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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5 (134/200)



〈 134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5

큰소리를 친 블레어는 뒤로 돌아서면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차라리 잘됐어. 샤를 공주와 다시 만날 핑계거리가 생겼군.’

죽은 하녀의 시체 따위 버려도 그만이었다.
샤를의 가신인 버나드가 무슨 이유로 하녀의 시체를 걸고 넘어지는지 모르겠으나, 블레어의 머릿속에선 불현듯 이를 빌미로 샤를과 만나 한마디라도 더 나눠보자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저 녀석의 무례함을 알리며 공주에게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는거야. 식사라든지 동행이라든지. 물론 말을 잘 털어야겠지.’

블레어가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아킨테 진영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시체잖아? 누구지?”

구경꾼들중에 멜리사도 껴있었다.

“무슨일이죠? 여기 죽은 여자는 누구입니까?”
“루테니아 가문의 하녀라는군요.”

버나드가 담담히 대답하자 멜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녀요? 올때 보니까 블레어 공이 크게 화를 내던데  때문에 그런거죠? 설마 경이 하녀를 죽인건가요?”
“큰일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버나드는 굳은 표정으로 쓰러져 죽은 웬디를 내려다보다 손짓으로 멜리사로 하여금 상체를 숙이게 한뒤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대고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우리 둘이 같이 일하기로 했죠?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줄테니 기사들을 시켜 여기 죽은 하녀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겨주시겠습니까? 난 덩치가 작아 혼자서 업을수가 없군요.”

멜리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미간을 좁히며 버나드를 빤히 바라봤다.

“루테니아 가문의 하녀라면서요? 그들에게 넘겨주면 되잖아요.”
“자세한건 들어가서 알려드리죠. 여기 있을때가 아닙니다. 서두릅시다.”

멜리사는 기사들을 시켜 죽은 웬디를 야영지 안으로 옮겼다.
야영지 안은 떠나기 위해 쌓아놓은 짐들을 마차에 옮겨 싣느라 분주했다.

버나드는 죽은 웬디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장소로 옮긴뒤 멜라니아를 불렀다.
그 자리에 멜리사도 있었기에 그녀에게 몇가지를 제외하고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멜리사가 깜짝 놀란다.

“블레어 왕자가 가짜라고요? 무슨 근거로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허나  하녀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버나드는 웬디의 몸에서 손발톱과 피부, 머리카락 등을 조금씩 떼어내 병속에 담아두고 있던 멜라니아를 바라봤다.

“괴상한짓 그만하고 네크로맨시 의식을 해줘.”
“어디서 감히 명령질이냐? 공손하게 못해?”
“하라면 해.”
“큭큭, 못된 놈. 대가는?”
“내 덕분에 돈도 많이 번 주제에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

멜리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끼어들었다.

“멜라니아 님께서 돈을 많이 버셨다고요? 어떻게요?”
“저놈의 그걸 뽑아다가 정력제를 만들어 내다팔았지.”
“정력제?”
“닥쳐.”

버나드가 인상을 썼다.

“허튼소리 하지말고 빨리 시키는거나 제대로 해.”
“버나드 경의 뭘 뽑았는대요? 뭘로 정력제를 만들었다는거죠?”
“쓸데없는 것에 관심갖지 말고 내 얘기나 계속 들으세요.”

버나드는 재빨리 말을 돌리며 아까 했던 얘기를 또 했다.

“…그리하여  하녀가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저 마녀를 시켜 들을려고 하고 있고요.”
“시체는 말을 못하잖아요?”
“암흑 주문을 배운 마녀는 시체의 입을 열게할 수 있죠.”

멜리사도 대충 감을 잡기 시작했다.
버나드는 현재 블레어가 가짜라는 것을 밝혀 샤를리나의 경쟁자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것을.
하지만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뜬금없이 루테니아 가문의 하녀를 매수한 것은 둘째치고 난생 처음만난 블레어가 가짜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겐 다양한 정보망이 있습니다. 며칠전 정보원 한명이 찾아와 활동하면서 들은 풍문을 내게 알려줬죠. 그것뿐입니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겨우 풍문가지고  엄청난 일을 기획하기에는 완전 도박 아닌가요?”
“원래는 간단히 조사만한뒤 물러설 예정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과감히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으나 하녀가 죽으면서 사정이 달라졌죠. 깊이 파고 들자고 다짐했습니다. 비참하게 죽은 하녀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하녀랑 깊은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돈으로  관계일텐데?”
“요즘 저놈은 미쳤어.”

멜라니아가 큭큭거렸다.

“옛날 같으면 하지도 않았을 뻘짓만 하고 다니지.”
“시끄러워.”
“레아의 죽음이 딱딱한 벽돌 같던 인간을 순정파로 만들었다니까.”
“레아가 누군데요?”
“멜리사 경. 마녀의 말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없습니다. 옛부터 마녀란 것들은 불경한 소리만 희희낙락 떠벌리는 추잡한 괴물 그 자체였으니까요.”

버나드는 발끈하며 마녀를 신랄하게 비난했으나 속으로는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큰 화는 내지못했다.
예전의 버나드는 없었다. 지금의 그는 레아를 따르는 성실한 순례자일뿐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그저 왕성 어딘가에 잠들어있는 레아의 시신을 되찾겠다는 일념하나로 죽기위한 여행을 하는 지금, 버나드는 계속 생전에 레아가 했던 말들을 반복해서 떠올릴뿐이다.
그녀가 했던 사소한 말까지 그 어느것 하나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단장님이 좀 더 부드러워졌으면 좋겠어요.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해 일해준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해주는건 어때요? ‘고마워요.’ 이 한마디만으로도 사람이 훨씬 온화하게 보일거예요. 인사를 받은 이는 자기 일을 더욱 사랑할테고 단장님을 많이 좋아해주겠죠.’

버나드는 옛날일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모른척 넘어가도 됐을 일을 굳이 하는건, 샤를리나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레아의 말에 감화된 나머지 하녀를 위한 복수인가.
복잡하게 생각할  없다.
장차 방해가 될만한 자를 미리 제거할 뿐이다.

“멜라니아, 어서 시작해.”

***


기다란 탁자에 반듯하게 누워있던 웬디가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은 생명력이 없이 흐릿했다.

“맙소사!”

멜리사가 입을 가리며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중얼중얼대며 다급히 신께 기도를 올렸다.

“자, 됐다.”

멜라니아가 흡족하게 웃으며 버나드를 바라봤다.

“이제 물어보렴, 늑대야.”

버나드는 피부가 창백한 웬디를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증거를 찾……”

문득 말을 멈춘 그는 생각을 바꿔 다시 물었다.

“어쩌다 살해당했나?”

얼음처럼 차갑고 아무 감정이 없어보이는 웬디의 시선이 또르르 움직이며 버나드를 올려다봤다.

“블레어 공의 침실 옷장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다.”
“왜 옷장속에 숨어있었지?”
“블레어 공이 가짜라는 증거를 찾아 돈을 벌고 싶었다.”

버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쉰뒤 다시 입을 열었다.

“증거는 찾았나?”
“찾았다.”

뒤에서 기도를 읊어대던 멜리사가 가까이 다가와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버나드의 질문이 이어졌다.

“증거는 어디에 숨겨져 있지? 그게 무엇이었나?”
“증거는 블레어 공의 말이었다.”
“무슨 말?”

웬디는 곧바로 블레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두고보자 잡것들…… 니놈들 가문에 내 천한 종자를 퍼뜨려주마…… 킥킥…… 두고봐…… 왕가에  씨를 퍼뜨려서 거지새끼들이 천하를 다스려주겠어…… 더러운 거지 출신이 고귀한 혈통을 지워버리고 왕국을 점령한지 아무도 모를거야…… 아무도…… 하하…… 병신들……”

난데없이, 여지껏 살아오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욕설들을 처음 접한 멜리사에게는 기절초풍할 소리였다.
그녀가 입을 쩍 벌리며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브, 블레어 공이 정말 저런 소리를 했다고요?”

무감정한 웬디의 욕설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나가면 제일 먼저 샤를리나한테 복수할거야…… 개년…… 니년이 얼마나 잘사나 두고보자…… 콧대 높은 귀족년들은 죄다 마음에 안들어……”
“오, 신이시여!”

자신이 모시는 주인인 샤를리나를 개년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멜리사에게 그야말로 대충격이었다.
그녀는 크게 놀라며 비틀거렸다.

“내, 내가 지금  들은 거야……?”
“블레어를 죽인것처럼 니들도 하나씩 처리해주마…… 왕가를 전부 나의 것으로 만들거야…… 날 쌍놈이라고 우습게 보는 것들 다 죽여버리겠어……”

멜리사는 급히 귀를 막고 뒷걸음질을 쳤다.

“천박한 욕설로 샤를리나 님을 모욕하다니……!”

당장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었다.
멜리사는 너무나 놀랐고,  후회했다.
애초에 안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평생 악몽으로 남을만큼 대단히 충격적인 욕설들이었다.

“죄송합니다 샤를리나님! 못들을 것을 듣고 말았습니다! 흐흑!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또 뭐라고 했지?”
“여기까지다. 블레어 공은 하녀가 가져온 술을 마시고 잠들었고, 나는 옷장을 몰래 빠져나와 도망치다 그에게 붙잡혀 칼에 찔렸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다 죽은건가?”
“그렇다.”
“……”

버나드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순식간에 얼이 나간 멜리사는 저 멀리 떨어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였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버나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
“모른다.”
“뭘?”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잠자코 보고 있던 멜라니아가 끼어들었다.

“자의적으로 말은 못하느니라. 질문에 대한 답만 말할 수 있지. 살아있는게 아니니까.”

버나드는 멜라니아를 본뒤 다시 웬디를 내려다봤다.

“수고했다. 그만 자도 좋다.”
“알겠다.”

웬디는  즉시 눈을 감았다.
이후 전혀 미동도 없는 것이 말그대로 시체였다.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고마웠다……”

버나드는 그렇게 중얼거린뒤 몸을 돌렸다.
눈앞에 얼이 빠진 멜리사가 보였다.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듣지 말걸!”

버나드가 피식 거렸다.

“멜리사 경, 별것 아니니 정신차리십시오.”
“이게 별것 아니라뇨? 끔찍한 소리였다구요! 지금 당장 뛰어가서 목욕하고 싶어요! 징그러운 욕설들이  몸에 덕지덕지 붙은 기분이에요!”
“세상에 이보다 더한 욕설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블레어 공이 가짜라는게 확실해졌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갑시다.”
“다, 다음 단계요?”
“그의 정체를 만천하에 알린뒤 제거해야죠.”
“우리가 가진 거라곤 죽은 사람의 말뿐인데 어떻게 증명해요? 아, 하녀의 시체를 가지고  생각인가요?”

버나드는, 웬디의 입을 열고 도구로 치아를 뽑고 있던 멜라니아를 돌아봤다.

“오래된 전설에 나오던 거울, 당신도 갖고 있나? 공주의 미모를 시기한 마녀가 갖고 있었다던 그 거울 말이야. 마녀들은 신기한 도구들을 잘 갖고 다니잖아.”

멜라니아가  수 없는 미소로 입꼬리를 말아올리던 그때였다.
백검대 기사 한명이 다급히 멜리사에게 뛰어왔다.

“대장님! 블레어 공이 시체를 내놓으라며 야영지 입구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절대 못들어오게 막아! 그를 인간 취급해주지마라!”
“현재 샤를리나 님께서 상대하시는 중입니다.”
“뭐!? 안돼! 고결한 품위를 간직한 그분께서 더러운 자와 말을 섞어선 절대 아니된다! 빨리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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