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결전5
병사들의 공격이 시작됐고, 사방에서 악의와 적의가 들끓었다.
“나를 따르라!”
대검을 든 어떤 기사의 외침과 함께 버나드를 향해 수많은 창과 검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그러나……
퍼어엉!
버나드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동시에 나가떨어져 버렸다.
“어?”
병사들이 순식간에 당하는 광경을 보고 안소니 후작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버나드는 딱히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서있었을뿐이었다.
하지만 스무명 가량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날아갔다라……?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전하, 저건 설마……!”
초조한 기색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던 프레드릭왕이 혀를 찼다.
“아무리봐도 세븐로얄 같군.”
버나드는 우두커니 서서 웃고 있었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세븐로얄의 힘이 완벽하게 돌아와 있었다.
“조금전 그 폭발로 봉인이 풀린게 틀림없어.”
체내에 넘쳐 흐르는 힘을 그는 잠시 만끽했다.
“두려워 하지마라! 신께서 친히 전하를 돌봐주시니 그 가호를 우리도 받고 있다!”
눈앞에 기사들과 함께 다수의 병사들이 보였다.
“공격!”
그들이 기세 좋게 덤벼들었다.
“소용없다.”
버나드는 마검을 고쳐 잡고 좌에서 우로 크게 허공을 그었다.
쉬이익!
초승달 모양의 섬광이 재빠르게 솟구쳐 나가며 기사와 병사들을 덮쳤다.
“끄악!”
“아악!”
별빛처럼 영롱한 섬광빛이 사라졌을때,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허리가 잘려나간 채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몇몇 병사들이 하얗게 질리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 방금 뭐야!?”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기사들은 난데없는 기술을 보고 기세가 한풀 꺾이며 칼을 늘어뜨렸다.
“칼에서 뭔가가 나갔어……?”
로잘리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검기를 방출한걸까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녀가 알기로 검기는 칼날에만 머물며 검의 위력을 더할 뿐이지 칼날을 둘러싼 검기를 쏴날린다는건 본적도 들은적도 없다.
줄리안이 피식 웃었다.
“검기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로잘리나의 물음에 줄리안은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뜸을 들이다 나직이 대답했다.
“마스터울프가 본래의 힘을 되찾은거야. 세븐로얄이라고 하지.”
프레드릭왕 주변이 난리가 났다.
언덕 위의 대신들은 어서 버나드를 죽이라며 언덕 밑에 포진해 있는 얼빠진 표정의 지휘관들을 다그쳤다.
그러는 동안 크록과 디아나가 버나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사자의 갈기털처럼 풍성하고 거친 머릿결을 휘날리며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는 크록.
금발에 꽁지머리를 한 날렵한 몸매의 여검사 디아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두 사람에게 대화란 것은 불필요했다.
그들은 굶주린 맹수처럼 버나드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프레드릭왕은 그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저 둘을 보게. 기세가 마음에 들어.”
안소니 후작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크록 경과 디아나 경 이 둘이 힘을 합치면 제 아무리 세븐로얄을 가진 마스터울프라 할지라도 해볼만할겁니다.”
“암. 우리 왕국의 차세대 영걸들 아닌가.”
디아나가 버나드의 배후에서 나타나며 ‘쾌속검’을 휘둘렀다.
몇주전 터널을 막고 있던 커다란 뱀의 몸뚱이도 종잇장처럼 거침없이 찢어발겼던 기술이다.
“죽어라!”
그러나 버나드의 갑옷은 흠집조차 안났다.
디아나는 속히 쾌속검을 접고 다른 공격을 시도했으나 버나드는 말그대로 괴물이었다.
귀신처럼 디아나의 칼을 빼앗은 다음 그녀의 목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 순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사이에서 놀람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저렇게 쉽게 당한다고!?”
“맙소사!”
우드득!
버나드는 디아나의 목을 부러뜨린뒤 그대로 집어던져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모든 사람들이 또 한차례 술렁거렸다.
“잘 먹으마!”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디아나의 시체에 신경을 쓰고 있을때, 크록이 불현듯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뚝 떨어지듯 거대한 양날도끼를 내려치며 버나드에게 일격을 날렸다.
“하압!”
하지만 그의 야심찬 공격도 무용지물이었다.
이드리스 갑옷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튼튼함을 자랑했고, 오히려 버나드의 사정거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손쉽게 붙잡혀버렸다.
버나드는 세븐로얄의 압도적인 힘을 발휘해 그의 갑옷을 깨부수고 심장에 칼을 밀어넣었다.
“커억……!”
크록은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부르르 떨다가 그대로 죽어버렸다.
싸늘한 주검이 된 그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왕국 제일의 실력이라고 칭송받던 두 사람이 버나드에게 상대조차 되지 못하고 쉽게 당해버리자 모두 충격에 빠졌다.
“버나드…… 버나드…… 크크큭……!”
프레드릭왕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동안 버나드는 묵직하게 한 길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고,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인가 병사들이 그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없었다.
세븐로얄을 손에 넣은 버나드를 막아설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비등한 힘을 가진 타국의 영걸이 나타나면 모를까.
지금 이 순간 그 앞에 적수가 없었다.
왕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버나드! 이것을 보게나!”
프레드릭왕은 손에 든 보석상자를 높이 들어 올려보였다.
“이게 뭔줄 아는가?”
어느새 4진에 이른 버나드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왕과의 거리는 불과 100미터였다.
왕이 외치는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1년전 네가 감옥에서 탈옥했을때, 우린 마녀 멜라니아의 방 벽장에서 이것을 찾아냈지! 이게 뭔줄 아는가?”
프레드릭왕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
버나드는 왕의 손에 쥐어져 있는 금빛 보석상자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그게 뭐지?”
“뭐? 모른다고?”
왕이 낄낄 웃음기를 머금은 상태로 재차 외쳤다.
“정말로 모르는건가 아니면 모르는척 하는건가? 그렇다면 내가 파괴해도 괜찮은것이냐?”
버나드는 신중히 고민했다.
‘멜라니아의 방에서 찾아냈다고……?’
때마침, 그때까지 숨어서 관전만 하고 있던 멜라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프레드릭왕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죽일놈아! 그건 건들지마! 이리 내놓거라!”
“저 계집은 또 뭐야?”
“내가 바로 멜라니아다!”
“네년이 멜라니아라고?”
왕은 크게 웃었다.
“늙은 몸뚱이가 젊어지다니 놀랍구나! 뭐, 사연은 차차 듣도록 하지.”
버나드는 멜라니아를 바라봤다가 다시 프레드릭왕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불안감이 엄습해있었다.
“설마 저건……!”
“이제야 반응을 보이는구나 버나드! 이건 아공간 상자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할 생각에 마법사들을 시켜 안으로 들어가보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허나 상자 안을 투시하는 것은 가능했다!”
프레드릭왕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멜라니아가 분한 목소리로 먼저 귀띔했다.
“저 안에 레아의 시신이 들어있단다.”
“!”
“벽장속에 꼭꼭 숨겨둔걸 어찌 찾아냈는지.”
버나드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저렇게 작은 상자였으면 궁을 떠날때 왜 들고 나오지 않았어?”
“당시만 해도 상자의 아공간이 완벽치 못했다. 레아는 어제 죽었고, 나는 급히 그 아이의 시신이 썩기 전에 아공간을 만들어야했지. 뒤엉킨 마력들이 자리를 잡을때까지 안정이 필요했어. 들고 다녔다간 흔들림 때문에 아공간이 채 굳기도 전에 허물어질 우려가 있었다.”
프레드릭왕의 외침이 들렸다.
“투시를 했더니 이 안에 엘프 한마리가 들어있더군! 그것도 나의 사랑스런 왕비와 아들을 살해한 원수 계집이!”
그는 무척 즐거워보였다.
“버나드! 자네가 계속 날뛰겠다면 이 아공간 상자를 아주 철저하게 박살을 내버릴 생각이다! 이 영겁의 불속에 던져 넣을거라고!”
프레드릭왕의 주변에 있던 기사가 두꺼운 장갑을 끼고 활활 타오르는 화로를 들고 나타났다.
“무엇이든 태우는 영겁의 불꽃이라면 아공간 상자속에 담긴 자네의 옛 부하도 살살 녹아버리겠지! 자, 기대되지 않나?”
왕이 사악하게 웃어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버나드는 그의 전부가 왕의 손에 달려 있음에도 의외로 침착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게 뭐지?”
“꼭 말을 해야 알겠나?”
버나드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레아가 떠올랐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레아가……
‘널 위해서라면 나도……’
결심한 버나드는 이내 멜라니아와 무언가를 상의했고, 멜라니아가 왕앞으로 걸어갔다.
“내게 보석상자를 건네주면 원하는걸 들어주겠다는군.”
“할망구는 잠깐만 기다려. 젊어지는 비법에 대해서 오늘밤 나랑 느긋이 얘기하자고.”
프레드릭왕은 보석상자를 멜라니아에게 건네며 100미터 가량 떨어진 버나드를 쳐다봤다.
“자, 네 차례다!”
멜라니아는 보석상자를 꼼꼼이 살펴본뒤 버나드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레아의 시신이 든 상자가 확실했다.
“여보게 버나드! 한가지 유의해주게! 아까처럼 팔을 잘랐다간 그땐 우리의 약속을 저버린거라 여길거야. 여기 있는 멜라니아와 옛부하의 시체를 지키고 싶다면 허튼 짓은 말아주게!”
버나드는 잠자코 멜라니아의 손에 있는 보석상자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투구를 벗어던졌다.
그의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칼을 거꾸로 쥔 다음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이드리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또 죽을 생각이오? 미쳤소!?
“해야 돼. 이제 다 왔다.”
-다 오다니?
“주변 상황을 볼 수 없다고 했지?”
-그렇소만.
“사람들의 적의는 느낄 수 있고?”
-그렇소. 이 상황에 그건 왜 물으시오?
“수많은 적의 가운데 단 한 사람. 유일하게 적의가 없는 자가 나타나면 그때 완갑을 제거해.”
-음? 누군데 그러시오?
“그럼 이만.”
버나드는 주저없이 자신의 목을 찔렀다.
붉은 칼날이 그의 목을 관통하자 피가 솟구쳤다.
“와아아! 놈이 죽었다!”
“이번엔 확실해!”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늑대를 잡았도다!”
프레드릭왕도 기쁨을 만끽하며 박수를 쳤다.
멀리서 훔쳐보고 있던 베아트리스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왜…… 여태 잘싸우다가 저런 미련한 짓을……?”
사정을 잘 모르는 그녀로서는 버나드의 죽음이 참 뜬금없었다.
버나드의 시체 주변으로 병사들이 몰려들었고, 안소니 후작을 비롯해 프레드릭왕도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엔 확실히 죽은걸까요?”
죽은 버나드를 내려다보며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안소니 후작의 물음에 프레드릭왕이 껄껄 웃었다.
“여기 보게나. 팔이 온전함세. 아깐 분명 팔과 관련된 뭔가가 있었을거야.”
왕은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시체를 손상시키지 말고 지금 즉시 영겁의 불속에 태워버리거라.”
“네!”
기사들이 바닥에 쓰러진 버나드의 시체를 치우려던 순간이었다.
“도끼 좀 잠시 빌릴게.”
“예? 아 네네.”
한 병사가 자신의 도끼를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부대의 지휘관에게 의심없이 빌려주었다.
지휘관은 도끼를 만지작 거리며 버나드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누가 퍼질러 자라 그랬습니까?”
하면서 힘껏 도끼를 내려쳤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듯이 완갑이 사라졌고, 버나드의 왼팔이 싹둑 잘려나갔다.
“세, 세상에!”
“안돼!”
뜻밖의 상황에 놀란 병사들이 당혹해하며 소란스러워졌다.
뒷짐을 지고 있던 프레드릭왕도, 안소니 후작도, 어이없는 장면에 잠시 얼이 빠졌다.
도끼를 빌린 지휘관, 아니 줄리안은 피 묻은 도끼를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해맑게 웃어보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다시 싸우세요!”
버나드의 입안에서 수백가닥의 실들이 솟구쳐 나오면서 그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동시에 칼집을 구성하고 있던 마름모꼴의 조각들이 산산이 분리되며 허공에서 날카로운 창을 형성했고, 그 창은 빠른 속도로 지근거리에 있던 프레드릭왕에게 날아갔다.
“저, 전하! 피하십시오!”
푸욱!
“크아아악!”
왕이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