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6
“그대의 기사가 저를 욕보였습니다. 게다가 제 소유물인 하녀의 시체를 허락도 없이 가져갔습니다. 샤를리나 님께 감히 요청합니다. 제 재산을 강탈해간 당신의 기사 버나드 경으로 하여금 우리 루테니아 가문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부디 협조하여주십시오.”
“버나드 경이 루테니아 가문의 하녀 시체를 가져갔다고요? 뭐하러 시체를? 그 사람 버르장머리는 없어도 멍청한 짓을 할 위인은 아닌데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샤를은 팔짱을 낀 채 날카롭게 따졌으나 블레어는 여유로운 태도로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릅니다. 시체를 가지고 이상한 짓을 한다든지 괴상한 취미가 있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우리끼리 이럴게 아니라 당장 버나드 경을 불러다 추궁해보면 바로 알게되실터, 어서 그를 불러주십시오.”
“……”
샤를은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옆에 서 있던 클레어와 시선을 맞추다가 다시금 블레어를 쳐다봤다.
“어째서요? 내가 왜 그래야하죠?”
“예……?”
“죽었으면 그만인거 아닌가요? 블레어 경이야말로 시체를 찾아서 뭐하게요? 설마 이상한 짓?”
뜻밖의 발언에 블레어가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다.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샤를리나님. 하녀는 제 재산입니다. 비록 시체라 할지라도 찾아가는게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아, 그렇지. 크흠! 시체를 묻어줘야하니까요. 하녀의 성불을 위해 주인인 제가 해야할 의무라고 봅니다. 그리고 버나드 경은 제 앞에서 무례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또……”
“저를 찾으셨습니까?”
불현듯 버나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샤를의 뒷쪽으로 향했다.
버나드가 큰 거울을 옆구리에 끼고 다가오는중이었다.
샤를이 뒤돌아보자마자 버나드를 향해 인상을 썼다.
“여긴 왜 나왔죠? 당장 들어가 있으세요. 이 일은 내가 해결하겠어요.”
“괜찮습니다 샤를리나님. 저와 관련된 일이기에 제가 직접 해결하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힘이 있다고 해결한다는 거야? 내 말 들어!”
“저를 지켜주려는 샤를리나 님의 배려심에 충분히 감명 받았습니다. 뒷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모든 일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것은 없는 법이죠. 블레어 공에게 시체를 가져간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겠습니다.”
“배려심? 내가 언제? 난 그런적 없어! 웃기지마요! 그, 근데, 정말로 시체를 가져간거야?”
“네.”
버나드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의 옆에 서있던 클레어는 담담한 시선으로 버나드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큰 거울에 향해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마녀 멜라니아를 비롯 멜리사도 서있었다.
멜리사가 급히 샤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하자 샤를의 맑은 눈동자가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곧바로 블레어를 돌아봤다. 그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서둘러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샤를리나 님?”
영문을 모르는 블레어는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십니까?”
“당신……, 가짜야?”
“마, 말도 안됩니다. 누가 그런 거짓말을 한답니까……?”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던 블레어는 금세 정색하며 크게 웃었다.
“별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다 듣는군요. 주위에 서있는 제 기사들을 보십시오. 제가 가짜라면 망토와 가슴에 루테니아 가문의 문장을 달고 있는 기사들이 절 지켜주고나 있겠습니까?”
“저들도 모르고 있으니 가짜를 지켜주고 있는거겠죠.”
버나드가 앞으로 나섰다.
“루테니아 가문의 기사들이여, 당신들은 이 자에게 속고 있습니다. 이 자는 블레어 공이 아닙니다. 가짜입니다.”
“무슨 소리요?”
“미친소리 하지마라 꼬마야.”
“이분을 어렸을때부터 지켜봐왔는데 감히 우리를 장님으로 알아?”
기사들이 어이없다며 웅성거렸다.
블레어가 의기양양하게 버나드를 쳐다봤다.
“버나드 경! 아까 날 욕보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가 가짜라는 해괴한 망언까지 내뱉는군요!”
“그런가요? 그럼 진실을 말하는 거울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왠 엉뚱한 소리입니까! 당장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는 것으로도 모자랄 판에!”
“진실이 곧 밝혀질겁니다.”
버나드는 들고 있던 거울을 두 손으로 바로 쥐고 태연히 내려다봤다.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거울이죠. 긴 말할 것 없이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버나드는 고풍스런 거울을 두 손으로 쥐고 뒤에 서있던 샤를을 비췄다.
“거울아, 거울아. 네가 비추고 있는 저 아름다운 분의 존함이 무엇이더냐.”
갑작스런 버나드의 엉뚱한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거울을 쳐다봤다.
잠깐의 정적.
놀랍게도 거울은 달달떨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킨테 가문의 외동딸 샤를리나 공주입니다.”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거울이 말을했어!”
“저거 그건가? 그래 맞아 그거야! 마녀들이 갖고 다닌다는 진실의 거울이라고!”
“아하 그 동화속에 나오던 그것말인가? 그 오래된 동화속의 내용이 사실이었단 말야?”
“저 거울을 어째서 버나드 경이 갖고 있는거지? 신기하군.”
블레어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사, 사기야! 저건 사기라고! 우리 몰래 어떤 미친 마녀랑 거래해서 거울에 마법을 부여한 것이겠지! 분명 짜여진 각본일거야!”
“믿기지 않으시다면, 믿게 해드리겠습니다.”
버나드는 블레어의 주위에 서있던 루테니아 가문의 기사중 한명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와서 똑바로 서주십시오. 거울에게 당신의 이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장난치는거면 각오해라 꼬마야.”
무장을 한 기사가 철갑소리를 내며 당당히 걸어나왔다.
버나드는 곧바로 그를 비춰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여기 선 기사의 이름이 무엇이니?”
거울이 덜덜떨며 대답했다.
“머리쪼개기의 달인 토일레의 아들 이브라치 토일레손.”
“허걱! 내 이름을 맞추다니! 심지어 우리 아버지의 별명이 머리쪼개기의 달인인것까지 맞췄어!”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신기한 거울이로세!”
“세상에 별게 다 있군!”
블레어의 안색은 더욱 굳어지며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버나드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즉시 그를 비췄다.
“거울아 거울아, 네가 비추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에게 알려주렴.”
그에 호응하듯 거울이 덜덜 떨었다.
“룬드햄 도시의 거지 출신 바크.”
동시에 타원형 거울속에는 볼품없는 거지옷을 입고 있는 블레어가 보였다.
루테니아 가문의 기사들은 크게 놀란 얼굴로 거울속의 초라한 행색의 블레어와 눈앞에 서있는 화려한 행색의 블레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은 곧 블레어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저 거울의 말이 사실입니까?”
“너희는 바보들이야? 지금 날 안믿고 저런것들을 믿고 있는것이냐! 난 블레어라고! 블레어가 맞아!”
블레어가 고래고래 외쳐보지만 소용없었다.
버나드는 이후에도 거울의 성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루테니아 가문의 기사들은 블레어의 외침보다 거울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얼마 후, 블레어는 결국 힘없이 머리를 숙였다.
***
블레어, 그러니까 블레어 행세를 했던 거지 바크는 루테니아 가문의 야영지로 끌려가서 취조를 당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진짜 블레어라고 주장했으나, 블레어를 어렸을때부터 지켜봐왔던 나이 지긋한 가신들이 나서서 아주 세세한 것까지 캐묻기 시작하자 정곡을 찔린 바크는 횡설수설하며 맥락없는 대답으로 위기를 모면하려했다.
“기억 안나…… 몰라…… 등에 큰 점이라니? 몰라…… 크면서 사라졌나보지……”
가짜는 완벽히 진짜가 될 수 없었고, 가신들은 끝내 바크가 가짜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하여 바크를 과감히 사형시켰다.
50대의 채찍질을 가한뒤 마지막엔 머리를 잘랐다.
죽기직전 바크는 절망한 나머지 실성하며 진실을 토해내기도 했다.
“하하하! 그래 맞다! 내가 니들의 주인을 죽였다! 병신들! 아하하하! 나 같은 못난 거지한테 속고 산 병신들아! 아하하하!”
루테니아 가문의 가신들은 오래전 바크에게 살해당한 주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모든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루테니아 가문은 그렇게 2차 걷는 사자 전쟁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
사건이 마무리된 뒤 아킨테 가문은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이틀째밤 버나드는 홀로 거울을 쥐고 돌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버나드는 진실의 거울을 얻게된 과정을 떠올렸다.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무척 운좋게도 마녀 멜라니아가 갖고 있었고 잠시 그것을 빌렸을뿐이다.
“거울아 거울아, 내 정체가 뭔지 말해줄 수 있니?”
덜덜덜.
“밤의 늑대들의 우두머리 마스터울프. 리버사이드 출신의 버나드 니더베인.”
거울속에는 버나드의 성인시절 모습이 뚜렷이 비춰지고 있었다.
현재 버나드는 소년의 외모를 갖고 있다.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너, 아주 위험한 녀석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