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결전6
눈부시게 빛나는 창날이 그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해낸 왕은 흰자위를 드러내며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푸른색의 옷 위로 피가 번져갔다.
병사들은 놀라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저, 전하께서 승하하셨다!”
그때 하얀 고치속에 갇혀 있던 버나드가 고치를 찢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버나드의 모습은 다름 아닌 십대 소년의 모습이었다.
먼 곳에서 그 광경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던 베아트리스는 크게 놀랐다.
“소, 소년이다! 내가 찾던……!”
전보다 키가 작아지고 어려진 버나드를 보며 줄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이 모습은 전에 본적이 있는 모습이군요. 도대체 목숨이 몇개나 있는겁니까?”
“줄리안……”
버나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으려할때, 돌연 한쪽에서 껄껄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버나드! 버나드! 아하하하!”
세상이 떠나가라 크게 웃는 자는 안소니 후작이었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않는 꼼수를 쓰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로다! 이를 어찌 해결해야할꼬!”
안소니 후작은 뒷짐을 진채 느긋하게 버나드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그가 말을 마친 순간 얼굴이 변하면서 프레드릭왕의 모습으로 변했다.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프레드릭왕의 모습은 안소니 후작으로 변했다.
“어, 어떻게 된거지?”
“저, 전하께서 살아계셨어!”
병사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로잘리나는 경악했다.
“아버지!”
프레드릭왕은 마법을 써서 그때까지 안소니 후작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된 로잘리나는 이미 죽어버린 안소니 후작에게 달려가 상체를 끌어안고 크게 슬퍼했다.
“항상 준비는 철저해야지. 암.”
프레드릭왕은 웃음기 서린 얼굴로 소년이 된 버나드를 밑에서부터 위로 쭈욱 훑어보았다.
“꼴이 아주 가관이구나. 마녀 멜라니아의 젊은 모습하며 너까지 이상한 모습이 되어버렸어.”
“당신이 원인이지.”
버나드는 칼을 쥐고 한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그만 포기해라 버나드.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프레드릭왕은 여유롭게 옥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그 앞에서 양팔을 벌렸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세상에서 왕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버나드는 단상 위에 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비웃었다.
“네 왕놀이는 끝났어.”
“배은망덕한 놈!”
프레드릭왕은 정색하며 버나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왕은 넓게 포진해 있는 수많은 병사들을 둘러본뒤 다시 버나드를 쳐다봤다.
“내 병력이 이것뿐이라 착각하면 큰 오산이다. 여기 있는 자들이 네놈의 칼앞에 전부 쓰러진다 할지라도 나의 병력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버나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숨죽이며 자신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한쪽에선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로잘리나의 곡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기서 더 올 가문이 있나?”
“내 자식들을 고려치 않은게 네놈의 패착이다.”
“자식들?”
뿌우우우우우ㅡ
갑자기 먼 곳에서 뿔나팔 소리와 함께 미세한 땅울림이 일었다.
“제때 와줬군.”
프레드릭왕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땅울림은 점차 커지더니 곧 프레드릭왕의 등뒤로 수도 없이 많은 깃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의 군대가 왕을 돕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지원군인가?”
“대충 봐도 우리의 두 배는 되겠어!”
갑작스런 대군의 출현에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버나드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저들의 깃발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부 왕의 자식들이다.
최근 벌어진 2차 걷는 사자 전쟁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왕의 자식들이 이끄는 부대들.
레아에게 살해당한 아말리아 왕비의 아들 “브랜든의 부대”
그리고 그의 누이인 “알렉시아의 부대”
서4남 “케네스의 부대”
서6녀 “테레사의 부대”
그외 서7남 조지, 서9남 로베르, 서9남 로난의 부대까지……
샤를리나를 제외하고 모든 자식들이 전부 다 왔다.
그들의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왕국에 나타난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잠시 걷는 사자 전쟁을 멈추고 한마음 한뜻으로 일치단결했다네. 내 아이들이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프레드릭왕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버나드는 초조해졌다.
제 아무리 무적 갑옷이 있다지만 대군을 상대로 홀로 싸우기는 버겁고, 더구나 목숨도 이제 아껴야한다.
소년 상태에서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더욱 작아졌다가는 아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기상태로는 일을 그르치게 된다.
‘기회는 지금 뿐이다.’
서둘러 프레드릭왕을 죽이기로 결심한 버나드가 칼을 고쳐잡을때였다.
프레드릭왕은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듯 곧바로 손을 저었다.
“포기하게나. 네 상대는 내가 아니야. 네 상대는 따로 초대를 해뒀지.”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건장한 덩치를 자랑하는 두 사내와 한 여자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아냐 아냐, 신경쓰지들 말게. 딱 적당한때에 와주었어.”
“저희가 처리해야할 자가 바로 이 자입니까?”
휘황찬란한 장비로 무장한 그들은 버나드와 프레드릭왕의 사이에 끼어들며 버나드를 향해 상당한 적의를 드러냈다.
“소년이군요.”
“한때 우리왕국의 영걸이었으니 방심하지들 말게나. 목숨도 끈질겨서 죽여도 계속 살아나더군.”
프레드릭왕은 흐뭇한 표정으로 버나드를 쳐다봤다.
“이 세 사람이 네 상대다. 날 지키러 먼 길을 달려왔으니 잘 대접해주라고.”
버나드의 미간에 주름이 접혔다.
놀랍게도 눈앞의 세 사람은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왼쪽의 사내는 로에그린 왕국의 영걸 바티스타.
중앙의 사내는 아서긴 왕국의 영걸 레이비론스.
마지막으로 우측의 여자는 비렐 왕국의 영걸 안야.
버나드는 말도 안되는 상황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로에그린, 아서긴, 비렐 왕국과 우리가 동맹을 맺었었나?”
“아, 자네가 이상하게 여길만하겠군. 1년전까지만 해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 네 왕국은 제국의 이간질 정책 때문에 서로 친하지 않았으니까.”
프레드릭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조만간 우리 네 왕국은 제국을 칠 생각이네. 그 황제 계집을 쫓아낼 생각이야.”
“이제보니 보통 미친게 아니군.”
프레드릭왕이 낄낄 거렸다.
“왕국이 발전하려면 전쟁을 해야 해. 그리고 왕국이 평화로워봤자 자식들이 아버지한테 대들기 밖에 더 해?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가르쳐줄때가 왔어.”
“넌 정말 왕이 아니야.”
버나드는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었다.
“넌 왕을 해선 안됐어.”
“왕 앞에서 말을 가려서 하게.”
프레드릭왕은 웃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화가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버나드, 널 죽일 수 없다는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지. 용암이 펄펄 끓어오르는 에트리나 활화산에 널 던져넣어야겠어. 바티스타 경, 레이비론스 경, 안야 경이 있는한 네놈도 꼼짝 못하겠지. 영걸들이여 어서 시작해주게.”
“예.”
“그러지요.”
“소년이 상대라니, 씁쓸하군요.”
세 영걸은 버나드를 노려보며 사방을 포위하듯 에워쌌다.
바티스타는 혼자서 전장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일당천의 무력을 가진 괴물 같은 장수였고, 레이비론스는 드래곤으로 폴리모프해 난공불락의 성을 쑥대밭으로 만든 일화가 있다. 안야의 활 쏘는 실력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났고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재주까지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븐로얄과 동등한 수준의 힘을 가진 영걸들이었다.
버나드는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해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이 자리에 온 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오직 레아가 되살아나 행복하게 살아가 주기만을 희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은 이 싸움에서 온몸이 부서지도록 싸워 불구가 되든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믿었던 주인에게 버려진 처량한 늑대는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뿐……
“레아……”
버나드는 눈을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평원의 바람은 선선했고 태양은 아주 높이 떠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때 버나드의 눈빛은 확고했다.
“너희 셋을 짓밟고 프레드릭을 죽이겠다. 와라.”
두 손으로 마검을 쥐고 정신을 집중하는 찰나였다.
갑자기 줄리안이 나타나 옆에 나란히 섰다.
“그 작아진 몸으로 뭘 어쩌겠다는건지, 여전히 답답하다니까. 힘들면 좀 도와달라고 외치라고요.”
그도 칼을 뽑아들며 세 영걸과 대치하는게 아닌가.
“줄리안……?”
“이래봬도 밤의 늑대들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당신의 부하 한 명’입니다. 한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줄리안의 말에 버나드는 미소지었다.
거대한 적들을 상대함에 있어 줄리안이라면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둘의 힘으로 최소 한놈은 박살내기에 충분하리라.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불쑥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단아하고 기품있는 무장을 한 여기사가 심지 굳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나드는 그녀를 알았다.
“당신은 로잘리나 경……?”
“저를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그녀는 한번 훌쩍이더니 말을 이었다.
“허락해주신다면 저도 마스터울프님을 돕고 싶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비로소 깨달았거든요.”
“경은 안소니 후작의 딸이 아닌가. 괜찮겠나?”
줄리안이 귀띔했다.
“내부 교란을 노린 매수공작의 결과물입니다. 제 주입식 교육을 통해 마스터울프의 사상에 감화되었죠.”
“음?”
슬쩍 윙크를 하는 줄리안의 말을 무시하고 로잘리나를 돌아봤다.
“경의 부친은 내 칼에 목숨을 잃었네. 분노하지 않는가?”
로잘리나는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 부친은 왕 같지도 않은 왕 프레드릭의 명에 따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백성을 살육하고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은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한다는 하늘의 뜻을 거역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부로 저희 그란델 가문은 부친의 과오를 사죄하고 저 로잘리나가 바로 세우겠습니다.”
로잘리나는 성큼성큼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 왕국의 영걸,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절 거두어주신다면 목숨을 바쳐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버나드는 내심 놀랐다.
“날 섬긴다고? 왜?”
생뚱맞다는 반응이 나오자 로잘리나가 난처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저기…… 당신을 존경합니다. 곁에서 배우고 싶기도 하고…… 당신이야말로 품격을 지닌 사람이란 생각도 들고…… 에, 또……”
“고맙다.”
버나드가 앳된 얼굴로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그토록 미워하던 후작의 여식이 나와 함께해줄줄이야. 전혀 생각도 못했어.”
버나드는 마검을 들어 그녀의 양어깨를 가볍게 한번씩 쳤다.
“이로써 넌 내 기사가 되었다. 함께 싸우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로잘리나는 크게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진 버나드를 내려다 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무척이나 좋아라했다.
“지금부터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버나드, 줄리안과 함께 그녀가 칼을 뽑아들며 적과 대치하는 순간 왕 다음으로 두번째로 많은 병력을 차출했던 그란델 가문의 병사들은 눈을 멀뚱멀뚱 떴다.
“여, 영애님께서 적한테 가담하시면 우린 어째야 하지?”
“몰라서 물어? 봉급 주는 사람의 뜻대로 해야지!”
그란델 가문의 병사들은 허둥지둥 몸을 돌리며 일제히 왕의 군대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프레드릭왕은 기막히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안소니의 여식이 날 배신할줄이야. 왕도에 돌아가거든 그란델 가문부터 철저히 뭉게줘야겠군. 쯧.”
왕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세 영걸 앞에서 두 놈이 되든 세 놈이 되든 상관없지. 어서 처리하시오.”
그때였다.
한 대신이 급히 뛰어와 난리법석을 떨었다.
“저, 전하 저길 보십시오!”
“또 무슨 일이냐?”
대신의 말에 눈을 돌려보니 먼 곳에서 날벼락이 치는 것처럼 천둥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런 벼락 소리에 놀란 병사들이 몸을 움찔하며 모두 그곳을 쳐다봤다.
몸주위가 뇌전에 휘감긴 근육질 여전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부근에 있던 병사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으며 홍해처럼 갈라졌고, 여전사는 두 눈에서 뇌광을 발산하며 매섭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녀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버나드 경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댔다가는 그날로 명줄이 끊길줄 알거라!”
베아트리스.
그녀는 소년이된 버나드를 보고 자신의 약혼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녀는 뇌전의 기운을 거침없이 발산하며 성큼성큼 중앙으로 향했다.
“버나드 경을 놔주거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감전시켜 죽여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