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2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3 (162/200)



〈 162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3

해링턴 영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내 이베타리가 버나드를 마주보고 섰다.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실은 본래 나이와 외모를 감추고 있는 괴물이지만.
서로 구면인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난 잊지 않아.”

이베타리의 흰자위가 급 노란색으로 물들면서 동공이 세로로 수축되었다.
노란자위 한가운데 새까맣고 가는 막대가 수직으로  있는게 영락없는 파충류의 눈이었다.
그 섬뜩한 눈으로 버나드를 응시했다.

“자매들을 죽인 인간.”

낮게 들끓어 오른 목소리에 원한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버나드는 개의치 않았다.

“인간 세계에 들어와산지 10년이 넘었을텐데 아직도 손님을 상냥하게 맞이하는 방법을 못배웠나?”
“넌 손님이 아니라 교활한 인간이다.”

버나드가 웃었다.

“교활했기에 너희를 사냥할  있었지.”

가틀라스와 야크샤샤들을 처리할 당시, 강대한 힘을 가졌던 거인 가틀라스를 죽인 것은 버나드가 아니라 바로 야크샤샤 다섯마리였다.
버나드는 순진한 하인인척 굴면서 야크샤샤들에게 다가가 이간질을 하며 그녀들이 가틀라스를 두고 질투를 하게 만들었고, 결국 질투심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야크샤샤들은 그 분풀이를 가틀라스에게 해대며 그를 살해해버렸다.

그 뒤 버나드는 야크샤샤들이 둥지에 낳은 알을 이용해 그들끼리 싸움을 붙였다.
알 하나를 까먹고 빈 껍질을 다른 야크샤샤의 둥지에 몰래 갖다놓아 훔쳐먹은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었달까.
 결과 서로를 불신하다 끝내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이베타리는 자매싸움의 승리자였다.
버나드의 꾀에 속았다지만 사실 자매들을 죽인건 그녀 자신이었다.

그 다음 버나드가 한 일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자매들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힌 이베타리의 이성을 망가뜨리는 일이었다.
인간 하인으로 위장해 그녀의 수발을 들면서 온갖 말을 동원해 그녀를 달래고 위로하는척했으나 사실은 은근히 힐난을 하며 그녀를 더욱 폐인이 되게끔 몰아갔다.
전쟁을 겪은 기사니만큼 정신고문이라면 자신있었다.

“평생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하십시오. 죽은 자매들을 위해  속죄하고 사셔야합니다.”
“흑흑, 그렇지? 그래야겠지?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어…… 흑흑.”

나중에는 하인과 주인의 처지가 뒤바뀌며 이베타리는 버나드에게 의존하는 증세가 생겼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약해진 그녀는 이내 버나드에게 길들여졌다.
버나드의 말을 잘 따르게 되었고, 그런식으로 의지박약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그녀를 목줄이 걸린 개처럼 끌고와서 해링턴과 연결시켜준 것이다.

이처럼 버나드가 떠날때까지만해도 바보스럽던 그녀였는데, 10여년이란 세월이 흐르다보니 다시금 정신이 건강해지고 과거를 되돌아볼 기회가 생기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일이 왠지 수상쩍었나보다.
그러나 이제와 버나드가 나쁜놈이란걸 깨닫는다고 해서 무엇하리.
현재 그녀에게는 해링턴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끔찍히 아꼈다.
게다가 인간세계에 물든 나머지 지금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좌우간 영주부부와 인사를 끝마친뒤 모두 방을 배정 받아 짐을 풀었고 저녁에는 해링턴 영주가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빛을 밝히는 만찬장에는 버나드와 샤를리나, 멜리사가 참석했고, 클레어는 문 근처에서 대기하며 묵묵히 지켜보았다.
영주측에서는 해링턴 영주와 이베타리 그리고 아들과 딸이 동석해 있었다.

“샤를리나님을 저희 가문에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샤를리나님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요! 너무 예쁘세요!”

인간과 괴물이 만나 낳은 자녀들이지만, 아들과 딸의 외모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인간이었다.
 두 살인 아들은 현재 견습기사로서 기사수행을 하는 중이고, 딸은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있어 신부수업을 받고 있다고 해링턴 영주가 말해주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식재료를 총동원해서 만들었습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어떠실지 모르지만, 오늘부로 저희 식료품 창고가 거덜났다는걸 감안해서 맛있게들 드셔주십시오. 하하하.”

만찬분위기는 자유롭고 화기애애했다.
샤를이 말을 많이 하는편은 아니었으나 해링턴 영주가 수다쟁이었다.
허풍기 많은 농담을 하거나 영지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들도 아버지의 성격을 쏙 빼닯았는지, 아들 역시 말이 많아 아버지와 아들이 가식없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버나드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입가에서 저절로 흐뭇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와중에  한사람, 이베타리만 제외하고.

그녀는 줄곧 침묵을 유지하며 버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로인해 분위기가 이상해지지는 않았으나 해링턴 영주와 자녀들은 계속 속으로 아내 혹은 어머니의 폭주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해링턴 영주야 둘의 관계를 잘 아니 긴장하는게 당연했고, 아들과 딸 또한 영지에 나타난 괴물을 물리쳤다는 영웅 버나드의 이야기를 전해들었기에 어머니와 버나드의 관계가 서로 앙숙이라는 것쯤이야 대략 눈치채고 있었다.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는군요. 다들 즐거우신 모양인가 봅니다.”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가 불쑥 꺼내든 말에 만찬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들이 급히 끼어들어 아무말이나 내뱉었다.

“오, 오늘 날씨가  좋더라구요. 아무래도 신께서도 샤를리나님의 방문을 반겨주시나 봅니다. 그쵸 아버지?”
“어, 어, 그런가보더구나. 오늘 날씨가 참 좋았지. 첨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고 싶을 정도였어. 아하하, 아하, 아하하……”

딸도 나이프를 내려놓고 황급히 말을 거들었다.

“샤를리나님, 내일 아침에 혹시 바쁘신가요? 저희 영지에 찬란한 언덕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풍경이 정말 예뻐요. 제가 모시고 갈테니 함께 가보지 않으실래요?”
“음, 뭐. 그러죠.”

샤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베타리가 물었다.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 샤를리나님은 어떻게 버나드 경과 만나게 된 건가요?”

그 물음에 버나드가 점잖게 입을 열며 대신 대답했다.

“제가 거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물론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겠죠? 샤를리나 님을 이용하려한다거나 별다른 속셈없이.”
“어, 어머니.”

아들이 자제를 부탁하듯 그녀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이베타리의 말문은 계속 이어졌다.

“버나드 경은 아킨테 지역 출신도 아닌듯한데  아킨테 가문을 선택했나요? 궁금하군요.”
“미셸님과 샤를리나 영애님은 세상 그 어떤 군주보다 훌륭하신분들이니까요.”
“겨우 그것뿐?”

이번에는 버나드 대신 샤를이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으며 대꾸했다.

“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버나드 경은 능력 좋은 기사예요. 다른 영주에게 내주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내게 와줘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해요.”
“자자, 뭣들 하느냐 여기 잔이 비어져 있잖느냐. 어서들 잔을 채워드려라.”

해링턴 영주가 목소리를 높이며 술병을 들고 서있는 하녀들을 보챘다.
나름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대화 주제를 바꾸려는 노력이었으나 약간 거만함을 띤 이베타리의 시선은 계속 버나드에게 머물러있었다.

“샤를리나님, 그거 아세요? 엊그제 왕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요.”
“부, 부인!”

해링턴 영주가 즉시 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높으신 분들 모시고 뭐하자는거요!”

호통치려는 그를 버나드가 빠르게 손바닥을 들어 제지했다.
해링턴 영주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도로 제자리에 앉자 버나드는 계속 해보란듯이 이베타리를 응시했다.

“왕가에서 뭐라든가요?”
“어떤 가문의 영주가 악마에게 속아 끌려다니고 있다더군요. 따라서 그들이 나타나면 체포하라는 명이 떨어졌어요.”

이베타리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 딸이 기다렸다는듯이 끼어들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 낭군님한테 끌려다니고 있어요.  끌려다니는게 좋아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끌려다니면 안되나요? 좋은 일이잖아요.”

횡설수설 하는 그녀는 그대로 무시당하며 샤를이 이베타리를 쳐다봤다.

“악마한테 끌려다니는 그 어떤 가문이란게 정확히 어디죠?”
“말해도 될까요?”

이베타리는 즐거워하며 버나드를 응시했다.
그러자 버나드가 입을 열려는 찰나 해링턴 영주가 술잔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오늘처럼 영광스럽고 행복한 날에 분위기가 왜 이런겁니까! 모두 즐겁자고 모인건데 심각한 얘기는 저리 치워두고 신나게 마셔봅시다! 아하하하!”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멜리사가 어색한 공기에 당황스러워하며 술잔을 들어보였다.

“거, 건배나 하죠.”

모두 잔을 들었다.
이베타리도 잔을 들며, 그 상태에서 말했다.

“제가 분위기를 망친 것 같군요. 남편의 말이 맞아요. 오늘처럼 기쁜 날에 샤를리나님이 버나드 경에게 속고 있다는걸 밝히면 안되겠죠. 그렇죠 여보?”

탁!
샤를이 술잔을 세게 내려놓는 소리에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술잔이 넘쳐흐르며 샤를의 손을 적셨다.
샤를은 이베타리를 노려봤다.

“당신, 아까부터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거야? 빙빙 돌리면 짜증나니까 직설적으로 말해.”
“그 전에 허락부터 받도록 하죠.”

이베타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버나드를 바라봤다.

“말해도 될까요?”

버나드는 예상외로 차분했다.

“부인, 굳이 제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아, 그랬죠. 그만 옛날 생각이 나서.”

이베타리는 미소를 머금고 샤를을 돌아봤다.

“공주님. 공주님도 버나드 경의 정체가 궁금하시죠?”
“버나드에 대해서라면 내가 당신보다 잘 알안다고 자부해.”
“아뇨, 당신은 저 사람에 대해 하나도 몰라요.”
“버나드랑 오늘 처음 만났으면서  안다고 까부는거야?”
“거봐요, 잘 모르시잖아요. 버나드 경과 저는 이미 십여년전부터 알던 사이랍니다. 그는 던헬더르에 왔던적이 있죠.”

출입문 근처에 서있던 클레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덩달아 멜리사도 의외란듯이 버나드를 쳐다봤다.
샤를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이베타리를 노려봤다.

“그래서?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뇨. 후훗.”

이베타리는 버나드를 돌아봤다.

“또 말해도 돼요?”

버나드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듯이 손으로 권하며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이베타리는 말했다.

“당시 버나드 경은 왕의 최측근으로서, 왕의 수족이나 다름없었죠. 버나드 경과 왕이 밀접한 관계였단 얘기는 아마도 처음 들으시겠죠?”

멜리사는 믿기지 않는다는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왕의 수족이었다고……?”

클레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줄 알았어…… 버나드라면……”

샤를은 코웃음을 치며 버나드를 돌아봤다.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었네.”

이베타리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에 더해서 놀라운 진실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현재 버나드 경은 왕의 군대에게 쫓기고 있답니다.  사이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샤를리나님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계시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버나드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제가 알아서 잘 처신할테니 샤를리나님께 피해가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멜리사가 눈을 크게 뜬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저 분의 말이 사실인가요?”
“전부 사실입니다.”
“사, 사실이라고요? 왕과 무슨 관계였는데요!?”

버나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샤를을 돌아봤다.
그녀에게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으나 영애님께서 궁에 계시던 어린 시절, 당신에게 매일같이 작은 조각상을 선물했던 사내가 바로 저 마스터울프 버나드 입니다.”

그래, 이제 전부 밝힐때다.
오히려 이베타리가 있어 일이 쉬워졌다.
버나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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