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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7 (136/200)



〈 136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7

버나드는 한참을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동료들이 있는 텐트로 걸어갔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마크와 데보라, 하녀 율리아, 멜라니아가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손으로 쥐고 있던 데보라가 버나드를 발견하고는 밝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이리와서 앉아.”

버나드는 대충 거울을 던져놓고 데보라 곁으로 가서  옆에 앉았다.
그러자 마크가 대뜸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야, 버나드. 내 여동생  서른이 다 돼간다. 언제까지 노처녀로 살게 만들거냐? 일은 일이고 우선 식부터 올리지 그러냐?”
“어머, 오라버니도 참. 마땅한 장소도 없고 아는 사람들도 없는데 여행길에 누가 식을 올려요?”
“그냥 조촐하게 치르면 되지  더 바라?  그러다 버나드가 딴맘 먹으면 어쩔려고 그래? 그대로 인생 망치는거야.”
“서슴없이 망언을 내뱉는 오라버니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네요. 호호.”

율리아는 따뜻하게 데워진 차를 버나드에게 건넸다.

“나리,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고맙다.”
“이놈 늑대야, 거울을 빌려준 값은 뭘로 치를거냐?”
“당신이 생각해서 알려줘. 정상적인걸로. 말 같지도 않은 얘기하면 안들어줄거야.”
“네놈은 결정할 권리가 없어. 내가 시키면 무조건 해야되느니라.”

버나드를 비롯해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둠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백검대장 멜리사였다.

‘버나드 경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수야 없지.’

평소 버나드의 정체를 수상히 여기던 그녀는 진실의 거울을 눈독들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저주를 내린 마녀 멜라니아 님과 잘 지내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블레어 공이 가짜란걸 밝힌 과정이 너무나 이상해. 죽은 하녀와의 관계도 그렇고 무언가 앞뒤가 안맞는 느낌이란 말이지. 자세히 캐물어보면 으레 정보원들이 알려줬다는식으로 둘러대기만 하고……’

멜리사의 시선은 텐트 앞에 놓인 잡동사니속, 진실의 거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거울만 있으면……! 그의 출신지라든지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거야.’

굳게 다짐한 그녀는 버나드와 그 일행들이 대화를 나누느라 한눈을 판 틈을 타 신속히 어둠속에서 빠져나와 재빨리 거울을 낚아채고 다시 수풀속으로 사라졌다.
거울을 손에 쥔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휴, 예쁜 거울 같으니.’

거울을 아기다루듯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리고 저멀리 앉아있는 버나드를 비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울아 거울아, 저 키 작은 소년의 정체를 내게 알려주지 않겠니? 어서 알려주려무나. 저 소년의 정체가 무엇이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속삭이며 거울에게 물어보았으나 기대와 달리 거울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거울아 거울아, 버나드 경의 정체를 빨리 알려줘.”
“……”

몇번이나 재차 물어봐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거울은 침묵했다.

“왜 이러지? 고장났나?”

멜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울을 툭툭치고 세차게 흔든 뒤에 다시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혹시 자고 있니? 잔다면 잠깐만 일어나볼래? 저쪽에 앉아있는 소년의 본명이 뭐니? 버나드가 맞아?”
“……”
“왜 안되는거지?”

멜리사가 실망하며 고민하는 사이 저쪽에서 버나드의 웃음이 들려왔다.

“갑자기 왜 웃어? 누나 얼굴에 뭐 묻었어?”
“아냐, 아냐, 아무것도. 그냥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무슨 생각인데? 알려줘.”
“그런게 있어.”

버나드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슬쩍 수풀쪽을 쳐다봤다.

‘멜리사 경이 여기까지 뒤따라 올줄이야. 평소 그녀답지 않아서 재밌군.’

버나드는 이미 오늘 오후부터 멜리사가 자신을 미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몰래 뒤쫓아오는 그녀의  눈빛이 마치 굶주린 사자마냥 진실의 거울을 향해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멜리사 경, 안타깝지만 늦었어.’

그녀가 한가지 모르는게 있었다.
진실의 거울은 더이상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곳에 오기전 버나드가 바위에 걸터앉아있을때의 일이었다.
버나드는 거울이 나중에 말썽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화근을 잘라낼 계획이었다.

다행히도 거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멜라니아가 말하길, 진실의 거울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수명이 줄어들어 언젠가는 거울에 깃든 힘이 사라지며 세상 어딘가의 다른 거울로 옮겨붙는다고 하였다.
멜라니아가 갖고 있던 거울은 일찍이 수명이 얼마남지 않은 상태였고, 버나드는 남은 수명을 빠르게 줄이기 위해 반복해서 거울의 능력을 사용했다.

“거울아 거울아, 내가 누구라고?”
“밤의 늑대들의 우두머리 마스터울프. 리버사이드 출신의 버나드 니더베인.”
“거울아 거울아, 내가 누구?”
“밤의 늑대들의 마스터울프. 리버사이드의…… 두르륵, 두륵…….”

마침내 거울에 깃든 힘이 완전히 사라지며 평범한 거울이 되었다.
따라서 그 사실을 모르는 멜리사는 지금 헛수고를 하는 중이었다.

‘왜 안되는거야. 침이라도 발라야 하나?’

거울을 세차게 흔드는지 수풀속에서 부스럭부스럭 연달아 소리가 난다.
버나드는 잠자코 그녀의 엉뚱하면서도 발칙한, 또는 귀여운 그리고 바보같은 행동을 느긋이 지켜볼 생각이다.

내일 아침 만났을때 밤잠을 설친 그녀의 얼굴이 참 우스꽝스러울 것이라고, 버나드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계속 웃음이 흘러나왔다.

***

이웃나라 그라나딘 왕국의 변경지방.
북동쪽 방향에서 수백마리에 달하는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오늘 아침 파수꾼들의 보고가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현재ㅡ, 왕국의 영걸 베아트리스는 중무장을 갖춘  홀로 성밖에 나와있었다.

어느 순간,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됐다.
초록을 찾아보기 힘든 변경대지의 황량한 들판에 외롭게 서있던 베아트리스는 조용히 칼을 뽑아들었다.

팔척장신에 두터운 근육질 몸을 가진 그녀는 언뜻 보면 건장한 체격을 갖춘 사내로 여겨질 정도다.
실제로도, 그녀보다 키가 큰 사내를 찾기란 왕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내들은 대부분 그녀보다 작았다.

또한 그녀에게서 여성의 몸매가 주는 아름다움이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 얼굴만한 양어깨, 바위처럼 크고 단단한 엉덩이, 철골처럼 두껍고 굳게 뻗은 허벅지 등, 이처럼 울그락 불그락한 근육들이 그녀의 여성미를 과하게 잡아먹은 상태였다.

성별은 여성이지만 결코 여성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심하게 건장한 체격에서 샘솟는 힘은  어떤가.
언제였던가, 달려드는 괴물의 머리를 움켜쥐고 가볍게 터뜨리는 괴력을 발휘했던적도 있다.
어쩌다도 아닌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한 힘을 가진 영걸이 현재 수백마리의 괴물과 맞서 싸우려 홀로 들판에 버티고 서있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마침내 저멀리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도착을 알리듯 괴물들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사방에 난무했다.

베아트리스는 쥐고 있던 검신에 침착하게 검기를 불어넣었다.
뇌전의 힘이 곧바로 검신을 둘러싸며 틱틱 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대지를 뒤덮으며 몰려온다.
가까워질수록 괴물들의 정체가 뚜렷해졌다.
사람다리가 달린 식물.
뱀을 닮은 괴물.
또는 애벌레처럼 여러 다리가 달린 물고기 괴물.

하나같이 기괴한 모양새들 뿐이다.
저들을 감히 식물이나 짐승이라 부를 수도 없다.
전부, 어디 한구석이 흉측하고 기괴한 것이  그대로 괴물 그 자체다.

성벽 위에서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은 일제히 등골이 오싹했다.

“베, 베아트리스 님 힘내십시오!”

 사람의 목소리가 곧 두 사람이 되고 열 사람이 되고 백사람이 되었다.
힘찬 응원에 호응하듯 베아트리스는 쥐고 있던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괴물떼가 지근거리에 이르렀을즈음, 그녀는 칼을 거꾸로 쥐며 땅에 힘차게 내려꽂았다.
그러자 번개의 힘이 사슬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순식간에 괴물들을 덮쳤다.
지지직!

이윽고 폭발적인 섬광이 수그러들었을때, 수백마리의 시체더미속에 홀로 서있는 이가 있었으니 당연 베아트리스였다.

***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여행은  즐겁지.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네.”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입니다. 레온 왕국의 튀사라 가문과 류발 가문을 이어주기 위해서 먼 길을 다녀오셨다 들었는데 일은 잘되셨는지요?”
“벌써 소문이 난겐가? 암, 잘됐고 말고. 걱정 붙들어 매게나.”

세레딕은 궁의 경비기사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말을 탄 채 궁안으로 들어섰다.
미려하게 꾸며진 연못의 울타리를 지나 마주치는 사람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세레딕을 향해 반색하며 공손히 인사를 건네왔다.
왕궁은 평화로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혈육간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웃나라인 레온 왕국과 비교하면 참으로 천국과 다를바 없는 아늑한 분위기가 있었다.

말에서 내려 하인들에게 고삐를 넘겨주는 동안에도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밝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레온 왕국에 다녀왔다 들었소. 요즘 그곳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들었는데 별일 없어 보여 다행이외다.”
“예끼, 누가 날 건든단 말인가? 혼날라고.”
“하하, 농담도 여전하시구려. 근데 왕궁의 그림자조차 쳐다보기 싫을 정도로 과한 업무에 질려하며 은퇴하신 분이 왕궁엔 어인 일이오? 아, 경이 찾아온게 달갑지 않은게 아니니 오해마시오. 경처럼 명예롭고 지체높은 분이 왕궁에 들리면 혹시 국난이 닥칠 정도로 위급한 일이 생긴건 아닐지 괜히 불안해서 말이오. 설마 레온 왕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게요?”
“있었지.”
“저런! 그게 정말이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오?”
“놀라지 말게나.”

세레딕이 야심차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왕국의 영걸 베아트리스 님의 천생배필을 찾았다네!”
“허걱! 사내보다 더 사내처럼 구는 우리 베아트리스 님을 좋다고 하는 사내가 있어?”
“물론이고 말고.  오늘 궁에 들른 이유도 전하께 이 일을 아뢰기 위해 온검세. 그러니 기대하라고.”
“영걸의 씨가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데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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