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9
루로키나 거지 삼남매가 그를 돕는다.
각자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키클롭스 주위를 동분서주하며 짐승보다 빨랐다.
마녀 멜라니아 역시 손을 거들었다. 그녀는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엘레나의 손끝에 상처를 내 흘러나오는 피로 무기에 영광의 힘이 깃들게 해주었다.
왕족의 피는 귀중한 마법재료에 속했고, 장비의 힘을 보다 강력하게 해주는 영험한 힘이 있었다.
버나드는 마검의 힘을 개방해 전력으로 싸웠다.
자신과 혼연일체가 된듯한 마검이 주입해주는 힘은 엄청났다.
그 와중에 뜻밖의 인물도 함께했다.
그 인물은 바로 클레어였다.
최근들어 버나드와 은근히 친해진 클레어는, 키클롭스를 함께 사냥해달라는 버나드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의문을 품거나 거절하지 않고 혼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까지 따라왔다.
“왜 키클롭스를 사냥하는지 모르겠지만, 늘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버나드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싶어. 알았어, 비밀을 지켜줄게.”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그녀의 화려한 칼놀림에 거대한 키클롭스의 몸 이곳저곳이 벌집이 됐다.
그럼에도 마물의 강인한 생명력은 그녀의 맹렬한 공격에도 끄덕없다.
클레어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뒤로 물러서면 빈 자리는 어김없이 루로키나 거지 삼남매가 메웠다.
그들은 정신없이 키클롭스를 괴롭혔다.
싸우는 모습에서 감히 인간이라 말하기가 어렵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뾰족하게 자란 손톱, 두 눈동자에서 붉게 발하는 빛, 아울러 너무나 창백해 푸르스름한 피부, 때론 박쥐로 변신하는 재주까지.
눈앞의 키클롭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마물의 특징을 그대로 루로키나 삼남매에게서 엿볼 수 있었다.
전투는 버거웠으나 두려워하는 자들은 없었다.
물론 실제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항상 냉정함과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버나드의 시기적절한 리더쉽이 클레어와 루로키나 삼남매를 더욱 안정케 만들었다.
“루! 샨! 뒤로 돌아가!”
“그라요!”
“멜라니아! 마법이다! 놈의 얼굴을 타격해!”
“알아서 할테니까 명령내리지마 늑대야!”
“클레어 지금이다! 둘이 양쪽에서 시선을 분산시킨다! 뛰어!”
“알았어!”
“딘! 넌 놈의 가랑이 밑으로 가!”
“나만 믿어불지라!”
위태로운 상황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한껏 힘이 들어간 버나드의 중저음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흥분을 억누르고 내내 평온을 유지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담겨있었다.
만약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가 클레어, 멜라니아, 루로키나 삼남매를 지휘했다면 강력한 키클롭스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진작에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냉정한 판단력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깃든 명령은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밤의 늑대들 시절때부터 터득해온 버나드만의 능력이었다.
그 숙달된 능력 덕분에 불리한 판세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이윽고 키클롭스의 거대한 체구가 뒤로 넘어가며 쿵소리와 함께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대로 움직임이 멈췄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마침내 놈을 쓰러뜨린 것이다.
워낙 적은 인원이었기에 공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나 긴 노력 끝에 얻은 그 기쁨이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환호성을 내질렀다.
“잡았다! 잡았시라 마스터울프!”
그때까지 숲속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데보라와 엘레나도 뛰어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축하해 버나드!”
“납치된 저는 왜 기뻐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았으니 다, 다행이랄까요.”
평소 감정없는 사람처럼 보이던 클레어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밝게 웃으며 크게 기뻐했다.
“이겼다……”
자정즈음부터 시작했던 전투가 끝났을때, 어느덧 해가 떠올라 아침을 알리며 그들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후 벌어진 광경은 상쾌한 아침햇살과 달리 그야말로 잔인하기 그지 없었지만……
“흐음, 저년 것도 이제 마지막이군. 늑대를 시켜 새로운 처녀혈을 구해야겠어.”
멜라니아는 키클롭스의 커다란 고환을 칼로 찢어,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해온 데보라의 처녀혈을 정액과 섞어 게걸스럽게 마시며 점점 쇠퇴해가던 미모의 젊음을 한층 되찾았고, 버나드는 키클롭스의 가슴팍을 찢고 벌려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심장을 뜯어 그 자리에서 날 것으로 먹어버렸다.
더불어 루로키나 삼남매는 가장 맛있는 부위를 사자들에게 양보한 하이에나들 같았다.
삼남매는 주변을 기웃거리며 그나마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부위의 살점을 뜯어 행복한 표정으로 먹어치웠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대며 야무지게 씹어먹는 그들의 입가는 피로 얼룩져 그야말로 살인귀 같은 모습이었다.
“우엑!”
엘레나는 비위가 상한 나머지 멀찌감치 떨어져 헛구역질을 하느라 정신없었고, 데보라는 늘 익숙한 풍경인듯 노래를 흥얼거리며 미리 준비해온 음식들을 돗자리 위에 펼쳐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직 버나드만을 멍하니 보고 있던 클레어는 담담한 눈빛으로 서있었다.
“신기해……”
내키지 않는듯 오만상을 써가며 키클롭스의 심장을 반쯤 먹어치운 버나드는 어느새 하얀 고치속에 들어가 있었다.
클레어는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고, 놀라운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는 중이었다.
“이렇게 된거였구나……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게……”
부우욱!
이윽고 버나드가 고치를 찢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금 세상으로 나온 버나드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이전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 높은 나무처럼 훌쩍 자라버린 키, 한눈에 봐도 무쇠처럼 단단해보이는 허벅지, 말그대로 적당한 근육과 늘씬함을 자랑하는 성인 남성의 몸 그것이다.
“꺄악! 어쩌면 좋니! 너무 멋있어졌잖아! 벌써부터 밤이 기대돼!”
데보라는 음식을 준비하다 말고 황홀한 비명을 내질렀고, 엘레나는 놀라워하면서도 버나드의 번들거리는 나체를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는지 급히 시선을 돌렸다.
클레어의 시선은 무심코 버나드의 하체에 가있었다.
최근 그녀의 주관심사가 버나드의 성기라서 그런걸까.
클레어는 버나드가 변한 모습을 신기해하면서도 그의 성기를 뚫어지라 쳐다보게 되었다.
꿀꺽.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무언가 묘하게 흥분되었다.
‘본모습을 감춘채 덜렁거리는 저것도 커졌다 작아졌다……’
전과 달리 특이했던 점은, 예전에 키클롭스를 잡아먹었을땐 20대 청년의 모습까지 자랐다면 지금 버나드의 모습은 그의 본모습 그대로 30대 초반으로 되돌아왔다는 것.
그 특이점에 대해 멜라니아는 아무렇지 않아하며 이렇게 평했다.
“그때의 키클롭스가 좀 어렸나보지. 이번에 잡은 녀석은 오래 살아 널 더 자라게 해줬나보구나.”
“한 놈 먹으면 조금 크고 두 놈 먹으면 더 크고, 애당초 마리수를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거군. 오래 산 놈일수록 내 몸에 좋다 이건가.”
한편 키클롭스의 피 냄새를 맡은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왔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외딴 산속.
격렬한 전투로 인해 상당한 체력을 소모한 일행들은 회복을 위해 데보라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섭취하며 한동안 머물다 가기로 정했다.
하늘의 밝은 태양과 뜨거운 열기를 자아내는 모닥불,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버나드의 마검이 있는 한 마물들은 쉽사리 접근해오지 못할 것이다.
인간들이 방심하기만을 바라며 주변에서 울어대기만할뿐.
식사 후 일행들은 교대로 불침번을 서가며 세 시간 정도 낮잠을 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가운데 이곳에서 우연히 만나게된, 일찍이 키클롭스를 사냥하기전 버나드가 소개한 사람들중에 유난히 그들과 어울리지 않던, 곱상한 외모와 더불어 왠지 모를 비범한 분위기를 풍기는 엘레나가 클레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사람, 누구?”
미리 준비해왔던 성인옷을 막 챙겨입은 버나드에게 다가가 그렇게 묻자 버나드는 별일 아니라는듯이 간단히 대꾸했다.
“내 노예다.”
“어디 출신?”
“태어날때부터 고아였지. 그녀 본인도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몰라. 나이도 모르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왜 같이 안다니고 따로 다녀?”
“너 답지않게 질문이 많군.”
버나드의 목소리에 조금 날이 서있었다.
그는 클레어의 두 눈을 마주보며 말을 돌렸다.
“얼른 잠이나 자둬. 지금 불침번은 나다.”
버나드는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모닥불 주변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속에 누워있던 엘레나에게 다가간 그는 곧 그녀를 데리고 멀치감치 멀어졌다.
“……”
그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던 클레어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가 이내 풀밭에 드러누웠다.
맑고 화창한 하늘이 올려다보인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걸까……”
현재 그녀의 마음은 버나드와 더 얘기하고 싶었다.
자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나 몸의 회복을 위해 강제로라도 자야했다.
어쩔 수 없이 잠을 청했다.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버나드와 마주보고 서있던 엘레나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제 몸을 깜싼채 벌벌 떨었다.
버나드는 잠시 그녀를 무표정으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가 두렵나?”
“아, 아뇨,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주인님이 두렵지 않, 않아요……”
“거짓말 하지마. 두렵잖아. 왜 솔직하지 못하지?”
“죄, 죄송합니다!”
꾸중을 들을게 두려웠던 엘레나는 몸을 움츠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버나드는 그런 그녀의 금발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겁내지마라. 난 널 다치게 하지않아. 그리고 누구도 널 다치게 할 수 없어. 나의 중요한 카드니까. 내가 지켜주겠다.”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다정한 손길과 그의 말에 놀란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똑바로 쳐다봤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절 지켜주신다고요?”
버나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먼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에 악몽을 꾼적 있나?”
“글쎄요. 꿔도, 꿈에서 깨고 나면 잘 기억이 안나서……”
“난 늘 악몽을 꾸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몇달째.”
“시, 싫으시겠어요.”
“사실 그게 악몽인지 좋은 꿈인지는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오는 꿈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나오면 좋은 꿈 아닌가요?”
“……”
먼곳의 지평선을 바라보던 버나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수 있나?”
엘레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죠. 전 당신의 노예니까요.”
“고맙다.”
버나드는 그녀와 가볍게 눈을 맞춘 후 다시 먼곳을 바라봤다.
“…지나가버린 인연을 잡지못한 아쉬움과 후회는 뒤늦게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자를 향한 저주인가 아니면 인생 한때의 찬란한 추억인가. 이제와 그 인연을 대신할 것은 없는 것일까 그때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는 것일까.”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어려워요.”
“내 머릿속에 계속 멤도는 말이지. 내가 지어낸 말이다.”
“혹시 그분과 이별하셨나요? 그래서 악몽인가요?”
“사랑의 이별 따위가 아니다. 그녀를 구하지 못한 나의 후회로 점철되어있지. 꿈에 그녀가 나와 기쁘지만,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 이것은 악몽인가 아니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어 좋은 꿈인가?”
엘레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보다 대답했다.
“슬픈꿈이라고 해야될 것 같아요. 맞아요, 그건 슬픈꿈이에요.”
“슬픈꿈……”
버나드는 긴 침묵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난…… 슬픈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널 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왕의 피를 물려받은 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해.”
난데없이 엘레나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그의 모습은 갑자기 나온게 아니다.
철저한 계산하에 나온 것이다.
버나드는 제국으로 가기 전에 엘레나를 먼저 내 사람으로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설령 그녀가 진심으로 내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목적 달성을 위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야했다.
현재 그 씨앗을 뿌리는 작업중이다.
사람을 구슬리는데 여러 방법이 있다.
그 가운데 돈이 가장 편리하지만 그래서는 사람의 진심을 얻지 못한다.
감동.
슬픈 사연에서 전해지는 감동이야말로 타인의 경계를 허무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