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2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3 (132/200)



〈 132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3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진화조가 양동이 등 물을 담을 수 있는 도구를 총동원해 타오르고 있던 불길을 진화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등에 장작을 짊어지고 있던 병사들이 재빠르게 비탈길을 내려와 터널 안쪽에 다시 장작을 쌓고 불을 지폈다.
금세 불길이 일자 연기가 터널 안쪽 깊숙이 흘러들어가도록 넓적한 판자 같은 것들을 손에 쥐고 여러 사람이 크게 부채질을 했다.

“아후 힘들어!  빠지겠네!”

어느 정도 그러다 멜리사의 명령으로 부채질을 멈췄다.
한참  불길이 꺼지고 터널안을 가득 메웠던 연기가 걷힌 뒤, 반대편 입구 저 끝에 한줄기 빛이 보였다.

“뱀이 사라졌습니다!”

터널 안을 유심히 들여다본 멜리사의 외침에 골짜기 위에서 지켜보던 귀족과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커다란 뱀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이로써 아킨테 가문과 루테니아 가문은 제국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빠서요. 일찍 출발해야합니다.”
“하루 정도  머물다 가시는게 어떠십니까?”
“느긋하게 속닥거릴때가 아니잖아요. 블레어 경도 어서 서두르시죠?”

길이 열리자 샤를은 즉시 백검대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 명령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블레어가 안달난듯 그녀를 뒤쫓아갔다.
샤를이 이렇게 빨리 떠날줄은, 그의 구상에 없던 일이었다.
어젯밤 분명 기분 좋게 헤어졌건만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샤를에게 흑심을 품었던 블레어는 초조한 기색으로 그녀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샤를리나 님께 보여드리고 싶은게 너무나 많습니다. 지루한 여행길에 재미난 구경거리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데리고 다니는 신기한 짐승이 있는데 같이 보시죠!”
“지루한 여행길을 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 뿐이네요. 남들보다 빨리 출발해야 끝나는것도 빠를테죠. 신기한 짐승따위를 구경할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처, 천천히 걸어주십시오! 걸음이 빠르십니다!”
“바쁘다고 했잖아요?”
“잠깐만요! 그, 그럼 우리 루테니아 가문도 서두를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기사들에게 신속히 짐을 싸라 이르겠습니다! 제국까지 동행하는 겁니다!”

그 순간 버나드가 다가와 끼어들었다.

“샤를리나 님께서는 조용한 여행을 바라십니다. 따라서 저분을 받드는 저희로서는 다른 가문과의 동행을 고려치 않고 있습니다. 이만 돌아가주십시오.”
“이 꼬맹이가……!”

블레어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갑자기 길을 가로막는 버나드를 귀찮은 방해꾼처럼 여겼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전하의 핏줄을 물려받은 일국의 왕자다! 혼쭐나기 싫으면  비켜라! 난 지금 샤를리나 님과 대화중이다!”

그러나 버나드가 그 말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은 그의 눈빛만 봐도 명백했다.
버나드는 흔들림없이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이상 들어오셔서는 안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샤를리나 님의 개인공간입니다.”
“네이놈! 여긴 그냥 숲일뿐이야! 사유지가 아니다!”
“샤를리나 님의 숙소 주변 반경 1km는 그분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허락없이 누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설령 형제자매라 할지라도요.”
“이 꼬맹이 자식이!”
“블레어 공!”

앞서 걸어가던 샤를이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 기사를 건들지마세요! 그는 나의 것입니다. 혼내는  나만이  수 있는 일이죠. 날 지키기 위해 본분에 충실한 그 사람을 내버려두세요. 당신은 그만 돌아가주시고요. 우리 대화는 끝났습니다.”
“……!”

블레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실없이 웃었다.

“제가 무슨 지저분하게 집적대는 사람 같군요.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전 추잡한 놈이 아닌데, 마치 더럽게 추근대는 이상한 놈처럼 보였나보군요. 그럴리가, 그럴리가요.”

뒤이어 심호흡을 하며 금세 평온을 되찾은 표정을 지었다.

“전 절대 샤를리나 님을 괴롭힐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신사적이고 교양있는 귀족이 그럴리가요? 하지만 계속 이러면 추잡스럽고 끈적끈적해보일테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것만 알아주십시오. 전 그저 오랜만에 만난 누이가 반가웠을 따름입니다. 그럼 이만.”

블레어는  발치에 떨어져있는 샤를을 향해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깔끔하게 자리를 떴다.

“귀찮은 인간 같으니.”

샤를은 군말없이 떠나는 블레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버나드에게 눈길을 돌렸다.

“블레어 공과 만나지 말라던 당신의 부탁대로 했어. 나중에 내 부탁도 들어줘야해.”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부탁은 나중에 생각나면 할거야. 뭐든지 들어줘야해.”
“당연합니다.”
“더 할 얘기 없지?”
“네.”
“있어봐야 뭐하지 마라 뭐하지 마라 귀찮은 얘기들 뿐이겠지만. 아무튼 사람들한테 서둘러서 짐싸라고해. 빨리 여길 떠나고 싶으니까. 방금 일로 블레어 공이 갑자기 싫어졌어.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니까 숨 막혀. 짜증나.”

샤를은 그대로 등을 돌리며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뒤에 남겨진 버나드는 저 멀리 홀로 걸어가는 블레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의 정체를 자세히 캐고 싶지만 여건상 안되겠군. 훗날을 기약해야겠어. 다시 만난다면 말이지.”

버나드도 미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다시 가서 찾아볼까……”

고민하고 있던 웬디에게 돈이 재촉한다.

‘블레어 공의 정체를 밝혀내면 더 큰돈을   있어. 그 공로로 밤의 늑대들이 널 부자로 만들어줄거야.’

어서 이 가난하고 지긋지긋한 생활을 청산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부자로 살자고!

때마침 블레어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터널속에 자리잡은 커다란 뱀을 쫓아내는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블레어는 오전부터 기사들과 함께 외출을 한 상태였고, 그의 숙소는 텅비어 있었다.

게다가 그는 떠나기전 하인들에게 일러두길, 오후에 돌아올때는 샤를리나 공주와 함께 돌아올테니 그녀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두라 명령했다.
따라서 그의 침실을 수색하려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
샤를리나와 밖에서 기분 좋은 한때를 보내느라 하루종일 비어있을테니 지금이 아니면 느긋하게 찾아볼 시간이 없다.

그 점이 그녀를 심하게 유혹했다.
우연히 생긴 기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물주인 버나드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가 금화 열닢정도는 기꺼이 내주지 않을까?

현재 가지고 있는 금화 다섯닢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웬디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서 찾아보는거야. 분명 뭔가가 나올지도 몰라. 나오기만 하면……!”

행복한 미래를 떠올리며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옛날 습관을 버리지 못한 도둑고양이는 그렇게 살금살금 범행장소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숙소 주변의 경비는 삼엄하지 않았다.
블레어가 영내 밖에 나가있는 까닭에 병사들은 평소보다 풀어져있었다.
숙소 앞에 자리를 잡고 도박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잠깐의 여유를 틈타 창녀를 불러다 구석진 곳에서 한낮의 정사를 즐기는 자도 있었다.

웬디는 곧장 블레어의 숙소 뒤편으로 가서 천막을 들어올리며 대담하게 숨어들어갔다.
화려한 침실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병사들의 일과와 하녀들의 일과를 꿰고 있는 웬디로서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저녁때까지 여기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최소 다섯 시간 이상은  내 시간이란 소리지.”

웃기게도, 침대 위에는 두 개의 베개와 연한 하늘색 드레스가 놓여있었다.
실내도 평소와 달리 정성스레 꾸며져 있었다.
평소 못보던 화려한 가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보나마나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것일터.
오늘밤 블레어의 상대가 누군지 짐작한 웬디는 웃음보가 터져나왔다.

“귀족들은 아무렇지 않게 근친을 하나봐. 우리보다 더 썩은 놈들이라니까.”

하지만 그 비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웬디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어쩌면…… 남이라서 샤를리나를 건드리려는게 아닐까?”

버나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만약 블레어가 가짜라면 혈육이 아닌 샤를리나에게 욕망을 느낄 수도 있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방안을 둘러보며 미친듯이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돈에 굶주린 사람 마냥 머릿속에 돈만 떠올리며 여기저기를 빈틈없이 뒤적거렸다.
그 와중에도 한번 건든 물건은 제자리에 원위치 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 없는거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점점 초조해져만갔다.
어느순간부터는 물건을 원위치해놓는 일도 귀찮아졌다. 대충 놓고 말았다.

처음에는 잠깐이면 될줄 알았으나 뒤지면 뒤질수록 나오는게 없었다.
블레어의 정체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단서가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정말 버나드에게 포섭된게 아닐까하고.
지금 이 순간 그가 원하는대로 하고 있지 않은가.
왜 쓸데없이 이곳에 다시 왔을까.
그가 시킨대로 하는셈이나 마찬가지다.
금화 다섯닢 받고  거기서 끝냈으면 좋았을것을 그 이후에도 버나드의 뜻대로 행동하고 있다.
웬디는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난 나야. 밤의 늑대들 말은 듣지 않아. 내 의지로 행동하는 중이라구.”

입술을 비죽였다.

"네놈들과 계속 연락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이번 일로 한탕한뒤 영원히 연락끊고 잠적할거야. 새로운 나로 살아갈 거라고."

그러나 몇 시간째 찾아도 찾아도 나오는게 없으니 포기란 단어가 떠오르고 자신이  이러는가 싶었다.

“포기하자. 괜한 짓을 했어.”

한숨을 내쉬며 그만 돌아가자고 마음먹었을때였다.

“버,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닥쳐! 가서 술이나 가져오라고 해!”

숙소 밖에서 성난 블레어의 음성이 들렸다.
크게 당황한 웬디는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서둘러 옷장속으로 급히 숨어들어갔다.
빠르게 내딛는 블레어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이내 침실에 들어온 소리가 났다.
옷장속에 갇힌 웬디는 숨을 죽인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0