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레아1
***레아편
“언니?”
레아는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벌써 아침이 온걸까.
창문을 통해 들어온 따사로운 햇살이 실내 구석까지 비추고 있었다.
레아는 얼굴을 간질이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또 그 꿈이야?”
아르키나가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했어.”
“어떤 이름? 내가 뭐라고 했니?”
레아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여동생을 바라봤다.
침대의 하얀시트에 손을 대는 순간 땀으로 젖어있다는걸 느꼈다.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뭐라고 불렀어?”
“언니도 몰라?”
“몰라, 꿈속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만 내 귀에 들리지 않아.”
“나도 모르겠어. 발음이 부정확해서 잘 들리지 않았거든.”
레아는 눈을 깜빡였다.
“자꾸 왜 이러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종종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는 꿈을 꿨다.
인간 종족으로 보이는 그가 왜 자꾸 꿈에 나오는 것인지……
여태 살아오면서 인간과 자신이 얽힌적은 전혀 없었건만.
아니, 단 한명 있긴 있다.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봐주는 인간 마녀 멜라니아가 현재 마을에서 지내고 있긴 했다.
하지만 레아는 평생 자신의 종족인 엘프들과만 지내왔고 인간 세상에 가본적은 단언코 없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상쾌한 공기를 쐬면 기분이 나아질거야. 자, 봐. 밝은 아침이야. 오늘 날씨 정말 좋다.”
창가로 걸어간 아르키나가 창문을 열며 이어말했다.
“삼촌께서 부르셔.”
“삼촌이?”
“결혼 얘기인가봐.”
“결혼…… 알았어.”
레아는 침대에서 나와 잠옷을 벗었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여성미 넘치는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걸치고 있는 것은 가슴을 가리고 있는 순백의 천과 끈으로 이어진 허리 아래 하얀 속옷뿐이었다.
“아르키나.”
레아가 옷걸이에 걸린 셔츠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넌 언니가 결혼하는게 좋니?”
“걱정돼?”
“아니 걱정되는건 아니지만……”
창가에 서있던 아르키나가 말 끝을 흐리는 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니의 결혼이 우리 야브라스 족과 헤이라닌 족을 연결해줄거야.”
“알아. 당연히 해야할 일이란걸.”
“우리 일족의 풍습이기도 하고.”
레아는 일족의 격언을 떠올렸다.
“남녀 누구든 결혼은 다른 엘프 종족과. 종족 번영을 위해서.”
“같은 종족끼리 결혼하면 질병이 찾아온다. 어른들의 말씀이시지.”
아르키나는 침대의 가장자리로 가서 앉았다.
“언니의 상대는 헤이라닌족의 장로 아들이야. 좋은 곳으로 시집가는 거니까 부러워.”
머지않아 헤이라닌족이 도착하고 이곳에서 결혼식이 치루어 진다.
레아는 약혼자의 얼굴을 본적이 없다.
혼인과 관련된 모든 일은 삼촌이자 장로인 살라두일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최근 다른 엘프종족들 사이에서 레아의 미모는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녀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남심을 홀리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고 금세 입소문을 탔다.
몸매까지 걸출한 그녀에게 늘 구애가 끊이지 않았다.
각 종족의 장로들은 저마다 강하고 젊은 엘프들을 내세워 살라두일에게 혼담을 제의했고, 살라두일은 최고의 조건을 제안한 헤이라닌족에게 레아를 시집 보내기로 결정했다.
소식을 들은 레아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녀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족의 번영을 먼저 생각해야했던 그녀는 끝내 수락을 하고 말았다.
레아는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헤이라닌족 마을로 출가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두 아이를 낳아야할 것이고 두 아이의 유년기가 지나면 한 아이는 헤이라닌족에 남고 다른 한 아이는 레아의 고향 야브라스족 마을, 즉 이곳으로 보내져 부모와 떨어져 자라게 될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걸쳐 터득한 엘프들의 지혜였다.
마을은 고립되지 않고 젊은이들의 결혼을 통해 늘 새로운 피가 수혈된다.
레아는 흰 셔츠에 손을 넣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모르겠어. 될 수 있으면 안하고 싶어.”
“바보같아. 삼촌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화를 내실거야. 주의해.”
“그러시겠지.”
레아는 금세 옷을 챙겨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정색 롱부츠를 신었다.
굽이 높은 롱부츠를 신자 훤칠한 키 덕분에 늘씬한 몸매가 한층 더 돋보였다.
허리까지 닿는 긴 금발 머리에 여러 보석이 박힌 머리장식을 두른 레아는 문앞으로 가서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
“갔다올게.”
“응. 그리고 꿈속의 인간은 너무 신경쓰지마. 꿈은 그저 꿈일뿐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더는 안나오겠지. 자꾸 신경쓰니까 계속 꾸는거야.”
레아는 문을 열며 아르키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레아가 문을 닫고 나가자 아르키나는 이내 표정이 굳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아있던 그녀는 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버나드…… 집요하네요. 뭐, 당신 탓은 아니지만.”
***
“라빌라~♪ 로오홀래~♬ 야브라스 일족 레아는 아름다운 엘프라네~♬ 그녀에게 짝이 생겼지~♬”
두꺼운 나무 기둥으로 만들어진 집을 나와 삼촌이 있는 정령의 회관쪽으로 걸어가는 사이 한 무리가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한 여자가 맑은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고 한 남자는 피리를, 두 남자가 손으로 북을 두드리고 있다.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곧 다가올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공연을 준비중인 사람들이다.
레아는 발길을 멈추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떼면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계속 불안감이 드는걸까…… 하면 안돼, 하면 안돼, 마음속에서 계속 하지말라고 외치는 것 같아……”
“레아다 레아! 꼬꼬댁!”
머리 위에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아! 레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커다란 독수리 한마리가 보였다.
독수리는 시끄럽게 떠들며 레아의 머리 위를 멤돌다 지상으로 내려왔다.
“어디가! 어디가! 꼬꼬댁!”
“삼촌을 뵈러가는 길이야.”
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실라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개를 접고 서 있는 실라르의 몸집은 레아보다 두 세 배는 될 정도로 컸다.
“태워줄까? 태워줄까?”
“아냐, 걸어갈게.”
“나도 간다 꼬꼬댁!”
실라르는 돌아가신 레아의 부모님이 닭과 함께 키우던 독수리였으며, 오래전 마족이 부모님이 살던 마을을 침공했을 당시 갓난아기였던 여동생 아르키나의 목숨을 구하고 고아가된 그녀를 키워주기까지한 영리하고 지혜로운 독수리였다.
닭을 흉내내는 버릇이 어릴적부터 몸에 밴 까닭에 꽥꽥 대는 목소리가 다소 시끄럽지만 레아는 실라르의 꼬꼬댁 대는 소리도 사랑스러웠다.
이윽고 커다란 고목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아름드리 자란 정령의 회관에 도착하자 레아는 실라르를 바라봤다.
“여기서 기다려.”
“갔다와! 갔다와!”
삼촌인 살라두일은 회의실에 있었다.
레아가 문앞에 이르자 엘프들이 그녀의 등장을 알렸다.
“살라두일 님, 레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이거라.”
때마침 회의가 끝난터라 회의실 안에는 살라두일만 남아있었다.
레아는 수북히 쌓인 서류 앞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봤다.
“저 왔어요, 삼촌.”
“오, 기다리고 있었단다.”
화려한 복장을 입고 왕관을 쓴 살라두일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150살이 넘은 살라두일은 놀라울만큼 젊은 미남이었다.
긴 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고 말총머리를 한 그가 레아를 칭찬했다.
“오늘도 아름답구나.”
“감사합니다.”
“앉으렴.”
“네.”
레아는 원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절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아.”
밝게 웃고 있던 살라두일은 이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멜라니아 말이다. 길어야 사흘 정도 버틸거라더구나. 그 전에 미리 작별인사를 나누렴.”
레아는 고개를 숙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네……”
“이 말을 해주려고 부른거란다. 아침은 먹었니?”
“아뇨, 아직.”
“그래, 어서 가서 든든히 챙겨먹으렴. 난 일이 있어 여기 계속 있어야할 것 같구나.”
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하자 살라두일이 다시 붙잡았다.
“아참,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니?”
“어제, 결혼식때 입을 새 드레스를 맞췄어요. 다섯 요정들이 달라붙어 제 옷을 만드는 중이죠. 일주일 안으로 만들 수 있대요. 그리고 제 짐도…… 오늘부터 싸놓으려고요.”
“결혼하고 나면 자주 못보게 되겠지. 헤이라닌 마을에서 열심히 살거라. 아르키나도 종종 그곳에 보낼테니까 너무 외로워 말고.”
레아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는 불안했다.
결혼식이 두려운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자꾸 자신을 뜯어말리는 것 같았다.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삼촌. 저, 역시 안……”
살라두일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웃어보였다.
“레아, 용기를 가지거라.”
“……”
레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삼켰다.
살라두일은 다정한 삼촌이지만 마을의 장로로 볼땐 매우 엄격하고 비정한 사람이었다.
“너와 아르키나의 결혼이 장차 우리 일족과 마을의 부흥에 커다란 밑거름이 될거야. 부모님께서 살아계시던 그때 그 시대처럼. 우리의 목표는 명확하다. 앞으로 50년 내에 마족을 토벌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야 해.”
그가 말했다.
“대업은 너와 아르키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너희의 남편과 자식들이 우리 일족에 큰 힘이 되어줄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레아는 힘없이 대답하며 회의실을 나섰다.
그녀는 다음 장소로 멜라니아를 찾아갔다.
네 명의 여자 엘프들이 멜라니아를 간호중이었고, 멜라니아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요즘 멜라니아가 눈을 뜨는 일은 드물다.
시력도 무척 나빠져서 사물을 잘 알아보지도 못했다.
1년전만해도 그녀는 젊고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갖춘 인간 여자였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 키클롭스의 정액이 듣질 않았다.
그녀는 다시 본모습으로 돌아와 노파가 되었고, 멜라니아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하길 자신의 몸이 키클롭스의 정액에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약효가 듣지 않는다고 했다.
“총 3년…… 아니야, 늑대와 함께 모험을 할때부터 마셨으니 그것까지 포함하면 총 4년이지. 고작 4년이 한계였던가. 젊음의 영광도……”
젊음을 잃자 그녀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우울증이 생겼다.
그 탓인지 건강도 점점 나빠져갔다.
모든 일에 대가가 따르듯, 젊음을 얻는 대신 나중에 그 젊음이 사라지면 심한 절망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에 반한 대가이자 부작용이었다.
젊음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에는 멜라니아의 노쇠한 몸이 버티질 못했다.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할머니, 주무세요?”
레아가 손을 잡아주자 침대에 누워있던 멜라니아가 힘겹게 눈을 떴다.
“레아구나……”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다.
목소리는 갸날프고 곁에 앉아있는 레아를 바라보는 눈도 반쯤 뜬 채 힘이 없다.
“이젠 팔도 움직여지지 않는구나…… 팔도 내 맘대로 안움직여져……”
“걱정하지 마세요. 약 잘 먹고 푹 쉬시면 금방 고쳐질거예요.”
“아냐, 아냐. 난 알아. 내 명이 곧 다할거란 것을…… 꿈속에서 있잖니? 늑대가 나와서 날 놀리지 뭐냐. 못된 놈.”
멜라니아가 힘없이 낄낄 웃는다.
“전부터 늑대라고 하시든데, 늑대가 누구예요?”
“늑대? 아, 늑대. 늑대…… 늑대는 말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멜라니아는 문득 다른 말을 꺼냈다.
“고향에 가고 싶다…… 고향에…… 기왕에 죽을거라면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그곳이 어딘데요?”
“인간 세상에 있는 우르프스 왕국. 그곳에 묻히고 싶구나…… 새 왕이 오고 나서 얼마나 바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천장을 아련히 바라보던 멜라니아는 레아를 돌아봤다.
“네가 데려다주겠니?”
“제가요?”
레아는 살짝 놀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자신을 끔찍히 아껴주었던 멜라니아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이 있었으나 그녀의 기억상 단 한번도 인간 세상에 가본적이 없기에 낯선 곳을 간다는게 덜컥 두려웠다.
“어, 언제요?”
“오늘 출발하는게 좋겠구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