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40
버나드는 따끈한 차를 가져와 엘레나와 함께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레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듣겠다는 것 마냥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귀담아 들었다.
버나드의 이야기중 감옥에서 고문을 받으며 사지가 잘렸던 이야기는 둘째치고 엘레나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했던 것은 레아의 존재였다.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않던 사내를 위해 죽은 레아를 추모하며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마음을 왜 받아주지 않았나요? 살아있을때 잘해주셨어야지…… 흐흑.”
“뒤늦게 반성하며 그녀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버나드는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내가 원하는건 단 두 가지. 돈과 권력이 아니다.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과 왕궁에 잠들어 있는 그녀의 시신만 되찾으면 그뿐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왕을 몰아내기란 불가능해요. 큰일난다고요.”
“해야 돼. 합법적인 테두리안에서 그를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기에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신들과 백성, 그리고 역사에 반하는 일도 아니다. 왕족의 피가 흐르는 샤를리나 님과 널 이용해서.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끝나면 우리왕국은 새로운 왕을 갖게 될것이다.”
“일이 잘 풀린다면 그렇게 되겠죠…… 전하께서 분명히 블랙드래곤의 심장 반쪽을 가져오면 왕위계승자로 인정하겠다고 하셨으니……”
“너도 욕심나겠지? 왕의 자리가?”
버나드가 정곡을 찌르자 엘레나가 당황하며 급히 손사래를 친다.
“저, 전 몰라요! 생각해본적 없어요!”
“샤를리나님이 승리하면 난 샤를리나님을 지지할 것이고, 네가 승리하면 널 지지할 것이다.”
“주인님은요?”
“네 승리시, 왕좌는 네 차지야. 난 레아의 시신만 되찾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후 세상 어딘가로 떠날 생각이지. 권력을 누리는 생활은 이제 질렸어. 왕궁은 사람이 살곳이 아니야. 모두가 미친놈들이지. 정상인도 그곳에서 다 잃고 미쳐서 나와. 나처럼.”
엘레나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물었다.
“저, 저도 왕이되면 미칠까요……?”
“네 그릇에 달렸겠지. 욕망과 고통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왕궁에서 지내다보면 온갖 인간들이 다가와서 속삭이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자는 흔치않아. 지금의 프레드릭왕도 한때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자 마저 미쳤어. 곁에서 섬겼던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을 끝으로 버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목적은 제국으로 가는 것이다. 너도 마찬가지일터. 고로 우리의 목적은 같다. 그리고 샤를리나님께서 여황제를 설득하는데 실패하면 난 두 번째 후보로 널 내세울거야. 그렇게 알고 날 따르도록 해.”
“따르기 싫어도 따를 수 밖에 없는걸요. 주인님의 노예니까.”
엘레나는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밝게 웃었다.
“주인님이 무섭게 느껴졌는데 안심했어요. 레아님의 시신을 찾는데 저도 힘 닿는데까지 도와드릴게요. 샤를리나님을 제치고 왕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샤를리나님이 왕이 되면 네 노예 주박을 풀어주겠다. 또한 샤를리나님께 부탁드려 귀족 작위와 작은 영지를 받게 해주지. 네가 왕이 되든 안되든 손해보는 것은 없어. 어느쪽이든 네게 좋은 결과가 될거야.”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녀가 기쁜 표정을 짓는다.
“만약 제게 영지가 생기게 되면 그곳에 오셔서 오래도록 사세요. 레아님을 묻을 양지 바른 자리도 내어드릴게요.”
“……?”
“왜 절 그렇게 쳐다보세요? 무서워요.”
“왜 그런 말을 하지?”
“전 친구라고 부를 사람도 없는데다 배운것도 없고 멍청해서 주변에 주인님처럼 나랏일을 하시던 위대한 분이 필요해요! 그래야 영지가 잘 돌아갈테니까요!”
“웃긴 여자군.”
“웃긴가요? 전 진심이에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고요! 제게 큰 돈이 생기면 주인님을 먹여살리겠어요. 그러니 절 지켜주세요! 전에 고용했던 용병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돈만 날렸죠! 물론 그 덕분에 주인님과 만날 수 있었지만!”
엘레나는 그간 사람의 정에 무척이나 굶주려있던듯 금세 경계를 허물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빛났고 입가엔 한가득 웃음꽃이 피어났다.
“주인님처럼 죽은 연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남자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봐요. 순정남이잖아요!”
“말을 바로해, 레아랑은 연인관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날 보고 순정남이라니 지인들이 들으면 배꼽빠지게 자지러지겠군. 차라리 괴물이라고 표현해라.”
버나드는 연인이라는 단어가 낯간지러웠다.
“레아랑 연인다운 짓같은건 해본적도 없어. 그녀가 살아생전에 우린 동료사이였을 뿐이다. 착각하지마.”
“그녀를 사랑하잖아요? 아까 분명히 사랑한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죽은 이후에 생긴 감정이지.”
갑자기 씁쓸한 기분이 퍼져나갔다.
“얘기는 여기까지다. 더이상 말하지마.”
버나드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그녀를 지나쳐 일행들이 자고 있는 모닥불쪽으로 걸어갔다.
몇발자국 걸었을때 그가 뒤돌아서 말했다.
“근데 넌 형제자매들 중에 유독 프레드릭왕을 많이 닮았군.”
“짜증나나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렇게 태어난걸요.”
“……”
“아, 아니지. 아니예요. 잘못보신거겠죠. 난 우리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어요. 머릿결, 입술, 피부, 신체 구석구석 전부다요. 금발 머리색만 전하를 닮았다고 인정할래요. 우리 엄마는 머리가 붉거든요.”
“그 부분이 가장 예쁘게 보이니 문제지.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텐데 네 금발머리는 아직도 윤기가 반질반질 빛이나는구나.”
“당연하죠. 머리가 기름으로 떡졌겠죠!”
“기름을 말하는게 아니야. 날 뭘로 보는거냐.”
버나드는 다시 앞을 보며 멀어져갔다.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넓은 등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중에 내 영지에서 살기 싫다는건가……”
***
식당안은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여행자 차림의 팔척장신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서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하던 말을 끊고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뚜벅 뚜벅.
베아트리스는 판금 장화를 신은 발걸음으로 당당히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그녀가 나타나자 식당안은 마치 언제 떠들었냐는듯이 고요했다.
몇몇은 베아트리스의 외모를 흉보며 쑥덕거렸다.
“계집 덩치가 왜 저래? 저래서야 시집이나 가겠어?”
“옷 보니까 우리 왕국 사람이 아닌것 같은데? 외국인 아냐?”
“가서 물어봐.”
“미쳤냐? 처맞으면 어쩔라고? 어메 저 손 크기봐. 저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장대한 기골을 가진 낯선 이방인을 모두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가운데, 주인이 난처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에…… 저, 저기, 뭘 시키시겠습니까?”
“XXXXXXXXXXXXXXXXXXXXXX?(술단지 한통과 청어구이 이십마리 되나?)”
“네? 혹시 다른 나라분이십니까?”
식당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베아트리스가 물었다.
“XXXXXXXXXXXXXXXXXXXX?(식당 종업원 중에 제국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없는건가?)”
그녀는 자신의 모국어인 그라나딘어가 아닌 제국어를 사용중이었다.
제국어는 여러 왕국에서 세계 공용어로 쓰이고 있었다.
“이분 뭐라는건지 도통 모르겠네. 대체 어디 사람이야?”
“XXXXXXXXXXXXXXXXXX(메뉴판 같은건 없나? 메뉴판, 메뉴판)”
“계속 자기 나라말만 하는데 뭔말인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흐음 어쩐다?”
지켜보고 있던 손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남의 왕국에 왔으면 남의 왕국 말을 어느 정도 배워오는 예의가 있어야지. 쯔쯔.”
“어이, 주인장. 저거 내가 듣기에 제국 사람 같은데?”
“제국? 그렇게나 먼 곳에서 왔다고?”
“XXXXXXXXXXX(메뉴판! 메뉴판! 메.뉴.판!)”
베아트리스는 양손짓으로 열심히 사각형을 그렸다.
하지만 주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얌전히 나가주면 좋겠는데…… 흠흠. 이봐, 아가씨. 그러니까 뭐가 먹고 싶냐고?”
“XXXXXXXXX(메.뉴.판!)
“에이 답답해서 안되겠다. 나 따라와봐! 일어서! 일어서!”
주인은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 후 그녀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그리하여 베아트리스는 부엌에 진열된 음식재료들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문했다.
잠시 후 자기 자리로 돌아와 주문한 음식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중이었다.
동네 건달로 보이는 청년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듣자하니 엄청난 여자가 이곳에 있다며?”
다섯 청년은 장난스런 웃음기를 머금고 실내를 둘러보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는 베아트리스를 발견했다.
“쟨가 보네.”
“우와 덩치봐라.”
“은발에 피부도 시커먼한게 야만인같이 생겼어. 야만녀네 야만녀.”
“저런 년들이 조임도 졸라 죽인다구. 자지가 짜부러질걸.”
“낄낄, 가보자.”
청년들은 주변에서 의자를 가져와 베아트리스가 앉은 테이블에 허락도 없이 둘러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일부 손님들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식당을 떠났다.
“저 새끼들 또왔네…… 여행객만 전문으로 터는 새끼들…… 저 망할 놈들 같으니 쯔쯔…… 에고 이래나저래나 난 어서 텨야겠다.”
자신의 테이블에 양해도 없이 합석한 청년들을 보며 베아트리스의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XXXXX?(내게 할말이 있나?)”
“이년 완전 내 취향이야. 근육 좀 봐.”
“우리가 면전앞에서 대놓고 욕해도 못알아듣겠지? 릭, 이 걸레년한테 우리 다섯명중에 누가 제일 맘에 드냐고 물어봐. 선택한 놈과 하룻밤 자게해준다고해.”
“왜 한놈이야 돌려먹어야지 병신아.”
다섯 청년중에 유일하게 릭이라는 청년 하나가 제국어를 구사할줄 알았다.
릭은 친구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최대한 예의바른척 말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난 릭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죠?)”
“(그라나딘 왕국에서 왔다. 제국어를 잘하는군.)”
“(3년전, 영주님의 명령을 받고 먼나라인 제국의 작은 항구에서 배를 탔었죠. 그때 어부 일을 하면서 배웠습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죠? 여긴 어찌 오게 되셨습니까?)”
“(기사다.)”
“(아하, 기사시군요. 혹시 귀족작위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냥 방랑기사?)”
“(귀족이다.)”
릭은 곧바로 손뼉을 마주치며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이년 귀족기사란다.”
“와우 죽이는데, 수중에 가진 것도 많겠네. 말과 갑옷만 팔아도 얼마야.”
“좋았어. 오늘 아주 큰 돈 벌겠군. 근데 기사면 강하단 소리잖아?”
“그래봤자 계집이지. 우리 다섯을 어떻게 이겨? 릭, 저번에 쓰다남은 수면제 가루 갖고 있지? 같이 술마시는척하면서 타자고. 늘 그랬듯이.”
“이년 피부처럼 갈색 보지일지 궁금하군.”
“돈만 뜯는게 아니라 진짜 먹을려고? 니들 비위도 좋다. 눈 크게 뜨고 잘봐, 덩치가 우락부락한 키 큰 드워프처럼 생긴 년이 우리 앞에 앉아있다구. 되레 우리가 잡아먹힐 수도 있어. 이년의 구멍을 메울려면 페니스 다섯개로도 부족할거라고.”
청년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가서 자랑할만한 놀라운 경험이 될지도 모르지. 예쁜 계집을 원하면 당장 창녀촌으로 꺼져버려. 우린 평생 한번 있을까말까한 색다른 맛을 즐길테니까. 릭, 어서 야만녀한테 한잔하자고 꼬셔봐.”
릭이 친근하게 웃으며 베아트리스를 마주봤다.
“(이 촌동네에 외국인이 찾아오다니 신기하네요. 오래 붙잡지 않을테니 잠깐 대화나 나누시죠. 저희가 주변 지리 사정도 밝고 하니 혹시나 궁금한게 있음 뭐든 물어보세요. 술은 저희가 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