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8
“버나드 라는 소년은 어렸을때부터 고아로 자라 배경은 자랑할만한게 못되나 현재 레온 왕국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가문인 아킨테 가문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중용되어 당주인 미셸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미셸로 하여금 그 아이를 양자로 삼으라는 제안을 해 우리 베아트리스 경과 혼인을 시키면 아킨테 가문과 우리 왕국의 영걸이 맺어지는 셈이니 세상에 내보이기도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흐음, 나쁘지 않은 이야기로군. 특히 세레딕, 자네의 안목이라면 믿을만하지. 장래가 유망해보인다는 레온 왕국의 그 소년과 우리 왕국의 영걸 베아트리스가 맺어진다면 장차 두 왕국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옥좌에 앉은 왕은 길게 자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흡족해했다.
“더욱이 아킨테 가문의 양자가 우리 왕국과 긴밀한 관계가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 공국과 다름없는 힘을 가진 가문이니까. 당주인 미셸과도 연이 닿을 좋은 기회군. 그들의 힘을 업고 레온 왕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걸세.”
세레딕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베아트리스 경이 과연 혼담제의를 받아들일지가 문제입니다. 변방에서 돌아오거든 저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왕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베아트리스의 의견이 무슨 소용있나. 왕국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있어. 우리끼리 바로 진행함세.”
“그래도 우선 당사자들이 혼인할 마음이 있어야 일이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껄껄, 자네도 참 무르군. 두 왕국의 미래를 위해 이보다 위대한 일이 어딨겠는가. 그리고 이처럼 큰 일에는 사랑따위 필요치 않네. 나도 우리 왕비와 사랑해서 결혼한게 아니야. 대업을 위해 윗어른들께서 강제로 시키신 것이지. 부부의 사랑과 정이란건, 살다보면 어련히 생기는걸세. 한 침대에 누워 살을 부닥치다보면 없던 정도 저절로 생기는게야. 이미 알만한 사람이 무슨 사랑 타령인가 껄껄.”
알현실에서 대화를 나눈지 얼마되지 않아 한 기사가 안으로 들어와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변방으로 출정을 나갔던 베아트리스 경이 돌아왔습니다!”
세레딕은 그 즉시 왕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작별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
세레딕은 이틀이 지난뒤에야 베아트리스를 만났다.
갓 원정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휴식을 주고 편안하게 만나기 위해서였다.
햇살이 따뜻한 오후, 왕궁 정원의 정자로 그녀를 불렀다.
세레딕이 현역으로 일할 당시 베아트리스는 야전사령관인 그의 곁을 지켰었기에 두 사람은 사제지간처럼 친분이 깊었다.
아무 부담이 없었던 베아트리스는 순순히 나와주었다.
영걸인데다, 그 덕분에 왕궁이 집앞마당처럼 편했기에 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등장한 그녀는 옷이 팽팽할 정도로 꽉낀 근육을 자랑하며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세레딕을 마주보며 편히 의자에 앉았다.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나중에 나처럼 오래 사는 비법을 담은 책을 쓸 생각이야. 자네도 한권 선물해주겠네.”
세레딕의 넉살에 베아트리스가 웃었다.
“꼭 부탁드립니다.”
세레딕은 그녀와 기분좋게 잡담을 나누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적당하다 싶을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먼 곳에서 자네에게 딱 맞는 배필을 찾았네.”
돌연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베아트리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아, 알아. 자네가 결혼 얘기에 얼마나 민감한지. 진정하고 우선 들어나보게.”
“결혼 얘기는 이제 지겹습니다.”
“평생 혼자 살고 싶은건 아니잖나.”
“혼자 살 수 있습니다.”
“대는 이어가야지. 자네를 칭송하는 모든 이들이 바라는 일일세. 자네의 좋은 혈통이 끊기는걸 아무도 바라지 않아.”
“더는 상처받기 싫습니다.”
그동안 베아트리스는 유명 귀족의 자제들과 혼담이 많았으나 자식들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의 의지로만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상견례 당일 키 190이 넘는 베아트리스의 장대한 장신과 터질듯한 근육질 몸을 보고 기겁하며 놀라 도망가는 사내들이 많았다.
약혼녀의 몸매가 갸날픈 청초한 여인이길 소망했던 그들은 하나같이 처음 마주한 베아트리스를 보고 기골이 장대한 사내대장부 또는 무시무시한 검은 악마를 떠올렸다.
반면에 부모들은 베아트리스가 덩치가 크건 말건, 성격이 사내 같든 아니든 오로지 그녀의 남다른 혈통과 유명세, 능력만을 봤기 때문에 혼담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하지만 귀족 가문의 사내들은 모조리 그녀와 결혼하기 싫다며 완강히 거부했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러길 수년, 결국 베아트리스는 그만 혼기를 놓쳐버렸다.
여러 세월동안 그녀 또한 상처를 많이 받았다.
간혹 들어오는 혼담마저 먼저 거절할 정도로 이젠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었다.
“세레딕 경, 불필요한 일을 하시는군요. 그만 됐습니다. 잘지내시는지 확인했으니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베아트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세레딕이 돌연 말했다.
“그 사람은 자네가 좋다더군. 빨리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
그 말이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바로 떠나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절 못봤으니 당연하죠. 누구나 황홀한 상상을 합니다. 잔인한 현실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기전까지는.”
“아닐세. 내가 확실히 캐물었어. 여자 답지않게 키가 무척 크고 덩치도 우락부락한데 괜찮겠냐고. 그러니까 자기는 좋대. 안길 곳이 넓어서 좋다지 뭔가.”
“……”
베아트리스는 아무 말이 없다.
눈치를 보니 분위기가 좋다.
그렇게 생각한 세레딕은 조용히 침을 꿀꺽 삼켰다.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서로 좋든 싫든 대충 둘러대서 일단 만나게나 해보자고,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자네 같은 여자를 만나는게 평생 꿈이었다지 뭔가. 엉뚱하게도 힘센 여자한테 잡혀사는게 꿈이래. 사내치곤 참 웃기지?”
“안믿습니다. 그리고 전 덩치만 이렇지 사내를 잡지 않아요. 만약 배우자가 생긴다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도 상냥하게 잘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겉보기에 귀엽진 않겠지만요. 아무튼 절 이상하게 말씀하는건 삼가주십시오.”
“믿네, 믿어. 자네처럼 여자중의 여자가 어딨겠는가. 내가 장담한다네. 자네는 최고의 여성미를 가진 여자야.”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베아트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요?”
“응? 더 칭찬해달라고?”
“아뇨, 그거말고요.”
베아트리스는 딴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새침하게 물었다.
“그가 또 뭐라고 했죠?”
“아아, 그 친구가 뭐라고 했냐면……”
세레딕은 속으로 긴장한 채 입술에 침을 바르며 좋은 말만 술술 늘어놓았다.
사실 사제지간처럼 가까이 지낸 사이라고는 하지만 베아트리스 곁에 있으면 늘 부담스럽다.
늙어 왜소한 자신보다 월등히 큰 체격이 풍기는 위압감은 실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
그녀가 따귀만 날려도 목이 완전히 돌아가 그대로 즉사할지도 모른다.
“……등등, 애는 낳을 수 있을만큼 낳자고 하더구만!”
“정말요?”
“그렇다네!”
“으음.”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어디 아프거나, 가난하다거나,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날 좋다고 하는건 아닙니까? 절박하거나 미쳐서 말이죠.”
“어허! 절대 그럴 일은 없네! 그는 말이지 딸 밖에 없는 아킨테 가문의 장자가 될 사람이야.”
“아킨테? 아킨테라면……”
“레온 왕국의 아킨테가 맞네. 어떤가? 이래도 내가 별볼일 없는 친구를 소개시켜준것 같나?”
“그 유명한 가문이라니……”
베아트리스는 내심 감탄하는 눈치였다.
세레딕은 기세를 더욱 밀어붙였다.
“더군다나! 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친구가 말이지. 사실 자네보다 나이가 한참 어려. 아마 열살 이상 차이나는 것 같던데.”
베아트리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성을 냈다.
“역시 그랬군요!”
“뭐, 뭐가?”
“갓난 아기랑 결혼하라고 하시는거잖습니까! 애기가 여자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화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아닐세!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게나! 그 친구는 십대 청년일세!”
“십대 청년이요……?”
청년이란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베아트리스의 기세가 금세 한풀 죽었다.
세레딕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우선 앉게나. 앉아서 이야기하지. 키 큰 자네가 서있으니까 햇빛을 다 가려서 어둡네.”
베아트리스는 순순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게나 젊은 사람이 절 좋다고 했다고요?”
“그렇다니까.”
“믿기지 않는군요.”
세레딕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세상엔 믿기 어려운 일들이 많지. 그리고 다양한 사람이 있고.”
“이름이 뭔가요?”
“버나드라고 하네. 아킨테 가문의 소년기사야. 그 아이와 알고 지낸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워낙 능력이 출중해 내 눈에 들었지. 반드시 자네와 엮어주고 싶었어.”
베아트리스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살짝 미소가 번졌다.
“소년기사라……”
“나이가 어려 비록 키는 작지만 얼굴도 잘 생겼고, 나중에 더 크면 훌륭한 꽃미남이 될걸세.”
“키가 어느 정도 되는데요?”
“자네보다 한참 작아. 한 이만큼? 170도 안될걸?”
세레딕은 말을 마치자마자 짐짓 음흉하게 속삭이듯 다시 말을 건넸다.
“다른 여자가 서방으로 삼기 전에 자네가 얼른 낚아채가란 말이야. 어차피 자네보다 작은 사내들 천지인데 어린게 무슨 소용인가?”
사실 베아트리스는 건장한 체격답게 성욕도 많고 그만큼 다급한 형편이라 적당한 배우자면 아무나 좋았다.
그러나 좀 전까지 해오던 분위기가 있어 손바닥 뒤집듯 헤헤 거리기엔 뭔가 꺼림칙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고 말씀드릴게요. 근데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죠? 아킨테 영지에서 생활하나요?”
세레딕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아킨테 가문 사람들과 제국으로 향하는 길일세. 미셸의 딸인 샤를리나와 같이 다니고 있을게야.”
“알겠습니다. 그럼 또 뵙도록 하죠.”
“잘 생각해보게나.”
베아트리스가 떠나는걸 세레딕은 말리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이미 결과를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푸르른 새벽.
여행자 차림으로 말을 타고 급하게 왕궁을 떠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베아트리스였다.
그리고 세레딕은 탑에 뚫린 창문으로 홀로 먼 길을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자네의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만. 겉으로는 싫은체 하면서도 얼마나 결혼이 하고 싶었으면……”
그는 다시 침대에 누우며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부탁함세 버나드. 남은건 자네에게 달렸어.”
세레딕은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를 상상했다.
베아트리스와 버나드가 잘되어, 두 사람이 함께 왕궁에 들어오는 광경을.
하지만 그가 단 하나 몰랐던게 있었으니, 그가 아는 버나드는 소년 버나드뿐이라는 것.
얼굴도 모르는 연인을 찾아 먼 길을 떠난 베아트리스 또한 그에게 들은 얘기라고는 오로지 버나드가 소년일때의 모습뿐이었다.
같은시각.
벌써 아침이 온 이웃나라 레온 왕국.
버나드는 다시 성인이 되기위해 키클롭스 사냥에 몰두하는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