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45
레온왕국의 수도 아이다썬.
숙소에 머물고 있던 란에게 한통의 서신이 배달됐다.
‘깜짝 놀랄만한 정보를 얻었소. 전보다 많이줄 의향이 있으면 오늘밤 ‘해질녘’으로 오시오.’
해질녘은 상업지구에 자리잡은 여관 이름이었다.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던 란은 버릇처럼 꼬리를 흔들며 편지를 여러차례 되뇌였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거 보니 큰거 하나 물었나보네.”
란은 창가로 가 바깥을 쳐다봤다.
햇살 가득한 한가로운 오후.
야트막한 언덕 하나 없이 확 트인 도시의 전경속 저 멀리 해질녘 여관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날밤.
란은 회색 외투를 몸에 걸쳤다.
단검을 챙긴뒤 외투의 모자를 눌러쓰며 숙소를 나섰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린뒤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위는 위험하다.
이유불문하고 체포되어 최소 한달 이상은 감옥에 갇혀있어야했다.
밤사이 워낙 실종과 살인이 많이 일어났기에 몇년째 이어진 프레드릭왕의 특별조치였다.
란은 고양이처럼 네 발로 벽을 기어올라가 지붕에 올랐다.
제자리에서 숨죽인채 잠시 주변 동향을 살폈다.
근처에서 순찰중인 병사들의 잡담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때쯤 그녀는 곧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두 다리로 걷지 않고 고양이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다.
빠르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지붕과 지붕사이를 건너뛰며 달렸다.
높은 감시탑 주변을 지나칠땐 건물벽에 찰싹 달라붙어서 벽면으로 이동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마음껏 활보하며 은밀히 이동하는 것은 아그리오족 출신인 란에게는 무척이나 쉬운일이었다.
아그리오족들은 인간보다 왜소했다.
성인이 되어도 키가 140대 후반까지 밖에 자라지 않는다.
몸무게도 평균 30kg대를 유지했다.
손과 발로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꼬리가 있었다.
꼬리를 사용해 원숭이처럼 어디든 매달리는 재주가 있었다.
‘여기군.’
이윽고 해질녘 여관에 무사히 도착했다.
란은 지붕에서 기어내려와 건물 3층의 열려진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잘왔다.”
방안에는 갑옷을 갖춰입은 한 사내가 술잔을 든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그는 오늘밤 순찰대를 이끄는 기사중의 한명이었다.
란에게는 오래전에 매수당한 상태다.
그가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하지.”
“일중에는 금주야.”
“그런가, 아쉽군.”
“정보나 빨리 말해 메버릭.”
“돈은 갖고 왔겠지?”
“걱정마 얼마든지 챙겨줄테니까.”
“이번 정보는 꽤나 고급정보야. 그러니 전보다 두둑히 챙겨줘야해. 적으면 두 번 다시 날 볼 생각하지 말라고.”
“어련하시겠어. 자, 어서 말만해. 귀가 솔깃할때마다 네 입속에 황금덩어리를 한가득 쑤셔 넣어줄테니까.”
란은 품속에서 주먹만한 돈주머니를 꺼내 흔들어보이더니 그것을 휙 내던졌다.
날아온 돈주머니를 잽싸게 받아든 기사 메버릭이 흡족하게 웃는다.
“돈에 연연하지 않아서 당신들과 일하기 편하다니까. 다른 놈들은 준다하면서 떼먹거나 사기를 치거든.”
“내 보스는 무척 돈이 많지. 걱정 뚝 끊어.”
“오늘 받은 돈으로 전부터 봐왔던 말을 살거야. 우리 부대원중에 나만 말이 형편 없더라고.”
란은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꼈다.
그러곤 한숨을 내쉬었다.
“잡담이 너무 길어.”
“내가 좀 들떴나보군. 그만큼 오늘 정보는 하나같이 굵직하지.”
메버릭은 술잔을 들이킨 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요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프레드릭왕의 총애를 받던 안소니 후작이 현재 알 수 없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얼마전 갑작스레 왕궁을 방문했던 제국의 사신들이 모조리 참수당하고 요한나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병영에서 생활하는 기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놀랄 노자네, 정말.”
메버릭의 말대로 엄청난 정보들이었다.
란은 품속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 메버릭에게 연달아 던졌다.
척, 척, 척!
금화가 들어있는 돈 주머니 세 개를 한번에 받은 메버릭의 입가가 헤벌쭉 벌어졌다.
“고마워. 이 정도면 말을 사고도 남겠군.”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근데 확실한거야?”
메버릭은 돈주머니에 입맞춤을 한뒤 란을 쳐다봤다.
“나도 요한나라는 계집을 실컷 따먹었지. 전하의 명령으로 다른 놈들도 며칠동안 질리도록 따먹었어. 내일 병영으로 와서 직접 보든지. 그건 내 손에서 처리 할 수 있는 문제니까. 단, 딴데로 빼돌릴 생각은 하지마. 보는것만 가능해. 전하께서 정치적인 문제로 언제 되찾아갈지 모르는 일이니까.”
“흐음, 그래?”
란은 고민에 잠긴 모습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메버릭과 마주 앉았다.
대화 내내 후드를 푹 뒤집어쓴 그녀가 다리를 꼬았다.
“제국이 알면 당장 전쟁을 걸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그건 됐고. 안소니 후작은? 그는 왜 감옥에 갇혔지?”
메버릭이 양손을 펼쳐보였다.
“나도 몰라. 그 사건은 고위귀족이 연루되었기에 나 같은 놈이 알 형편이 못되거든. 오직 윗사람들만 아는 일이지.”
“알아봤을것 아냐. 돈 벌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내 소관이 아닌 일을 뒤적이다가 괜히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아. 그냥 어쩌다 들은 말을 네게 알려주는 것 뿐이다.”
“의외로 신중하시네.”
“가늘고 길게 살아야지. 안그래?”
“가만, 어쩌다 주워들은 말이면 정보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아냐, 아냐, 그럴리 없어. 몇주째 안소니 후작이 안보인다고. 위에서 말은 안하지만 왕궁의 기사들은 저마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야. 정 못믿겠으면 내일 당장 그란델 가문을 찾아가봐. 전하의 친위대가 쥐 새끼 한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란델 가문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지. 그쪽 식구들 어느 누구도 몇주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어. 이것만 봐도 뭔가 이상하지 않아? 게다가 안소니 후작의 딸인 로잘리나 경까지 자기집 저택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
“어쩌다 사이가 틀어진거야?”
“전하와? 글쎄 나도 모른다니까. 전하의 속을 누가 알랴. 천하의 안소니 후작이 그런 꼴을 당할지 누가 알았겠어.”
메버릭은 다시금 술잔을 집어 쭉 들이켰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란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식들은 서로 죽이느라 안달이고, 나라의 재상은 감옥에 처박히고, 그 와중에 제국의 사신을 참수하는 것도 모자라 계집 하나는 걸레가 된 상황이고, 이거야 원…… 나라꼴이 완전 개판이구만……”
“그걸 이제 알았나? 난 2차 걷는 사자 전쟁인가 뭔가할때부터 알았고만. 제국이랑 전쟁나면 제일 먼저 튈거야. 처자식 없는게 이리 편할줄이야.”
***
며칠째, 간수들은 저녁이 되면 감옥에서 안소니 후작을 끄집어내 온몸에 채찍질을 가했다.
채찍질은 단 열대.
고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뼈속까지 시릴 정도의 통증을 떠안고 밤새 잠을 설치며 괴로워하길 바라는 것처럼 간수들은 저녁마다 그를 괴롭혔다.
채찍질이 끝난 후에는 다시금 감방 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특별실에 그를 가뒀다.
“전하께 지은 죄를 참회하십시오.”
간수들이 떠난 후 안소니 후작은 깜깜한 감방의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신음했다.
비참한 현실속 그나마 위로가 되는게 있다면, 그를 돌봐줄 하녀 한명이 함께 감방에 갇혀있다는 것이었다.
프레드릭왕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나리, 등에 손을 대겠습니다.”
앳된 티가 나는 하녀는 상처가 난 안소니 후작의 등에 약을 바르고 그에게 물을 떠먹였다.
하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신음을 흘리던 후작은 결국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보였다.
“어쩌다…… 내가 어쩌다 이리 추락했는고……! 아아, 하늘이 원망스럽도다!”
간수들이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복도쪽에서 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깜깜한 복도에 불빛이 스며들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곧 등잔불이 안소니 후작이 갇힌 철창안을 비추었다.
“여보게 안소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안소니 후작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창살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프레드릭왕이 서 있었다.
“전하!”
“몸은 괜찮은가?”
안소니 후작은 곧장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전하!”
프레드릭왕은 상의를 탈의하고 있던 안소니 후작의 상처난 등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살려달라니 무슨 말인가. 난 자네를 죽이지 않아. 다만 날 속인 죄를 꾸짖고 있을뿐. 내 오늘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 왔다네.”
“무, 무엇이든 실토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진실만을 고하겠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기합이 잔뜩 들었구만. 힘들텐데 목소리를 낮추게.”
감옥 문이 열리고 프레드릭왕과 함께왔던 간수들이 하녀를 데리고 나갔다.
프레드릭왕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안소니 후작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쯧, 불쌍한지고. 그러게 왜 속였나.”
그동안 버나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프레드릭왕에게 숨기고 있던 안소니 후작은 은밀히 일을 처리하려다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다.
최근 들어 안소니 후작과 그의 휘하에 있는 줄리안이 이끄는 나이트섀도우의 움직임을 유심히 감시하던 왕은 버나드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안소니 후작을 즉시 감옥에 가둬버렸다.
“소,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전하를 향한 충정으로 행한 일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충정이라? 껄껄, 자네가 일찍 말만해줬더라도 늑대를 놓칠일은 결코 없었을거야. 하지만 이게 뭔가. 사지가 잘려 죽어가던 늑대는 전처럼 부활해서 내 땅을 보란듯이 활보하고 있어. 언제 날 죽이러 올지 모르지. 이래가지고 불안해서 잠이나 자겠나?”
“죄, 죄송합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프레드릭왕은 사악하게 눈을 빛냈다.
“늑대를 사냥할때야.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직접 놈의 숨통을 끊을 생각이네. 그러나 놈은 강하지. 쉽지 않을거야. 따라서 늑대를 추격하기 위해 최소 3천명 이상의 군사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전시도 아닌 상황에 대군을 움직이려면 신전의 동의를 얻어야하지. 그래야 영주들도 군말없이 따라줄테고. 자네도 함께 설득해주겠지?”
“무, 물론입니다! 신전의 대주교와 주변 영주들을 온 힘을 다해 설득하겠습니다! 그들이 거절한다면 저희 가문의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설득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돈이면 안될게 없지.”
프레드릭왕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늑대는 어디까지 추적했나? 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냈어?”
“아킨테 가문의 영애 샤를리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냈을뿐 이것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좀 더 조사가 필요합니다.”
“아킨테 가문과?”
프레드릭왕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들이 그럴줄 알았어. 설마가 역시나였군. 미셸 그 계집을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이참에 함께 쓸어버려야겠군.”
왕은 쓰게 웃은뒤 안소니 후작의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자, 일어나게. 오랜만에 전쟁다운 전쟁을 할때가 왔어. 살찐 내 몸에 맞는 갑옷이 있을지나 모르겠군. 자네도 얼른 치료받고 빨리 출병을 준비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