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8 (167/200)



〈 16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8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가며 정성을 들여 만든 갑옷의 첫 시험무대이다 보니 그녀의 음성은 들떠 있었다.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자신만만하군.”
-날 비웃는거요? 고대 괴물 레비아탄에게서 소량 밖에 취할 수 없는 희귀한 부위를 사용해서 만들었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견고하고 단단하여 외압으로는 절대 파괴할 수가 없지. 만약 갑옷을 파괴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 자는 신이오. 그러니 그런 자를 만나면 신이니까 바로 패배를 선언하거나 도망치시오.

버나드는 마검을 허리에 차고 갑옷과 한 세트인 은빛 투구를 집어들었다.
투구에는 화려한 무늬의 늑대 문양과 더불어 양쪽 측면에 마치 천사의 날개를 본 떠 만든듯한 은빛 날개가 부착되어 있었다.

버나드는 날개 투구를 착용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갑옷에 들어간 기분이 어때? 답답하지 않나?”
-그런건 없소. 아름다운 산과 들을 보는 것처럼 평온하오.
“그나마 잘됐군. 근데 주변이 보이기는 해?”
-전혀 안보인다오. 느낌만으로 알아야하지. 내가 파악할  있는 정보는 무척 한정되어 있소. 당신의 신체 상태와 감정. 주변의 살기 같은. 당신을 향한 타인의 살기 정도는 금방 눈치챌 수 있소.
“그것 가지고는 나한테 별 도움도 안되겠는데.”

버나드가 무시하듯 말하자 이드리스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삶을 포기하고 갑옷안에 들어가 이처럼 상냥하게 대화를 나눠주는데 그것만으로도 당신한테 영광인 것 아니오?
“과연. 그 점은 가히 칭찬할만하군. 한 여인이 삶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해주니 남자로서 영광이다.”
-여보시오. 목소리에 영혼이 하나도 없잖소.
“네 환심을 살 목적으로 전략적인 대화법을 시도했는데 실패했나보군. 네가 들으면 좋아할 말을 내키지 않으면서도 일부러 해봤다. 네 기분을 상하게 해봐야 나만 손해니까.”
-이런 사기꾼!

버나드는 대기실을 나와 투기장 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는 투기장으로 사용되던 곳이 아니라 본래 공터였고, 동그란 공터 주위로 관람석이 임시로 지어져 있었다.
의자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그런곳에 구경꾼들이 수백명이나 몰려와 있었다.

관객들은 날개 투구와 은빛 갑옷을 착용한 버나드가 입장하자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화려한 투구속에 가려진 인물이 버나드인지 모른다.
버나드가 본명을 알리지 않고 ‘아킨테의 기사’ 라는 이름으로 이번 시합에 임했기 때문이다.

누구인지 모름에도 관객들은 열광했다.

“난 너한테 전재산을 걸었어! 전부 다 때려부숴라!”

버나드는 빙 둘러앉은 관중들을 둘러보다가 운좋게 데보라를 발견했다.
그녀의 오빠인 마크와 하녀 율리아도 와있었다.
세 사람은 북적대는 인파속에 껴서 자신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마크왈,

“아킨테의 기사! 우승하면 멋진 그림 하나 그려줄게!”

율리아왈,

“아킨테의 기사님 힘내세요!”

데보라왈,

“아킨테의 기사 사랑해! 꺄아아아!”

그들 주변에 멜라니아는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각 멜라니아는 대저택에서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미녀 마법사라는 가짜 신분을 내세워 약을 파는 중이었다.

“정말 이 약을 먹으면 남편의 정력이 세지나요?”
“황홀한 밤을 보내고 싶다면 강력히 추천한답니다. 시중에 파는 약들과 차원이 달라요. 이 약은 백년에 한마리 나올까말까한 우두머리 늑대의 정자를 채취해서 만든지라 남편의 페니스가 발기력이 좋은 늑대 우두머리처럼 아주 단단하게 커진답니다?”
“어머, 궁금해라. 한병 주세요. 아니 서른병을 사겠어요.”

귀부인들은 정력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멜라니아의 젊고 아름다운 미모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멜라니아는 그녀들의 숨겨진 욕망을 읽고, 환상을 내밀었다.

“이 새로운 약은 노화방지제입니다. 여러분들에게만 솔직히 고백하는데, 저는 사실 일흔살이 넘는 할머니랍니다?”
“거짓말! 정말이에요?”
“믿을 수 없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젊은시절부터 이 약을 복용하면서 지금처럼 노화가 더디게 되었지요. 여러분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챙겨드시면 저처럼 노화가 매우 천천히 진행된답니다. 절 믿으세요.”

귀부인들은 젊고 아름다운 멜라니아의 육감적인 몸매에 넋을 잃은 채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오십병 사겠어요!”
“저는 백병이요!”
“집을 사줄테니 가지고 있는거 전부 내놓으세요!”

정력제와 노화방지제는 그 자리서 불티나게 팔렸다.
정력제의 효과는 확실했지만 노화방지제의 효과는 글쎄…… 사실 멜라니아는 노화방지제의 제조법을 모른다.

좌우간 버나드는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 멀리 엘레나로 짐작되는 무리들이 보인다.
엘레나는 루로키나 거지 삼남매와 함께 건물 지붕 위에서 몰래 훔쳐보는 중이었다.

귀빈석으로 눈을 돌렸다.
가장 높은 단상에 앉아있는 해링턴 영주와 그 옆에 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베타리 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딸이 눈에 들어왔고, 아킨테측에서는 대표로 나온 멜리사가 보였다. 샤를과 클레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

버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고,  가벼운 감정변화를 이드리스가 즉시 감지했다.

-방금 생체리듬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소. 누굴 본거요? 누구길래 당신을 탄식하게 만든거요?
“아무것도 아니야. 무시해.”

투기장 사방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거치되어 있었다.
이는 사전에 버나드의 요청으로 준비된 것들이다.
참가자는 자신의 무기 말고도 필요하면 거치대에 놓인 무기들을 마음껏 쓸  있었다.

이외에 개회식, 영주의 개회사, 심판의 규칙설명, 악단의 축하공연 같은건 모조리 빠져 있었다.
 상금만 걸려있지, 규칙도 없고 참가자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정식 대회도 아니다.
투기장 안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그야말로 아무런 억제가 없는 무법천지 아수라장에 입성한 것과 다름없었다.

참가자 소개도 없다.
의기투합한 자들끼리 우르르 한꺼번에 몰려나와도 좋고, 따로따로 행동하든 참가자의 자유다.
전부 덤빌테면 덤벼보라는 식으로 애당초 주최측에서 순서조차 정해주지 않았다.

버나드가 투기장 한가운데 서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참가자들 스스로 자기들끼리 나름 순서를 정한 모양이다.
약 서른명 가량의 짐승 가죽을 걸친자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눈을 부릅뜨고 다가와 으르렁 거렸다.

“우리는 로팔로 형제단이다. 네놈을 흠씬 두들겨 패준 다음 코를 베어갈 계획이야. 무서우면 지금말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게 무릎을 꿇으면 상금만 받고 조용히 떠나주지.”

우두머리가 낄낄 거리며 웃었다.
버나드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오른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별다른 말도 없이 곧장 주먹을 휘둘러 사내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시작된 공격을 우두머리는 감히 막거나 피할 엄두도 못내며 정통으로 얻어맞고 고개가 돌아간 채 그대로 붕 떠서 날아갔다.
멀리 날아간 그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눈을 뜬  기절해버렸다.

“시, 시작한건가?”

관중들은 이렇다할 신호도 없이 벌어진 상황에 놀라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더니 갑자기 함성을 내질렀다.

“아킨테의 기사가 한방에 끝내버렸어!”
“와아!”

규칙도 없고 심판도 없는 시합이다.
무대에 오른 순간 시합이 이미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다.
로팔로 형제단은 어이없이 나가떨어진 우두머리를 보고 얼이 빠져 있었으나 곧 각자 차고온 무기를 꺼내들며 버나드를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가……!”
“얘들아 덮쳐!”

그 말을 신호로 본격적인 첫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버나드를 쓰러뜨리기 위해 사람들이 줄줄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버나드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바위처럼 우뚝 서있기만 했다.

 여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모래를 한움큼 움켜쥐었다.

“이거나 처먹어!”

버나드의 투구에 모래를 뿌렸다.
그와 더불어 어떤 사내는 버나드를 넘어뜨릴 생각에 쇠몽둥이로 힘껏 정강이를 후려쳤다.

석궁을 든 사내도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발사한 화살들은 백발백중 버나드의 등에 부딪히며 한발 한발 망치처럼 위력이 강했지만 버나드가 착용한 갑옷의 방어력은 그 이상이었다.
수십발의 화살은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덩치가 산처럼 커다란 어떤 사내는 끄응 하면서 버나드를 뒤에서 끌어안고 번쩍 들어올리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본인이 가져온 길고 두꺼운 통나무를 두 손으로 부둥켜 안고 크게 휘두르며 버나드의 목을 후려쳤다.
통나무는 우지끈하며 세차게 부러졌으나 버나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땅바닥에 깊이 박혀 있는 바위처럼 굳건하게 서있었다.
멋지고 차가운 느낌을 주고 있는 투구를 쓰고 있기에 그가 현재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무도 볼 수 없다.

사방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날 정도로 사람들이 실컷 두들겨 팼지만 버나드의 몸은 처음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때리는 사람의 손만 아프고 절대 부서지지 않는 바위를 치는듯한 허탈감만이 사람들에게 되돌아올뿐이었다.

투기장을 에워싼 관중들은 수십명을 상대로 꿈쩍도 안하는 버나드를 보고 신기하다며 박수갈채를 보냈으며 중앙 귀빈석에 앉아있던 귀족들은 크게 감탄하며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투기장 주변에서 경호를 담당하던 기사들도 하라는 감시는 안하고 한눈을 팔며 버나드를 흥미있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관중석에 서 있던 마크가 데보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버나드 괜찮은거냐? 선채로 죽은거 아니야? 왜 움직이질 않아?”

데보라는 투기장 중앙에 시선을 고정한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버나드는 지금 시험하고 있는거예요.”
“뭘?”
“갑옷의 내구도가 어느 정도인지.”

주인의 활약에 신이난 율리아가 눈빛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처음 입으신거잖아요. 그러니 데보라 님의 말씀이 맞는것 같아요.”

서른명에 달하는 로팔로 형제단들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떼로 덤비며 버나드를 세차게 패고 찌르고 쏘고 뿌리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공격중이었지만 버나드가 쓰러지기도 전에 체력을 소진한 자신들이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제기랄!”

형제단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나약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는 안돼. 우리 같은 도적놈들이 비싼 갑옷을 입은 기사를 어찌 잡어……”
“저, 저기요. 그, 그만 도, 돌아갈래요?”
“시끄럽다! 돌아가서 채찍질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패기나 해!”

중간 우두머리의 협박에 못이겨 로팔로 형제단은 남아있는 힘을 전부 쏟아붓기 시작했지만, 잠시 후 버나드는 포기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그들에게 압도적인 힘 앞에서 사람의 숫자는 전혀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줬다.
갑옷의 내구성 측정이 끝나자 버나드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맞았는데도 흠집 하나 없군.”
-거봐, 내가 뭐랬소. 당신의 갑옷은 무적갑이오. 오직 신만이 파괴할 수 있지.
“그래도 아직 몰라. 이들을 쫓아내고 빨리 다음 상대를 맞이해야겠어.”
-내게 전해지는 느낌을 보아하니 왠지 조급해보이는구려.
“멋대로  감정을 판단하지마.”

버나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사내의 목을 움켜쥐었다.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하면서 동시에 뒤에서 칼을 내려치는 여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얼굴을 맞은 사내는 이빨이 산산 조각이 나며 바닥에 쓰러졌고 여자는 아픈 가랑이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버나드의 반격이 함성을 이끌어냈다.
관중들은 드디어 공격했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귀족들도 흥에 겨워 박수를 쳐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제압한 버나드는 잠시 투기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철장갑을  손가락을 쫙 폈다가 다시 오므렸다.

“관중들의 노리개가 된  같군.”
-사람들의 관심이 싫소?
“수치심만 들뿐이야.”
-난 내 작품을 시험하는 이 순간이 즐거운데 당신은 자존심이 상하나 보군. 하긴, 당신의 운명이 짓궂지만 않았어도 지금 당신이 있어할 곳은  싸움터가 아니라 귀족들이 앉아있는 귀빈석이었겠지. 그것도 가장 높은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을거야. 이런 짓은 노예 검투사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

오늘따라 유난히 도시가 소란스러웠다.
대략 삼십대 정도 되는 마차의 긴 행렬때문에 거리는 혼잡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어디론가 바삐 이동하는 중이었다.
버나드를 찾을 생각에 아침부터 내성 주변을 기웃거리던 베아트리스는  이상 참지 못하고 행인중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저 마차들은 어디에 가는 것이오?)”

베아트리스의 덩치에 압도된 행인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투, 투기장입니다. 오늘 막싸움이 있는 날이거든요.)”
“(막싸움? 그게 뭡니까?)”
“(참가자의 신분을 묻지 않으며, 동네 불량배들 싸움처럼 규칙도, 심판도 없는 난장판 시합이란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상금이 걸려있지요.  지역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은 전부 모였습니다.)”
“(호오……)”

그라나딘 왕국을 대표하는 영걸이자 무인으로서 평소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녀로서는 구경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들이 모였는지 구미가 당겼다.

“우리 그라나딘 왕국보다 실력이 미천한 레온 왕국 주제에 재밌게들 노는군.”

애국심이 강해서 자국과 자국 백성이 무조건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애송이들 시합일게 뻔하지만 재미삼아 잠깐 보고 오자면서 그녀는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합 참가자의 신분을 묻지 않는다니, 기회가 되면 참가하자는 욕심도 살짝 들었다.
그동안 버나드를 찾느라 개인 훈련은 고사하고 칼을 잡아본지도 오래됐다.
때마침 몸이 찌뿌둥하던 그녀였다.
그간의 답답함을, 아무리 난리쳐도 간섭 받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풀고 싶었다.
레온 왕국 사람들에게 그라나딘 왕국의 위대함을 한수 가르쳐줄겸.

“우승 상금을 받아 여비에 보태는 것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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