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0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70 (170/200)



〈 170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70


“샤를 님. 샤를 님.”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샤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샤를 님, 아침입니다.”

클레어가 한손에 양젖이 담긴 컵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해……”
“일어나셔야 합니다. 버나드 경을 감시해야한다면서요.”

그 말에 이불속에서 뒹굴던 샤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됐어? 그 녀석 안떠났지?”
“어제 초저녁부터 취침에 들어간뒤 아직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다시 가서 살펴볼 생각입니다.”

요즘 샤를은 기사들을 시켜 버나드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감시하고 있었다.
얼마전 버나드 앞에서는 떠날테면 떠나라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지만, 사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것을 원치않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무력을 써서라도 그를 붙잡아둘 생각이었다.

“녀석은 절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 날 악마라고 생각할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다뤄줄거야. 감히 날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다니, 나쁜놈. 이기주의자.”
“드세요.”

클레어가 사과주를 탄 양젖을 내밀었다.
샤를은 단숨에 마시고는 침상에서 걸어나왔다.
그녀는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얼굴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오늘은 뭘 하면서 놀까. 아침부터 버나드를 괴롭혀줄까?”
“식사하고 계시는 동안 저는 그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응, 빨리 갔다와. 녀석의 오늘 일정도 알아오고.”
“네.”

클레어는 방을 나와 곧장 버나드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줄곧 무감정한 표정을 유지하던 이전의 모습에 비해, 오늘 클레어의 얼굴에는 풍부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조급함, 설레임, 초조함, 즐거움 등등 그녀는 빨리 버나드와 만나고 싶었다.

어제 관계를 맺은 이후부터 잠잘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버나드만 생각했을 정도로 그에게 푹 빠져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꼼짝 못하고 하루종일 샤를을 지켜야한다는게 이렇게 괴롭고 힘든지 처음 느꼈다.
짧게라도 좋으니 어서 만나서 다정한 연인들처럼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갖길 원했다.
그리고 그의 페니스를 또 빨아주고 싶었다.
그가 너무 좋았다.

“오셨습니까?”

버나드의 방문을 감시하고 있던 기사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밤을 새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 좀 피곤해보인다.

“지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버나드 경은 뭐하나요?”
“아직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습니다.”
“한번도 안나왔나요?”
“네.”
“식사는요?”
“식사 당번을 맡은 하녀들이 너무 안온다 싶어서 방금 전에 알아봤는데, 어제 저녁 버나드 경이 갑자기 주방의 하녀들을 찾아와서는 아침은 거르겠다고 했다더군요.”
“왜 그랬지……”

클레어는 굳게 닫혀있는 방문을 주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침 밥은 챙겨먹는게 좋은데. 어디 아픈가.’

자기도 모르게 벌써 버나드의 아내가 된  마냥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 쉬세요. 지금부터 제가 맡겠습니다.”
“휴, 가서 오전까지 자야겠습니다. 그럼 수고 하십시오. 식당가서 밥부터 먹을까~♪”

콧노래를 흥얼대며 떠나는 기사를 뒤로하고 클레어는 곧바로 방문으로 향했다.
버나드의 방을 노크하는데 있어 거리낌은 전혀 없었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도 버나드는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마음 편히 받아줄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똑똑.

“버나드.”

똑똑.

“버나드?”

똑똑.

“나야, 클레어.”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클레어는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초조한 심정으로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쾅쾅!

“버나드! 나 클레어! 들어가도 돼?”

혹시나 문고리를 돌려보았더니 문은 잠겨있었다.
철컥.
철컥.

‘이상해……’

버나드가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클레어는 순간 이성을 억제하지 못했다.
급기야 그녀는 마나를 실은 주먹을 휘둘러 가차없이 문을 때려 부쉈다.
팍!
그녀는 뚫린 구멍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잠금장치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버나드?”

약간 냉기가 느껴지는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나드가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소지품들이 몇 개 남아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클레어의 시선이 급하게 구석의 갑옷 거치대로 향했다.
슬프게도, 갑옷 거치대에 걸려있어야할 갑옷이 사라져 있었다.

“안돼!”

그녀는 당장 방을 뛰쳐나가 샤를에게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어에게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샤를은 충격과 실망이 뒤섞인 얼굴로 의자에 털썩 앉더니, 갑자기 버나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얌체 같은 자식이 날 속였어! 날 똥으로 봤다고!”

샤를은 먹던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크게 성을 내며 하녀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여태껏 단 한번도 입지 않았던 그녀의 전용 갑옷을 꺼내들었다.

“어서 입혀! 당장 가서 놈을 잡아올거야! 클레어 너는 빨리 가서 기사들한테 준비하라고 해!”

잠시 후,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멜리사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때마침 샤를은 전신 거울 앞에서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고가의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을 착용하는 중이었다.

여정 내내 그토록 입으라, 입어달라, 제발 입어주세요, 해도 죽도록 입기 싫어했던 갑옷을 샤를이 자원해서 입는 광경을 보고 멜리사는 크게 감동 받았지만 마냥 감탄하고 있을때가 아니었다.
멜리사는 어제 버나드와 만났을때를 회상했다.

“내일 새벽에 떠날겁니다.”
“샤를리나님도 알고 계세요?”
“아뇨. 그래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뭘 부탁하려고요?”
“당신은 대장이고 모두를 이끄는 리더니까 감정을 배제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버나드는 진지한 눈빛으로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샤를리나님께서 요즘 저를 감시하고 계시더군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의 성격으로 봐선, 절 잡으러 오실지도 모릅니다. 절대 그리 놔둬선 안됩니다. 제가 가려는 장소가 위험천만하다는건 멜리사 경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거예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샤를리나 님을 말리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샤를리나 님을 제국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는 것입니다. 잊지마십시오.”

버나드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바닥을 펴보였다.
손바닥 위에 알약 한 개가 보였다.

“받으십시오.”
“이게 뭔데요?”
“이틀간 잠드는 수면제입니다. 안되겠다 싶으면 이걸 먹이십시오. 샤를리나님께서 주무시는 동안 국경을 넘어 제국으로 가는 겁니다.”
“이제와 제국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게 있나요? 왕국은 이미 우리 아킨테 가문을 적으로 돌린 상황이에요. 2차 걷는 사자 전쟁은 이제 끝났다고요. 제국에서 블랙드래곤의 심장 반쪽을 되찾아온다 할지라도 왕가에서는 우리 샤를리나님을 왕위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을거예요.”
“그러니까 더더욱 제국에 가야합니다. 황제를 만나면 일이 잘 풀릴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자신하죠?”
“황제에게 미리 사람을 보내놨습니다. 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그리오족 수인이고 그 친구가 알아서 잘 인도해줄테니 걱정 놓으십시오.”

그런식으로 두 사람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결과, 결국 샤를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해야하는 백검대장 멜리사로서는 버나드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생각이 옳았고, 현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탈출로였다.

현재 미셸이 이끄는 증원군이 달려와주고 있지만, ‘마스터울프’란 이름에 연정을 품고 한이 맺힌 미셸은 왠지 딸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 마스터울프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큰듯 싶었다.
한마디로 왕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돋보여 멜리사는 샤를을 미셸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미셸이 있는 곳으로 가면 자연스레 전란에 휘말리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상황에 말로 설득하는건 불가능해. 어쩔  없이 약을 먹여야 겠어.’

그렇게 작심한 멜리사는 재빨리 주전자의 물을 따라서 물잔에 약을 탔다.
물잔을 들고 웃으면서 전신 거울 앞에 서있는 샤를에게 다가갔다.

“어머나 너무 위엄있게  어울리세요. 버나드 경이 갑옷을 입으신 샤를리나 님을 보고 무서워서 꼼짝도 못할 것 같아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놈이 개처럼 말을 잘 들어야할텐데 말이야.”

샤를은 아무것도 모르고 히죽 거렸다.
멜리사는 이때다 싶어 얼른 물잔을 내밀었다.

“이거 마시세요. 갑옷의 하중을 덜 느끼게 해주는 영약이에요.”
“이런 약도 있었어?”
“네, 전투를 앞둔 기사라면 누구나 마시고 나간 답니다.”
“오호, 줘봐.”

멜리사가 건넨 물잔을 샤를이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려는 찰나였다.
언제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 돌연 갑옷으로 무장한 클레어가 나타나 칼집으로  쳐서 멜리사의 손에서 물컵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칼을 꺼내들면서 차가운 표정으로 멜리사를 노려봤다.

“뭐하시는 겁니까?”

클레어의 물음에 멜리사는 당황하지 않고 심각한 눈빛으로 마주봤다.

“클레어 경, 지금 당신이 칼을 겨눈 사람이 누군지 잊었나요? 무례하군요.”
“샤를리나님께 무엇을 드리려 한건지 여쭸습니다.”
“두 사람 뭐야? 왜 그래?”
“샤를리나님, 갑옷의 하중을 덜어주는  같은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

샤를은 놀란 눈으로 멜리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멜리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드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래요, 전 버나드 경과  편입니다. 샤를리나 님을 지키기 위해 수면제를 먹일 생각이었죠.”

그제야 멜리사의 속셈을 깨달은 샤를이 인상을 썼다.

“멜리사!”

그녀는 양허리를 짚고 고함을 쳤다.

“아무도 날 말릴 수 없어! 이번 일은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서 특별히 용서해줄테니까 빨리 가서 기사들 집합시켜!”
“하지만……!”

멜리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저항할 생각을 포기해버렸다.
샤를이 무언가를 하겠다고 나서면 그녀를 말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미셸이 하나 밖에 없는 딸이라고 오냐오냐 해서 키운 결과다.
성격이 제멋대로고 비록 나이도 어리지만 주군은 주군, 멜리사는 순순히 두 손 두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알겠습니다……”

멜리사는 방을 나가기전 클레어에게 다가가 비웃듯 속삭였다.
조금전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기어오른 것에 대한 앙갚음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클레어 경, 이렇게 심각한 표정의 경의 모습은 처음보는 군요. 혹시 오빠를 지키고 싶어서 그런건가요?”
“…오빠 라니요? 제게 피를 나눈 오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 모르셨구나. 조만간 경이 엄청 무서워하는 부친께서 도착하실거예요. 미셸님과 함께.”

클레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친께서 버나드 경을 양자로 삼을 생각이라나 뭐라나. 클레어 경은 딸이라서 가문의 후계자로 삼기 싫은가봐요.”

어깨를 미세하게 떠는 반응을 보고 멜리사는 속이 시원했다.

“날 따라 제국에 갔으면 아버지랑 마주치지 않았을텐데 안됐네요. 뭐 어쩌겠어요. 후계자 자격을 내놓고 시집이나 가라면 가야지. 아무튼 잘 해봐요.”

멜리사는 클레어의 어깨를 토닥이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막상 되갚아줬더니 뭔가 개운치 못한 느낌이다.

“좀 쪼잔했지? 맞아, 내가 생각해도 좀 쪼잔한 복수였어  답지않게.”

멜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고 복도를 걸었다.

좌우지간, 샤를 일행이 갑자기 성을 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버나드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해링턴 영주는 아내인 이베타리를 붙잡고 강력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부인! 우리 영웅님께서는 우리 가문에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분께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지요! 자고로 우리 인간 세계에는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짐승만도 못하다 라고 말입니다!”

이베타리는 남편의 열변을 듣고나서 차분히 물었다.

“원하는게 뭔가요?”
“샤를리나 님을 도와 영웅 님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부디 부인께서 허락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군사를 동원하겠다고요?”
“정답입니다.”
“얼마나요?”
“상대는 왕국을 통치하는 전하의 군대. 최대한 많이 모아야겠지요. 제발 허락해주시오.”
“당신이 다칠거예요.”
“우리 병력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려는게 아닙니다. 전쟁을 억제하고자,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견제 역할을 하는게 목적입니다. 가서 전하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볼 생각입니다.”

해링턴 영주는 아내의 손을 잡고 거듭 설득했다.

“버나드 경은 나의 원수……”

벽을 지그시 응시하는 이베타리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부인, 영웅님이 없었다면 우리가 만날 수 없었고, 또 우리 예쁜 아가들도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벽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던 이베타리가 고개를 돌리며 남편을 마주봤다.

“버나드 경은 나의 원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인간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신과 평범한 결혼 생활을 누릴  있었지요.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다, 당연하다마다!”

해링턴 영주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물론입니다!”
“단 당신과 우리 병사들이 위험하다 싶을땐 인간의 모습을 풀고 본 모습으로 돌아가겠어요.”
“어허헉! 그,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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