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62
갑옷이 만들어진지 닷새째, 던헬더르 영지에 도착했다.
던헬더르는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변경 영지다.
겉으로는 레온왕국의 통치를 받고 있지만 실상은 제국의 영향력이 더욱 크게 미치는 곳이기도 하다.
거리의 풍경조차 레온왕국스럽다기보다는 대체적으로 제국의 건축양식에 더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원인으로는 국경을 넘어온 제국인들이 영지의 경제를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양국의 문화가 섞여있는 이국적인 도시.
제국의 여유로운 상류층이 휴양지 삼아 드나들기에 도시는 화려하고 평화로웠으며, 그와 더불어 관료, 학자, 상인, 은퇴자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교와 사업의 장소이기도 했기에 거리는 늘 인파로 북적였다.
“이곳만큼은 돌아가고 싶었는데……”
버나드는 라벤다에 올라탄 채 행렬을 벗어나 언덕을 기어올라 먼 곳을 주시했다.
저 멀리 변경 도시 던헬더르가 어렴풋이 보였다.
애당초 버나드는 던헬더르만큼은 피해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시간이 촉박한지라 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이곳을 억지로 통과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여기는 그곳이잖느냐?”
검은 망사로브를 걸친 멜라니아가 어느새 뒤따라와있었다.
그녀는 말머리를 나란히하며 던헬더르를 응시했다.
“한마리의 거인과 다섯뱀이 나타났던 곳 아니냐?”
“맞아, 그곳이다.”
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멜라니아가 낄낄 거렸다.
“괜찮은게야? 이곳에 들려도? 여기 영주에게도 왕가의 전령조가 이미 도착했을게다.”
“하루전 루로키나 삼남매를 보내 동태를 파악했다. 동상이 아직 있다는군.”
“그 동상 말이냐?”
멜라니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개떡 같은 꼴을 보게 생겼군!”
“20여일간의 오랜 야영생활로 병사들은 지쳐있고, 뒤에선 프레드릭이 따라오고 있어. 이곳에 머무는게 최선의 전략이었다.”
“네놈이 귀찮아질텐데?”
“……”
버나드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내 여정은 여기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프레드릭이 곧 나타날거야. 뒤는 내게 맡기고 내가 중도탈락하는 것과 상관없이 넌 계속 샤를리나님을 모시고 국경을 넘어라.”
“어디서 명령질이냐? 내가 누굴 모시든 내 마음이란다.”
“부탁해.”
버나드는 멜라니아의 왼손을 가볍게 잡아쥐며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우리 둘 다 레아의 시신을 찾아 그녀를 좋은 땅에 묻어주는게 소원이잖아. 샤를리나만이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
매일 경멸어린 눈짓만 보내던 늑대의 행동은 어느때보다도 다정했다.
“무슨 바람이 분게냐?”
멜라니아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늑대가 죽을때가 됐나보군. 쳇.”
그녀는 말머리를 돌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손등 키스에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던헬더르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나드의 시선은 다시금 던헬더르성으로 묵묵히 향했다.
아주 오래전 다녀갔던 기억이 있는 저 익숙한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옛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제 1차 걷는 사자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던헬더르 영지에서 갑자기 급보를 전해왔다.
영지에 난데없이 강력한 괴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던헬더르의 영주 해링턴은 왕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자신이 가진 군사 오백명으로도 버거운 괴물이니 하루빨리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프레드릭왕은 왕도 부근까지 쳐들어온 여동생 이블린을 저지해야했기 때문에 던헬더르에 병력을 보내줄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빨리 병력을 보내달라는 해링턴 영주의 서신은 매일 같이 날아들었고, 프레드릭왕도 그의 요구를 마냥 묵살할 수만은 없었다.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만큼이나 후방에서의 전쟁지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병력과 군수물자 등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프레드릭왕으로서는, 레온왕국과 제국사이의 중요한 길목인 던헬더르가 반기를 들고 이블린에게 가담하는 최악의 상황만은 절대 피해야했다.
수송길이 막히면 자신에게 큰 타격이 될테니까.
하지만 병력을 돌릴 여유가 없는 상황.
따라서 그가 선택한 차선책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최정예 전사를 소수의 병력과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괴물 퇴치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진심이 담긴 성의만 보여주면 됐다.
갑작스레 출몰한 괴물때문에 영지가 피폐해진 해링턴 영주를 위로하고 달래는게 목적이었다.
왕의 최측근인 자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링턴 영주가 크게 감동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출발 당일, 당시 열아홉살 청년이었던 버나드는 떠나기전 프레드릭왕에게 물었다.
“전하, 전 그곳에서 어떤 얼굴을 해야합니까?”
그때만해도 버나드는 매사 무감정한 표정을 짓는 얼음 같은 청년이었다.
살인을 해도 표정 변화가 없었고, 남들의 슬픈 사연을 들어도 슬퍼하지도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즐거운 일이 있어도 결코 웃는 일이 없었다.
동료들은 그를 향해 심장이 없는 인형 같다고 비웃곤했다.
반면에 프레드릭왕은 최고의 살인병기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곳에 가거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되거라. 네 행동이 나의 행동이 되는거야. 네가 욕먹으면 내가 욕먹는단 말이지. 변경 것들이 불만을 품지 않도록 예를 다해 해링턴 영주의 똥꼬나 살살 긁어주고와.”
왕의 명령이라면, 그것이 설령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버나드는 이윽고 던헬더르에 당도해 해링턴 영주와 만나자 세상 누구보다도 공손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친절한 태도로 영주에게 사정을 듣고 그를 위로하며 같이 안타까워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얘기는 이랬다.
던헬더르 영지에는 그림 같이 아름다운 작은 호수가 하나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호수 근처에 가틀라스 라는 거인이 살기 시작했다.
호수는 워낙 인근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가틀라스는 주변 동물이나 괴물들만 잡아먹고 살뿐 민가까지 내려와 영지민들을 해치는 일은 없었다.
영지민들이 무리해서 호수 근처에 다가가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 어느날 수백년을 산 뱀녀, 즉 야크샤샤 다섯마리가 호수에 나타났고, 야크샤샤들은 자주 가틀라스와 만나 난잡하게 교접을 벌이며 던헬더르 영지에 큰 피해를 끼치기 시작했다.
야크샤샤와 가틀라스가 서로 왕래하며 관계를 가질때마다 영지 곳곳에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농사가 전혀 되지 않았다.
가틀라스는 지치지도 않고 다섯마리의 야크샤샤를 돌아가며 품거나 단체로 난교까지 벌이는 등 그렇게 괴물들은 서로간에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 오입질을 해댔으니, 그로인해 버나드가 도착했을즈음 던헬더르 영지는 다섯달 내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한해 농사는 완전히 망쳤고 영지민들은 식량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버나드가 나타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기지를 발휘해 가틀라스와 다섯마리의 야크샤샤들을 단숨에 물리치며 던헬더르 영지 역사에 길이남을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심지어 페니스의 길이가 무려 40cm에 달해 그간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했던 해링턴 영주에게 딱 한마리 살려놓았던 야크샤샤까지 선물하며 영주의 가문이 후대를 이을 수 있게끔 해줌은 물론, 오랜 비로 망가진 영지가 신속히 재건될 수 있도록 한동안 던헬더르에 머물며 물적,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버나드가 떠난 이후 던헬더르 영지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지고 해마다 늑대 축제가 열렸다.
아울러 영웅적인 늑대가 나타나 거인과 다섯마리의 뱀녀들을 물리치는 연극도 공연되었다.
“해링턴 영주로부터 방문을 환영한다는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도시로 들어가지 않고 야영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샤를에게 멜리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샤를이 기뻐했다.
“빨리 들어가자.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어.”
“근데 해링턴 영주는 아량이 넓은 사람인가 봅니다. 우리 병사들이 도시에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봤더니 괜찮다네요. 마음 편히 들어와서 도시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필요한 물품들을 마음껏 구입하랍니다.”
“그래? 그럼 잘됐네. 병사들한테 무기는 야영지에 놔두고 도시에 가서 실컷 즐기라고해.”
얼마 지나지 않아 샤를은 버나드를 비롯해 가신들을 데리고 던헬더르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을 통과하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대로 한가운데 자리잡은 높이 3미터쯤 되는 동상이었다.
“어?”
마차에 타고 있던 샤를은 동상을 지나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인데?”
멜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말에 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동상 앞에서 고삐를 잡아세우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버나드가 헛기침을 하며 빠르게 말을 몰고 다가왔다.
“샤를리나님을 지키지 않고 뭐합니까. 어서 서두릅시다.”
“저기요. 이 동상의 기사분 어디서 본것 같지 않나요?”
“그럴리가요. 그냥 지인과 얼굴이 비슷할뿐이겠죠.”
“그런가?”
“자자, 갑시다.”
멜리사는 버나드에게 등을 떠밀리며 다시 말을 몰았다.
이윽고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내성에 다다르자 해링턴 영주 부부가 미리 마중나와 있었다.
부부는 극진한 예우를 다해가며 샤를과 일행들을 반겼다.
“던헬더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주님!”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락이라니요. 당연히 들어오셔야지요! 영광입니다!”
세월이 흘러 50대 중년이된 해링턴 영주는 젊은시절 모습처럼 여전히 활기찬 사람이었다.
그리고 페니스가 워낙 커 바지속에 따로 페니스 주머니를 달고 다녀야 하는 그였기에 우측 허벅지쪽에 달린 기다란 페니스 주머니의 윤곽이 도드라진 모습도 여전했다.
버나드를 제외하고 다른 일행들은 그 모습을 처음 봤기에 ‘저게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민망한 나머지 시선을 돌리는 이도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링턴 영주는 내내 밝았다.
“이제보니 아킨테 가문은 멋진 신사숙녀분들만 골라 받나봅니다! 기사들이 전부 멋지고 아름다워요! 하하하!”
그는 샤를에 이어 일행 한명 한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여유롭게 농담을 건네기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나드와 악수를 하게된 그는 돌연 눈을 가늘게 뜨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후후, 세월이 흘러도 그 기품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풍채는 여전하시군요.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내 은인, 나의 영웅님. 사정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전하의 전령조가 도착했거든요.”
느끼한 표정을 짓고 낯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를 보며 버나드는 살짝지근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해링턴 영주는 한술더떠 자신이 마치 첩보원이라도 된 것 마냥 버나드에게 슬쩍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걱정마십시오. 전, 평생 만나본적도 없는 전하보다 우리 영지를 지켜주신 영웅님이 더 소중하니까요. 그리고 어제 루로키나 아이들에게 전달 받은대로 체류하시는 동안 버나드님을 모른척 하겠습니다. 후후, 슬프지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전하와 관련된 일일랑 신경끄시고 오래오래 편히 묵다 가시길 바랍니다. 나의 영웅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