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51
나흘이 걸려 에버런 령에 도착했다.
국경과 인접한 영지인 에버런은 평화로웠지만 어딘가 삭막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최근 출몰한다는 악령의 여파인듯 싶었다.
담벼락 여기저기서 악령을 쫓아내는 부적들이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버나드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혼자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영주의 초대를 받았어요. 샤를리나님한테 가서 준비하시라고 전해주겠어요?”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기하는 중에 멜리사가 다가와 말했다.
영지를 지나가려면 절차상 영주의 승인이 필요했고, 승인을 얻으려면 영주와 만나 함께 식사라도 하는 기본적인 예의가 필요했다.
버나드와 멜리사는 샤를리나를 데리고 영주의 관저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알았어. 옷 갈아 입을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평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샤를은 버나드의 얘기를 듣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넘게 야영을 한 그녀는 몰골이 초췌했다.
오늘밤은 오랜만에 따뜻하고 아늑한 방에서 잘 수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그녀는 군말없이 따라와줬다.
이후 버나드, 샤를리나, 멜리사, 러즈반, 클레어 이렇게 다섯 사람만 조촐하게 관저로 향했다.
베네피카의 쌍둥이 자매 그리아와 카샤는 남아서 야영지를 지켰다.
마을 한복판을 지나 잘 가꿔진 숲에 들어섰다.
숲을 지나자 넓은 빈터가 나왔다.
영주의 관저가 보였다.
관저의 외경은 훌륭했다. 건물이 옛스럽긴 하지만 산자락을 등진 풍경이 장관이었다.
정문에 다가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집사가 나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오오, 아름다우셔라! 어떤분이 샤를리나 공주님인지 굳이 말씀을 안하셔도 단번에 알겠군요. 샤를리나 공주님, 오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자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말들을 하인들에게 맡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다섯 사람을 2층의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각자 방배정을 받고 방에서 쉬며 대기하고 있던 때였다.
버나드는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주었다.
복도에 집사가 서있었다.
“저희 영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다들 오랜 여행으로 피곤할테니 오늘 저녁은 편히 쉬시고 내일 인사를 하는게 좋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푹 주무시고 내일 만나시지요.”
“라쥬르 영주님께 배려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그럼 이만.”
버나드는 멜리사의 방을 찾아가 그녀와 짧게 앞일에 관한 대화를 나눈 후 클레어를 찾아갔다.
오늘밤 자신과 멜리사, 러즈반, 클레어 이렇게 네 명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기로 정했다.
첫번째 순번인 클레어는 방에서 경무장 차림으로 대기중이었다.
그녀는 방을 찾아온 버나드에게 뜬금없이 약을 하나 건넸다.
“내가 자주 먹는 수면제야. 요즘 생각이 많아보이던데 이걸 먹으면 편히 잘 수 있어.”
버나드는 무심코 그것을 받으며 샤를리나 님을 잘 지켜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눕는 침대는 그야말로 편안하고 따스했다.
데보라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클레어가 준 수면제를 꺼냈다.
혀로 살짝 맛을 보니 수면제가 맞다.
비밀 조직을 이끌 당시의 경험으로 약물 전문가이기도한 버나드가 수면제의 맛을 모를리 없었다.
“나중에 필요할때가 있겠지.”
버나드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다.
그는 약물에 의존하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
약물에 미친 사람들을 자주 봐왔기 때문이다. 본인이 약물을 사용해 타인을 미치게 만든적도 있고. 예를들면 포로에게서 자백을 받아낼때라든지.
수면제를 짐속에 넣은뒤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노곤함을 느끼던 버나드는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
철컥.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불침번을 서던 클레어는 샤를리나가 무사히 자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방을 찾아갔다.
다음방에선 멜리사가 곤히 자고 있었다.
다시 방을 나와 러즈반의 방에 들어갔다.
아무 이상없는 것을 확인한뒤 도로 나와 마지막으로 버나드의 방에 들어갔다.
많이 피곤했는지 버나드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클레어는 코 고는 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에 다가가서 버나드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는 버나드의 하반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슬며시 이불을 젓히고 바지 중앙에 손을 댔다.
바지채 물컹한 것이 느껴진다.
손바닥 가득 들어오는 묵직한 감촉에 내심 놀라워하며 클레어는 꿀꺽 침을 삼켰다.
여성의 몸을 사정없이 찌르고 마구 헤집는 괴물을 드디어 만졌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몇 차례인가 가볍게 주물럭 거리던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을 하지 못했다.
페니스의 실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잠겨있는 바지의 단추로 시선이 가며 좀 더 과감해지려는 찰나, 갑자기 버나드의 코골이 소리가 뚝 그쳤다.
“으음……”
“……!”
버나드가 뒤척이는 소리에 놀라 그녀는 후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순식간에 침대에서 몇 걸음 멀어진 클레어는 놀란 가슴을 서둘러 진정시키고 버나드의 얼굴을 주의깊게 쳐다봤다.
다행히 깨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뜰까봐 무서웠다.
젓힌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그녀는 방을 나왔다.
***
아침 식사는 라쥬르 영주와 함께했다.
라쥬르 영주는 식사내내 불만을 쏟아냈다.
그의 말속에서 왕의 자녀중 누가 악령이된 로토에게 살해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망할놈의 악령이 안젤리나 공주를 비롯해 그 일행들을 전부 죽여버리는 바람에 내 입장이 무척 난처해졌다오. 공주의 모친이 나보고, 영지 관리를 소홀히한 책임이 있으니 공주의 목숨값을 내놓으라더군요. 정말 날강도가 따로없어.”
안젤리나 공주라면 프레드릭의 스무명의 자식중 열한번째로 태어난 서3녀다. 열다섯번째로 태어난 샤를(서5녀)의 이복 언니다.
“세상에 이런게 어딨소? 난 단지 길을 열어달라길래 길을 열어줬을뿐인데 대체 뭔 잘못을 했단 말이오? 내가 가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라쥬르 영주는 단호히 말했다.
“내, 샤를리나님의 앞길을 막을 생각은 없지만, 정 그 길을 지나고 싶다면 ‘어떤 피해를 당해도 우리 에버런 가문에게 변상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가시오. 각서를 쓰지 않으면 절대 길을 열어줄 수 없소이다.”
당연히 각서따위를 쓸 생각은 없다.
라쥬르 영주는 사실 아랫가문 주제에 윗가문에게 무례한 요구를 하는 셈이다.
가고 싶다하면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순순히 길을 열어주는게 도리다.
영지의 크기만 봐도 아킨테 가문이 에버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신분 또한 왕의 피를 물려받은 샤를이 우위였다.
하지만 식사자리에서 샤를을 비롯해 누구도 불쾌감을 표출하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사전에 일행들에게 악령을 퇴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상황이다.
사실 버나드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의 주장을 제지, 거부, 기각할 수 있는 이는 현재 백검대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샤를은 요즘 들어 투덜대면서도 버나드의 말을 잘 따랐고, 멜리사 역시 그동안 함께한 경험을 통해 버나드를 총명하고 우수한 사람으로 여기며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고로 현재 백검대는 버나드가 이끄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심 무렵, 샤를은 라쥬르 영주를 찾아가 악령을 퇴치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라쥬르 영주가 크게 기뻐했다.
“놈을 처리해준다면 오늘밤 당장 성대한 연회를 열겠소!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지원해드리리다! 어서 처치해주시오!”
같은시각, 버나드는 본대가 머무는 야영지로 가서 멜라니아를 만나고 있었다.
말이 악령퇴치지 실은 로토를 성불시킬 목적이었고, 마법이나 주술쪽에 밝은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넌 또 하나 빚진거야. 큭큭.”
“호수에 물뜨러 가는 일 또 없어? 군말없이 가줄테니까 빚 좀 갚게 이것저것 요구하란 말이야. 왜 쌓아두고만 있지?”
그리하여 준비는 척척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다음날 오전, 버나드는 일행들과 함께, 일년전 밤의 늑대들과 왕의 군대간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란바이어 평원을 찾았다.
메마른 들판에는 찢어진 옷가지들과 백골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당시 전투가 벌어진 후 치우지도 않은 모양이다.
무기와 방어구에 붙어있던 쇠붙이들만 모조리 사라졌다.
“옷이 이게 뭐야. 꼭 이 짓을 해야해?”
어느새 새하얀 신녀복으로 갈아입은 샤를리나가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끌리는 소매를 보고 투덜거리자 멜라니아가 쏘아붙였다.
“시끄러 이년아.”
“내가 왜 이 기분 나쁜 할머니의 말을 들어야해?”
“괴물 좆을 잘라다 입에 콱 쑤셔 박아줄까보다. 젊은 아가씨한테 할머니가 뭐야 할머니가.”
그 말을 들은 멜리사가 깜짝 놀라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멜라니아님? 샤를리나님께 심한 말씀은 자제 좀……”
“넌 뭐야? 분수를 알고 덤벼! 이 몸이 저년의 탯줄을 잘랐다! 나 없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년이지! 대장이라는 년이 위아래를 몰라.”
멜리사는 이마에 손을 대며 한숨을 내쉬었고, 멜라니아는 큰 소리치며 샤를에게 다가가 둘둘말린 두루마리 양피지를 건넸다.
“건방 떨지말고 최대한 공손하게 큰 목소리로 읽거라. 안그랬다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악령한테 잡아먹히는줄 알아.”
“씨……”
샤를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양피지를 펼쳤다.
멜라니아의 생각은 이랬다.
악령으로 변한 로토를 달래려면 그를 죽인 자의 진심어린 사죄가 필요하고, 로토를 살해한 것은 비록 간접적이지만 어쨌든 프레드릭왕이니, 왕의 피를 물려받은 샤를리나가 열과 성을 다하여 위로를 하고 용서를 빌면 악령의 원한이 풀린다는 것이다.
샤를은 수많은 백골이 널브러진 장소를 바라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 프레드릭 전하의 열다섯번째 딸 샤를리나는 안타깝게 숨진 로토님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이년아, 목소리가 작아. 더 크게!”
“나 프레드릭 전하의 열다섯번째 딸 샤를리나는 안타깝게 숨진 로토님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있잖아! 최대한 공손하게 하란 말이다! 공손하게!”
“후! 이 마녀가……!”
버나드가 서둘러 다가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한 샤를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참고 잘해주면 오늘밤에 잘때 동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방금 옛날 공주님들과 관련된 아주 재밌는 얘기가 생각났어요. 좋아하시잖아요, 왕자와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
샤를이 그를 홱 째려본다.
“약속이야.”
“네, 약속하지요.”
“알았어.”
샤를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번하더니 전에 없이 진지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두루마리 양피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로토님이시여, 당신의 억울한 죽음을 슬피 생각하는 마음 매우 간절하옵나이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또 미안합니다. 오늘……”
숙연한 분위기 속에 어느덧 위령문의 중간부분을 읽을때였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싸늘하고 음침한 기운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고 있었다.
버나드는 미간에 힘을주며 직감했다.
“왔다.”
말을 내뱉는 순간 어두운 기운이 똘똘 뭉치며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더니 곧 그림자처럼 새까만 인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어어어…… 냄새…… 왕의 냄새가 난다…… 죽인다…… 왕의 피…… 모두 죽인다…… 어어…… 왕의 자식, 아무도 이곳 못지나간다…… 전부 죽인다…… 우어어……”
등에는 정신없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여덟개의 기다란 촉수가 달려있었다.
촉수 또한 하나같이 새까맣다.
“꺄아악!”
샤를은 겁을 집어먹고 비명을 질렀다.
멜라니아가 따끔하게 소리쳤다.
“넌 멈추지말고 계속 읽거라! 빨리 읽어!”
버나드도 다급히 소리쳤다.
“저 녀석은 우리에게 맡기고 샤를리나 님은 어서 위령문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끝납니다!”
“알, 알았어!”
버나드는 즉시 마검을 꺼내들며 주변에 있던 멜리사, 클레어를 쳐다봤다.
“샤를리나님이 위령문을 다 읽을 수 있도록 지켜야합니다. 자, 갑시다!”
“시간 버는거야 쉽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