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결전1
해링턴 영주의 집결 명령이 떨어진지 단 몇시간 만에 성안의 기사와 종자들이 모두 성문 밖으로 모여들었다.
말들의 울음 소리, 병사들에게 지시하는 상관의 고함 소리, 구경나온 시민들의 잡담 소리 등 모든 소리가 한데 뒤섞여 주변이 엄청 소란스러웠다.
준비를 끝마치고 야영지에서 출발한 샤를도 백검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말을 몰줄 모르는 샤를은 클레어의 뒷자리에 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비웃기는 커녕 작고 아담한 체구의 빛나는 외모를 보고 감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머리가 내 주먹보다 작아!”
“요정 같다!”
갑옷 차림의 해링턴 영주는 아내 이베타리와 함께 샤를에게 다가가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먼 발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베아트리스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주위에 몰려든 여자들이 쑥덕대는 소리를 통해 대충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왕의 군대와 맞서는 버나드 경을 구원하러 가는 중이라고?’
베아트리스는 왠지 모르게 초조함을 느꼈다.
마음 한켠에서 ‘너도 빨리 준비하고 가봐야하지 않겠냐’며 등떠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애매했다.
‘만약 그 버나드가 그 버나드면 큰일난 것이고, 혹시나 그 버나드가 그 버나드가 아니라면 헛수고를 하는 셈인데.’
키 큰 버나드 경이 자신이 찾는 키 작은 버나드인지 아닌지 확신을 얻지 못한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샤를리나의 부대 안에 버나드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단 한 사람, 자신과 안면이 있는 그 사람 뿐이라는 것.
‘좋아, 가서 살펴보는게 좋겠어.’
그녀는 결국 키 큰 버나드가 있는 곳에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약혼자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해 무장을 완벽히 하고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키 큰 버나드가 자신이 찾는 그 약혼자 버나드가 맞다면……
“전력을 다해 구하겠어. 덩치가 우락부락한 내가 좋다는 그……”
그녀를 이 길로 이끈 세레딕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기골이 장대한 자네 같은 여자를 만나는게 평생 꿈이었다지 뭔가. 엉뚱하게도 힘센 여자한테 잡혀사는게 꿈이래. 사내치곤 참 웃기지?’
베아트리스는 행복감을 느끼며 히죽댔다.
“나 좋다는 사내를 죽게 놔둘수야 없지.”
꼬마신랑과의 단란한 신혼생활을 떠올린 그녀는 생각만으로도 절로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크게 웃으면서 어디론가 떠나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이 수근댔다.
“저 근육녀 뭐야. 미쳤나봐.”
한편, 각자 병력을 이끌고 나온 샤를과 해링턴 영주에게 문제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버나드가 어디로 갔는지 둘 다 모른다는 것이다.
“음……”
“흠……”
오늘 새벽 버나드와 마주쳤던 성문 경비병이 보고하길, 평상복 차림의 버나드가 홀로 말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쪽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무작정 병사를 이동시킬 수는 없는 일.
“남쪽에 싸움터로 삼을만한 장소가 몇 군데 떠오르긴 합니다만, 흐음…… 우선 사람을 보내 파악해보겠습니다.”
“보고를 기다리다가는 늦어요. 일단 출발합시다.”
“하지만 공주님, 에…… 병사들의 체력도 신경써야하고 또 헛걸음을 하면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 손해일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게 아니라 소, 손해이지 않을까요?”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책있어요?”
샤를이 화를 내듯 흘겨보자 해링턴 영주는 움찔하더니 곧바로 엄지를 추켜올렸다.
“역시 공주님! 대단하십니다! 공주님의 말씀대로 우선 아무데나 직행합시다! 출발하지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베타리가 남편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속삭였다.
“헛수고만 할거라며 거부하면 되지 왜 바보같이 굴어요?”
해링턴 영주가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부인…… 부인도 잘 알겠지만 이 못난 남편은 여자들 앞에서 말을 잘 못한답니다…… 총각시절 성기가 큰 이유로 하도 많이 차여봐서 자신감없는 쑥맥이 되었어요……”
“나는 여자 아니에요?”
“에헤헤 부인이랑은 매일 한 이불을 덮고 자다보니……”
“오늘부터 각방 써요.”
“커어엇!”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기 보세요! 저기!”
모두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하늘 저편에서, 약 70기 정도 되는 그리폰 기사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제국과 영토를 맞대며 살고 있는 던헬더르 사람들은 갑작스런 그리폰 기사들의 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 방문했나봐!”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샤를은 이쪽으로 날아오는 그리폰 부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또 뭐야, 짜증나게……”
앞자리에 앉아있는 클레어도 하늘을 주시한 채 말을 꺼냈다.
“선두에서 날아오는 저 크고 화려한 그리폰……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책에서 묘사한대로라면 분명……”
그리폰들은 순식간에 날아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멈춰섰다.
강렬한 바람이 일고 태양의 역광에 눈이부셔 사람들은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올려다봐야만했다.
하늘에서 불쑥 또랑또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버나드를 찾고 있어! 당신들중에 버나드를 아는 사람있어?”
그때 마크, 율리아와 함께 샤를을 따라나섰던 데보라가 서둘러 소리쳤다.
“버나드는 여기 없어요! 저한테 말도 없이 떠나버렸어요! 서운하게!”
“혹시 큰 가슴 데보라……?”
“절 어떻게 아세요?! 어라?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는?”
그리폰에 타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밝게 웃었다.
“나야 란! 란이야!”
밑을 내려다보는 란의 얼굴을 보고 데보라가 손뼉을 마주치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어머 란씨!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데보라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묻자 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명랑하게 대답했다.
“뭐, 그럭저럭 열심히 살았지! 헤헷!”
가만히 듣고 있던 마크가 얼핏 백치미가 느껴지는 여동생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아, 지금 태평하게 안부나 물을때가 아니잖아.”
“아, 맞아! 란 씨! 우리 버나드 못봤어요?”
“나도 버나드를 찾으러 온거야 큰 가슴 언니. 버나드가 어디로 간지 모르는 거야?”
“몰라요! 오늘 새벽에 말도 없이 떠났어요! 그래서 슬프답니다!”
“그래? 말도 없이 어디로 간거지……”
란은 잠시 생각을 하는듯 하더니 곧바로 신이난듯 말했다.
“놀라지마! 인간들이 황제라고 부르는 높은 사람도 같이 왔어!”
“예!?”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깊게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바삐 하늘을 두리번 거렸다.
란의 앞쪽, 선두에 선 한마리의 그리폰.
그곳에 홀로 타고 있던 금빛 갑옷을 입은 여성이 햇빛을 받아 휘황찬란한 빛을 뿜내며 입을 열었다.
“버나드의 행방을 아는 자. 어서 짐에게 고하라.”
천둥과 같은 위엄이 있는 우렁찬 음성.
기겁한 사람들은 헐레벌떡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세상에! 고위귀족이 아니라 황제님이 직접 행차하셨어!”
“아, 안믿겨져!”
아래를 잠시 내려다보던 황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도 모르는건가……?”
얼마뒤 그녀는 지상으로 내려와 샤를과 해링턴 영주를 만났다.
두 사람에게서 버나드의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는 즉각 명령을 내렸다.
“빨리 찾거라!”
여러마리의 그리폰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빠르게 날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 라스티니아는 괜한 걱정을 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버나드는 그동안 얼마나 변했을까.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날 보고 실망하지는 않을런지……”
그러다 눈에 힘을 주며 가죽 장갑을 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프레드릭. 20년전 당신을 처음봤을때 어쩐지 느낌이 안좋더라니.”
***
“여봐라 늑대는 아직도 울지 않느냐?”
“예, 아직 이렇다할 소식이 없습니다.”
“궁을 나가더니 행동하는게 느려터졌군. 왕을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프레드릭왕은 가볍게 투덜대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사흘전 던헬더르 영지에 도착한 왕의 군대는 영주의 성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남동쪽 가디가스 평원에 진을 쳤다.
본래는 빠르게 해링턴 영주의 성을 급습할 계획이었으나 도중에 버나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디가스 평원에서 결판을 내자.
먹잇감이 제 발로 호랑이 소굴로 들어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원정을 나온 프레드릭왕의 목적은 아킨테 가문이 아닌 오로지 버나드였고, 버나드만 잡으면 왕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버나드의 암살 실력을 잘 아는 만큼, 그가 살아있는한 프레드릭왕은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버나드만 사라지면 두려울게 없어.’
마침내 오늘 왕국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를 제거한다.
프레드릭왕은 그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만 곧 끝난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마스터울프는 왜 이곳을 싸움터로 정했을까요?”
무장을 한 안소니 후작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갈색으로 물든 드넓은 평원을 바라봤다.
“혹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게 아닌지……”
왕은 낄낄 웃어댔다.
“걱정 붙들어 매게나. 주변을 둘러봐. 천오백명의 병사가 진을 치고 있고 사방은 뻥 뚫려 있어. 이런 곳에서 무슨 개수작을 부리겠나.”
왕은 하인 및 인부 삼백명을 제외한 천오백명의 군사를 1진에서 5진까지 총 다섯개 부대로 나누었고, 주요 대신들과 함께 시야가 탁트인 언덕 위에 자리잡은 채 모든 병력을 전방에 포진시켰다.
현재 프레드릭왕이 앉아있는 곳과 최전방에서 대기중인 1진과의 거리는 무려 500미터에 달했다.
“놈이 병력을 이끌고 올까요?”
“버나드랑 한편이 되면 그날부로 반역자일세. 그런 용기 있는 놈들이 있을라고?”
“그럼 세븐로얄을 되찾은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혼자 오는게 아닌지요?”
안소니의 후작의 말을 듣고 프레드릭왕은 옆을 돌아봤다.
나이 지긋한 궁중 마법사장이 서 있었다.
마법사장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세븐로얄의 봉인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확연히 느껴집니다.”
프레드릭왕은 껄껄 웃으며 다시 안소니 후작을 돌아봤다.
“그렇다는군.”
갑자기 뿔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뿌우우우우ㅡ!
“드디어 늑대가 울부짖을려나 보군! 왔어!”
프레드릭왕과 안소니 후작의 시선이 동시에 전방의 먼 곳으로 향했다.
최전방을 맡은 1진 병력이 포진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병력과 대치하듯 홀로 서 있는 자가 있었으니, 햇살 때문에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 갑옷을 착용한 채 날개 투구를 쓴 인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가져와.”
프레드릭왕이 손짓하자 마법사들이 서둘러 먼 곳의 상황을 크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수정구를 왕 앞에다 설치했고, 다른 대신들도 저마다 준비한 수정구를 본인들 앞에다 놓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줄리안과 로잘리나가 무장차림으로 대기중이었다.
“이 사람이 마스터울프……?”
로잘리나는 동료들과 함께 수정구를 들여다보면서, 날개 투구를 쓰고 나타난 자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수정구 주위에 몰려든 동료들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자가 1차 걷는 사자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마스터울프라는거지?”
“우린 전설을 보고 있다고!”
“근데 뭘 믿고 혼자 나타났지? 설마 천오백명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다는건가?”
다른 동료가 소리내어 웃었다.
“나 이 녀석에 관해서 재밌는 소문을 들었어.”
“무슨 소문?”
“동성애자래.”
“뭐 동성애자? 미친놈. 신이 격노할 짓을 하다니 역시 악마는 악마야.”
로잘리나가 급히 끼어들며 바로 부정했다.
“저도 그 소문 들었는데 아니래요. 걍 누가 헛소문 퍼뜨린 거예요.”
그녀는 말하면서 옆에 서 있는 줄리안을 힐끔 쳐다봤다.
마스터울프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 밖에 없을 것이다.
한마디 거들어주길 바랐지만ㅡ, 조금전부터 말이 없어진 줄리안의 얼굴은 상당히 진지해보였다.
지금까지 저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조용히 수정구만 응시하고 있었다.
-차가운 철가면속에 얼굴을 숨긴 그대가 정말 버나드가 맞다면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보거라.
수정구속에서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울프에게도 먼 곳에 있는 왕의 목소리가 전해졌는지, 수정구속의 그는 거리낌없이 투구를 벗어보였다.
“오오, 저렇게 생겼군.”
“악마처럼 안생겼어. 큼지막한 송곳니라도 달린줄 알았는데.”
주위가 웅성거렸다.
동시에 로잘리나는 투구를 벗은 마스터울프의 생김새에 그만 시선을 빼앗겼다.
‘내 예상보다 한참 젊잖아……?’
그녀가 상상했던 마스터울프의 모습은 위엄있는 중년남성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달랐다.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젊고 잘 생겼으며,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도 매우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사내였다.
-껄껄, 버나드가 맞군.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아니, 많이 변했지. 잘렸던 사지는 어째서 붙어있는게지?
마스터울프는 멀리 있는 언덕을 바라보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신께서 널 죽이라고 도로 붙여주시더군. 왕 같지도 않은 놈이 옥좌에 앉아있다면서 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하루빨리 쫓아내라지 뭔가.”
그 순간 듣고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저, 저놈봐라! 저, 전하께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일삼다니!”
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하며 눈을 부릅떴지만, 로잘리나는 버나드에게 다른 인상을 받았다.
왕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는 그의 모습은 무언가 격이 달랐다.
“마스터울프…… 킹메이커…… 만약 전하가 없었다면 본인이 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남자……!”
그녀는 수정구속의 버나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