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7화 〉결전7 (177/200)



〈 177화 〉결전7

천지를 뒤흔드는듯한 사나운 기세.
병사들은 그녀의 박력에 못이겨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줄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저 구릿빛 피부, 사내를 압도하는 커다란 덩치, 벼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라이트닝…… 그라나딘 왕국의 영걸 베아트리스가 틀림없군요. 그녀가 어째서……?”

버나드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도 이유를  수 없었다.

“왜 이곳에……”

이윽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던 베아트리스가 버나드와 마주보고 섰다.
그녀는 맹렬하게 날뛰던 뇌전의 기운을 한풀 죽이며 자신보다 머리 네 개는  작은 버나드를 목을 꺽다시피 내려다봤다.
생애 첫 연인인데다, 자신에게는 평생 없으리라 여겼던 약혼자를 눈앞에 두고 불쑥 긴장이 된 나머지 첫 말을 무어라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약간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널 안다. 너도 날 알지?”
“물론. 그때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리가……”
“좋아, 날 기억해줬군. 안그랬으면 서운했을거야.”

베아트리스는 울컥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며 버나드를 냅다 한팔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거친 성격답게 사랑의 표현방식도 일직선이었다.

“허걱! 뭐, 뭐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난데없는 광경을 보고 술렁였다.
버나드 역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소년의 힘으로는 허리를 휘감고 있는 베아트리스의 강력한 팔힘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저 입술을 대줄 수 밖에.

베아트리스는 눈물이  것 같았다.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버나드를 찾기 위해 남의 나라까지 와서 겪었던 온갖 고생들을 생각하면  보답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키스 정도는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입맞춤 시간이 길어질수록 버나드를 생각하는 그녀의 애정과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달콤해! 달콤하다!’

계속 당해주고 있던 버나드는 두 손으로 힘겹게 그녀의 얼굴을 밀쳐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베아트리스는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웃었다.

“우린 이미 볼장 다 본 사이잖아? 그리고 세레딕 경에게 전해들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한다고 했다며. 나도 네가 좋다.”
“음?”

그 순간 지난날 세레딕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그럴싸한 아가씨를 소개시켜주면 마음이 달라질걸? 내 그라나딘 왕국으로 돌아가거든 자네의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처자를 물색해볼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주게.’

여기에 더해서 몇주전 호숫가에서 베아트리스가 한 말도 떠올랐다.
페니스를 손에 쥐고 그녀의 몸안에 삽입하려고 할때였다.
베아트리스가 다급히 팔을 뻗어 침입을 막았다.

“안돼.”
“무슨 소리야.”
“여긴 허락할 수 없다.”
“어째서?”
“약혼자가 있어.”
“당신 결혼해? 혹시 우리 레온 왕국에 온게 결혼 때문에?”

잠시 대답을 주저하던 베아트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약혼자를 만나러 왔지.”

대충 모든 사정을 파악한 버나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약혼자가 설마 나……?”
“응, 너다.”

베아트리스는 밝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재차 두툼한 입술을 들이밀었다.

“키스해줘. 키스.”

버나드가 황급히 그녀의 얼굴을 막았다.

“잠깐!”

서둘러 말했다.

“지금은 때가 때이니만큼 모든 일이 정리된 후에 나중에 느긋이 이야기 하자고. 이럴때가 아니야. 이해하지?”

베아트리스는 아쉽다는듯이 입맛을 쩝쩝다시다가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음 편히 있을 장소는 아니지.”

평생 혼자지내온 까닭에 연인의 사랑에 굶주려있던 그녀로서는 자신이 좋다는 버나드를 향한 애착이 무척이나 컸다.
더구나 지금 버나드의 외모가 성인이 아니라 앳된 얼굴에 체구가 작은 소년이다보니 더욱 보호본능이 일었고 그녀의 눈을 멀게했다.

‘계속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그런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버나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무섭게 인상을 썼다.

“나는 그라나딘 왕국의 영걸 베아트리스다! 그대들의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나의 사랑스런 연인 버나드 경을 공격해도 좋다!  너희의 죽음은 편치 못할 것이다! 이 몸이 사지를 완전 작살을 낼테니까!”

베아트리스의 말에 공감한 로잘리나가 칼을 높이 쳐들며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

줄리안이 히죽히죽대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단장님, 저 근육녀한테 뭔짓을 한겁니까? 어떻게 꼬신거예요?”
“나도 이유를 몰라 설명을 못해주겠네.”

이드리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소. 부정적이진 않고 무언가 기뻐보이는구려?
“든든한 아군이 생겼거든.”
-아군? 누구길래?

프레드릭왕이 뒷짐을 진 채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조만간 늑대가 저 근육질 년과 낑낑대며 그짓을 하는 꼴을 볼 수 있겠군. 저 크고 단단한 엉덩이에 꼬추를 끼워넣기도 쉽지 않겠어.”
“당신 페니스는 서지도 않잖아.”

베아트리스가 비웃었다.
그녀의 도발은 효과가 있었다.
프레드릭왕은 쉽게 발끈하며 그녀에게 저질스런 욕을 퍼부어댔다.

“네 왕은 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느냐! 이 덩치  창녀 주제에! 영걸 신분인 네년은 우리 왕국을 침범했어! 이 말은 즉 전쟁이다! 베아트리스! 네년 때문에 그라나딘 왕국과 우리 왕국은 앞으로 전쟁을 치를 일만 남았다! 바티스타 경! 레이비론스 경! 안야 경!  개 같은 년부터 잡아족치게!”

주변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싸움이 벌어지려 하는 찰나 누더기 망토를 걸친 사내가 불현듯 버나드 앞에 나타났다.

“버나드! 어디있느냐 버나드!”

눈을 감은 채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사내는 맹인이었다.
버나드는 그를 보자마자 더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레퍼드!”
“오오,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레퍼드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가서 대뜸 손에 잡히는 것을 껴안고 주섬주섬 어루만졌다.

“이게 얼마만이냐! 이 녀석, 못본 사이에 키도 아담해졌고, 그동안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가슴도 풍만해지고 물렁물렁해졌구나. 으음? 물렁물렁?”
“스승님, 전 여깄습니다.”
“뭐라고?”

영걸 안야가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 자식이 죽을려고 환장했군.”
“어이쿠 숙녀분께 무례를 범했고만! 미안하오!”

레퍼드는 서둘러 손을 거두며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내 앞이 안보여서 그만 실수를 했소이다!”

하지만 안야는 으르렁 거리며 화살을 하나 꺼내들었다.

“사죄는 죽음으로 갚아라!”

레퍼드의 목을 노리고 그녀가 화살을 휘둘렀다.
하지만 레퍼드는 그녀의 공격을 가뿐히 피하며 바람처럼 버나드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오오, 버나드! 많이 보고 싶었단다!”
“스승님, 그 친구는 줄리안입니다.”
“으응? 여기도 아니야?”
“전 여깄습니다.”

버나드가 먼저 다가가 오랜만에 재회한 스승을 기쁜 마음으로 껴안았다.

“흰머리가 왜 이렇게 느셨습니까?
“그만큼 늙은게지. 으음? 그나저나 너는  이리 덩치가 작아졌느냐?”
“말하자면 사연이 깁니다.”
“알았다. 귀에 익은 네 목소리가 분명히 너라고 말해주니 됐다.”
“그런데 여긴 어찌 알고 오신겁니까?”
“프레드릭이 윙블 가문의 도만 영주와 마렐 부인에게 행한 참극을 쫓아 어느새 이곳까지 이르렀다. 너와 만나서 다행이로구나.”

레퍼드가 말을 마치는 순간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저 자가 레퍼드라고!? 그 후, 훌륭한 용병왕!?”
“맙소사! 그가 아직 살아있었다니!”

레퍼드는 주변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렇다! 내가 바로 훌륭한 용병왕 레퍼드다! 내가 아끼는 버나드를 돕고, 폭군 프레드릭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이곳에 왔지!”

프레드릭왕은 버나드와 함께있는 레퍼드를 노려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저 눈깔병신을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오래전 레퍼드의 눈알만 빼버리고 살려둔 것을 후회했다.
그는 즉시 세 영걸에게 외쳤다.

“일이 점점 재밌없어 지는구려. 어서 모조리 죽이시오!”

그러나 바티스타, 레이비론스, 안야,  영걸은 처음 기세와 다르게 주저했다.
셋 중에서 가장 지혜가 높은 레이비론스가 입을 열었다.

“더는 우리가 나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저길 보십시오. 그라나딘의 왕국 베아트리스 경, 훌륭한 용병왕 레퍼드, 거기에 버나드 경까지. 저 셋과 우리 셋이 맞붙었다가는 이 일대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누구도 살아남으리라 장담할  없습니다. 심지어 전하까지도요. 여섯 영걸의 싸움은 단순한 전쟁이 아닙니다.  구역을 넘어 한 영지와 영지민들이 무참히 살육되고 파괴되는  희생을 감수 해야하는 일입니다. 저는 추후 우리 백성들 사이에서 한 영지를 파괴한 학살자란 불명예스런 명칭으로 불리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도망치겠다는거요?”
“도망치는게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상황을 바라볼뿐이죠. 게다가 저기 만인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용병왕 레퍼드가 있습니다. 저 자가 지금은 비록 노쇠하여 힘을 잃었다한들 그의 인덕과 명성은 전하의 왕국을 넘어 많은 나라에 알려져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위대한 인물을 제 손으로 죽였다고 알려져 보십시오. 훌륭한 용병왕 레퍼드를 살해한 레이비론스라……  역시 절대 쌓고 싶지 않은 불명예스러운 명예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일에서 손을 떼고 싶군요.”
“뭣이!? 명령이다! 당장 저놈들을 죽여!”
“애석하지만 전하는 저희의 왕이 아닙니다.”
“빌어먹을!”

노기를 드러낸 프레드릭왕을 향해 베이비론스와 바티스타, 안야는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우리 세 왕국과 레온왕국이 맺은 협약에 따라 전하의 호위는 계속 맡을 것입니다. 허나 저들 셋과의 무력충돌은 가능한 피할 생각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라나딘 왕국과의 외교 문제도 있고, 우리는 레온왕국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너그러이 살펴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나서지 않으면 그라나딘 왕국의 영걸 베아트리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훌륭한 용병왕 레퍼드 역시 병사들의 싸움에 명분없이 끼어들지 못할테고요.”
“타세력의 개입없이 오로지 레온왕국의 힘만으로 해결하십시오. 버나드 경과 전하의 구도로 가는겁니다. 그것이 현명한 길입니다.”
“저들은 외교적 문제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은데 당신들은  상황을 면피할 생각에 말도 안되는 궤변만 늘어놓고 자빠졌군!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해!”

세 영걸이 발끈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왕국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흥! 그대들이 겁쟁이처럼 도망치겠다면 할 수 없지! 실컷 구경들이나 하시게!”

프레드릭왕에게는 아직 그의 자식들이 있었다.

“당장 버나드를 공격하라 전하라!”

왕의 명령은 곧바로 배후에 진을 치고 있던 자식들의 부대에게 전해졌고, 이내 이천명에 달하는 병사들의 목청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버나드를 죽여라!”
“전하를 지켜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정렬해있던 병사들은 한 목소리로 외치며 진군을 시작했다.

“왕국을 위협하는 악마를 물리치자!”

레퍼드는 귓가에 들려오는 힘찬 함성에 칼을 뽑아들며 미소지었다.

“너와 함께 싸우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염려마라. 나도 아직 열 사람 몫은 거뜬히 해낼  있다.”

베아트리스는 평원을 가득 메운 채 물밀듯이 밀려오는 군사들을 보며 피가 끓어올랐다.

“그동안 사내들을 두들겨 패던 내가  남자를 위해 싸우다니 너무 낭만적이군!”
“베아트리스 경,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진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일이 끝난뒤 차차 풀기로 하자고.”
“오해?”

베아트리스는 가만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웃음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나타나서 네게 고백을 하니 당황스러우리란걸 잘 안다. 오해가 아니야.  마음은 진심이다. 그러니……”

그녀가 칼을 뽑아들며 크게 외쳤다.

“오늘부터 네 침대는 내 침대다!”

줄리안이 낄낄 거렸다.

“단장님, 베아트리스 경과  어울리는군요. 그녀의 마음을 피하지 마십시오.”
“넌 내가 난처한걸 즐길뿐이겠지.”
“잘 아시는군요.”

로잘리나는 한껏 들떠보였다.
그녀는 칼을 쥐고 버나드와 나란히 서며 그를 힐끔 쳐다보고 미소지었다.

“마스터울프와 함께 싸우다니 영광입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싸울게요. 싸울때  근처에 계속 있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설레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버나드는 오늘 처음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의 호의가 갑작스러운게 사실이었다.

“로잘리나 경. 힘든 싸움이 될거야. 줄리안과 같이 다니도록 해.”
“전 당신을 존경해요. 당신이 싸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요.”

줄리안이 끼어들었다.

“이 정도 열성팬인데 전투가 끝나면 단장님께서 키스라도 해줘야겠군요. 열심히 싸운 상으로 한 다섯 번 정도는 해줘야되겠는데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세요.”

로잘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편, 버나드는 점점 가까워지는 적들과 더불어 자신들을 포위한 왕의 병사들을 경계하며 무척이나 진지했다.

“모두 전투에 집중해. 상대의 숫자가 많으니까 먼저 공격하지 말고 덤비는 녀석들만 상대해.”

그때였다.
주변 상황에 누구보다 세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레퍼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버나드, 새로운 무리가 오고 있다.”
“네?”
“동쪽이다. 동쪽을 봐!”

동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아무것도 없는 평원의 지평선 너머에서 먼지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곧 말발굽 소리, 둥둥거리는 북소리, 여러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횡렬로 늘어선 수많은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깃발을 먼저 알아본 프레드릭왕은 크게 분노했다.

“저건 미셸의 군대잖아! 그년이 왔어! 제기랄!”

버나드는 선두에서 백마를 타고 있는 여인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킨테의 미셸……”

줄리안이 밝게 웃었다.

“이제야 좀 쪽수가 맞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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