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5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6 (165/200)



〈 165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6

“기쁘시겠군.”
“네 녀석이 괴로워할 모습을 떠올리니 당연히 기쁘지. 하지만 마녀라 불리는 나도 사람이란다. 네가 지난 1년간 레아를 위해 어떤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옆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 점을 생각하니 웃음이 잠깐 나오다 말더군.”

버나드는 무심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멜라니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확실히 우리의 여정이 끝날때가 됐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그 어린 계집이 레아의 주변에서 사라져 달라고 네게 요구했겠지?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느냐?”

모처럼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셔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사라지며 버나드의 표정이 쓸쓸하게 변했다.

“난……”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했으니 후회도 미련도 없다. 과거의 추억을 계속 그리워 하기보다 현재의 인연을 지키는게 맞겠지. 곁에서 항상  응원해주고 걱정해주는 한 사람이 눈에 밟혔기에 선택에 있어 주저함은 없었다. 잡지 못한 추억…… 이제는 놔줄때야. 다시  시절로 돌아가봐야 같은 고통을 반복할뿐. 난 또 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주겠지.”

***

베아트리스는 아침 일찍 백검대의 야영지를 빠져나와 창녀들과 함께 도시로 향했다.
열명 남짓한 여자들이 수다를 떨며 해자의 다리를 건너 성문 앞에 이르자 긴 창을 든 경비병  명이 다가왔다.

“이봐 예쁜 아가씨들, 어디 가시는 길인가?”

일행의 대장격인 세라가 나서서 대답했다.

“우리는 샤를리나님을 따라다니는 계집들이에요. 시장에 들려서 필요한 물품을 살 예정이랍니다.”

오랜만의 도시 구경인지라 그녀의 기분은 상당히 들떠있었다.

“우리를 원하는 분이 계시면 장사도  하구요.”

세라는 말을 마치며 끈적한 윙크를 날렸다.

“잠깐 시간 있으면 같이 놀지 않을래요?”
“호오, 나한테 장사질이야? 흐음……”

그녀의 속내를 파악한 경비병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동이 수상하니 몸수색을 해야겠군. 일단 너부터 따라와봐.”

옆에 나란히 서있던 다른 경비병도 여자들을 쭈욱 둘러보다  여자를 가리켰다.

“난 이 여자가 수상하군. 철저하게 조사해봐야겠어.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려라.”

경비병들은 잠시 대기하라는 말을 남긴뒤 세라와 다른 여자를 데리고 건물뒤로 사라졌다.

‘한심한 놈들.’

자국에서 수천의 병사를 이끄는 베아트리스로서는 이 군기 빠진 모습이 화가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잠자코 지켜보기만 할뿐 나서지 않았다.
조금전 세라와 다른 창녀가 주고 받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기사들한테 들어보니까 이 성은 통행료가 엄청 비싸. 우리가 아홉명이니 아홉명치를 내려면 대체 얼마야.’
‘걱정마, 한방에 퉁치는 방법이 있으니.’

잠시 후 세라는 발목까지 내려갔던 속옷을 위로 끌어올리면서 치마를 단정히 하고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뒤이어 다른 여자와 함께 나타난 경비병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후우…… 아무 이상없군. 통과다. 얼른들 가봐. 헉헉……”
“고마워요. 오빠 체력 좋더라.”

세라는 찡긋 하며 도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베아트리스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저 년 완전 명기야. 다리가 후들거려서 잠깐 앉아있어야겠군. 휴.”
“역시 계집은 다른 지방 계집이 최고야. 낄낄.”

경비병들은 키는 멀대같이 크고 덩치가 우락부락한 베아트리스가 옆을 지나치자 눈이 동그래졌다.

“오매나 무셔라, 저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저런 애가 몸을 판다고? 검투사 아냐?”
“에이 신경꺼. 계집들 호위무사인가보지.”
“그치? 아무렴 저런년이 몸을 팔까. 살 놈들도 없을거야.”

그렇게 성문을 통과해 도시안으로 들어서자 여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덥썩 끌어안았다.
넓은 거리, 북적이는 인파, 길 양쪽으로 줄줄이 늘어선 가게들.
그동안  돈을  생각에 한껏 고무된 모습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베아트리스는 폭 넓은 거리 한가운데에 세워진 동상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끌리듯 걸어가 동상을 마주보고 섰다.

‘이 동상…… 희한하군. 그자의 얼굴과 많이 닮았어.’

베아트리스는 동상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유심히 살폈다.

‘샤를리나의 기사인 그의 동상이 이곳에 세워질리가 없는데…… 이곳은 아킨테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이고……’

시선을 내려 동상 하단에 붙어있는 동판을 쳐다봤다.
동판에는 레온왕국어를 비롯 제국어로도 글귀가 적혀있었다.

‘거인 가틀라스와 다섯마리의 야크샤샤를 물리친 영웅 버나드.’

순간 베아트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버나드(Bernard)!?”

그녀의 눈에 ‘Bernard’  철자가 뚜렷이 보였다.

“내가 찾는 그 아이와 이름이 똑같잖아. 어떻게 된거지……?”

베아트리스는 궁금증을 못참은 나머지 그동안 꾹꾹 눌러담았던 불같은 성격이 튀어나오며 갑자기 지나가는 행인의 멱살을 붙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허헉! 왜 그러십니까!?”

놀란 행인이 붕떠서 바둥거렸다.

“(제국어를 할  있나?)”
“(무, 물론입니다! 제국인인데 왜요?)”
“(이 동상은 누구지. 이 사람은 지금 어딨어?)”
“(이 분은 10여년전에 이 땅을 구원한 영웅 버나드님이십니다! 어디 계시는지는 저도 몰라요!)”
“(이름이 왜 버나드야?)”
“(이, 이름이 버나드인게 제 탓이 아니잖아요! 그, 근데 베른알트라고 발음하시면 안되고 ‘버나드’ 라고 발음해야 합니다. 에헤헤, 레온 왕국 사람들중에도 가끔씩 베르나르 라고 발음 하는 사람도 있던데, 이름은 고유명사니까 꼭 ‘버나드’ 라고 하셔야합니다.)”
“(내 발음이 잘못됐다고……?)”

베아트리스는 행인을 내려놓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세레딕 경이 소개해준 내 약혼자 버나드…… 나와 아름다운 호수에서 만났던 버나드…… 창녀들이 우러러 보는 버나드…… 소년이냐 성인이냐의 문제만 없었더라면 쉬운 문제일텐데 세레딕 경은 분명 소년이라고 했어…… 하지만 샤를리나 밑에서 일하는 버나드는 몸집이 큰 사람 한명밖에 없단 말이지…… 혹시 세레딕 경이 다녀간 사이에 빠르게 성장한건 아닐지……”

우두커니 서서 산발적으로 퍼져있던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니 어느덧 결론에 이르렀다.

“우선 그 몸뚱이 큰 버나드라는 자를 미행해봐야겠어.”

그때부터 베아트리스는 창녀 집단에서 이탈해 혼자 행동하기 시작했다.

***

“어서 서두릅시다!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 던헬더르에 도착해야 합니다!”
“예!? 일주일 안으로요? 불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세요! 잠자는 시간을 더 줄여서라도 일정을 앞당깁시다!”

미셸은 어리둥절해하는 가신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야영지에서  식사가 끝난 참이고 가신들은 느긋이 쉬고 싶었다.
그런데 미셸이 갑자기 호통을 치며 빨리 떠날 채비를 하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행군에 지친 병사들에게 쉴 시간을 넉넉히 주며 너그럽고 평온했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로 간것일까.

오늘 아침, 멜리사에게 연락이 왔다.
수정구를 통한 오랜만의 교신이었다.
대도시가 아닌 이상 여행길중에 마력을 조달하는게 쉬운 일도 아니고 가급적 마력을 아끼기 위해 그동안 전령조를 써왔으나, 수정구를 통해 연락했다는건 대단히 급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최근 왕가가 우리 아킨테 가문을 모독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혹시  일 때문에 샤를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느냐?”
-영애님은 무사히  지내고 계십니다. 다른 소식으로 급히 연락을 드렸습니다. 영주님, 놀라지 마십시오.

수정구속의 멜리사는 들뜬 기색으로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버나드 경이 바로 밤의 늑대들의 수장 마스터울프였습니다.

얼토당토 않는 얘기에 미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게야?  아이가 어떻게 마스터울프란 말이냐? 나이부터 안맞는다.”
-혹시…… 버나드 경의 몸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걸 모르셨는지요?
“뭐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미셸이 생뚱맞다는 표정을 짓자 멜리사는 곧바로 머리를 숙였다.

-전 미셸님께서 이미 아시는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겨 가장 중대한 사안을 그간 보고 드리지 못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버나드경의 몸은 마녀 멜라니아의 저주에 걸려 어쩔땐 소년처럼 작아지기도 하고 어쩔땐 어른처럼 커지곤 하는 특이한 체질입니다.
“그, 그럴리가……?”

이외에도 멜리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걸 말했다.
그리고 뒤늦게 진실을 알게된 미셸은 탄식을 뱉으며 가슴을 쳤다.

“그 아이가 저주에 걸린 마스터울프였다니……!”

미셸은 진작에 버나드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우둔함을 탓하는 한편 조만간 만나리란 기대감에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오래전 이루지 못한 짝사랑의 아쉬움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버나드를 빨리 만나고 싶은 욕구와 초조함으로 발등에 불이 붙었다.
황급히 막사 밖으로 뛰쳐나가 쉬고 있던 가신들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던헬더르까지 일주일이다! 일주일 안으로 도착하지 못할시에는 모두 각오하거라!”

가신들은 난데없는 명령에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던 미셸님께서 저렇게 엄중히 명을 내리시는건 처음봐.”
“오메, 표정이 완전 굳으셨어. 자칫 눈에 거슬렸다간 뺨이라도 맞겠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오늘따라 너무 무서우신데?”

가신들이 영문을 모른채 짐을 싸는동안 미셸은 그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다.
초조한 그녀는 버나드가 어디론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몸서리를 쳤다.

‘당장 그와 만나야 해! 그가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야 한다고!’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날개가 없는 것이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날개라도 있다면 단숨에 날아가버릴텐데.

“후우…… 심호흡, 심호흡…… 진정하자……”

미셸은 무심코 마스터울프가 떠오를때마다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말을 되뇌었다.

“사람은 늘 지나가버린 인연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그리운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미련은 더더욱 커져만 간다. 지나가버린 인연을 잡지못한 아쉬움과 후회는 뒤늦게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자를 향한 저주인가 아니면 인생 한때의 찬란한 추억인가. 이제와  인연을 대신할 것은 없는 것일까 그때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녀는 해당 문구에 새로 덧붙였다.

“세월이 흘러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미셸은, 이번만큼은 그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을거야. 잡지 못한 추억따위가 아닌 미래를 함께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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