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58 (157/200)



〈 15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58

며칠동안 먼 거리를 이동한 왕의 군대는 한적한 숲속에서 막사를 세우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병사들이 쉬는동안 대신들은 프레드릭왕의 막사로 모여들어 최근 가장 골치 아픈 식수 문제를 논의했다.
천팔백명에 달하는 병력이 한꺼번에 이동하는 만큼 대량의 식수를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마침 들르는 지역마다 가뭄이었다.
그로인해 다음 마을에서 젖소나 양을 사 젖을 짜서 충당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어떤 이는 마법사들을 시켜 병사들의 소변을 정제해 식수로 재활용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그런식으로 대신들이 여러 의견을 내가며 상의하던중 문득 막사 밖에서 전령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하, 에버런에서 전령조가 날아왔습니다. 에버런은 라쥬르 영주의 통치 지역입니다.”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자 전령조 담당관이 머리를 숙이고 막사안으로 들어왔다.

“에버런이라면 국경과 가까운  아닌가. 설마 샤를리나를 붙잡은 것인가?”

실내에는 안소니 후작을 비롯해 대가문 출신의 대신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고, 왕의 의자가 가장 안쪽에 비치되어 권위를 내세우듯 원탁을 내려다보며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자네가 읽어보게.”

프레드릭왕은 문쪽에 자리잡은 대신에게 대독하라 이른뒤 옆에 술병을 들고 서있던 시녀에게 잔을 내밀어 채우게했다.
왕이 달콤한 맛의 포도주를 입안으로 넘기는 사이 문쪽에 앉아있던 대신이 일어나 전령조 담당관이 건네주는 쪽지를 받았다.
다리에 묶여있던 쪽지가 풀린 비둘기는 전령조 담당관의 어깨 위로 올라가서 구구 거렸다.

“읽겠습니다.”

대신은 그렇게 운을 뗀뒤,  손에 포도주잔을 든 왕이 빨리 읽으라는 손짓을 하자 쪽지를 펼쳐보이며 큰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선물일세 프레드릭. 음……? 끝입니다.”
“어?”
“선물?”
“그게 단가?”
“적힌거라고는 이게 전부네만.”

대신들이 머리를 갸웃거리던 그 순간, 프레드릭의 뇌리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화들짝 떠올랐다.
바로 1차 걷는 사자 전쟁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던 버나드가 적군의 영주들을 살해할때의 수법.
왕은 냉큼 술잔을 집어던지며 눈을 부릅떴다.

“당장  비둘기를 죽여! 버나드가 보낸 것이다!”

그 한마디를 외치고 그는 다급히 옆에 서있던 시녀를 두 팔로 붙잡아 앞으로 내세우며 방패막이로 세웠다.

“꺄악!”
“저, 전하!”

영문을 모르는 대신들이 어영부영하는 사이 전령조 담당관의 어깨에 앉아있던 비둘기가 돌연 괴상한 조짐을 보이더니 날개를 활짝 펴고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목이 쭉 늘어나면서 그대로 프레드릭왕쪽으로 날아갔는데, 머리가 순식간에 커지면서 살쾡이의 얼굴로 변했다.
괴물은 단숨에 왕을 집어 삼키려 했고 프레드릭왕은 잽싸게 시녀의 등을 떠밀었다.
시녀가 대신 잡아먹혔으나 등을 떠밀던  역시 찰나의 순간 괴물의 입이 닫히면서 두 팔이 모두 물어뜯겼다.

“끄아악!”

왕은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잘린 양팔에서 분수같이 피가 솟구쳤다.
머리만 살쾡이 얼굴로 변하고 목이 10미터나 길어진 괴물은 재차 공격을 가하려했으나 순간 몸집이 크게 부풀어오르면서 거대해졌다.
어깨를 대주고 있던 전령조 담당관의 몸을 깔아뭉게고 막사를 부수며 세상에 존재를 알렸다.

“으악! 저게 뭐야!”

살쾡이의 얼굴에 머리가 길쭉하고 새의 몸뚱이를 가진 기괴한 괴물이 출현하자 영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밀치다 자빠지며 허둥댔다.
괴물은 화염을 뿜어 주변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 시각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로잘리나는 난데없는 소란에 다급히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왕의 막사 부근에서 날뛰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망치는 기사를 붙잡아 캐물었다.

“무슨 일이죠? 저 괴물은 뭐예요!?”
“버나드다! 버나드가 우릴 공격했어!”
“그럴리가요! 그는 지금 여기서 수백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고요!”
“씨발 지금 그걸 따질때가 아니야! 아무튼 버나드가 보낸 괴물이라고!”

공포에 질린 기사는 욕설을 지껄이며 헐레벌떡 도망쳤다.
로잘리나는 믿기지 않는듯이 멍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먼 곳까지 공격하다니…… 그는 대체 어떤 힘을 가진거야……”

왕의 막사를 비롯해  주변 모든 막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어떤 곳에서는 폭발하는 소리가 나며 온갖 잡동사니들이 하늘 높이 비상하는 광경도   있었다.
다른쪽에서는 용기 있는 기사들의 외침도 들렸다.

“창병! 궁병! 모두 이쪽으로 모여라! 전하와 대신들을 신속히 구출한다!”

 외침 덕분에 로잘리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숙소로 뛰어들어가 서둘러 무장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오며 자신의 상관인 줄리안을 찾아나섰다.

난장판이된 길을 뚫고 무사히 단장 숙소에 이르자 몇몇 나이트섀도우 부대원들이 무장을 갖춘채 모여있었다.
그곳에 줄리안도 있었다.

“마스터울프가 벌인짓이라던데 사실인가요?”
“그라면 가능하지.”

줄리안은 멀리서 포악하게 날뛰는 괴물을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띄웠다.

“왕의 군대 안에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가 많아. 나 역시 마스터울프와 함께 일했지만 1차 걷는 사자 전쟁이 끝나고 난뒤에 밤의 늑대들에 합류한터라 직접 전장을 체험해보지도 못했고 그 때문에 마스터울프의 수를 읽기가 어렵지. 한마디로 그는 전략의 폭이 넓어. 1차 걷는 사자 전쟁때 써먹던 기술들을 하나씩 입맛대로 골라 써먹으면 얼마나 즐겁겠어? 젠장, 그를 쫓고 있던 우리가 되려 당할줄이야. 참 쪽팔리고 웃기다니깐.”

투덜대듯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그의 말은, 로잘리나로 하여금 새삼 버나드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강한 군대를 가진 전하께서 위기에 빠지다니 놀라워. 마스터울프 버나드. 그를 빨리 보고 싶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해.’

로잘리나가 홀로 생각에 잠긴채 우두커니 서있자 줄리안이 바로 딱밤을 때렸다.
딱!

“아야.”
“너 뭐하니?”
“네?”
“너희 아버지 구하러 가야지 어따 정신줄 놓고 있어?”
“아 맞아요! 아버지! 빨리 아버지를 구하러 가야해요!”

줄리안이 이끄는 나이트섀도우는 즉시 집합 종을 울리고 전열을 가다듬은뒤 괴물이 있는 곳으로 곧장 말을 타고 달려갔다.
이내 도착한 자욱한 연기투성이의 일대는 괴물의 포효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불길로 가득차 있었다.
줄리안이 타고 있는 말이 바닥에 찢겨진  널브러진 천막을 짓밟고 섰다.

“우리 부대는 주군이신 안소니 후작님의 신변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괴물을 상대하는건 그 다음이다!”

그들에 이어 다른 가문 출신인 철갑으로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서로 가문과 소속이 다르지만 그들은 ‘왕의 군대’ 라는 미명 아래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반격에 나섰고, 괴물 또한 곳곳에 화염을 내뿜으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등, 양쪽이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속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괴물이 밀리는 형세로 기울게 된건 당연 크록과 디에나의 맹활약 덕분이었다.

어느순간부터 괴물은 지쳤는지 헥헥대며 침을 마구 흘려댔다.
그 틈을  크록과 디에나가 기다렸다는듯이 아껴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크록은 괴물의 한쪽 다리를 힘껏 끌어 안고 빙빙 돌리다 구석으로 내동댕이치기도 했으며 디에나는 가볍고 유려한 몸놀림으로 사뿐히 도약해 괴물의 튼튼하고 커다란 날갯죽지를 단칼에 잘라버리는 검술의 진수를 선보이며 모두를 놀라게했다.

“흥, 겨우 그것뿐인가?”

디에나의 눈부신 검술을 보고 크록도 지지 않겠다는듯이 커다란 날이 달린 자신의 양날 도끼를 한손으로 거머쥐었다.
얼마뒤, 괴물의 정수리를 정통으로 가격한 도끼날이 두개골을 단숨에 갈랐다.
마침내 마법도 통하지 않던 강력한 괴물이 쓰러졌다.

크록이 바닥에 착지하자  뒤에는 디에나가 지켜보고 있었다.
금빛이 도는 짧은 단발에 꽁지머리를  그녀가 무표정으로 다가왔다.

“머리를 어떻게 갈랐지?  칼은 안통하던데.”
“그러니까 드워프제를 쓰라고.”

크록은 보란듯이 양날도끼를 허공에 휘둘러보였다.

“나랑 한번 자주면 좋은 드워프를 소개시켜줄 생각도 있는데, 어떠신지?”
“네겐 명예가 없나보군.”

그녀의 일갈에 크록은 누런 이를 내보이고 씩 웃으며 야만성을 드러냈다.

“네 칼질이 나의 욕망을 자극해. 춤을 추듯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네 예쁜 엉덩이에 좆을 박고 싶어 미치겠다고.”
“어쩐지 나도 네 털난 엉덩이에 도끼자루를 쑤셔 넣어주고 싶더라.”

디에나는 미소를 짓더니 정색하면서 침을 뱉었다.

“그거나 처먹어.”
“영광이군.”

그녀의 침이 크록의 가슴팍에서 흘러내렸다.
크록은 손으로 스윽 닦더니 보란듯이 입으로 가져가 할짝할짝 핥아먹었다.

“쓰읍. 흐음, 진미가 따로없군.”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프레드릭왕 주위로 몰려들었다.
괴물을 처치했으나 누구도 기뻐하지 못했다.
왕의 얼굴은 말그대로 흙빛이었다.
왕의 주치의들은 발을 동동 굴렀고, 두 팔이 찢겨 잘려나간 왕은 심한 출혈로 인해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늑대의 비열한 간계에 당할줄이야 원통하도다……”

왕은 숨이 멎어가는 상황에서 ‘버나드’, ‘늑대’, ‘분노스럽다’ 라는 단어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모든 사람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은  흐느껴 울었으며, 대신들은 충심을 경쟁하듯 서로 목청을 드높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전하전하만 외칠뿐이었다.

“비통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왕국과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하네.”

안소니 후작은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란듯이 말을 뱉은뒤 시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는 왕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처럼 슬프긴 마찬가지였으나 한편으로는 초조해보였다.

“전하, 제가 전하의 유지를 이어받아 반드시 그 늑대놈을 처단하겠습니다. 후계자가 정해질때까지 당분간 와, 왕의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섭정 역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물심양면 노력하여 왕가의 대가 끊기지 않게 최선을 다 하겠나이다.”
“그, 그리 하……”

왕은 채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자들의 곡소리가 더욱 커지자  주변에서 멀찌감치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왕이 죽었다.

안소니 후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외쳤다.

“전하께서 대리나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당분간 국정은 명분으로나 혈통으로나 위세로나 여러모로 합당한 이 안소니가 돌보도록 하겠소이다! 만약 반발하는……”

그때였다.
갑자기 뒷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자네한테 그런 권한을 줬나?”
“뭣이? 내 말에 반대하겠단……! 헉!?”

불쑥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안소니 후작은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어떻게!?”

그 순간 시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왕의 시체가 눈깜짝할 사이에 펑하고 사라지며 나무 막대기로 변했다.

“허상 마법……?”

허상 마법을 써서 왕의 분신을 만들었다라, 이는 분명 궁정 마법사들의 짓이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안소니 후작은 헐레벌떡 네 발로 기어가서 불쑥 등장한 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이옵니다!”

프레드릭왕은 건재했다.
사지가 멀쩡한 그를 보고 사람들은 일제히 귀신이라도  것 마냥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이내 놀람과 환호성이 장내를 뒤덮은 가운데, 왕은 뒷짐을 진채 껄껄 웃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진영 안이 어수선하구나. 어서 정비를 마치고 출발하자. 늑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 빨리 가서 상대해줘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