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4
“지가 뭔데 날 무시하는거야!”
어째서인지 블레어는 상당히 화가 나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한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쾅쾅 소리가 들려올때마다 깜깜한 옷장속에 숨어있던 웬디의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나쁜년! 나랑 동등한 신분을 가진 주제에 찬밥취급해? 가다가 괴물한테 잡아먹혀도 시원찮을년!”
잔뜩 겁먹은 웬디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오랫동안 숨죽여 있어야만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뜻밖의 말을 엿들었다.
“두고보자 잡것들. 니놈들 가문에 내 천한 종자를 퍼뜨려주마. 킥킥. 두고봐. 왕가에 내 씨를 퍼뜨려서 거지새끼들이 천하를 다스려주겠어! 더러운 거지 출신이 고귀한 혈통을 지워버리고 왕국을 점령한지 아무도 모를거야! 아무도! 하하하! 병신들!”
웬디는 귀를 의심했다.
‘거지출신? 무슨 뜻이지?’
불편하게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점점 저려왔다.
하지만 웬디는 꾹 참고 옷장밖에서 들려오는 블레어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내가 잘 나가면 제일 먼저 샤를리나한테 복수할거야. 개년. 니년이 얼마나 잘사나 두고보자! 콧대 높은 귀족년들은 죄다 마음에 안들어!”
계속해서 천박한 말을 입에 담는 그를 보며 웬디는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아무리 화가났다 할지라도 귀족이라면 결코 입에 담지 않는 상스러운 욕설들이 그뒤에도 난무했다.
‘밤의 늑대들 말이 맞나봐. 저 사람은 정말 블레어 공이 아닌가봐……’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결정적인 발언이 귀에 들려왔다.
“블레어를 죽인것처럼 니들도 하나씩 처리해주마! 왕가를 전부 나의 것으로 만들거야! 날 쌍놈이라고 우습게 보는 것들 다 죽여버리겠어!”
얼마뒤 하녀들이 술을 가져왔고, 블레어는 언제 그랬냐는듯 화내던 것을 잊고 하녀들에게 치근덕대다 금세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때까지 블레어에게 희롱을 당하던 두 하녀는 얼른 옷매무새를 고치고 조용히 침실을 떠났다.
‘서둘러야해!’
웬디는 마침내 빠져나갈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옷장문을 슬쩍 열고 실내를 뻐끔히 둘러보았다.
블레어는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옷장문을 가능한 활짝 연뒤, 천천히 발을 뻗어 바닥에 내딛었다.
살짝 쥐가 나는 바람에 다리가 저렸지만 걷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조용, 조용히……’
조심스레 옷장을 나와 문쪽으로 향했다.
블레어가 가끔 잠꼬대를 할때마다 웬디는 흠칫 흠칫 놀랐다.
오금이 저리도록 긴장되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버나드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들은 얘기들을 말해주면 사례를 받을 수 있겠지?”
황색 비단으로 가려진 입구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심장의 두근거림도 점점 빨라져갔다.
입구에 거의 다왔을즈음, 그녀는 마지막으로 침대쪽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블레어가 잘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꺄악!”
뒤돌아본 그녀는 이내 기겁하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취한 얼굴의 블레어가 단검을 쥐고 빙긋 웃으며 서있었다.
“이년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아, 기억났다. 매일 아침 똥가는 년이었던가?”
“사, 살려주세요!”
제자리에 주저앉은 웬디는 울먹이며 싹싹 빌었다.
“아무짓도 안했어요! 요강을 갈기 위해 잠깐 들렸을뿐이에요!”
“지랄마. 벌레처럼 옷장속에서 기어나오는거 다 봤어 이 거짓말쟁이야. 난 옛날부터 힘든 길거리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잠귀가 밝지. 귀가 밝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거든. 잠자는 틈을 타 소지품을 훔쳐달아나는 도둑놈들도 많았고.”
블레어가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얘기 전부 엿들었지? 이 쥐새끼야.”
사정없이 단검을 내려쳐 웬디의 가슴팍을 찔렀다.
푹!
“꺅!”
웬디는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블레어를 힘껏 밀쳤다.
그녀의 체격이 열여섯살의 블레어보다 조금 더 컸다.
그래서인지 블레어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콰당!
“이런 씨!”
웬디는 찢어지는 아픔을 찾아가며 가슴에 박힌 단검을 뽑아든 채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블레어가 서둘러 일어나 불같이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뒤쫓았다.
“누가 보냈어! 누가 보냈냐고! 샤를리나지! 이 썅년아!”
그는 마치 짐승 사냥을 하는 것처럼 웬디를 쫓는 일에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취기에 그만 실성한 사람 같았다.
“으하하하!”
와장창!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란 경비병들이 숙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가슴에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웬디와 그 뒤를 쫓는 블레어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칼을 뽑아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켜비켜! 너희는 상관말아라!”
“예?”
“저년은 내가 잡을거라고!”
블레어의 명령을 들은 경비병들은 얼결에 길을 내주며 웬디가 도망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만봤다.
곧 웬디가 숙소 밖으로 달아나자 블레어도 신난 표정으로 뛰쳐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웬디와 블레어를 멍하니 쳐다봤다.
“왕자님! 어찌된 일입니까? 저년이 뭔짓이라도 했습니까?”
“내 숙소에 몰래 숨어있었다! 날 암살하려고 했어! 저것봐! 저년 손에 칼이 쥐어져 있잖아!”
“예!? 뭐라고요? 여봐라! 당장 저 계집년을 체포하라!”
“놔둬! 내가 직접 붙잡아 혼쭐을 내줄것이다! 너희는 저리 비켜! 이히히!”
블레어는 웬디를 우습게 여기고 혼자 붙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의외로 그녀는 발이 빠르고 잘 도망쳤다.
부상을 입은 몸에도 너무 잘 도망가자 블레어는 속에서 화가 솟구치며 더욱 오기가 불타올랐다.
“건들기만 해봐! 저년은 내가 꼭 잡는다! 아무도 건들지마!”
웬디를 쫓는게 재밌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있었다.
만약 그녀가 기사들에게 잡힌다면, 심문을 당하다가 자신이 방에서 혼자 떠벌렸던 말들이 만천하에 공개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이 발각되지 않으려면 직접 잡아 그 자리에서 처단하는 것이 제일 뒤탈이 없었다.
웬디를 쫓는 일은 쉬웠다.
그녀가 지나간 곳엔 어김없이 그녀가 흘린 피가 바닥을 시뻘겋게 적셨다.
그러나 술에 취한 블레어는 세상이 어지러웠고 어쩔땐 저혼자 자빠지기도 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병사와 기사들은 그 코믹한 광경에 배꼽을 붙잡고 자지러졌다.
동시에 절박했던 웬디는 출혈때문에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고, 생사를 넘나드는 이 외롭고 긴박한 상황속에서 그녀가 향할 곳은 오직 하나였다.
‘신이시여 저를 구해주소서! 부디……!’
블레어가 예상외로 웬디한테 애를 먹자 주변에서 낄낄거리며 비웃던 기사 중 하나가 안되겠다 여겼는지 활을 꺼내들었다.
때마침 웬디는 야영지를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저대로 가만 놔뒀다가는 자칫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아킨테군쪽으로 달려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집 하나 못잡다니 왕자님도 참. 저렇게 나약해서야 앞으로 어쩔라고 그러시나. 낄낄.”
피슉!
기사가 쏜 화살이 웬디를 향해 바람처럼 날아갔다.
“큭!”
웬디는 등에 화살을 맞고도 조금 더 뛰어가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와 심한 출혈등,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이제 한계였다.
“네이년! 드디어 잡았다! 이 개썅년!”
블레어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바닥에 쓰러진 웬디를 살벌하게 내려다봤다.
“헉, 헉! 사람 고생시키고 말야. 헉! 헉! 아휴 힘들어 빌어먹을! 칼 어딨어 칼! 어, 저깄다.”
그가, 웬디가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단검을 주우러 가는 사이, 바닥에 엎어진 웬디는 절박한 시선으로 정면을 향해 힘겹게 팔을 뻗고 있었다.
“도와줘…… 당신……”
흐릿한 그녀의 시선에 한 소년이 비치는 중이었다.
바로 버나드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죽어가는 웬디를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
웬디를 도와주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버나드를 향해 팔을 뻗은 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감히 내 방에 숨어있다니! 이 암살자년! 죽어!”
블레어가 단검을 쥐고 달려와 웬디를 찌를려는 찰나 버나드가 고함을 쳤다.
“멈추십시오! 여긴 샤를리나 님의 땅입니다!”
소년의 덩치에 맞지 않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퍼졌다.
블레어는 깜짝 놀라 몸이 굳었다.
“너, 너…… 죽고 싶은거냐? 내가 누구라고 함부로 언성을 높여?”
“이 여자는 이미 죽었습니다. 공의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습니다.”
“뭐?”
“확인해보십시오.”
블레어는 의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발로 웬디의 시체를 몇차례 차보았다.
눈을 뜬 채 별다른 미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은게 확실했다.
블레어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거두며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괘씸한년 같으니. 알았으니 돌아가보시오.”
블레어는 곧장 뒤를 돌아보며 저 멀리 야영지 안에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서 뭣들하느냐! 당장 이리와서 시체를 치우지 않고!”
그러자 버나드가 단호히 끼어들었다.
“시체는 내어드릴 수 없으니 괜한 수고할 필요없다 하십시오.”
“뭐요?”
블레어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 꼬맹이가 보자보자 하니까 기사라길래 경경 해줬더니 지금 무슨 헛소리야!”
버나드는 담담히 대응했다.
“시체가 누운 자리를 보십시오. 여긴 정확히 샤를리나 님의 영역 안입니다. 따라서 시체의 처리는 우리 아킨테 가문이 맡겠습니다.”
“또 사유지니 뭐니 주장할 셈이냐!”
“사유지를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여긴 서류상 공의 땅도 아니며, 우리 샤를리나 님의 땅도 아닙니다. 다만 타인의 땅을 여행하는 귀족에게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야영지 주변 어느 정도까지는 군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위구역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귀족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블레어 공도 이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고요.”
버나드는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공은 현재 우리 아킨테 가문의 야영지 바로 앞, 방위구역에 무단 침범하셨습니다. 샤를리나 님께 사전에 상의도 없이 말이지요.”
블레어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버나드의 말이 맞았다.
어느새 아킨테 가문의 방위구역 안을 침범하고 있었다.
블레어는 속으로 혀를찼다. 사실 버나드가 하는 말이 무슨뜻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쓰러져있는 망할 시체 때문에 온거잖아! 시체만 줍고 돌아가겠다니까!”
“이 여성은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하인이다! 내 하인인데 뭔 개수작이야! 너희들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
“우리 방위구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꼼꼼이 기록으로 남겨둬야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겨우 똥치우는 하녀 때문에? 하하 나참! 머리가 돌았나보군! 별 귀찮은 수고를 다하고 자빠졌네!”
“훗날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기록은 철저히 남겨둬야하니까요. 좌우간 저로서는 사망한 이 여성이 블레어 공의 하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바로라도 좋으니 이 여성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계약서라든지 증명서를 보여주십시오. 사본을 만든뒤 즉시 여성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버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에 힘주어 말했다.
“반면, 그전까진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설령 양가문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할지라도요.”
블레어는 그 모습을 괘씸하게 바라보다 이윽고 허탈함에 혀를찼다.
“당장 가서 내 하녀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것들을 찾아올테니까 이 시체에 절대 손대지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