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결전8
미셸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전황을 살피려 고개를 돌릴때마다 머리에 쓴 서클릿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수많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한 소년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늦지 않았군.”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사만다도 웃었다.
“또 꼬마 모습으로 있군요. 우리가 또 속을줄 아나보지? 앙큼한 녀석.”
“꼬마라고요?”
클레어의 아버지 발론도 바삐 두리번 거리다 버나드를 겨우 찾았다.
“저 꼬마가 마스터울프 버나드 입니까?”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아이가 버나드 입니다. 또 소년의 모습으로 있는게 저한테는 짓궂어 보이기도 하는군요.”
사만다가 말했다.
“어서 도와주죠. 그래야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을테니.”
또 한차례 뿔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뿌우우우ㅡ!
이번에는 미셸의 군사가 차지한 동쪽이 아닌 서쪽이었다.
레아가 잠들어있는 보석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있던 멜라니아가 크게 외쳤다.
“샤를이구나! 샤를이 제국으로 안가고 이곳에 왔어!”
모두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햇살이 밝게 내려쬐는 언덕에서 해링턴 영주가 이끄는 부대와 함께 샤를 및 그녀의 백검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다란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던 해링턴 영주가 크게 외쳤다.
“영웅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말위에 탄 클레어의 허리를 부둥켜 안고 있던 샤를은 먼 곳의 버나드를 바라보며 당차게 외쳤다.
“내가 당신 말을 들을줄 알았어? 넌 도망 못가!”
“버나드!”
데보라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철퇴를 들고 있는 그녀가 손을 크게 흔들며 해맑게 소리쳤다.
“버나드! 누나가 구해주러왔어!”
버나드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샤를리나님, 데보라……”
데보라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버나드를 안도하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뿌우우우!
불현듯 뿔나팔 소리가 재차 울렸다.
이번에는 인간들이 만든 인공의 것이 아닌 그보다 훨씬 나은 아름다운 음색을 가진 이질적인 뿔나팔 소리였다.
버나드는 급히 남쪽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거대한 형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거인?
거인이라기보다는 네 발달린 짐승이었다.
쿵쿵!
땅울림이 점차 심해지며 마침내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털이 수북한 거대한 야수 위에 타고 있는 엘프들이었다.
여러마리의 야수가 동시에 울부짖자 왕의 병사들은 아연실색했다.
“세상에! 에, 엘프들까지 왔어……!”
“우리를 공격하려는 건가?”
“오, 신이시여!”
활로 무장한 엘프들을 비롯해 온갖 잡다한 동물들이 모여있는 엘프 부대의 선두에 레아의 여동생 아르키나가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버나드에게 소리없이 고하고 있었다.
‘당신이 죽으면 언니를 살릴 수 없기에…… 도우러 왔어.’
로잘리나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왕국은 영웅을 잊지 않았어요! 영웅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거라구요!”
프레드릭왕은 울분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버나드…… 사람들은 언제나 네놈만 좋아했지…… 인망은 왕에게 오기 마련이거늘 왜 왕도 아닌 네게만 인망이 따르는지…… 그렇기에 늘 그림자속에 꼭꼭 숨겨 일을 시켰거늘……”
왕은 자기도 모르게 휘청거렸던 다리에 힘을 주고 힘껏 외쳤다.
“차라리 잘됐구나! 이 참에 이 나라의 반역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어! 아하하하!”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크게 웃는 와중에 그는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리폰들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저, 저것은!”
허공에 떠있는 가장 화려한 그리폰에게서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입니다 프레드릭.”
병사들중에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화, 황제 폐하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폰 부대를 끌고 오셨어!”
병사들이 겁을 집어먹으며 크게 동요했다.
동시에 프레드릭왕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어, 어째서!? 어째서 황제가 이곳에 있단 말이냐!”
“당신의 만행을 알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터인데?”
황제 라스티니아는 왕의 머리 위를 한바퀴 멤돌다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이끌고온 그리폰 부대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짓눌려 누구 하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왕의 자식들조차 부대의 진군을 멈춘 채 멍하니 황제를 응시할뿐이었다.
“버나드 경.”
화려한 갑옷을 두른 라스티니아는 미소를 띠운 채 가장 먼저 버나드를 찾았다.
“작아졌군요.”
“폐하.”
버나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세요.”
그녀는 버나드를 직접 일으켜 세운뒤 다정하게 말했다.
“듣던대로 소년의 모습이네요.”
머리 위에서 란이 밝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다 말했어!”
버나드와 라스티니아는 그녀를 올려다본 후 다시 서로를 마주봤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십여년만에 만나 반가운, 뭉클한 무언가가 있었다.
“란이 부탁하길래 오는 길에 키클롭스를 네 마리 정도 잡았습니다. 심장이 준비되어 있으니 잘 먹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폐하.”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격식만 차리는군요. 내게 무언가 할 말은 없나요?”
“폐하……?”
버나드는 눈을 깜빡이다 정중히 입을 열었다.
“프레드릭왕의 폐위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스티니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여전히 여자 다루는데 소질이 없는 남자군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프레드릭의 폐위를 허락겠습니다. 경이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 레온왕국이 바뀔 시간입니다.”
버나드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뒤 뒤로 돌아섰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옥좌 앞의 프레드릭왕에게 향해 있었다.
라스티니아에게서 멀어져 프레드릭왕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누구도 그를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
미셸, 샤를, 해링턴 영주, 엘프의 군대에 이어 여황제까지 나타나자 왕국군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처분을 바라는 사형수들처럼 전부 넋을 잃고 서있었다.
“당신이 졌어.”
버나드의 말에 프레드릭왕은 낮게 웃었다.
“모두 다 겁쟁이들 뿐이야. 내가 이런 놈들을 믿고 왕국을 이끌었다니. 여보게 버나드. 자네 같은 놈이 한놈만 있었어도 좋았을텐데 말이야.”
“당신이 날 밀쳐냈지.”
“난 솔직히 자네를 미워했지만 좋아했네.”
“거기엔 이유가 있었지. 네 말을 착실히 잘 들었던 개가 바로 나였으니까.”
버나드는 말을 마치지마자 프레드릭왕의 가슴에 마검을 찔러넣었다.
푹!
“커어억!”
왕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눈을 부릅떴다.
“이, 이봐. 나, 난 자네의 왕이라고……! 우, 우리 함께 전장을 뛰어다녔잖아……?”
“당신의 여동생 이블린이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어.”
버나드는 마검을 뽑으면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며 그대로 프레드릭왕의 목을 후려쳤다.
잘려나간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고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
왕이 죽자 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전락했다.
왕의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밀치며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했다.
왕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회군하며 전장을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여황제를 비롯해 미셸, 샤를, 해링턴 영주, 엘프의 부대는 달아나는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잡아라! 그리고 처단하라!”
“예!”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사방으로 흩어지며 왕의 군대를 철저히 박살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들에게조차 자비란 없었다.
라스티니아의 머릿속에는 이미 레온왕국의 새 왕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그럴려면 대대적인 물갈이가 필요했다.
마침 이곳에 병력을 이끌고 모여든 자들은 죄다 죽은 프레드릭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친자식들과 영주들이었고, 이들만 제거하면 새 왕을 즉위시키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황제는 말살을 천명했다.
“왕의 자식들과 영주들을 한놈도 살려둬선 아니된다!”
그렇게 전장이 정리되고 있을 무렵, 멜라니아는 피묻은 옥좌에 멍하니 앉아있던 버나드에게 다가가 보석상자를 내밀었다.
여황제가 하사한 키클롭스의 심장을 먹은 버나드는 어느새 기운을 차리고 본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의 발앞에는 목이 잘려나간 프레드릭왕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이제 때가 됐느니라.”
“무슨 때?”
“네놈도 예상하고 있잖아. 설마 아직도 고민중인게냐?”
그녀는 보석상자의 덮개를 열며 버나드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아와 작별을 할 시간이다. 조금 있으면 레아의 여동생 아르키나가 이 상자를 돌려받으러 올게야.”
“……”
보석상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버나드는 결심이 선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한대로 미련없이 보내줘야겠지.”
“내가 잘 보살필테니 걱정말거라.”
“당신도 따라갈려고?”
“이 기회에 엘프 왕국에 가서 살아보려한다. 물론 레아한테 네놈 얘기는 입밖으로 벙긋도 안할거야. 네놈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는게 내게는 최고의 즐거움이니까.”
버나드는 피식 웃었다.
“괴롭지 않아. 레아가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 난 최선을 다 했고.”
그러면서 버나드는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히 매만졌다.
잠시 후 그는 보석상자속 아공간으로 뛰어들었다.
***
밤하늘처럼 별들이 총총이 빛나는 아공간.
버나드는 무중력상태의 드넓은 공간을 유유히 유영한끝에 마침내 레아를 발견했다.
무릎까지 덮는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잠들어 있는 그녀.
반듯하게 누워있는 그녀의 몸이 아공간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레아……”
버나드는 벅찬 가슴을 안고 그녀에게 헤엄쳐 다가갔다.
레아는 예전과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뾰족한 두 귀, 생기 넘치는 흰 피부, 허리까지 자란 금발과 조각처럼 아름답지만 친근한 얼굴.
전혀 죽은 사람 같지 않았다.
흔들면 깨어날 것처럼 평온하게 잠든 레아를 바라보는 사이 버나드의 입술은 떨리고 마음은 한없이 외로워져만 갔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가 하염없이 레아를 바라보며 위태로웠지만, 버나드는 끝까지 레아를 만지지도 소리쳐 울지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그는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삼켰다.
레아가 어딘가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장차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게 나름 위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점차 각오가 무너지려할즈음 간신히 힘을 내어 레아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픔없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미안했어.”
버나드는 그대로 등을 돌리며, 레아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흐릿해지는 것처럼 그녀와 점점 멀어져 갔다.
버나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레아와 함께 지냈던 시절은 찬란한 추억이었다고.
앞으로 레아가 꿈에 나와도 더 이상 아프지 않으리라.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