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에필로그
***에필로그
어딘가에 살고 있을 요정님에게.
전하는 새벽부터 황제와 함께 사냥을 떠났어.
전날 산더미처럼 쌓인 국무를 처리하느라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며칠전부터 우리 왕국에 머물고 있는 황제가 사냥을 좋아해서 어쩔 수 없었다나봐.
왕과 황제 폐하가 움직이는만큼 두 분을 모시는 일행도 대단했어.
언제나 상냥하시고 큰 가슴을 가진 데보라 왕비님, 신경질적이고 쌀쌀맞지만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샤를리나 왕비님, 나만 보면 체력 단련을 시켜주시려는 베아트리스 왕비님, 방에서 늘 철 냄새가 나고 전하의 무구를 직접 새심하게 신경써주시는 소탈한 성격의 이드리스 왕비님,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클레어 왕비님, 그리고 총사령관 레퍼드 경, 야전 사령관 멜리사 경, 보안 사령관 줄리안 경과 그의 아내 로잘리나 경, 전하의 충성스런 고양이 란 경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대단했기에 그 분들을 떠받드는 보좌진과 하인들까지 전부 따라가서 왕궁은 텅텅 비었어.
다들 저녁쯤엔 돌아오리라 생각해.
오늘 저녁은 아마 맛있는 고기들로 넘쳐나겠지.
덕분에 난 오늘 하루 공부를 안해도 돼서 기뻐.
선생님은 내 부탁을 아주 잘 들어주거든.
공부가 하기 싫다고 떼를 쓰면 난처한 표정으로 어려워하면서도 무척 잘 들어줘.
아, 너희 왕국에는 왕비가 너무 많다고?
네 질문에 나도 공감해.
다른 나라에서도 다섯 왕비가 있는 우리 왕국을 신기하게 여기나 봐.
원래 왕비는 나라마다 한명씩이잖아?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우리 왕국 역사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나.
다섯 왕비를 신부로 맞은 전하가 정말 특이한 경우래.
보통은 왕비 한 명에 나머지는 후궁으로 들인다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대.
선생님께서 알려주셨는데, 전하는 새로운 왕조의 초대왕이고 기반이 얕아 다섯 왕비님들의 도움이 절실했다나 봐.
민심을 잘 파악하고 다룰줄 아는 평민 친화적인 성격을 가진 데보라 왕비님의 자애심, 아킨테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샤를리나 왕비님의 강력한 군사력, 이웃 그라나딘 왕국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내주는 외국인 왕비 베아트리스 왕비님의 남다른 배경, 전국의 대장장이들, 광부들, 심지어 드워프들의 우상이기까지한 이드리스 왕비님, 그리고 왕비 신분임에도 매일 지근거리에서 왕을 보필하는 클레어 왕비님의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한분 한분이 가진 각양각색의 배경과 매력들이 레온 왕조가 몰락한 후에 새로 들어선 우르프스 왕조에 꼭 필요했다나 봐.
전하께서는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당당히 다섯 왕비와 한날 한시에 결혼하며 ‘모두가 내 사랑스러운 아내들’ 이라고 선언하셨어.
백성들은 다섯 왕비가 생겨난걸 처음에는 낯설어 했지만, 4년이나 흐른 지금은 익숙해졌나 봐.
더 없이 든든한 국모들이 많아서 다들 반기는 분위기야.
다만, 다섯 왕비를 한꺼번에 좋아하지 않고 사람마다 좋아하는 왕비가 다르다는게 좀 아쉽긴 해.
각자의 취향탓이니 어쩔 수 없으려나?
참고로 백성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왕비님은 데보라 왕비님이야.
데보라 왕비님은 자주 빵을 구워서 궁밖의 백성들에게 나눠 주시곤 해.
백성들과 만나는걸 아주 좋아하시는 분이지.
어쩔땐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에도 나타나 직접 장을 보시기도 한다니까?
정말 서민적인 분이야.
데보라 왕비님의 친오빠 마크는 하녀 출신인 율리아와 결혼했다고 해.
마크의 그림 실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누이가 왕비님이라 그런지 여러 귀족들에게 잘 팔린다나 봐.
그 때문인지 일부 호사가들 사이에서 마크는 ‘그림은 못 그리지만 일단 사놓으면 언젠가 가격이 올라갈 화가’ 로 불린다고 해.
아무튼 데보라 왕비님 외에 빵을 구울줄 아는 왕비님은 클레어 왕비님 말고는 아무도 없어.
하지만 클레어 왕비님은 백성들에게 빵을 나눠주시지 않아.
평소 사람들을 친근히 대하는 성격도 아니고 무뚝뚝한 분이신지라 그 분이 만든 빵은 오로지 전하만이 드실 수 있지.
덤으로 나도!
나도 여러번 먹어 봤는데, 정성과 사랑이 아주 듬뿍 담긴 빵이라 끝내주게 맛있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눠줄게.
왕궁에 꼭 놀러와.
***
안녕?
일기를 쓰다가 잠시 성안을 뛰어다니다 왔어.
전하와 왕비님들도 없고 오랜만에 뛰어노니까 너무 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와중에 궁안의 경비병들을 만났는데, 날 보더니 무척 곤란해하는 표정들이었어.
“뛰, 뛰어다니시면 안됩니다!”
“그러다 다치세요! 어엇!”
“위, 위험합니다!
경비병들이랑 술래잡기 놀이하니까 너무 재밌는거 있지?
땀이 나고 숨도 차지만 그래도 신이 나!
날 잡으려는 경비병들을 피해 어떤 방에 들어갔는데 거긴 아주 섬뜩한 것들이 많은 무시무시한 방이었어.
전에 누구였더라, 아! 욜리라는 시녀한테 들었는데 오래전 어떤 마녀가 쓰던 방이었대.
이름이…… 멜라니아였던가?
박제해놓은 동물들도 있고 방 분위기는 비록 소름끼치고 무서웠지만 왠지 모르게 다정한 기운도 함께 느껴져.
전하께선 언젠가 마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며 방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계신대.
아마도…… 좋은 마녀여서 그런 것이겠지?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
무섭겠지만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
자주색 마법사 모자에 허리가 구부정하고 지팡이를 쥔 노파가 연상되지만.
확실한건, 멜라니아가 건국에 큰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야.
새로 쓰여진 역사책에도 그녀의 이름이 들어간 것을 본 것 같아.
전하께서 세운 우르프스 왕조의 건국사를 다 읽은건 아니야.
내가 아직 어리고 국어를 잘 몰라서 난해한 내용의 책일뿐이더라고.
커다란 알에서 태어난 전하께서 소년이 되어 이 땅의 폭군으로 기록된 프레드릭 왕을 만나고 시작되는 이야기는 꽤 흥미로워 보이는데,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
이해가 잘 안되서 덮었어.
게다가 역사시간에 선생님께서 읽어주실때도 있는데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가장 흥미로운 장면인, 전하께서 여러 여인들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는 ‘애는 몰라도 된다며’ 다 건너뛰는 것 같더라구.
전하의 사지가 잘리는 잔인한 묘사도 얘기 안해줘서 답답해.(전하께서 사지가 잘린 적이 있다는걸 난 이미 알고있다구! 신께서 사지를 도로 붙여주신 것도 들었어!)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이어지질 않아.
끊기니까 재미없어.
이래봬도 난 왕궁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어떤 비밀이냐고?
이건 다섯 왕비님들도 모르는 어마무시한 비밀들이지. 오직 나만이 안다구? 엣헴.
절대 말 안한다고 약속하면 말해줄 수 있어.
약속해?
좋아, 약속했어.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있잖아.
이건 샤를리나 왕비님의 어머니인 아킨테의 미셸님에 관한 이야기야.
난 그 분을 큰 할머님이라고 불러.
그날은 큰 할머님이 멀고 먼 아킨테에서 온 날이었지.
궁안은 환영행사로 떠들썩했어.
큰 할머님은 일년에 두 세 번정도 놀러오시거든.
오실때마다 궁안에는 항상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해.
그리고 평소에는 사람만나는 것을 싫어하던 샤를리나 님이 유독 말이 많아지는 날이기도 하지.
그날따라 쥬스를 많이 마신 나는 밤에 오줌을 싸고 말았어.(부끄럽지만)
하지만 날 도와줄 시녀들이 때마침 자리를 비운거야.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새벽까지 열렸던 연회 때문에 밀린 설거지를 처리하느라 궁안의 모든 시녀들이 달라붙어 잠도 못자고 그릇만 닦고 있었대.
내가 일찍 잠들어 있었기에 그들은 안심했던거지.
도와줄 사람은 없고, 축축한 침대가 싫어서 방을 나와 전하가 계신 방으로 갔어.
축축한 내 옷과 침대를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했거든.
전하한테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때 난 본거야.
새벽 어스름이 걷힐 무렵ㅡ 전하의 방에서 몰래 나오는 큰 할머님을 말이야.
처음에는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갸우뚱 거렸어.
두 분이 밤새 카드놀이라도 한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러나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동이 틀 무렵이면 어김없이 전하의 방을 나오는 큰 할머님의 모습이 보였지.
한번은, 큰 할머님이 방문을 열고 나왔는데 긴 치마속에 손을 넣어 흘러내린 속옷을 끌어올리는 광경도 보았어.
그 다음날에는 결정적인 일이 있었지.
방문 앞에서 큰 할머님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며 작별인사를 건네는 전하의 모습을 본거야!
난 즉시 어머니한테 달려가고 싶었어.
전하와 큰 할머님의 밀회가 나쁘다고 생각한건 아니고 그저 재미난 광경을 봤다는 생각에 아는 사람들을 붙잡고 수다를 떨고 싶었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사람들에게 떠들어대면 전하께서 곤란해하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폭군 프레드릭왕은 열명이 넘는 첩과 스무명이 넘는 자식들을 뒀다고 들었어.
많은 여인들과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어쩌면 왕의 운명이 아닐까.
우르프스 왕국 건국사만 봐도 전하의 주변에는 언제나 여자들이 많았잖아?
그 중 다섯분은 왕비님이 됐고.
난 키득키득 웃으며 전하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맹세했지.
내가 밤에 오줌 싼걸 감추고 싶어하는 것처럼 전하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테니까.
그리고 난 총명한 아이야.
딴얘기지만, 예전에 얼핏 들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에 큰 할머님 곁에서 시중을 드는 피에르 라는 청년이 있었다나 봐.
그 청년은 지금 아킨테 가문을 나와 꿈에 그리던 음유시인이 되었다고 해.
아직 음유시인으로서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있지만 현생활에 충분히 만족한다나 봐.
그나마 유명한 그의 대표곡이 있다면 ‘드디어 해방됐어! 나는 자유야!’ 라는 노래라나?
이제 일기를 마쳐야겠어.
곧 선생님이 오실 시간이야.
오늘 수업을 안하는 대신 오후에 같이 왕궁의 정원에서 뛰어 놀기로 약속했거든.
선생님의 이름은 엘레나야.
샤를리나 왕비님과 자매라고 하던데, 서로 신분 차이가 많이 나는가 보더라구.
엘레나 선생님은 샤를리나 왕비님을 매우 어려워 하셔.
좌우간 엘레나 선생님도 귀족이야.
4년전 전하께 집과 토지를 받아서 그녀만의 가문이 생겼어.
내가 갓난 아기때 유명한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지금은 내 훈육교사가 되셨지.
전하와도 무척 친하게 지내셔.
행사가 있을땐 직접 전하의 시중도 들고.
그런 엘레나 선생님께서 자택에서 함께 생활하는 루, 딘, 샨도 불러온다고 하셨어.
정원에서 그 세 남매와 같이 뛰어놀거야.
막내 여동생 루와 그녀의 첫째 오빠 딘, 둘째 오빠 샨은 피부가 창백하고 은발에다가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도 쓰고 독특하게 생긴 아이들이지만(실은 나보다 열살 이상은 더 많아보이는데 키도 작고 성격도 나랑 아주 잘 맞아)
너무 좋은 사람들이야.
일찍이 전하께서 내 호위를 루와 딘, 샨에게 맡기기도 하셨지.
응?
내가 누구길래 전하께서 직접 호위까지 챙겨주냐고?
아!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구나!
미안.
난 데이지야.
생일이 지난주에 지난 네 살 여자아이지.
네 살 여자애가 글을 왜 이렇게 잘쓰냐고?
다들 날 보고 영특하다고 칭찬해.
출신성분이 남다른 왕의 딸이거든. 엣헴.
우르프스 왕국의 왕, 버나드왕이 우리 아빠고 클레어 왕비님이 우리 엄마야.
두 분이 처음으로 사랑을 속삭인 곳이 데이지꽃이 만발한 계곡가였는데, 그날 어머니의 뱃속에 내가 생겼기에 내 이름을 데이지라고 지으셨대.
형제로는 데보라 왕비님이 낳은 두 살짜리 남자 아기가 있는데 걘 내 이복동생이야. 귀여워. 잘 울지 않고 웃음이 많은 아이야.
샤를리나 왕비님은 현재 임신중이고.
이드리스 왕비님도 아직 티가 안나지만 임신중.
베아트리스 왕비님은 세쌍둥이를 임신중인가봐.
배가 아주 크게 부르셨다니까.
그런데도 사냥을 나가셨어.
그 분은 사냥이나 싸우는걸 정말 좋아해.
이처럼 영광스럽게도 우리 우르프스 왕국을 수호하는 신들께서 겹경사를 내려주셨어.
신하들은 왕비님들이 전원 아이를 가져서 기뻐하고 있고, 백성들은 왕국의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흠뻑 빠져있어.
왕비님들의 순산을 바라는 축제가 왕국 각지에서 열리고 있지.
우리 아빠가 왕이된 후로 왕국 전체가 활기넘치고 밝아졌다고 해.
그 전에는 어땠는지 나야 모르지만, 민심을 살펴보면 다들 아빠를 좋아하는 것 같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친절하고 활발하며 밤에는 도시 곳곳에 오색찬란한 불빛들이 수놓아지지.
푸짐하게 차려진 술과 음식 앞에서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춤을 추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끊이질 않아.
4년째 풍년이래.
신들께서 새로운 왕을 인정했다며 우리 아빠를 향한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해.
풍년 덕분에 우리 우르프스 왕국은 자유롭고 백성들은 여유가 흘러넘쳐.
외지인들을 배척하지도 않지.
행복하니까 새로운 생명도 자주 찾아와.
요즘은 집집마다 개 짖는 소리보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울음 소리가 더 자주 들린대.
거리 여기저기서 기쁨이 가득 넘쳐나.
앗, 엘레나 선생님께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어.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산뜻한 연두색 치마를 입으셨네.
일단 여기서 급하게 마칠게!
갖다와서 또 쓸거야.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