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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50 (149/200)



〈 149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50

화려한 제복을 입고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오르는 로토가 떠오른다.
그 주변에서 레아와 줄리안이 밝은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다.

로토가 계단에 오르자  앞 단상에 서있는 사람은 버나드였다.
기품있고 중후한 차림새지만 얼굴만큼은 지금보다 훨씬 앳된 모습이다.
10년전의 일이니 당연할까.

“저 로토는 국가를 지키는 업무를 수행하는 기사로서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을 발휘하여 전하께 무한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밤의 늑대들’의 규율 및 직무상 명령을 준수, 복종하며 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을 하늘에 계시는 신과 이 땅의 정복자이신 프레드릭 전하, 그리고 마스터울프님께, 제 검과 가진 모든 것,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아울러 본인은 레온왕국과 한 몸이신 프레드릭 전하를 섬기며, 그분을 위해 복종하고, 그분을 위해 죽겠습니다. 부디 제 검을 받아주십시오.”

로토는 머리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두 손으로 검을 떠받들어보이자 버나드는 작은 침으로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 흘러나온 피를 칼집에 한방울 떨어뜨렸다.
레아와 줄리안에게도 똑같이 시켰다.
로토를 동료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로토여, 네 검에는 나와 동료들의 피가 묻었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서로를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신뢰감을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일 너를 비롯 여러 부하들과 식사를 하기바라며, 죽지마라. 우리 일은 극도로 위험천만해 언제 누가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어제 함께 식사했던 동료가 오늘은 죽어있는 상황이 부지기수지. 따라서 내가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죽지마라. 그리고 죽더라도 나라와 전하를 위해 명예롭게 죽어라. 자결은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스런 죽음이다. 적에게 붙잡히면 수단을 가리지 말고 자결하라.”
“아니 첫날부터 죽으라고 가르치면 어떡해요?”

줄리안이 옆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쫄아서 집으로 돌아가면 어쩌려고.”
“조용해.”

레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팔을 가볍게 꼬집었다.

“식중이야. 잠자코 들어. 단장님께서 하시는 일에 끼어들지마.”

다부진 체격에 덩치가  로토는 상당히 들뜬 표정이다.
그의 호탕한 음성이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저 로토! 밤의 늑대들의 비밀을 엄격히 지키며 동료를 가족처럼 사랑하고 단장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겠습니다! 앞으로 저의 활약을 지켜봐주십시오! 모든 신들의 이름을 걸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와하하하!”

버나드는 흐뭇한 표정으로 로토를 내려다봤다.
무성하게 자란 구레나룻에 얼굴은 비록 험상궂게 생겼지만 눈빛은 경솔하거나 남의 목숨을 가벼이 여길 눈이 아니었다.
맑고 심지 있어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 좋은 부하를 찾았다고, 속으로 재차 생각하며 버나드는 크게 기뻤다.

***

랜턴이 떠난  버나드는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텐트 주변에 쪼그려 앉아 옛날 일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으면, 율리아가 가끔씩 마실 차라든지  혹은 치즈 같은 것들을 가져왔다.

“나리, 좀이따 다시 오겠습니다. 데보라님을 도와주러 가볼게요. 지금 저쪽에서 나물 장사중이거든요.”

그녀가 두고 간 것들을 아무 생각없이 주워들고 입속에 쑤셔 넣는다.
정신이 딴데 팔려있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계처럼 씹기만했다.
우물우물거리는 버나드의 시선은 계속 먼 곳의 풍경에 향해있었다.

***

로토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처음 만난것은 254년, 265년인 지금으로부터 11년전의 일이다.
254년은 프레드릭왕과 여동생 웨이벌리의 이블린, 두 남매간의 싸움이었던  1차 걷는 사자 전쟁의 종전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매우 뜻깊은 해였다.
전쟁은 프레드릭왕의 승리로 끝났고, 왕실은 곧장 대대적인 재건 작업에 들어갔다.

“눈엣가시였던 이블린도 죽였고 이제 두 다리 뻗고 자도 되겠어. 이제야말로 비로소 독보적인 왕이 되었군! 우선 날 과시할  있는 멋진 의자가 필요해. 저기 있는 구닥다리 같은 의자따위 버리고 새로 하나 맞추자고! 수년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똥냄새가 아직도 나는 것 같거든. 하하하!”

프레드릭왕의 지시로 기존 옥좌를 버리고  옥좌를 만드는 일을 버나드가 직접 맡았다.
왕은 전체가 순금으로 만들어진 ‘황금옥좌’를 원했다.
그리고 황금옥좌에 여러 기능을 넣을 것을 주문했다. 왕 이외의 사람이 앉으면 신비한 힘이 발휘돼 의자에서 풀려날 수 없게 구속된다든지, 장시간 앉아 있으면 저절로 피로가 풀리는 그런 기능들 말이다.

황금옥좌를 멋지게 제작하는 것도 큰 일인데 거기에 또 신비한 기능까지 넣으라니, 이는 평범한 대장장이가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드워프를 섭외할 생각도 있었으나 드워프족은 웨이벌리의 이블린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프레드릭왕에게 칼을 들이댄 상태였다.
전쟁이 프레드릭왕의 승리로 끝나면서 박해를 당하기 시작했고, 서로 관계가 좋지 못한 상황에 고집센 그들이 순순히 황금의자를 만들어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버나드는 드워프를 제외하고 열심히 수소문하여 유명한 대장장이를 찾아갔다.
이름이 지야크 라는 자였다.
지야크는 젊은 시절 운좋게 아티팩트 ‘불의 신의 망치’를 얻어 전국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자였다.
인간이면서 드워프의 기술을 초월한 대장장이.

그러나 막상 만나본 지야크는 수많은 명품을 만든 위업에도 불구하고 명성에 비해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80세가 넘은 그는 노환으로 병들어있었다.
몸에서 단백질이 계속 빠져나가 젊은시절 왕성했던 근육이  빠져 체격도 무척 왜소한 상태였다.
망치를 들 힘이나 있을지 의문.

하지만 당시 버나드는 상당히 냉혈한이었다.
피가 난무하는 전쟁이 끝난 직후였기에 그의 눈빛은 매사 살기를 띠고 있었다.
황금옥좌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은 지야크가 병환으로 무리라며 다른이를 찾아보라고 호소했으나 버나드의 머릿속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오로지 지야크의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진 황금옥좌만을 원했다.

“병을 핑계삼아 전하의 명을 거역할 생각이라면 너와  가족 전부를 체포하겠다.”
“요, 용서하여 주십시오! 콜록, 콜록!”

결국, 지야크는 어쩔 수 없이 버나드를 따라나서기로 한다.
짐을 챙긴 그가 집을 떠나려할때였다.
지야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차남은 전쟁 때문에 영주에게 징집돼 오랫동안 객지생활을 하는 중이었고 장남이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아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노쇠한 아버지를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던 장남이 울면서 매달렸다.

“내가 대신 가겠소. 아버지는 긴 여행을 못한다오. 돌아가시고 말거외다.”
“지야크가 아니면 안돼. 네 솜씨를 신뢰할 수 없다.”
“나, 나도  수 있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기술을 어깨너머로 봐오며 감각을 익혔고 직접 가르침도 받았소! 내 실력을 무시하지 마시오! 내 비록 명성은 초라하나 요즘 우리 대장간에서  나가는 물건들은 전부 내 작품이라오!”

이드리스 라는 이름을 가진 장남은 남자치고는 꽤 선이 얇고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사내였다.
그는 허겁지겁 뛰어가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무기들을 몇가지 들고와 버나드에게 내밀었다.

“이게 내가 만든거요! 한번 보시오! 젊은시절 아버지의 솜씨와 완벽히 똑같다고 자부하는 바요!”

이드리스의 제작품을 이리저리 꼼꼼이 돌려보던 버나드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그의 솜씨는 정말 예상외였다.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자신이 볼때 수집욕이 생길 정도로 상당히 뛰어났다.
젊은 나이에 장인 소리를 들어도 마땅한 실력이건만 그동안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건가?

“네가 따라와라.”
“가, 감사하오!”

그리하여 이드리스와 함께 귀향길에 올랐다.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았을때 말에 타고 있던 이드리스가 소변이 마려운지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 있었다.
왕이 보낸 신하인 버나드 때문에 종일 긴장하고 있던터라 화장실 한번 못간 상태였다.
버나드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잠시 쉬었다가자는 제안을 건넸다.

“잠시 소변  보고 오겠소! 절대 따라오지 마시오!”

말에서 내린 이드리스는 다급히 어디론가로 뛰어갔다.
근처에서 볼일을 보면 될 것을 숲속 깊숙이 사라지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버나드가 조용히 뒤를 밟았다.

이드리스는 계곡물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어가더니 하반신이 완전히 잠긴 상태에서 그대로 소변을 보는 것이었다.
몰래 지켜보고 있던 버나드는 그 광경을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유히 흘러내려가는 붉은 핏물이 눈에 들어왔다.
버나드는 그 즉시 무언가를 깨닫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숨어있던 나무에서 나와 곧바로 이드리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첨벙첨벙!

“뭐, 뭐하는 짓이오!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소!”

이드리스가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물속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버나드는 인상을 쓰며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곧장 따귀를 날렸다.
찰싹!

“꺄악!”
“너, 계집이었군.”

두 손으로 거칠게 그의 옷을 찢으며 가슴을 풀어헤치자 하얀천을 똘똘감아 납작해진 젖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버나드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봤다.

“왜 속였지?”

한쪽 뺨이 붉게 상기된 이드리스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수, 숨길 생각은 없었소! 조만간 마, 말할려고 했다오!”
“계집인것도 모자라 불결하게 하혈까지 하는 중이었어. 그런 주제에 신성한 황금옥좌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옥좌에 네 피를 묻혀 왕국에 저주를 뿌릴 생각이냐!”

이드리스는 여자였다.
세상은, 여자 대장장이가 만든 물건의 가치를 낮게 보는 풍조가 있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녀는 평소 남장을 하고 지냈다.
그리고 일국의 왕이 앉을 황금옥좌를 여성 대장장이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세상에 알려지면 그것은 그것대로 조롱당할 우려가 있었다.

버나드는 그녀를 데리고 다시 지야크에게 돌아갔다.
본래 목적대로 지야크를 왕도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대장간 앞에  낯선 청년이 보였다.
용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등뒤에 칼을 차고 있었고, 건장한 체구였다.
그는 이드리스를 발견하더니 크게 소리치며 뛰어와 그녀를 얼싸안았다.

“누나 나왔어! 사랑스런 동생 로토가 돌아왔다고!”
“어, 어떻게 된거야?”
“드디어 전쟁이 끝났어! 아하하하! 어……? 근데 옷이 이게 뭐야. 옷이 왜 찢어져있어?”

갸우뚱하는 로토의 시선이 덜덜 떨고 있던 이드리스의 등뒤로 향했다.
그곳엔 버나드가 묵직하게 서있었다.
로토의 얼굴은 즉각 험상궂게 변했다.

“어이 형씨, 설마 우리 누나를 겁탈한거냐?”

그렇게 시비가 붙어 싸움이 시작됐다.
몇차례인가 서로 칼을 주고받고는 버나드는 내심 감탄했다.
로토의 실력이 한낱 시골 용병의 검술 수준으로 보기에는 놀라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왕도에서도 충분히 먹힐 실력이야. 아니, 그 이상…… 어쩌면 열손가락 안에 들지도 모르겠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인재를 발견할줄이야……
신선했다.
그리고 로토를 갖고 싶었다.

감탄한 것은 로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거대한 장벽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버나드는 무서우리만치 빨랐고, 날카롭고, 정확했다.
무언가를 하려하면 하기도 전에 모조리 막히는 바람에 공격다운 공격 한번을 못했다.
버나드의 검술은 그가 여태껏 만나본 사람들중에 가장 으뜸이었다.

“와하하하! 재밌는 남자군! 이 정도 실력이면 우리 누나를 줘도 상관없겠어! 앞으로 매형이라 부르지!”
“네녀석과 가족이 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데리고  생각은 있지. 날 따라와라. 네게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줄테니.”

어느순간 두 사람은 싸우는 것을 중단하고 의기투합했다.
누나에 대한 오해도 풀렸다.

그쯤되자 버나드는 로토의 솜씨에 반해 황금옥좌건은 안중에도 없었다.
로토를 부하로 삼고 싶은 욕심이 먼저였다.

로토 역시 그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버나드라는 남자를 따라가 견문도 넓히고 검술을 더욱 갈고 닦고 싶었다.

“앞으로 당신을 따를테니 그 대신 황금옥좌는 우리 누나가 만들게 해줘! 그게 조건이야! 어차피 남장한거 당신이 숨겨주면 아무도 모르잖아!”

잠깐의 고민끝에 버나드는 혼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로토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

“내가 자네를 죽게 만든  같아 미안하군……”

한동안 옛날 생각에 잠겨있던 버나드는 쓰게 웃었다.

“로토가 악령이 됐다라……”

소문이 정말 사실이라면 로토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해야할 사람은 바로 자신.
한낱 시골용병에 불과했던 그를 중앙 정치의 소용돌이속으로 끌어들였던 자신이 책임을 지고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숙명이다.
버나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나드!”
“나~~~~~~리!”

때마침 장사가 끝났는지 데보라와 율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중이었다.

“우리 돈 많이 벌었어! 이걸로 천막사자!”

버나드는 그녀들을 향해 밝게 손을 흔들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로토, 로토, 로토여…… 에버런에서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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