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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화 〉결전4 (174/200)



〈 174화 〉결전4

“으랴!”

베아트리스는 엄청난 속도로 숲속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멧돼지의 목에 휘감긴 올가미를 당기며 다른 손으로는 멧돼지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뇌전의 기운이 감도는 손바닥이 엉덩이를 때릴때마다 따끔한 자극에 화들짝 놀란 멧돼지가 부리나케 질주했다.

“피 냄새가 난다. 전장의 냄새가!”

그녀는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는 눈으로 일일이 봐야지만 싸움터를 찾아갈 수 있는 반면에 여기, 굳이 묻지 않고 보지 않고도 본능으로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
베아트리스.
그녀는 회귀 본능을 가진 연어처럼 바람에 실려오는 피냄새를 쫓아 버나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점점 짙어지는  냄새를 따라 이윽고 도착한 곳은 무수한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는 널따란 평원.

베아트리스는 멧돼지의 등위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가 타고온 멧돼지는 침을 질질 흘리며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죽어버렸다.

“예상외로 조용하군. 설마 끝난건가?”

베아트리스는 심각한 눈길로 전황을 살폈다.
피와 시체로 얼룩진 전장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이가 있었으니, 모두가  자를 주목하고 있었다.

“죽었나?”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사내 주변이 붉었다.
바닥에 번져나가는 피의 양을 보아하니 이미 죽은 것 같았다.
그 광경을 주의깊게 살펴보던 베아트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저 날개 투구! 저 갑옷! 그렇다면 저 자가 바로 버나드……?’

이제서야 엊그제 자신과 시합장에서 싸운 인물이 일전에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큰 버나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누런 잡초가 무성한 맨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제길! 한발 늦었단 말인가!”

***


“죽기 직전에 팔을 자르는 자해를 하던데 왜 그랬을까요? 폭발 마법이 심어지면 원래 그런겁니까? 불쑥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싶어진다든지.”

안소니 후작의 질문에 마법사장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깊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마스터울프는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역전의 용사. 그도 자신의 몸안에 폭탄이 심어진걸 단숨에 알아챘을 겁니다. 원인을 찾아 제거할 생각에 시간은 없고 팔부터 자르고 본 것이겠지요.”
“정답은 배안인데 말이지.”

프레드릭왕이 자신의 뱃살을 주물럭 거리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와중에 로잘리나는 넋을 잃고  있었다. 다들 기뻐하는 와중에 그녀만은 아무런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스터울프는 적이었지만 그의 죽음이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살아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기분이 어떠세요?”

줄리안에게 다가가 그렇게 묻자 줄리안은 먼 곳에 있는 버나드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말년에 고생만 하다 가셨네. 아무튼 관짝은  사이즈 작은걸로 주문해도 되겠어. 속이 다 터져버려서 그만큼 양도 줄어들었을테니까 말이야. 가벼워서 들기 편하겠다. 그렇지?”

답변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로잘리나가 째려본다.

“단장님은 한결 같으시네요.”
“어떤점이?”
“사람이 항상 가벼워요.”
“그게 내 매력이라고 하는 여자도 있는걸?”
“한때 섬겼던 분의 죽음 앞에선 한번만이라도 진지해지면 안되나요?”
“마스터울프와 생판 알지도 못하는 네가 대신 진지해주잖아. 그러면 됐지.”

로잘리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마스터울프는 당신 같은 사람을 대체 어떤식으로 통제했는지…… 그가 존경스러워질 지경이네요.”
“자유방목.”
“네?”
“자유방목 몰라? 그냥 내버려뒀다고. 내가 뭘하든 말든 신경 안쓰고.”
“그래도 시킬 일이 있으면 시키고 화낼땐 화냈겠죠.”
“전혀.”

줄리안은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익살스럽게 대꾸했다.

“심지어 내가 배신을 때려도 화를 안내던데?”
“그럴리가요.”
“진짜야. 지금 봐.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의미죠?”

로잘리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줄리안이 히죽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난 지금도 일중이야.”

 무렵, 왕의 명을 받은 시녀가 긴 치마를 펄럭이며 황급히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버나드의 시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미모의 시녀를 보며 휘파람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저, 전하께서 피를 받아오라고 하셨어요.”
“피?”
“생피를 여기에 받아오라고 하셔서.”

시녀가  술잔을 내보이자 병사들이 낄낄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내장주라도 드실려나, 얼른 떠가.”

시녀는 밑을 내려다보자마자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시금 용기를 내서 버나드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갑옷을 입고 있어 피를 받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혹시나 싶어 투구를 벗겨보자란 생각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다른 손으로 열심히 끙끙대며 투구를 벗겼다.
간신히 투구를 벗기자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엄마야!”

시녀는 깜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버나드의 벌어진 입안에서 하얀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녀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동시에 버나드의 입안에서 뿜어져나온 수백가닥의 거미줄들이 단숨에 버나드의 몸을 갑옷채로 칭칭 휘감기 시작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버나드의 몸은 고치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프레드릭왕과 그의 마법사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건 전장 한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불길한 타원형의 고치뿐이었다.

“여보게, 버나드는 죽었다 하지 않았는가?”

왕이 굳은 표정으로 묻자 마법사장이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된 것인지…… 전하, 기이한 일이옵니다. 버나드 경은 확실히 죽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하께서도 직접 목격하셨다시피 버나드 경은 아까 분명 죽었습니다.”
“그럼 저건 어찌 설명할건가?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 글쎄요. 직접 가서 살펴봐야 알  같습니다.”

마법사장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하자 안소니 후작이 그를 붙잡았다.

“멈추십시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안소니 후작이 왕을 돌아봤다.

“전하, 당장 저것을 태워버리십시오. 태우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어서 실행에 옮기게.”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안소니 후작은 곧바로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잠시 후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기사 세 명이 하얀 고치 주변으로 몰려들었을때였다.
그때까지 잠잠했던 고치가 돌연 부우욱 찢기며 팔이 튀어나왔다.
다음 머리가 나오고, 뒤이어 몸 전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으아악! 사람 살려!"

기사들은 횃불을 내동댕이치며 줄행랑을 쳤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은 안색이 급 변하며 모두가 놀랐다.
몇명은 망연자실한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저게 뭐야!”

프레드릭왕은 당황하기는 커녕 인상을 찡그리며 화가 솟구쳤다.

“당장 저 녀석을 죽여! 죽이란 말이다!”

로잘리나는 말문을 잃었다.

“믿을 수가 없어……!”

줄리안조차도 감탄하고 있었다.

“호오.”

날개 투구에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 갑옷.
고치속에서 튀어나온 기사는 죽었어야할 버나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것도 갑옷까지 고스란히 착용하고 있었다.
버나드의 귓가에 이드리스의 활짝 웃음짓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즈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기능을 넣어달란 것과 양팔의 완갑을 제거해달라고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구려? 정말 대단하오. 당신의 정체가 불멸자였다니!
“난 불멸자가 아니다. 그저 죽기 직전,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팔을 잘라봤을뿐이야. 죽은 상태에서도 부활이 가능할줄은 꿈에도 몰랐지.”

고치를 뚫고 나온 버나드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피로와 함께 모든 잔상처들이 완벽히 회복되어 있었다.

그리고 갑옷으로 온몸을 가린 까닭인지 그의 달라진 점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버나드는 30대의 버나드에서 20대 초반의 버나드가 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가 변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아 챈 사람이 있으니 바로 베아트리스였다.

“저 자의 정체가 뭐지?”

놀란 가운데 의문을 품은 그녀의 눈썰미는 짐승처럼 날카로웠다.

‘근육이 전보다 빠져있다. 그 때문에 상체가 훨씬 날렵해보여. 어깨의 간격도 좁아졌고. 키도 좀 작아진 느낌이 들고. 왜지? 갑옷속의 사내는 다른 사람인가? 아냐, 그럴리가 없다. 아주 약간 작아졌지만 전체적인 체형은 버나드가 맞다. 그럼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혼자 복잡하게 고민하던 그녀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에이! 닥치고 보면 알겠지!”

한편,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3진! 3진 공격 준비!”
“크록 경! 디아나 경! 어서 준비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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