절벽 아래에는 드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포기하십시오!”

엘프들은 금세 몰려와 그녀를 반원 모양으로 포위했다.

“안돼……!”

레아가 아찔한 높이의 발밑을 내려다보며 낙담하는 가운데, 소란을 듣고 달려온 살라두일과 아르키나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레아, 그만하고 돌아가자. 이번 건은 나를 포함 그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한숨 자고나면 기분이 나아질거야.”
“미안해요, 삼촌. 전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갈 수 있어! 우린 너의 실수를 따스하게 감싸줄  있단다!”

레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전 그에게 가야만해요.”

아르키나가 끼어들었다.

“언니만의 생각이야. 그는 언니를 잊었어.”
“아니야 난 이미 알고 있어! 우리 엘프족과의 거래 때문에 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나를 위해서! 나를 살리기 위해!”
“결혼은 어쩔 생각이냐!”

살라두일이 소리쳤다.

“네 욕심 때문에 우리 일족은 약속을 깨뜨렸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

레아는 말문이 막히며 대답하지 못했다.
주저하며 뜸을 들이던 그녀는 곧 힘차게 외쳤다.

“제가 도망쳤다고 하세요! 저를 일족의 배반자로 만들면 괜찮을거예요!”
“뭐?”

그 말을 들은 살라두일의 눈빛에 노기가 서렸다.
그가 매섭게 소리쳤다.

“인간 세상으로 가면 넌  죽게 될거야! 인간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타락했고! 나약하며! 그들의 삶은 거짓말과 더러운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너처럼 고결하고 아름다운 꽃은  지옥 같은 곳에서 절대 살아남을  없어!”
“거짓과 욕망이 없는 장소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어요! 우리 엘프 세계도 마찬가지잖아요! 믿었던 삼촌마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제 눈을 멀게 하고 다른 종족한테 정략결혼으로 처분하려고 하셨어요!”
“처분이라니? 말을 가려서 하거라! 네 부모님의 복수와 일족의 부흥을 위해 널 좋은 곳에 시집보내려던 거였어!”
“그게 바로 욕망이에요!”
“언니! 언니가 보고 싶어하는 그 자에게는 이미 다섯명의 부인이 있어! 그곳에 언니의 자리는 없을거야!”
“아무래도 좋아.”

레아는 고개를 떨군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지금 나는 그가 보고 싶어.”

아르키나가 체념한 얼굴로 살라두일에게 속삭였다.

“말로는 안되겠네요. 강제로 제압하는  밖에 없을  같아요.”
“우리 일족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네가 하렴. 레아는  인간 마녀의 언변에 속아 이성을 잃은 것 같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반드시 붙잡아.”
“네, 수면 화살로 재워버릴게요.”
“레아는 정령의 기운이 강해 수면이 안통할지도 모르니 다리를 쏴서 다치게 해도 좋다. 죽지만 않으면 어느 부위든 괜찮아. 단 가슴만큼은 상처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렴. 신랑측에서 잡티 하나 없는 아름다운 젖가슴을 원할테니. 레아의 가치가 떨어지면 우리측의 요구사항을 일부 변경하거나 삭제하려 들지도 몰라.”
“……”

아르키나는 삼촌의 매정한 발언을 듣고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아르키나가 활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레아는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만둬!”
“뒤는 절벽이야. 조심해 언니.”

아르키나가 활을 들어 레아를 정조준했다.

“무예의 무자도 모르는 언니가 화살을 피하기는 힘들거야. 피하겠답시고 괜히 힘빼지 말고 그냥 맞고 편히 쉬어.”

자신을 막을 생각에 무언가를 하려는  같은데, 레아로서는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몰랐다.
그녀가 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간절한 호소뿐.

“그를 위해 수백번을 죽어도 괜찮아! 그에게 돌아갈거야! 나를 놔줘!”

그 순간 그녀의 외침에 응답하듯 하늘 저편에서 무언가가 혜성처럼 날아와 레아를 향해 소리쳤다.

“꼬꼬댁!”
“실라르!”
“레아! 타라! 타라!”

갑작스런 독수리의 출현에 아르키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나랑 더 오래 지냈으면서  바보 녀석이!”

그녀는 발끈하며 곧바로 화살을 쏴날렸다.
동시에 레아는 망설이지 않고 절벽을 뛰어내렸다.

야심차게 날아간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고, 허공에 과감히 몸을 맡긴 레아는 빠르게 날아온 실라르의 등위에 올라타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쏴라!”

살라두일의 다급한 외침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밑으로 떨어졌고, 레아는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제길!”

살라두일은 화난 눈빛으로 상공을 바라보다가 망토를 펄럭이며 뒤로 돌아섰다.

“즉시 인간 세상으로 떠날 추격조를 편성해라. 조장은 네가 맡아.”
“네, 삼촌.”

살라두일은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병사들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이후 모두가 떠난뒤에도 홀로 남아있던 아르키나는  상공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심하게 혼란스러웠다.

“버나드왕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아니면 하지 말까…… 요청해? 아니야 위험해. 요청하는게 좋겠지? 아냐 그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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