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42
가죽 장갑을 벗고, 상의를 탈의하고, 바지와 속옷도 벗었다.
호수에 들어가 신선한 물고기를 사냥할 계획이었다.
이윽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자 그녀의 매력적인 구릿빛 피부와 몸 구석구석 터질 것 같은 근육들이 여과없이 노출되었다.
첨벙.
호숫물에 살짝 발을 담그고 밑을 내려다 보았다.
잔물결이 일렁거리는 수면에 그녀의 나신이 거울처럼 뚜렷이 비치고 있었다.
풍만한 젖가슴과 무성히 자란 은색숲으로 가려진 높은 둔덕은 그녀를 여성이라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다.
베아트리스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살짝 수줍었다.
“이처럼 예쁜 여자인데 사내들은 뭐가 부족해서……”
자아도취에 빠져들만큼 그라나딘 왕국에서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주변 풍경이 너무나 황홀했다.
그녀는 잠시 사냥 생각을 잊고 호수속을 유유히 떠다녔다.
호수는 그녀의 큰 덩치를 포근히 감싸주듯 품에 안았다.
무거워서 가라앉는 일도 없이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떠다니기만 했다.
버나드란 소년은 어떤 사람일까.
연락도 없이 찾아가는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자신을 보고 어떤 말을 할까?
세레딕 경의 말은 진실일까?
싫다며 돌아가라고 하면 어쩌지?
망중한을 즐기는 와중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걱정은 점점 불어나기만 했다.
***
“가서 물 떠와!”
아침부터 멜라니아가 난리다.
“여기서 90km쯤 떨어진 곳에 레바스콘데 라고 불리는 호수가 있다. 고대에 신이 내려와서 목욕했던 물이야. 귀중하고 신성한 물이니 언젠가 내 주술에 쓰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빨리 가서 물 떠와!”
버나드는 기가 막혔다.
“장난해? 거기까지 언제 가라고? 잠이 덜깼나 이 마녀가!”
“라벤다는 뒀다 어따쓰게? 하루에 천리를 가는 라벤다를 타고 갔다오면 금방이지 않느냐!”
“오전에 멜리사 경과 만나서 회의도 해야하고 정오엔 샤를리나 님과 식사도 예정되어있다. 할 일이 태산이라고!”
“그건 니가 감당할 일이지 내 알바 아니다! 넌 약속을 지켜야한다 늑대야! 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내 소원도 하나씩 들어주는게 우리의 계약이었느니라!”
일행이 지켜보는 텐트 앞에서 버나드와 멜라니아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중이었다.
버나드는 바쁜 와중에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는 그녀가 답답했고 멜라니아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자꾸 우기며 그를 쪼아댔다.
“약속지켜! 안지키면 다음부터 네 부탁따위 안들어줄거다!”
“지금 쓸것도 아니면서 들고 다니기만 무겁게 왜 그딴걸 시키는거야!”
“필요한지 안필요한지는 내가 결정한다! 넌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면 그뿐인게야! 이게 우리의 약속이고 우리의 계약이니까!”
데보라의 친오빠 마크는 멜라니아에게 저주를 받을까 무서워 싸움을 말리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숨어서 지켜보는중이었고, 버나드의 하녀인 율리아는 걱정스런 안색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곁에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차라리 큰 일을 시켜! 내가 물이나 떠오는 잔심부름 하는 하인이 아니잖아!”
“몰랐느냐? 넌 전부터 내 하인이었어! 내가 널 살려줬어! 다 죽어가는걸 구해준 은인이라고! 알아서 기어야할 놈이 어디서 감히 대드느냐!”
“이 할망구가 마침내 돌았군! 당신이 구해줬던건 전에 전부 갚았어!”
“언제 갚았느냐! 난 받은 기억이 없는데!”
“젊음은 누구의 힘으로 되찾았지?”
“네놈이 다한건 아니잖느냐!”
“내걸 뺏어먹은거나 마찬가지다!”
양쪽 모두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결국 나선건 데보라였다.
“버나드가 많이 바쁘면 루로키나 삼남매를 시키면 안돼?”
“걔들은 주변 상황을 수집하러 멀리 떠났어.”
“아…… 그렇구나.”
데보라는 버나드와 멜라니아 사이에 끼어들어 버나드의 두 손을 맞잡고 애원하듯 달랬다.
“버나드? 누난 버나드의 편을 들어주고 싶지만 멜라니아 씨의 말도 어느정도 이해는 가. 최근에 진실의 거울을 준것도 있고 또 키클롭스를 사냥할때 힘을 보태줬잖니. 아직 우리가 못 갚았잖아. 이참에 갚으면 안될까? 잘 생각해보면 물떠오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잖아. 누나도 같이 가줄테니까 멜라니아 씨의 말을 들어주면 안될까?”
“저 마녀가 뭘 요구하든 안하겠다는게 아니야. 차라리 굵직하고 큰 일을 하면 몰라도 저 마녀는 날 보고 56마일을 달려서 고작 물을 떠오라잖아. 뭐 때문에 아침부터 고약한 심술을 부리는건지 몰라도 바쁜 사람한테 똥개훈련을 시키겠다는거야. 골탕 먹이겠다는거지! 어쩌면 나와 데보라의 사이를 질투해서 일부러 시키는걸수도 있어! 못된 마녀들은 늘 타인을 향해 질투와 시기가 심하지!”
“응응, 진정해 버나드. 누나를 위해서 목소리 좀 약간 낮춰줄래?”
“단순한 물이 아니다 망할 늑대야! 어디서도 못볼 귀중한 물이라고! 썩어빠진 녀석!”
“그 물이 진짜 있냐고!”
“있어 등신 늑대야!”
“할머니는 가만계세요! 제가 알아서 설득할게요!”
데보라가 다그치듯 말하자 멜라니아는 데보라를 향해 투덜거렸다
“내 외모가 지보다 어린데 어디서 할머니야 나쁜년. 나보다 늙어보이는게.”
멜라니아는 이년저년하면서 텐트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어지는 데보라의 목소리는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 같은 누나처럼 상냥함을 띠고 있었다.
“누나랑 같이 물뜨러 가자. 물만 떠오면 멜라니아에게 빚진걸 하나 없앨 수 있으니 잘됐잖니. 모처럼 우리 둘만의 낭만도 즐길겸.”
마크가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그, 그래! 두, 둘이 갔다와! 여긴 내가 잘 지키고 있을게! 멜리사 대장님 한테도 잘 말해놓을테니 걱정마라! 일개 무명 화가를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율리아도 재빨리 거들었다.
그녀는 높이 한 손을 들어올렸다.
“나리, 저도 갈 수 있어요!”
“있잖아 율리아 씨? 버나드는 내 여동생한테 맡기고 우린 여기나 잘지키고 있자고. 알았지? 커플 사이에 끼어들면 눈치없단 소리들어. 자, 자. 손 내려.”
데보라의 부드러운 숨결과 손길이 닿은 탓일까.
불같이 화를 내던 버나드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눈앞에서 데보라가 애원하듯 쳐다보니 계속 화를 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멜라니아는 기분 나쁜 마녀지만 데보라는 좋은 여자다.
그녀의 부탁을 내치긴 힘들었다.
“할 수 없지. 혼자 빨리 갔다올게. 데보라는 야영지에 남아있어.”
“아냐, 누나도 갈거야. 빨리 짐 챙길게.”
“괜찮아. 먼 길을 하루사이에 다녀올려면 라벤다를 재촉해야해. 라벤다가 워낙 빨라서 자칫하면 데보라가 떨어질지도 몰라. 안전을 위해서라도 나 혼자 다녀오는게 나아. 그게 훨씬 편하고.”
버나드는 텐트안에 들어가 있던 멜라니아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물 떠올테니까 하나 까. 진실의 거울을 까든지 키클롭스를 까든지.”
“큭큭, 키클롭스를 없던 일로해주지. 물은 여기에 담아오거라.”
멜라니아가 손바닥만한 보라색 가죽통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버나드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90km정도면 서둘러도 저녁 늦게나 오겠네. 도중에 피곤하면 야영할지도 모르니 안온다고 걱정하지마. 늦어도 내일 저녁까진 올거야.”
데보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심히 다녀와야해.”
허리에 칼을 차고 가벼운 여행자차림을 한 버나드는 데보라가 건네는 수통과 식량 주머니를 받아들고 곧바로 라벤다 위에 올라탔다.
이어 모두와 인사를 나눈뒤 야영지 밖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보면 황금색으로 보이지만 반들반들 윤기나는 아이보리색 털을 가진 라벤다가 초록 들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라벤다는 정말 빨랐다.
버나드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야영지 밖으로 나와있던 마크가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바람이다 바람.”
***
레바스콘데 라는 호수를 찾아나선지 거의 반나절을 허비했을때였다.
시야를 가렸던 울창한 나무들이 사라지고 마침내 훤히 뚫린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이 멋지게 드리워진 맑고 깨끗한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절경이군. 이쯤되면 마녀의 말을 믿어야 하나……”
고대에 신이 내려와 목욕을 했다더니 호수는 사람을 홀릴만큼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땅을 혼자만 만끽했다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온지 좀 됐는지 꺼져가는 모닥불과 근처 나무에 묶인 흰 말이 보였다.
말의 생김새를 보면 보통 비범한 말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저런건 귀족들이나 타고 다닐 말이다.
그것도 고위 귀족이.
씨가 아주 좋은 놈이였다.
모닥불 근처에 벗어놓은 옷가지도 보였다.
버나드는 버릇처럼 말의 주인이 어떤 인간인지 유심히 탐색했다.
“여자가 저런 옷을 입으면 이불을 입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야. 옷의 부피가 큰걸로 보아 여자는 아닌듯 하군. 키 크고 뚱뚱한 체격의 남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쯤 호수쪽에서 물살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려보니 호수 중앙을 가로지르며 여유롭게 수영을 하는 이가 눈에 띄었다.
먼거리라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가 나체라는 것은 알겠다.
거기다 체격도 큰 터라 대충 예상은 되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내였군. 어디 가문의 기사대장쯤 맡고 있으려나?”
관심을 끄기로 했다.
타인은 타인, 나는 나.
직업병 때문에 무심코 타인을 관찰했으나 지금은 그럴때가 아니다. 서둘러야했다. 제 할일만 하고 떠날 생각이다.
“서로 각자 할일 하자고. 무심히, 신경쓰지 말고, 쿨하게.”
버나드는 곧장 멜라니아의 보라색 가죽통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라벤다의 목을 축이게 한뒤 바로 옷가지를 벗어던졌다.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몸이 뻐근했고, 더군다나 풀냄새가 온몸에 베겼다. 그게 싫었다. 숨쉴때마다 풀냄새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냄새도 쫓을겸 목욕을 하며 숨 좀 돌리다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알몸으로 호수속에 뛰어들었다.
첨벙!
“아아, 시원하군.”
잠시나마 홀로 느긋이 수영을 하며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쉴때였다.
일부러 상대 근처에 가지 않고 호수 가장 자리에서만 헤엄치고 다녔지만 상대는 뭐가 불만족인지 이쪽으로 헤엄을치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대략 5미터 간격을 두고 멈췄다.
“……”
버나드는 일단 아무말없이 상대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물밖으로 얼굴만 나온 상태라 상대의 얼굴만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듯 했다.
짧은 은발머리는 물에 젖어 귓가에 척 달라 붙어있고 윤곽이 또렷한 턱을 가졌다.
코는 아담하다.
입술은 두툼하다.
눈매는 날카롭지만 이목구비를 한데 모아놓고보면 여성스럽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라고 단언하기엔 어렵고 중성미가 느껴졌다.
여자인가……?
아니, 남자?
아냐, 여자야.
아니아니, 남자 같은데.
버나드는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여자군.”
시선을 내려 투명한 물속을 들여다보니 풍만한 젖가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물고기 한마리가 순진하게 다가와 그녀의 큼지막한 유두를 뻐끔 뻐끔 쪼아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이 무심코 실소를 자아냈다.
상대에게 실례라 생각하며 웃음을 지우던 순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버나드의 뇌리에 뭔가가 번쩍하며 스쳐지나갔다.
‘그라나딘 왕국의 영걸, 베아트리스!’
그와 동시였다.
베아트리스가 물에 젖은 입술로 차갑게 물었다.
“(방금 왜 웃었지? 혹시 내 외모를 비웃은건가?)”
“(오해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변명하지마. 넌 방금 비웃었어. 아…… 그러고 보니 제국어를 할줄 아는군. 말이 통해서 잘됐다. 자, 솔직히 대답해라. 방금 왜 비웃었지? 너도 여자가 괴물처럼 덩치 큰게 웃기나?)”
베아트리스는 위압감을 조성하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이어 버나드를 마주봤다.
“(이곳에 널 도와줄 사람은 없다. 사실대로 말하면 살려주지. 허나 진심이 보이지 않을시, 이 맑은 호수에 목 부러진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그림도 나름 볼만하겠지.)”
버나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양팔을 들어올렸다.
“(성질이 꽤 사납군. 초면에 시비거는건 실례야. 외톨이 되기 딱 좋은 성격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