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6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7 (166/200)



〈 166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7

버나드는 멜라니아가 떠난 이후에도 홀로 서쪽 성곽에 남아 있다가 사람들의 아침 식사가 끝났을 무렵 샤를을 찾아갔다.
샤를의 방앞을 클레어가 지키고 있었다.

“샤를리나님의 상태는 어때? 기분 좀 풀리셨어?”

클레어에게 다가가 묻자 그녀가 무표정으로 쳐다봤다.

“너랑 만나기 싫어. 나가서 죽어버려.”

난데없는 소리에 버나드는 당황하지 않고 눈을 깜빡깜빡거리다 말했다.

“샤를리나님이 시켰어?”
“널 보면 꼭 전하라고 하셨어. 무척 화내면서.”

클레어는 미안한듯 마주본채로 고개를 숙였다.

“식사 끝나셨지?”
“응.”
“내가 왔다고 전해줘.”
“응.”

클레어는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나왔다.

“만나기 싫으시대.”
“알았어.”

버나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클레어가 서둘러 문을 노크했다.
그러자 금세 방문이 열리며 잠옷바람의 샤를이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뭘 잘했다고 떠나! 성질 머리하고는! 용서를 빌란 말이야!”

그녀는 방문을 열어둔 채 안으로 사라졌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버나드는 다시 뒤로 돌아 클레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샤를은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버나드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어제 들었다시피 전하가 부대를 이끌고 제가 있는 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그로인해 당분간 함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먼저 제국으로 떠나십시오.”

샤를이 이불을 젓히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가지마!”
“가야합니다.”
“가면 죽는다고! 네가 아버지를 어떻게 이겨!”

샤를의 금발 머리는 헝클어졌어도 풍성하고 윤기가 흘렀다.
버나드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설령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피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후 버나드는 침대에 걸터 앉으며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샤를이 어릴적 그녀와 왕궁에서 함께했던 추억, 레아라는 존재, 자신이 프레드릭왕과 적대관계가  이유, 신분을 숨긴  아킨테 가문을 따라다니게 된 계기 등등 샤를은 잠자코 들으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문앞에 서 있던 클레어도 조용히 몰입해서 듣고 있었다.
이윽고 버나드가 물었다.

“제 심정이 이해되시나요?”

샤를은 울것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사지가 잘리는 고통스런 일까지 있었으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리다 똑바로 눈을 마주봤다.

“너야말로 내 마음을 모르겠어?”
“말해주십시오.”
“어릴적 왕궁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였던 우드를 잃고 싶지 않아. 가봤자 개죽음만 당할거라고, 왕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황제말고 누가 있어?”

버나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샤를리나님을 비롯 아킨테 가문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상관없어.”

샤를은 떼를 썼다.

“어머니가 전력으로 힘 써주실거야. 우리 아킨테 가문이 아는 인맥을 총동원하면 아버지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겠지.”

버나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샤를리나님의 생각은 오히려 저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저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나올테지요.”
“나 때문에 힘들어?”

샤를이 대뜸 웃었다.
그러고는 불쑥 화제를 돌렸다.

“우리 같이 술마실까? 한잔씩 마실때마다 내가 꼬박꼬박 따라줄게. 남자들은 여자가 따라주는걸 좋아한다고 들었어.”

그녀의 입가에 밝고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
귀태가 잘잘 흐르는 꽃다운 나이의 미녀가 술을 권하니 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이라할지라도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유혹이었다.

하지만 버나드는 그녀의 의도를 순식간에 간파했다.
거하게 취하게 만든뒤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둘 심산으로 파악했다.

“아침부터 술은 현명한 군주가  일이 아닙니다. 한가하시면 시찰을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싫다는거야?”
“네.”

거절을 당해도 샤를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

그녀는 갑자기 원피스로된 잠옷을 머리 위로 벗어 던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속옷조차 입지 않은, 말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앳된 얼굴에 피부는 백옥처럼 하얬다.
버나드는 순간 당황하면서 이 세상에 그녀의 몸처럼 눈부신 것은 없으리라 단언했다.

“이거 봐봐.”

그녀는 돌연 버나드의 손을 잡고 자신의 젖가슴을 움켜쥐게 했다.
그 광경을 문앞에서 지켜보던 클레어는 겉으로는 담담했으나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하녀들이 그러는데, 조금만 더 크면 어머니처럼 가슴이 커질거래. 네가 생각해도 그럴것 같아?”

버나드는 내심 당황했지만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주군이 묻길래 가신으로서 솔직담백하게 대답하자는 마음뿐이었다.
한손에 쥐어지는 크기의 샤를의 젖가슴을 두어차례 주물럭거린 다음, 일절 사심없이 연구자의 자세로 소감을 밝혔다.

“살결이 보드랍고 또래에 비해서 크시군요. 아주 예쁜 가슴입니다.”
“마음에 들어?”
“네.”
“이쪽도 만져볼래?”

샤를이 다른 손을 잡으려 하길래 버나드는 신속히 젖가슴에서 손을 떼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헛기침을 한뒤 차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나중에 다른 가신한테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함부로 남에게 몸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너니까 이러는거야.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남자 우드니까. 그동안 내 꿈이 뭐였는줄 알아? 우드한테 시집가는거였어. 네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네게 시집을 가줄게.”

버나드는 그녀의 말을 낯뜨겁게 생각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샤를을 군주로만 여겼고, 여자로 생각해본적은 한번도 없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말없이 떠나도 헤아려 주십시오.”
“가지마!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샤를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또 소리쳤다.

“왜 내 말은 안들어줘? 레아라는 여자가 그렇게 좋아? 그럼 우리 관계는 뭐야? 나만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소중히 생각해왔잖아! 억울해!”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그녀는 급기야 오열을 하면서 오래전 버나드가 만들어준 조각상들을 바닥에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이딴거 백개 천개 줘봤자 아무 쓸모없어! 나한테 소중한건 당신의 마음이라고!”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샤를리나님.”

버나드는 실내를 가득 메운 그녀의 울음소리를 애써 흘려들었다.
어떻게든 못들은 척을 하며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응석받이로 곱게 자란 샤를은 고집덩어리다.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맘대로 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버나드도 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응석을 받아줄 수 없었다.

“던지지 마십시오. 다치십니다.”

한편, 샤를이 통곡하며 우는 소리에 클레어도 덩달아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샤를을 위로했다.

“진정하세요 샤를님. 버나드 경을 보내줘야만 해요. 그의 말이 옳아요.”

펑펑 울던 샤를은 돌연 울음을 뚝 그치며 고개를 들었다.

“클레어! 넌 누구편이야?”
“제 주군은 샤를님이십니다.”
“그럼 내 편을 들어야지!”

샤를은 알몸인 채로 침대에 걸터앉으며 버나드의 옷자락을 붙잡고 팽하고 코를 풀었다.
그녀는 이어 인상을 찌푸리고 버나드를 올려다봤다.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아무리 울어도 동정해주지도 않네. 나쁜놈.”

그녀는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며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갈테면 가.  이것만 알아둬. 방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다신 안볼거야. 죽든지 말든지 신경안쓸거라고.”

그러나 샤를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나드는 정중히 작별인사를 건넨뒤 방을 나섰다.

***

샤를의 방에서 나온 버나드는 곧장 하녀들이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어젯밤 몰래 성에 숨어들어온 데보라에게 식사를 가져다줄 참이었다.

잠시 부엌에 들려 하녀들에게 얘기해 음식을 받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와중이었다.
2층 계단에서 내려오던 해링턴 영주와 우연히 마주쳤다.

“오! 여기 계셨군요! 방에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으시길래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영주는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삿말을 건넸다.
이어 버나드의 양손에 들린 쟁반을 보더니 갑자기 화를 냈다.

“감히 영웅님께 식사를 운반시키다니 내 이것들을!”
“해링턴 공, 오해입니다. 운동삼아 직접 가지러 나왔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천만다행입니다.”
“아무튼 어쩐 일로 절 찾으셨습니까?”

해링턴 영주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어젯밤 제 아내의 무례를 다시 한번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평소 좋은 여자인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나 서글퍼졌는지 그만 분별력과 평정심을 잃었나 봅니다.”

버나드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깨끗이 잊었으니 그 일은 더이상 심려치 마십시오.”

간단히 대답한 후 화제를 돌렸다.

“그렇잖아도 저도 마침 영주님을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저를요?”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영웅님의 부탁이라면 두 팔 걷고 도와드려야지요!”
“영주님은 정말 자비롭고 의리가 넘치십니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저로서는 참으로 고맙고 탄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장가 보내주신 은인인걸요! 영웅님이 아니었으면 사랑스러운 아내며 우리 귀여운 자식들과도 평생  만났을 겁니다. 돈으로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귀중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부담갖지 말고 무엇이든 말씀해보십시오! 아하하!”

버나드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다른 곳에 올려놓은뒤 사양않고 말했다.

“이 지역에 무예가 좋기로 소문난 이들이 몇명쯤 됩니까?”
“음, 꽤 있을겁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데리고 있는 기사들도 제법 한가닥 하구요. 왜 그러십니까?”
“실력 좋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내일까지 한자리에 모아주십시오.”
“예? 한자리에?”

버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를 쓰러뜨리면 상금을 준다고 홍보해주십시오. 시합 규칙은 없습니다. 그리고  명이든 백 명이든 동시에 덤벼도 상관없다고도 알려주십시오.”

해링턴 영주는 크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떴다.

“어렵지는 않은 일인데……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무, 물론 영웅님의 실력을 의심하는건 아닙니다. 왠지 무리하시는게 아닌가 싶어서…… 백명이 동시에 덤비면 큰일납니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시려구요?”

버나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허나 시합에 참가하는 자들에게는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으니 각오하고 오라 전하십시오.”
“오오, 이 자신감……!”

해링턴 영주는 더욱 놀란듯 감탄을 자아내며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이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마상창시합이나 검투사들의 싸움보다 더 대단한 것을 구경하게 생겼군요! 축제입니다 축제! 우리 도시의 축제!”

프레드릭왕이 쫓아오는 위급한 이때, 버나드가 뜬금없는 일을 벌이는 것 같으나 실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버나드는 얼마뒤 굉장히 중요하고 꼭 살아남아야하는 일전을 치러야 하기에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준비란 바로……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레온 왕가의 비전.
지금은 버나드에게서 사라져 버린 힘.
버나드는 봉인된 세븐로얄을 반드시 되찾고 싶었다.

‘세븐로얄만 있다면 나는 더욱 강해질 수 있어.’

현재 자신의 몸상태는 전성기때에 비해 한참 못미쳤다.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진게 아니다.
1년전 버나드는 체포되자마자 제일 먼저 궁중 마법사들의 실험대에 올랐다.

당시 궁중 마법사들은 온갖 암흑마법을 써서 버나드를 검술에 소질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동시에 세븐로얄의 힘도 봉인해버렸다.

지금에 이르러, 강제로 잊혀졌던 검술이야 어느 정도 떠올랐다지만 그것으로는 만족을 못했다.
프레드릭의 군대와 싸우려면 일대다수의 대결에 특효약인 세븐로얄이라는 극약처방을 반드시 받아야만했다.
따라서 버나드는 이번에 벌어질 수십, 수백명과의 대결을 통해……, 그러니까 체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극한으로 몰아가는 훈련을 통해 세븐로얄의 기억  한조각만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해링턴 영주와 대화를 나눈지 이틀째 되는 날, 약속대로 시합이 마련됐다.
해링턴 영주가  막대한 상금을 노리고  좀 꽤나 쓰는 자들이 던헬더르 지역을 비롯해 제국에서까지 달려왔다.
용병단, 도적단, 작은 규모의 패밀리 기사단, 나이, 성별, 개인, 단체 가릴 것 없이 모여든 자들이 무려 이백칠십명이었다.
아울러 수천의 관중들이 객석을  채웠으며 영주의 가족을 포함 그 친인척들까지 총출동해 귀빈석에 모여 앉아있었다.

같은시각, 버나드는 최근 새로 제작한 갑옷 ‘이드리스’를 착용하고 대기실에서 명상에 잠긴  시합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대기실 문이 열렸다.

“절 따라오십시오. 시작합니다.”
“알겠네.”

버나드는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준비 됐나 이드리스?”

곧바로 귓가에 밝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하고 자시고도 없소. 설사 만명이 덤벼도 당신의 무적 갑옷은 절대 흠집 하나 안날거외다. 내 장담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