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46
그 후 모든 일은 신속히 추진되었다.
프레드릭왕은 무려 일주일만에 신전의 동의를 얻고 왕성 주변 영주들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아킨테 가문의 영애 샤를리나는 늑대라는 악마에게 현혹된 것도 모자라 배속에 악마의 씨까지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그 추악한 악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한다!”
프레드릭왕과 안소니 후작의 주장에 속은 대주교와 영주들은 순순히 병사를 내줬다.
그렇게 모인 기사와 종자들이 팔백명이었다.
여기에 오십명의 신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출병 통보로 인해 농번기 등 여러 사유가 더해져 당초 예상에 크게 못미쳤으나 기사 개개인의 장비를 따지면 인당 오십명몫은 거뜬히 해낼 정도로 훌륭한 장비를 갖춘 고위기사들로만 포진되어 있었다. 왕가가 직접 나서서 영주들에게 유능한 자들을 보내라고 강하게 요구했던 만큼 기사들 대부분이 이름만 말해도 다 알정도로 유명한 가문의 출신들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로만 구성된게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예였고 질적으로 우수했다.
출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왕가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워낙 갑작스런 출병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하루 빨리 떠나야했던 프레드릭왕은 사정없이 왕도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백성들의 곡식을 빼앗았고, 여정 내내 뒤치닥거리를 도맡아줄 일꾼이 필요해 남자들을 강제로 징병하여 군에 합류시켰다.
그에 반해 왕도 안에서 사는 시민들의 재산은 일절 건들지 않았다.
아무튼 그리하여 총 구백명정도가 왕도에 집결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형편이 좋은 몇몇 지방 영주들도 가담하기로 얘기가 되어있었다.
순조롭다면 총병력이 천오백명까지 불어날 예정이었다.
“자, 모두 악마를 토벌하러 떠나자!”
마침내 프레드릭왕의 우렁찬 명령이 떨어졌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병사들은 거리로 몰린 상류층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진군해 나아갔다.
“악마를 죽여라!”
“악마와 계약한 아킨테 가문을 벌하라!”
“미셸과 그 딸 샤를리나의 자궁을 찢어발기고 돌아오라!”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모든 병사들이 한걸음 한걸음 힘차게 내딛는 와중에, 나이트섀도우를 이끄는 줄리안의 입가에서 시민들을 경멸하듯 한숨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리석은 자들……”
“네? 뭐라고 하셨어요?”
나란히 말을 몰고가던 로잘리나가 쳐다본다.
그녀는 아버지인 안소니 후작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자택에 감금되어 있다 풀려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이 약간 수척했다. 식사까지 일일이 통제 받았던 모양이다.
물론 줄리안의 처지도 그와 비슷했다.
그도 왕실친위대에게 수일간 감시당하다가 최근 해방되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사냥이 잘되겠다고.”
“사냥이요?”
“늑대 사냥. 마스터울프는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줄리안은 큭큭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엔 다른 가문에서 온 쟁쟁한 기사들이 수두룩했다.
그 와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자들이 몇몇 있었으니, 앞이 보이기나 하는건지 두 눈에 검은 안대를 차고 있는 흑갑의 여기사 ‘디아나’라든지, 겉모습만 봐도 딱 야수다 싶을 정도로 사자의 갈기털 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우락부락한 야만기사 ‘크록’등이 보였다.
하나같이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떤이들은 벌써 그들을 영걸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우리 레온왕국의 영걸 디아나님! 부디 악마를 물리쳐주십시오!”
“디아나님이 왜 영걸이야! 진짜 영걸은 크록님이지! 여기 좀 봐주십시오 크록님! 제 소원입니다! 아킨테 가문을 아주 박살을 내버리십시오!”
한편, 로잘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마스터울프를 잡으러 가는거 아니었나요? 어째서 갑자기 우리의 적이 아킨테 가문으로 바뀐걸까요?”
줄리안은 귀찮다는듯이 대꾸했다.
“어이 신참 아가씨, 우린 사고력을 죽여야해. 위에서 시키는대로, 복종만 할뿐이야. 피래미가 의문을 품어봤자 단명해.”
“궁금하잖아요. 제가 조사한바에 따르면 아킨테 가문은 악마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후작님한테 가서 물어보든지.”
“아버지는 출병을 준비하느라 요며칠 계속 눈코뜰새없이 바빴어요. 찾아뵙는게 실례일정도로요. 지금도 전하 옆에 계시고.”
로잘리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왕과 나란히 말을 타고 따라오는 안소니 후작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호기심 어린 눈길로 줄리안을 쳐다봤다.
“사실 요즘 들어 자꾸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요.”
“뭔데?”
“남들에게 말하긴 곤란한 생각이죠. 하지만 단장님께는 편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왜?”
“당신이 절 이렇게 만들었거든요. 늘 그자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는 바람에. 개인적으로 자료를 찾아본 것도 있고.”
줄리안이 피식 웃었다.
“난감한 아가씨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마스터울프는 사실 좋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푸학.”
줄리안은 말위에서 배꼽을 부여잡고 자지러졌다.
“어디가서 그런말 하지마. 곧바로 사형당해.”
“그걸 잘 아는 분이 왜 마스터울프 얘기가 나올때마다 그 시절이 그립다는듯이 말씀하셨죠?”
“내가 언제.”
줄리안이 정색하며 쳐다봤다.
“나는 마스터울프를 잡기위해 창설된 나이트섀도우의 단장이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네 망상이야.”
“그렇다면 빨리 잡으시죠.”
로잘리나가 쏘아붙였다.
“제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자신이 할 일이 뭔지 잊은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매일 유유자적 태만하시기나 하고.”
“걱정마 까탈스런 풋내기 여기사님. 지금 잡으러 가고 있잖아.”
줄리안은 언제 화를 냈었냐는듯 장난기 가득하게 눈을 번쩍였다.
“너야말로 마스터울프를 향해 사랑에 빠지지나 말라고. 네 아버지가 화를 낼테니까.”
“사랑이라뇨? 정말 소름 돋는 발언이세요. 저를 그런 범죄자와…… 아무리 상관이시지만 이번 말씀은 심했어요.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을뿐입니다. 기사서약을 할때 저는 세상에 정의를 약속했죠. 약자를 돕고 질서를 지키는 기사로서 상황을 냉정히 보고 싶을뿐이에요.”
“그러기엔 마스터울프를 상당히 동정하는 것 같은데?”
“그 말씀이야말로 망상이시네요. 제가 지금 이러는건, 왕실친위대에게 붙들려 며칠간 집안에 갇힌게 이해안되서 그런 것도 있어요. 그때 전하께서 제 아버지와 우리 가문을 대체 어쩌실 생각이었는지 정말 의아하다구요. 우리 가문은 왕가에 절대적으로 충성했는데 왜 그런……”
로잘리나는 생각만해도 화가나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며 약간 울먹거렸다.
“이봐 까탈스런 풋내기 신입.”
줄리안은 전에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 의문은 당연해. 억울할테지. 그런데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벌어지는게 아니야. 전부 이유가 있어.”
“무슨 이유요? 우리 집안과 왕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줄리안은 나지막이 대꾸했다.
“왕은 미쳤어. 그리고 네 아버지는 마스터울프를 질투하며 눈이 멀었지. 그러다 탈난거야.”
그 무렵, 란은 숙소에서 수정구를 통해 버나드와 교신중이었다.
“왕이 떠났어. 명분은 악마에 씌인 아킨테 가문을 구원한다나 뭐라나. 물론 가짜겠지. 최종 목적은 당신일거야.”
난데없이 접한 소식임에도 수정구속의 버나드는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런가…… 알겠다. 몸조심 잘하도록.
“그게 다야?”
-더 할말이 있나?
“내 말은, 걱정이 안되냐고. 빨리 도망가야하는거 아냐?”
-도망이라니, 날 뭘로 보는가. 피할 생각은 없다. 오면 친히 마중나갈뿐.
“제정신이야? 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어찌 이기려고? 게다가 그들은 정예 기사들이라고.”
-프레드릭이 여기까지 오는데 빨라도 두 달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 그 사이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지.
란은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 그러다 죽을거야.”
-쉽게 죽을거면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어.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어살았겠지.
“왕과 정면으로 맞서기엔 당신은 너무나 작은 존재야. 지금 처한 현실을 봐. 당신이 가진게 뭐가 있어? 열여섯살 계집애 밑에서 기사 놀이나 하는 주제에.”
-부정은 못하겠군. 좌우간 상황은 알겠다. 다음에 또 연락하지.
“당분간 연락 못할거야.”
란은 수정구를 놔두고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프레드릭왕도 없는데 이곳에 남아있어봤자 더 할 일도 없잖아. 당장 그곳으로 갈거야. 기다리고 있어. 수정구를 가동시키려면 마력이 필요한데 큰 도시 아니면 구하기가 힘들어. 그러니 당분간 연락못해. 정 급하면 편지를 보내든지 할게.
어째서인지 버나드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곳에 올 필요 없어.
“왜? 이제 필요없으니까 꺼지라 이 말이야?”
-그렇지않아. 넌 내게 중요해. 란, 넌 그 요한나라는 소녀를 구해 곧장 제국으로 가라. 황제를 만나 사정을 알리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급히 짐을 싸던 란의 동작이 멈췄다.
그녀는 수정구를 돌아봤다.
“당신은? 당신이 무사히 살아서 제국에 온다는 보장이 없잖아.”
버나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난 죽지않아. 반드시 살아남아서 레아의 시신을 꼭 되찾을거야.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에 묻히고 싶다. 그때까지는…… 죽지않아.
말을 마친 그는 란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가 훌쩍이면서 투덜거렸다.
“바보 같이 왜 죽을 생각만 하는거야.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잘 살아가면 되잖아. 레아도 그것을 바랄테고. 난 그녀의 친구였으니까 알아. 레아도 나와 똑같은 말을 했을거야. 죽지 말라고.”
그러자 버나드는 잔잔히 웃어보였다.
-알아, 그녀도 분명 같은 말을 했겠지. 나를 위해서.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난 늘 그랬듯 그녀의 말을 안들을테고.
그 말을 들은 란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농담하지마 나쁜놈아.”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날 살아숨쉬게 하고 매일 발전케 만드는건 프레드릭이야. 복수가 끝나면 길을 잃은 나는 동시에 삶의 의욕도 잃겠지. 목적을 성취해도 레아는 돌아오지 않을테니까. 솔직히 지금은 나도 모르겠어. 그때가 되면 레아가 길을 알려줄테지.
버나드는 눈에 힘을주며 덧붙였다.
-한가지 확실한건, 이 나라의 왕은 곧 바뀐다는거지. 그리고 그 기회가 지금 다가오고 있어. 난 놓치지 않을거야. 프레드릭이 직접 찾아온다면 온힘을 다해 반격에 나서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